소녀

이흥덕展 / LEEHEUNGDUK / 李興德 / painting   2016_1121 ▶ 2016_1214 / 일요일,공휴일 휴관

이흥덕_소녀_캔버스에 유채_95×72.5cm_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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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am~06:00pm / 일요일,공휴일 휴관

Art Gallery 2ND AVENUE 서울 서초구 방배동 796-13번지 Tel. +82.2.593.1140 blog.naver.com/gallery2ndavenue

삶은 상대성에 의해 구별되어 있다. 즉 좋음과 나쁨, 선과 악, 남과 여, 하늘과 땅, 많음과 적음 등등 서로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여유와 허탈감, 선과 악의 도덕과 응징, 남과 여의 배설과 잉태, 그 사이 균형감을 갖고 싶다. 관찰자로서, 때로는 각성자로서 통찰하기를. ■ 이흥덕

이흥덕_아침 독서_캔버스에 유채_90.8×90.8cm_2015
이흥덕_소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3×100cm_2001
이흥덕_기다리는 사람들_캔버스에 유채_33×77cm_2003

이흥덕의 그림은 세상 속에 있는 숱한 사람들과 그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바라보며 다시 세상을 이야기한다. 마치 지구하고도 한국, 그리고 서울의 어느 지붕 밑 식탁 위의 사과와 과도를 보면서 결국은 사과나 칼 세상 모두를 아울러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들의 사소한 일상인 사과나 과도를 보면서 다시 테이블, 방, 집, 동네, 서울, 한국, 지구로 역으로 확대한다는 뜻이다. 비극을 희극처럼 아이러니하게 얘기하는 그의 그림은 때로는 은유로, 때로는 상징으로, 때로는 기호물들은 통하여 욕망과 권력(힘)의 레토릭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사과나 사람을 '사과'나 '사람'이 아닌 싱싱함이나 부패로, 선과 악으로, 그리고 욕망이나 이성으로 환치시킨다. 性은 이러한 상태, 다시 말하면 인간의 육체라는 하드웨어를 섹슈얼하게 드러내면서(이러한 점은 이흥덕의 그림이 성을 통해서 우리사회의 현실에 대해 풍자와 비판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그 자신의 끊임없이 그 감각적인 조형적 쾌감에 탐닉하는 양면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바로 육체로부터 확대되는 욕망과 권력에 대한 관념이나 개념을 이야기하는 매개체로 제시된다. 욕망은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조건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할 수 있는 비판적인 대사이며, 그것이 오늘을 사는 인간들을 정확하게 규명할 수 있는 질료가 되는 것이다. 성과 욕망은 사회화의 과정에서 쉽게 폭력적인 힘으로 전이되고 그 힘은 결국 우리들의 일상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는 비이성적인 실체로 존재한다. (「회화, 되돌아 보다」중에서, 2000) ■ 김진하

이흥덕_독서하는 소녀_캔버스에 유채_91×91cm_2009
이흥덕_독서하는 소녀_드로잉_27×37cm_2001

이흥덕작가 그림 속의 불안은 이미 오래 되었다. 다만 초현실적인 요소를 띄던 과거의 그림들과는 달리 지금의 불안은 더욱 구체적인 주변 현장에서 드러나는 점이 다를 뿐이다. 작가의 심리적인 시점에 의해 드러나던 구작에서의 불안이 이젠 객관적인 관찰로부터 이루어지는 현실 속에서 구체성을 증폭해 낸다. 따라서 불안은, 혹은 그러한 불안 사이에 종종 비치는 희망에 대한 상징(성자들이나 통나무를 멘 젊은이, 머리에 새나 토끼를 이고 있는 사람 등)은 차라리 심리적인 문제라기보다 구체적인 현실과, 그 현실에 대한 작가의 입장(희망에 대해 소박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원하는 비현실적인 관념으로서의 희망)이 혼용된 지각도상으로 보여진다. 그의 그림에 있어서 이 불안의 상징은 감성에 의한 그림 분위기에서도 주제의식의 강조에 의한 주지적인 입장에서도 오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있는 불쾌한 현실에서의 사실들을 이흥덕 그림이 다시 들먹이기 때문에 오는 다소 묘하고도 역설적인 확인작업인 것이다. (「섬세한 감각계, 회화적 되새김질」, 2001) ■ 김진하

