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길 핑크힐 코끼리

이정윤展 / LEEJUNGYOON / 李姃潤 / mixed media   2017_0407 ▶︎ 2017_0611

이정윤_Round Trip_PVC, 재봉, 공기주입모터, LED_550×400×400cm_2017 이정윤_On the Edge_PVC, 재봉, 공기주입모터, 조화, 혼합매체_300×300×275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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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 / 닥터자르트

관람시간 / 11:00am~10:00pm

필터스페이스 인 서울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11길 46(신사동 535번지)

'기이한 짐승이 있는데, 몸은 길고 높으며 꼬리의 길이가 석 자 가량이나 되고 털은 없고 코가 긴 놈이 현성천에서 오식양으로 향하여 갔습니다' (「삼국사기」 권 10, 신라본기 소성왕 2년 5월) 고려시대 쓰여진 삼국사기에 묘사된 이 짐승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길고 높은 몸. 석 자(약 90cm)나 되는 긴 꼬리. 털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단서. 코가 길다. 이 모든 묘사를 통해 어렴풋이 추론해본다면 이 짐승은 아마도 코끼리였으리라. '통일신라시대, 한반도에 코끼리가 과연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게 된 것인가?' 라는 의문을 가져볼 법도 하다. 하지만 코끼리였으면 가능했으리라. 그들은 깨끗한 물과 신선한 공기, 그리고 따스한 빛을 찾아서 하루에도 수십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이동하기 때문이다. ● 2017년. 잿빛하늘 아래 대한민국 서울. 그것도 가장 복잡하고 번화한 가로수길의 한복판에 코끼리가 나타났다.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발생한다. '이곳에 도대체 왜 코끼리가?' 그 이유는 명확하다. 이곳에는 순수의 결정으로 정제된 물과 공기, 그리고 빛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 이정윤의 손에서 피어난 코끼리는 호젓한 걸음을 멈추고 이곳 필터스페이스의 한 편에 걸터앉았다.

이정윤_Flying Trunk_D100 공기조형물, 장변 50cm 봉제인형, 공기주입모터_2014

이정윤은 그간 인간과 코끼리간의 유사성에 주목하여 코끼리를 소재로 「A TRUNK project」라 명명된 작품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진행해왔다. 인간과 코끼리, 얼핏 보면 이 둘은 전혀 별개의 개체로 보이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이는 단순히 포유류, 육지동물 이라는 단순한 생물학적 유사성에서만 기인한 것이 아니다. 코끼리들은 암컷 코끼리를 중심으로 집단을 구성하며, 끊임없이 유목하는 등의 과정에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써 각자가 맡은 역할을 수행한다. 즉, 하나의 체계를 구성하고,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상호가 관계한다는 점에서 코끼리들은 인간과도 같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정윤은 코끼리를 통하여 인간을 상징하고, 이에 빗대어 우리의 삶을 투영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정윤은 이러한 의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코끼리를 의인화(擬人化)하여 하나의 해학적인 우화(寓話)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택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드러나는 주된 장치가 바로 하이힐(High Heel)이다. 하이힐은 '여성다움'을 강요하는 젠더(Gender)적 산물의 결정체이다. 여성들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하이힐을 신는다. 하이힐을 신었을 때 생성되는 이미지는 어느덧 보편적 정서상의 미(美)로 규정되고 제도화 되었다. 이를 위해서 여성들은 불편함과 통증을 감내하면서도 하이힐을 신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하이힐은 현대 여성, 나아가 현대인들을 속박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이정윤은 코끼리에 하이힐을 신김으로써 단순한 의인화를 너머 규범과 시선, 나아가 제도에 속박당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대 인간의 초상을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정윤_A Trunk_PVC, 재봉, 공기주입모터_120×80×120_2016

본 전시 『가로수길 핑크힐 코끼리』에서 이정윤은 마치 잠시 쉬었다 가려는 듯 발걸음을 멈추고 걸터앉아 있는 코끼리, 일상의 굴레에서 탈출을 하듯 낙하산을 메고 부유하는 코끼리, 봉제인형으로 만들어져 곳곳을 유람하고 다시 돌아온 코끼리 등 다양한 형태의 하이힐을 신은 코끼리들을 통하여 규범과 시선. 그리고 제도에 의해 개인이 구속되는 현대사회의 인간에 대해서 고찰한다. 특히나 본 전시에서 코끼리와 전시 공간의 사이에는 남다른 맥락이 존재한다. 서두에도 언급된 것처럼 본 전시를 선보이는 공간 - 필터스페이스 인 서울에는 코끼리가 그토록 원하는 깨끗한 물과 신선한 공기, 따스한 빛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곳은 하이힐을 신고 잰 걸음으로 세상 곳곳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던 코끼리들이 지친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쉬었다 가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인 것이다. 이렇듯 본 프로젝트는 코끼리를 매개로 작품과 전시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유기적인 관계성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장소 특정적(Site-Specific)인 의미를 획득하고 있기도 하다.

이정윤_Round Trip_2012년부터 관람자들에게 입양시켰다 다시 돌아온 봉제인형들, 소포상자, 기록물_ 가변설치_2012~17

이렇듯 이정윤의 코끼리는 단순한 코끼리가 아니다. 이는 공고한 제도로 굳어져버린 사회의 시선 속에서 하릴없이 순응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표상이다. 하지만 순응의 너머에는 자유라는 희망이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그에 대한 기대를 안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지친 걸음을 멈추고 앉아 있는 코끼리처럼. 낙하산을 메고 탈출하는 코끼리처럼. 이러한 희망들은 제도를 향해 띄워 보내는 작가의, 나아가 우리의 대응 일 수 있다.

이정윤_The Moment_아크릴수조, 봉제인형, 튜브_60×110cm_2017

끝으로 본 글을 맺으며 한 가지 작은 바람을 적어본다. 언젠가는 이정윤의 코끼리가 하이힐을 벗어 던져버리고, 맨발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느릿느릿 걸어 다니는 풍경에 대한 상상이다. 우리를 속박하고 옭아매는 굴레를 벗어 던지는 그때. 그때에는 우리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자유롭고, 여유롭게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 김동완

Vol.20170408h | 이정윤展 / LEEJUNGYOON / 李姃潤 /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