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길목에서

고찬규_김덕기 2인展   2017_0324 ▶︎ 2017_0411 / 일,공휴일 휴관

고찬규_A Day_한지에 채색_27.3×17.9cm_2017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공휴일 휴관

Art Gallery 2ND AVENUE 서울 서초구 방배동 796-13번지 Tel. +82.(0)2.593.1140 blog.naver.com/gallery2ndavenue

현대인의 초상, 우리시대의 보통사람들 - The road taken. 고찬규가 자신의 근작에 부친 이 주제는 대략 길 위에서, 길 위에 서서, 길을 걷다, 정도를 의미할 것이다. 여기서 길은 그저 길이 아니라 삶의 유비로서의 길을 암시한다. 길은 말하자면 전형적인 삶의 메타포인 것. 오죽하면 로드무비라는 독립된 영화장르가 따로 있을 정도다. 그 중에서도 영화 「지라이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 그리고 한 때 사람들에 의해 널리 불려지던 팝송 「나의 길 My way」 정도가 생각난다. 여기서 길은 각각 정체성 문제와, 선택의 기로에 선 삶의 조건, 그리고 삶에 대한 회한과 반성을 매개한다. 이처럼 길을 삶에 비유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의식의 소산이다.

고찬규_Monday 6AM_한지에 채색_53×45.5cm_2017
고찬규_봄비 그치다_한지에 채색_53×45.5cm_2017
고찬규_샛별_한지에 채색_27×22cm_2017

그러므로 작가에게 있어서 길은 자신이 걸어온 길, 그리고 앞으로 걸어 가야할 길에 대한 반성 같은 것이며, 그 길에 거는 다짐 같은 것이며, 일종의 자기주술에 해당한다. 실제로 작가의 그림 중엔 자신의 자화상이지 싶은 그림들이 있어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화실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거나 생각 중인 모델을 그린 그림이 그렇다. 그림 속에서 그는 아마도 화가의 길에 대해서 골몰하고 있을 것이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영합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언어가 자신만의 경계를 넘어 보편적인 언어가 될 수 있는.

고찬규_새 봄_한지에 채색_53.7×45.5cm_2017
고찬규_그래도 목련은 핀다_한지에 채색_53×45.5cm_2016

실제로 작가의 그림은 자신을 아우르면서, 이와 동시에 자신의 경계를 넘어선다. 자기반성 내지는 자기연민의 경계를 넘어 보통사람들의 보통 살림살이에 묻어나는 삶의 애환을, 애증을 그린다. 그 그림 속엔 그네들의 삶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공감어린 시선이 묻어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객관적인 관찰의 시선이 투사된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에선 이 시대의 보편적인 삶의 초상이 반영되고, 특히 도시인으로서의 삶의 정서가 아로새겨진다(여기서 도시인은 실질적이기보다는 의식적인 문제로서, 그가 도시인으로서의 의식으로 생각하고 삶의 방식을 사는 한, 모든 현대인은 도시인이다. 즉 도시인은 사실상 현대인과 동격인 것이다). 그는 삶이라는 이름의 길을 산다. 그 길은 이따금씩 처연하고(1993년의 가는 길-노래를 지어), 막막하다(1998년의 길 없는 길). 도시에서 그는 정체성을 상실한 채 남으로 살고(2001년의 익명의 초상), 그 상실감으로 때로 말마저 잃는다(2005년의 모노로그-상실의 시대). 어쩌면 상실감은 현대인을 현대인답게 해주는 고유의 질병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고향을 상실하고, 원형을 상실하고, 자기를 상실하는. 말을 상실하고, 표정(몸말)을 상실하고, 의미(말과 의미를 연결시키는 능력)를 상실하는. 그 고도 같은 도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지나쳐온 삶을 되새김질 하고(2006년의 삶, 그 이면),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는 일(2004년의 봄날은 가고)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꿈꾸는 일(2002년의 꿈꾸는 섬-도시), 특히 비상을 꿈꾸는 일(2007년의 비상을 꿈꾸다). 이 불면의 도시 속에서(2008년의 불면도시). 향수와 더불어(2009년의 불면-향수). 그는 과연 비상할 수 있을까? 꿈을 비상으로 바꿔놓을 수 있을까? 그런데 정작 비상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꿈속으로의 비상? 아니면 꿈밖으로의 비상?

