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OMISSION

전지윤展 / CHUNJIYOON / 全志胤 / media art   2017_0407 ▶ 2017_0428 / 월요일 휴관

전지윤_HAVE SOME MORE?_Projection Mapping_가변설치, 130×65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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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0407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3 GALLERY3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11(인사동 188-4번지) 3층 Tel. +82.(0)2.730.5322 www.gallery3.co.kr

전지윤의 미학적 생략과 복원, 『My Ommission』전 ● 1. 평자는 운 좋게도 지금까지 전지윤의 개인전에 거의 빠짐없이 참여할 수 있었다. 전공이 미학이나 예술학이 아닌 평자로서 전지윤의 전시는 그 때마다 반가운 소식이었고, 고단한 삶의 작은 위안이 되었다. 특히 사회학이라는 이름 아래 예술제도의 독점구조에 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진 필자에게 전지윤의 미디어아트는 예술의 확장 가능성을 읽는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전지윤의 작업에는 일정한 미학적 논리가 내재되어 있다. 그 논리는 전지윤으로 하여금 고정된 화이트큐브를 벗어나 낯선 세계를 탐색하게 했다. 나는 전지윤에 이끌려 인사동 골목을 배회했고, 또 충정로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손님들과 얘기를 나누었고, 또 연남동 한 오피스의 사무실에서 차를 마셨다. 전지윤은 그런 방식으로 일정하게, 지속적으로 고립된 미학의 세계를 벗어나 일상의 세계로 나아갔다. 물론 아이폰이라는 미디어는 전지윤이 확장하는 미학의 경계를 탐하는 일종의 입장료에 해당했다. 아이폰은 작가, 혹은 관객이라는 개별 주체가 사회공간이라는 객관적 세계를 미학의 이름으로 유영하는 작은 돛이 되었다. 이러한 유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전지윤이라는 개별 작가에 온전히 환원될 수 없는 동시대 예술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 2. 주지하는 것처럼 공산주의 이념을 정립한 맑스는 생산력(force of production)과 생산관계(relation of production) 사이의 변증법에 관해 서술한 바 있다. 생산력은 인간이 자연에 맞서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켜나가는 생산도구와 수단을 말한다. 다른 한편 생산관계란 인간과 자연의 대립 속에서 맺어지는 인간과 다른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 흥미로운 것은 각 역사적 단계 속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정합적으로 조응하기도 하지만, 종래 상극적이고 모순적인 관계에 도달한다는 맑스의 시각이다. 예컨대 지주-농노 사이의 생산관계는 농업생산력과 어떤 단계까지 조응했지만, 기계와 공장제로의 생산력 발전을 방해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 생산력 발전에 의해 자본주의적 노동자-자본가 관계에 의해 대체되었다. 전지윤의 작업을 독해하는 지점에서 맑스의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복기하는 이유는 그의 작업이 예술에서 생산력의 발전의 일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예술이 붓과 물감, 좌대 위에 질료 덩어리로만 존재하기를 멈추는 순간 예술제도는 어떤 형태로 맺어질까? 예술생산력의 발전은 한편에서는 미디어를 포함하는 복잡한 과학기술의 발전을 포섭하고 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른바 장소특정성 미술이나 공동체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다. 전지윤의 작업은 도구적으로는 미디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고, 자신의 체험을 공유 가능한 보편적 경험으로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의 삶 속을 유영해 나갔던 것이다.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그 발전의 미학적 변용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바꾸는 예술계의 변화는 어떻게 나타날까? 이 문제를 전지윤의 작업 속에서 검토하는 시도는 곧 전지윤이라는 작가가 기존의 예술제도로부터 어떻게, 어디까지 벗어날 수 있을까를 가늠하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 전지윤은 안온한 갤러리를 벗어나 레스토랑을 겸하는 충정로 「충정각」의 홀(『the Matrix』, 2011), 연희동 어느 기획사의 사무실 공간(『DATA Fantasy』, 2014)을 넘나들었다. 전지윤이 그처럼 일상의 공간을 찾았던 이유는 화이트큐브에서 복원될 수 없는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맥락 위에 자신의 작업을 놓고자 했기 때문이다. 전지윤의 작업은 곧 시간과 공간의 특수성을 탈각해버린 무색무취의 진공상태로서의 화이트큐브보다는 일상의 구체적인 맥락 위에 놓일 때 가장 어울린다. 전지윤은 전시공학적으로 매우 치밀하게 숙고된 의도 아래 굳이 예술작품이고자 하는 어색한 욕망을 버린 채 일상 속에서 일상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 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지윤의 작업은 일상과 일상성을 겨루는 미학적 시도라 할 수 있다. 전지윤에게서 발견되는 예술생산력의 수준은 미학을 특수한 산물이 아니라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틈입시키고, 그러한 틈입을 통해 사람들의 삶의 체험을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 견인해 내는 데에 도달한다. 일상 속에서 일상과 일상성을 겨루는 테크놀로지의 미학이라 할까.