이흥덕_빨간 부츠_종이에 목탄_40×29.5cm_2001
이흥덕_사춘기_종이에 목탄_29.5×40cm_2001

이흥덕 작품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은 그의 그림 그리는 방식에 대한 이해이다. 그는 매우 전통적인 작화방식을 고집한다. 어떤 재료를 사용하든 상관없이, 어떤 소재를 다루던 그의 제작방식은 전통적인 회화제작 방식에 머문다. 그럼에도 그가 선택한 회화 형식은 늘 대중 기호에 맞추어져 있다.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요소들은 서구 팝계열 작가들이 거둔 상업적 성공과 미술적 권위에 의에 우리가 반성하지 못한 결과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중기호가 전통적 화법으로 둔갑하는 순간 고유의 미술가치로 환원은 미술제도 안에서 결정 지워진다. 가령 화랑이나 미술관 그리고 수장가들의 취향이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중기호의 미적 가치는 소통의 원활함이나 자극적인 언술행위처럼 도상의 쉬운 이해, 자극적인 색 대비 효과, 쉬운 기호들의 집합을 통해 적확한 메시지의 공유를 하는 것이지 환원시켜 가치를 드높이는데 있지 않다. 그러나 회화는 그런 미묘한 기교를 통해 살아남기를 제도안에서 획득한 바 있다. 이흥덕의 작품이 가지는 어눌함은 바로 이런 복잡한 가치 증폭의 사이클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시작해 결과적으로 대중기호의 오해를 통해 보다 간결한 메시지를 공유하는데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그의 작품에서 풀어낸 자유로움은 이제, 드디어 작화방식이 곧 미술적 언어로서 완결성을 가지게 된다는 확증적 결과를 보여준다. 따라서 작가는 자신이 선택한 미술적 가치와(성공한 시장가치가 아닌) 작가로서 지닌 메시지의 공유를 상당기간 고심하며 맞추어봐야 할 것이다. 그는 사실, 일찍이 팝계열의 작가들이 실패했던 것을 거울삼아 회화형식에 대한 기본적인 배반을 받아들여야 했었다. (지금도 그 문제에서는 작가의 변화에 추이를 따라 지켜볼 뿐이지만.) (「회화, 길을 묻다」중에서, 2005) ■ 이섭

이흥덕_봄비_캔버스에 유채_45×53cm_2007

이흥덕의 어조가 차라리 강한 비판조였다면, 감상자들은 짐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일상의 다반사가 수용과 순응, 타협과 협잡, 거짓과 선동으로 범람하고 있다고 외치는 것이라면,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흥덕의 회화에선 어떠한 외침도 들리지 않는다. 선동도 미사여구도 없다. 작가는 뒷짐을 진채 한참 뒤로 물러서 있다. 회화에는 어떤 경미하고 불확실한 징후, 불쾌하고 후덥지근한 어떤 긴장감, 또는 보다 모호한 형태의 대립과 긴장감이 고작 배어있을 뿐이다. 결론은 더더군다나 암시조차 없다. 때문에 감상자는 주석없는 세상과 단지 마주서는 당혹스러운 경험을 갖게 된다. 긴장감, 해석의 부담은 고스란히 감사자의 몫으로 떨어진다. 관찰자적 전망 안에서 해석학적 긴장감이 고조되는 것이다. ● 이흥덕의 이 이 거리두기, 중립성은 자신의 회화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맥락일 것이다. 이흥덕은 자신의 회화조차 자신에게 격렬한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렇게 되면 예술가들도 결국 자신의 예술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니까.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로부터 자유로운 예술가일 것이다. 그런 자유로운 정신의 산물에서 한 불안한 인간의 집착적 욕망 이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사실 이흥덕은 언제나 타고난 관찰자였다 : "저는 시선을 극단적인 점에 두고 싶지 않습니다. 중간 어디쯤에 두고, 나와 이웃의 삶을 바라보고 싶은 것이죠. 편들기, 정치적인 성향의 비판들, 지나치게 원론적인 것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은 오히려 삶을 유지해가는 모든 사람들의 매일매일을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흥덕) 이것이 삶을 대하는 전형적으로 이흥덕 식의 태도다. 세계의 부조리를 해부하는 상황에서조차 그는 한 발 더 뒤로 물러서 있다. 사실을 왜곡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분명 알랭 로브그리에(Alain Robbe-Grillet)의 잘 알려진 선언을 환기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 "세계는 의미 있는 것도 부조리한 것도 아니며, 단지 있는 것이고, 이야말로 세계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이다." 단정짓거나 판결을 내리는 일체의 것으로부터의 후퇴, 그것이 가능하거나 필요하더라도 해석은 관자 각자의 몫일뿐이라는 점, 관대함, 보이지 않는 관찰자의 미덕... (「관찰자의 미학 : 실제, 또는 '저항의 암시적 풍경' 앞에 서게 하기」중에서, 2006) ■ 심상용

이흥덕_개와 소녀_종이에 아크릴채색_87.5×119cm_1997

1998년에 이르기까지 4년여의 시간동안 그는 카페연작을 그리지 않았다. 이 모색기를 거쳐 완성한 대작들은 실상 '빈 카페'가 아니라 1998년의 다른 작품들, 「붓다 예술 서울에 입성하시다」, 「이발소」, 「지하철 사람들」, 「풀장」, 「신도시」 등이다. 1998년의 작품세계는 이전과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 증거들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채색기법과 작품 속 공간의 변화다. 그는 이제 카페공간을 뛰쳐나와 광장, 신도시, 지하철, 이발소, 풀장, 주택가, 매춘업소 등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시선을 던진다. 이 작품들은 여전히 욕망과 판타지를 뒤섞어 비현실과 초현실의 풍경을 자아내고 있으나 현실적 리얼리티가 잘 살아 있는데, 오히려 비현실․ 초현실적 묘사들이 현실적 내러티브를 직조한 은유로서 현실을 더 현실감 있게 만들고 있다. 특히 「붓다 예수 서울에 입성하시다」와 「지하철 사람들」은 'IMF한국'의 자화상이라 할 만큼 1998년의 시대현실을 적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흥덕류의 에로티시즘이 발아하는 몇 개의 장면도 오버랩된다. (「21세기 아시아 만다라를 향한 회화繪畫수행」중에서, 2008) ■ 김종길

Vol.20161126d | 이흥덕展 / LEEHEUNGDUK / 李興德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