고찬규_먼 길_한지에 채색_72.7×60cm_2017
고찬규_Rainy day_한지에 채색_91×73cm_2016

그동안 작가가 그린 그림에 반영된 주제의식을 재구성해본 것이다. 이 재구성에서도 엿볼 수 있듯 작가는 시종 길이라는 특정 주제에 천착하면서 그 주제를 심화시켜왔다. 그리고 그 길은 삶을 상징하며, 특히 도시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자의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자의식은 일종의 상실감으로서 나타나고, 그 상실감의 와중에서도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는 자기암시 내지는 자기주술의 형태로 나타난다. 근작에서도 역시 길은 어김없이 메인 테마로서 등장한다. 「가는 길」, 「길을 잃다」, 「길을 묻다」. 그는 여전히 길 위에 서있고, 곧잘 길을 잃으며, 그럴 때마다 자주 길을 묻는다. 그의 그림은 서사적이고 문학적이다. 일종의 이야기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해서 주제와 제목과 그림의 편차가 크지가 않다. 쉽게 이해시키고 저절로 공감을 이끌어낸다. 이로써 등장인물에 동화된 나머지 마치 그림 속의 그가 그림 밖의 나를 대리하는 것 같다.

고찬규_바람인형_종이에 과슈_53×45.5cm_2014
고찬규_하루_한지에 과슈_35×27cm_2012

고찬규는 대개 세로로 길거나 옆으로 긴 장방형 화면에다 그림을 그린다. 주로 세로로 긴 그림에선 모델을 화면의 정중앙에 포치해 정면 상을 취하게 하는 경우가 많고, 옆으로 긴 그림에선 모델을 화면의 한쪽에 치우치게 포치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머지 빈 여백과 조응하게끔 조율하는 편이다. 세로로 긴 그림이 그림 속 모델과 직면하는 것 같은 현실감으로 육박해온다면, 옆으로 긴 그림에서 여백은 마치 현실에 연장된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그림에다 일정한 공간감을 부여해주는 편이다. 흔히 공간감은 화면 안쪽을 향해 열린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사실상 깊이감에 해당하며, 원근법과 질감을 통해서 취해지는), 작가의 그림에선 그 공간감이 옆으로 확장되면서 실현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김덕기_봄이오는 소리-속삭임_장지에 채색_61×73cm_2009
김덕기_봄이오는 소리-재잘재잘_장지에 채색_38×45.5cm_2017
김덕기_봄이오는 소리-응시_장지에 채색_61×73cm_2016

텅 빈 화면에 대개는 저 홀로 그려진 그림 속 모델에 주목하게끔 유도하는가 하면(여기서 프레임은 마치 모델을 가두고 한정하고 제약하는 틀, 즉 세상이라는 틀의 유비처럼 읽힌다), 여백으로 하여금 모델의 비가시적인 측면을 대리하게 함으로써 그림의 의미론적인 지평을 확장시킨다. 여백에 의해 일종의 심리적인 공간이 생성되고 확장되는 것. 말하자면 모델의 표정과 몸짓은 일종의 언어의 한 형식일 수 있고, 그 형식을 통해서도 미처 드러나 보이지 않는 언어, 잠재적인 언어, 사사로운 감정과 기분, 욕망과 무의식, 그리고 상황논리가 모두 여백을 통해서 말해진다. 엄밀하게는 말해진다기보다는 암시되는 것인데, 이처럼 말하는 여백, 암시하는 여백이야말로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것의 층위로 끌어올리는, 널리 알려진 예술의 기획 내지는 그 존재의미와도 통한다. 그리고 여백은 어쩌면 그림 속 모델의 경계를 넘어 그를 대면하는 관객에게마저 할애되고 배려된 공간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를 대면하는 관객들 저마다의 사정과 처지에 따라서 그 공감하는 바로 채워 넣어질, 그럼으로써 비로소 완성되어질, 어떤 암시적이고 잠재적인 공간인 것. 이처럼 여백은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잠재적인 공간임을 넘어 사실상의 관객참여를 유도하는 상호작용성의 계기로도 작용하고 있는 것.