전지윤_HELLO_Interactive work w/iPad, Installation_가변설치_2017
전지윤_Fumble Object_Plastic Object_가변설치_2008
전지윤_Slowly_Projection Mapping w/Objects, Installation_가변설치, 100×9×17cm_2017

3. 그렇다면 이번 전시는 어떠했을까? 전지윤은 이번 전시의 제목을 「My Ommission」, 즉 '생략'이라 명명했다. '생략'은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무엇을 생략했다는 것일까? 게다가 소유격(My)의 형태로 생략의 '주체'를 명명했다는 것은 그 생략행위가 매우 중요한 작가 자신의 결단이었음을 암시한다. 전지윤이 감행한 생략은 의외로 반대편에 또 다른 '복원'을 감행하고 있다. 전지윤의 생략은 그 생략만큼이나 과감한 복원은 함께 읽혀져야 한다. 그 복원의 실마리는 전지윤의 전시가 갤러리에서 이루지고 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예술가의 전시가 갤러리에서 열린다는 당연한 사실이 전지윤의 전시를 관람하는 평자에게는 그만큼 낯설고 이질적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전지윤이 채택해 왔던 미학적 전략은 갤러리나 전시장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지윤이 생략하고자 했던 것은 복원된 전시장이 주는 미학적 효용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된다. 전지윤의 이번 전시는 평자에게 오히려 감상하기에 수월했다. 나는 힘들게 주소를 물어 레스토랑과 사무실을 찾아 낼 필요가 없었다. 해지기 전 골목길을 배회하면서 특정 지점에 아이폰 카메라 초점을 맞출 필요도 없었다. 나는 전시장에서 오롯하게 작품 앞에 서서 전지윤의 날 선 감각에 집중할 수 있었고, 전지윤이 드러내고자 했던 삶의 실존적 체험에 다가설 수 있었다. 전지윤은 갤러리라는 미학의 실험실 속에 자신의 작품을 놓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이전보다 몰입된 감상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에서 전지윤이 생략하고자 하는 것은 관객의 행동과 시선을 혼란스럽게 하는 우연적인 변수들이라 할 수 있다. 평자의 경험에 따르면 그 변수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시공간의 맥락성과 특수성이었다. 지금까지 전지윤은 그 일상의 시공간적 차별성을 급진적으로 수용하려 했지만 그 반대편에서 많은 것들을 희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상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그야말로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진다. 그 모든 통제되지 않는 우연과 자유는 그만큼 관객으로 하여금 전지윤의 의도에 접근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던 제약 요인이었다. 그 때마다 전지윤은 그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세세한 지침을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전지윤은 갤러리라는 통제된 맥락을 복원함으로써 시공간의 차별성이 가져오는 무한한 우연성을 생략하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 4. 물론 전지윤이 생략과 복원을 제로섬 관계로 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즉 일상의 우연과 갤러리가 제공해 주는 맥락의 통제가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전지윤은 생략과 복원의 절묘한 중점을 찾는 것으로 보인다. 그 생략과 복원의 중점에서 전지윤은 여전히 관객의 실천적 적극성과 통제된 미학적 실험실로서 전시장이 주는 효용을 조화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한 조화를 통해 전지윤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의도한 인간적인 관계의 체험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전지윤은 가장 관능적인 감각을 동원하도록 만든다. 「Slowly」는 정교하게 설계된 프레임을 통해 8개의 '심장'을 움켜쥐는 어떤 생명체의 촉수를 보여준다. 그것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의 삶과 기억을 옥죄어 온다. 어쩌면 우리는 누구나 (무)의식의 근저에 삶을 움켜쥐는 기억의 단편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 기억의 빨판은 의식적으로 떼어 낼 수 없을 만큼 강력하게 우리 삶을 흡착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삶의 실존적 조건일 수도 있다. 그 실존적 조건은 개인의 아픔일수도 있고 사회적 트라우마일 수도 있다. 그것이 개인의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건 「Hello」는 모든 실존적 조건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소통의 문제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함축한다. 벽면에 걸려 있는 이미지에서 우리는 한 인물의 단면만을 볼 수 있다. 그것도 아주 흐릿하게 말이다. 그 흐릿한 단면만으로 우리는 상대방의 전체를 판단한다. 그러한 판단을 통해 이루어지는 소통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오해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그 오해는 또한 서로에게 상처를 내고, 서로와의 관계는 어긋나 버리고 만다. 어긋난 관계 속에서 서로에 대한 오해는 때로 일방적인 억압으로 작용할 수 있다. 예컨대 원치 않는 육식(肉食)은 때로 단순한 개인의 식습관이나 취향을 넘어서 존재의 근거를 위협하는 억압을 초래한다(「Have Some More?」). 육식은 보편적인 미감(味感)이 아니라 아주 날카롭게 타자의 생명을 말소하는 '살해'일 수 있다. 마치 당연한 듯 권유되는 육식은 누군가에게는 욕망의 충족을 의미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존재를 산산히 조각내는 참을 수 없는 아픔을 의미할 수 있다. 전지윤은 소통의 모순 속에서 해체되는 주체를 찢기고 조각난 이미지 속에서 육식을 강요받는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또한 가장 말초적인 감각을 날카롭게 찢고 껍질을 벗겨내는 고통과도 연결된다(「The Dinner Table」). 전지윤의 시도는 소통에서 발생하는 그 어쩔 수 없는 오해를 인정하되, 그것을 바로잡고자 희망의 미학과 관련된다. 그 희망의 미학은 「Hello」에서 다음과 같이 구현된다. 즉 오브제 이미지 위에 아이패드를 비추면 인물의 보이지 않는 모든 측면들이 겹쳐지는 것이다. 전지윤의 미디어아트는 미디어를 통해 소통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일종의 희망이라 할 수 있다. 그 희망은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하는 이성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전체를 고려하는 상상력을 동원하는 것이며 전지윤에게 테크놀로지는 곧 그러한 상상을 호출하는 실천적인 도구라 할 수 있다. 전지윤에게 미디어란 곧 대화의 한계와 모순을 극복하는 수단인 것이다.

