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하는 이미지로부터

오지은展 / OHJIEUN / 吳知垠 / painting   2017_0328 ▶︎ 2017_0402

오지은_채식주의자의 넝쿨_캔버스에 유채_45×53cm_201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오지은 인스타그램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7_0328_화요일_06:00pm

사이아트 도큐먼트 공모 우수작가展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일요일_02:00pm~07:00pm

사이아트 도큐먼트 CYART DOCUMENT 서울 종로구 안국동 63-1번지 Tel. +82.(0)2.3141.8842 www.cyartgallery.com

불안정한 현실을 바라보는 꿈틀거리는 시선의 흔적 ● 오지은 작가의 작업에서는 흔히 잿빛 하늘에 흔들리는 풍경들이 보인다. 어두운 화면 때문인지 이 풍경들은 남겨진 붓질의 흔적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강한 움직임을 느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적막하고 엄숙한 느낌으로 다가 오고 있다. 이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고 마치 텅 비워진 것처럼 보이는 풍경의 모습 때문일 수도 있다. 움직이는 사람도 동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단지 이 그림을 그리면서 움직였을 법한 붓을 잡았던 작가의 흔적만이 남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곳에서는 이렇게 풍경을 바라보았던 작가의 시선만이 읽혀진다. 작가는 풍경이라는 대상을 재현해내는 것 같지만 사실 이것이 똑같이 재현될 것이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눈에 보이는 사물들이 재현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캔버스 안으로 쉽게 들어 올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사물을 그려낸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움직이는 흐름을 따라가며 시선의 흔적을 수집해 내는 것에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풍경으로 다가오는 이미지들이 유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흔들리는 것은 그의 시선이자 손으로 이어지는 몸 그 자체였다는 말이다.

오지은_낭만주의자의 풍경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7
오지은_쉽게 그려진 그림_캔버스에 유채_53×40.9cm_2017

이처럼 감각하고 반응하는 몸으로부터의 행위는 회화라는 일련의 작업 과정을 통해 되새김질을 하듯 눈 앞에 나타난 세계를 맞이하고 해석해내는 일로 연장되고 있다. 이것이 작가가 세계를 인식하고 살아있는 존재로서 세계에 다가서는 최적의 방식이 되었던 것이다. 작가는 꿈틀거리며 붓을 눌렀다가 구부리고 휘저으면서 세계를 읽어가면서 그가 존재하고 있는 공간을 읽어내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지만 여기서 만들어진 의미들은 사실 그 한계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기에 다가오는 모든 사건들에 대해서도 회의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마치 폐쇄회로의 경계 안에 있음을 인식하고 있지만 동시에 비상과 도약을 꿈꾸고 있는 듯한 과감한 움직임을 그의 작업은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 같다. ● 그가 스스로 이상주의자이며 허무주의자라고 지칭하게 된 것은 그가 이처럼 양가적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맞닥뜨린 현실의 한계적 상황을 직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다시 작업을 통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를 자신의 감각기관 안으로 초대하고 자신의 언어로 기표화하는 행위를 반복하게 되었던 것 같다.

오지은_증폭된 공간_캔버스에 유채_72.7×53cm_2017

그러한 의미에서 오지은 작가의 작업에서 작가는 결국 막다른 골목을 예정하고 있는듯한 불안정한 현실 속에서 존재자로서 무엇을 스스로 선택하고 행위 할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절망할 수 없는 지점에서 존재자로서의 선택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화려하거나 몽롱한 꿈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세계 속에 살아 있음에 대한 낮은 목소리의 웅변이며 호흡과 맥박이 느껴질 정도의 크지 않지만 울림과 떨림이 담겨 있는 분명한 움직임의 느낌들이다. 작가는 그 움직임을 캔버스 위에 남겨 놓고 있다. ■ 이승훈

오지은_reality_캔버스에 유채_17.9×25.8cm_2017
오지은_다락_캔버스에 유채_27.3×40.9cm_2017

나는 항상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화두는 나에게 있어 시선이 닿는 모든 부분을 의심하고 되짚어 봄으로써, 기존에 존재 하지 않는 또 다른 체계를 만드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있다. 나는 이상주의자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삶이 어떤 거대하고 거창한 의미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말처럼 인간은 내던져진 존재처럼 느껴지고, 살아갈 이유를 끊임없이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허무주의자이다. 이런 양면성을 내포 하고 있는 것에 스스로를 긍정적 허무주의자라 말하고 싶다. 삶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면 어떤 것도 의미가 될 수 있고, 믿어왔던 의미에 부합하지 않아도 살아 갈 수 있고 버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지은_기도원_캔버스에 유채_40.9×53cm_2017
오지은_왜곡된 풍경의 재현_캔버스에 유채_27.3×34.8cm_2017

의미가 없다는 것만이 유일한 의미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작업을 대하는 태도도 이와 다르지 않다. 나의 시선은 결코 좁혀질 수 없는 대상과의 물리적 또는 심리적 거리감을 향하고 나는 그것을 캔버스에 옮긴다. 그러나 그것은 회화라는 하나의 물질로만 남을 뿐이다. 그것이 담고 있던 상황의 전말은 침묵하고 지켜보는 이에겐 하나의 매혹이 되어 다가오는 것이다. 무심코 지나치던 공간과 상황들은 회화로 기록되는 순간 보는 이로 하여금 '의미의 전달'을 불러일으키지만 그가 그림 앞을 떠나는 순간 다시 무의미한 공간으로 남겨진다. 끊임없는 양면성의 반복이 일어나는 것이다.

오지은_익숙한 세로_캔버스에 유채_53×45cm_2016

작가에게 작업이란, 사소한 감정 하나 놓치지 않으려, 그 감정에 충실하기 위해 자기 비애가 끊임없이 반복된다. 혹자는 피곤한 일이다. 혹자는 아름다운 일이다. 말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 그림은 매혹적이고 이상적 공간인 동시에 무기력한 삶을 방관하는 반성의 결과물이다. ■ 오지은

Vol.20170328c | 오지은展 / OHJIEUN / 吳知垠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