김덕기_그 화가의집_장지에 채색_23×16.5cm_2007
김덕기_봄이오는소리(소원을 말해봐)_장지에 채색_38×45.5cm_2017

그런가하면 작가의 그림에선 대개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엄밀하게 그들의 시선이 가닿는 곳은 그림 밖에서 그림을 쳐다보는 관객의 시선인 것이며, 또 다른 시선의 한 갈래는 자기 내면을 향한다. 이 가운데 정면을 빤히 쳐다보는, 관객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의 쳐다보기와 말 걸기는 상징적이라기보다는 직접적이다. 그의 시선과 관객의 시선이 부닥치면서 그의 시선은 응시로 변질된다. 이처럼 그림 속 가상의 자장에 속하는 그와 그림 밖 현실의 자장에 속하는 관객, 그리고 그들의 응시와 시선이 상호작용하면서 공감을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내부를 향하는 또 다른 시선은 모델의 자기반성적인 성향과 함께 자기연민에의 몰입을 엿보게 한다. 이처럼 외관상 정면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델의 시선은 사실은 이중적이다. 자기 외부의 타자에게 공감을 호소해오면서, 동시에 자기반성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김덕기_반가움1_장지에 채색_45.5×53cm_2006
김덕기_반가움2_장지에 채색_45.5×53cm_2006

한편으로 그림 속 모델의 표정과 몸짓(눈길을 포함해서)은 일종의 언어(몸말)의 한 형식이라고 했다. 여기에 여러 부수적인 장치(소품)들이 더해져 어떤 의미론적인 전형성을 낳는다. 이를테면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가슴 앞에다 놓은 포즈(소망, 염원, 기원), 한 손이나 양손으로 턱을 괴거나 입 언저리에다 대고 있는 포즈(생각하는, 사념 속에 빠진), 양손을 앞으로 모아 깍지 낀 포즈(약간의 의구심과 설렘), 손사래를 치듯 한 손을 몸 밖으로 내민 포즈(황망함?), 양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쪼그려 앉은 포즈(열중하는), 그리고 종이학(그리움), 종이비행기와 꽃과 무지개(희망), 넥타이(억압적인 현실), 카드와 주사위(행운, 운명, 선택의 귀로에 선, 어떤 결정적인 순간), 불어오는 바람에 뒤집혀진, 그리고 놓쳐버려 저만치 날아가는 우산(황망함, 난만함?), 바람(세파, 세상살이), 빈 의자(외로움)에 이르기까지. 이 몸말들은 마치 마임처럼 삶의 애환과 상황논리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고, 이 소품들은 일종의 기호화된 도상학을 가능하게 해준다. 즉각적으로 공감을 이끌어내고 메시지를 쉽게 전달하는 미덕이 있지만, 이와 동시에 자칫 좀 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의미를 닫아버릴 수도 있는 양날의 칼에 해당하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김덕기_감나무가 있는 집_장지에 채색_25.5×31.5cm_2003
김덕기_봄을 기다리는 나무_장지에 채색_45.5×53cm_2003
김덕기_그래도 맛있었다_장지에 채색_31×42cm_2003

글을 마감하면서 작가의 근작 중 현대인의 표상 내지는 전형성을 예시해주고 있는 그림이 눈길을 끈다. 「바람인형」. 바람인형 옆을 중년의 남자가 지나쳐가고 있다. 바람인형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남자와 역시나 그 남자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춤에 열중인 인형과의 대비가 극적인 그림이다. 서로에게 서로의 초상으로, 분신으로 작용하고 기능하는 바람인형과 남자. 주지하다시피 바람인형의 일은 춤추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춤은 기계가 공급해준 인공바람에 의해 가능해진다. 바람인형 스스로는 결코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도 춤을 출 수도 없다. 철저하게 수동적인(기계적인?) 바람인형이 제도에 길들여진, 제도가 마련해준 계기 없이는 행복도 불행도 없는, 희극도 비극도 없는 남자의 초상 같고, 현대인의 자화상 같다. 바람인형은 소위 제도적 인간이라는 인간의 정의를 재확인시켜주고, 새삼 재고하게 한다. ■ 고충환

* 고찬규 블로그_blog.naver.com/myartb

Vol.20170324d | 봄이 오는 길목에서-고찬규_김덕기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