전지윤_The Dinner Table. No.1-No.5_Interactive AR work w/iPad, Installation_가변설치, 300×45cm_2017

5. 이번 전지윤의 전시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미학에 대한 성찰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 성찰은 전지윤의 향후 미학적 실천을 가늠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즉 한편으로는 미디어 활용 가능성을 확대함으로써 일상과 관객의 실천적 개입을 확장시켜 나가고 다른 한편 내용적으로는 동시대 사회적 삶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파생하는 소통의 모순을 체험가능한 형태로 제공할 것이다. 전지윤의 전시는 여전히 골목길, 까페, 사무실, 시장을 포함하는 일상의 현장과 엄밀하게 통제되는 전시장에서 출몰할 것으로 보인다. 그 속에서 전지윤의 생략과 복원은 좀 더 환류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낼 것으로 보인다. 일상의 우연과 우연의 가변성은 전지윤이 초점을 맞춘 소통의 부재와 그 부재의 극복이라는 희망을 함께 공유하도록 만들기 위해 조율될 것이다. 그러한 조율이 다음 전시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지를 기다리는 작업은 비교적 유쾌한 일이다. ■ 김동일

전지윤_Wonderland_Interactive work w/iPad, Installation_가변설치_2014

미디어를 통한 사유 : 타자를 향한 모험 ● 며칠 전 서울 공덕오거리를 지나가는데 "포켓몬 잡으려다 사람 잡겠네"라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자기가 있는 현실 위에 디지털 가상을 중첩하는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기술을 토대로 현실 속에서 게임 캐릭터를 잡는 모바일 게임이 엄청난 열풍을 넘어 사회적 문제로 대두한 것이다. 나는 2011년 뉴미디어아트 기획 기사를 진행하면서 작가 전지윤을 통해 처음 증강현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이 기술은 설명을 듣고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이해되는 낯선 개념이었다. 작가는 증강현실을 적용한 모바일 작업을 처음 선보였는데 작업을 설명하는 열정적인 에너지가 인상적이었다. 전지윤은 이번 전시에서도 증강현실 기술을 활용한 작업을 선보였다. 하지만 과거보다 그 기술이 다소 소박해 보인다. 스마트폰 덕분에 오늘날 미디어아트보다 대중이 일상 속에서 접하는 기술의 발달과 그것을 수용하는 대중의 디지털 반응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디어아트는 이제 새로운 기술을 구현하는 것 이상으로 그 기술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가 중요해졌다. 작가는 디지털 기술은 일반적으로 보지 못하는 현상을 재현하는 데 탁월하다고 설명한다. 이때 기술 자체보다는 '개념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어떤 기술을 적용할 것인가'가 고민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기술의 발달은 작가가 표현할 수 있는 미디어의 확장을 가져왔다. 스마트 기기는 그녀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도구다. 작은 기계에 AP(Application Processor), 디스플레이, 모뎀, 카메라, 마이크, 스피커, 각종 센서 등이 압축되어 들어있고 관객에게도 매우 친숙한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전지윤은 소통보다 관객이 능동적으로 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데 몰두한다. 예를 들어 증강현실 기술을 활용한 작업 「The Dinner Table」 시리즈는 벽면에 고정된 깨진 접시에 아이패드를 갖다 대면 낙지, 꽃게, 전복, 오징어 등 살아있는 해산물을 잔인하게 죽이는 영상이 구동된다. 이때 접시의 사라진 파편의 흔적인 검은 부분은 일종의 마커로 작용한다. 작가는 왜 이러한 장면을 증강현실을 통해 보여주는 것일까? 눈에 띄는 것은 영상에서 엿보이는 강력한 생명력이다. 인간이 잔인하게 껍질을 떼어내고 칼질을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해산물은 생생한 움직임을 드러낸다. 고통 속에서 그 자체로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작가는 증강현실을 통해 무의식 속의 기억을 마치 소환해 내듯이 눈앞에 구현해낸다. 하지만 아이패드를 내려놓는 순간 영상은 눈앞에서 사라진다. 이 작업의 핵심은 관객이 아이패드를 깨진 접시에 가까이 가져가는 수고로운 행위를 거쳐야 영상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객 참여로 이루어지는 증강현실은 그 자체로 전지윤의 작업에서 의미 있는 메시지로 작용한다. 이때 관객 참여와 소통은 명백히 다른 문제다. 그녀의 작업은 생명을 존중하고, 살해하지 말라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생명을 영위하기 위해 수많은 생명을 살해하고 그 생명을 섭취함으로써 삶을 지탱한다. 먹는다는 일상적인 행위는 나의 존재성을 부여하는 존재론적 차원이며, 먹거리란 다른 말로 바꾸면 타자에 다름 아니다. 관객 참여를 통해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타자를 호출하는 행위는 먹고살기 위해 너무나 당연하게 다른 생명을 빼앗고 있지만, 우리가 마치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에 가깝다. 실제 전지윤은 채식주의자다. 그녀가 육식하지 않는 이유는 남의 살, 즉 남의 근육을 씹는 느낌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닭을 제외하고는 그녀가 먹을 수 있는 해산물에 집중되어 있다. 오히려 해산물은 작가에게 가장 타자화된 존재다. 그 점 때문에 작업은 오히려 작가 자신의 다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전지윤_MY OMISSION

이번 전시에는 증강현실뿐 아니라 어떤 대상물의 표면에 빛을 쏘아 새로운 대상물처럼 보이게 하는 프로젝션 맵핑(Projection Mapping) 기술도 주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Slowly」는 흰색 석고로 제작한 가슴 형상의 오브제 위로 살아 꿈틀거리는 낙지 영상과 사운드가 중첩된다. 절단된 8개의 가슴 오브제 표면에는 젖인지, 낙지의 먹물인지 그 실체가 불분명한 검은 액체가 중력을 거슬러 흐르고 있어 언캐니한 분위기는 더욱 극대화된다. 이 작품 옆에는 2008년 작 「Fumble Object I for man」이 배치되어 있다. 켜켜이 쌓인 종이 위에 검은 액체의 흔적이 있고 그 위로 모형처럼 제작된 또 다른 가슴 오브제가 놓여 있다. 작업의 제목처럼 쉽게 만질 수 있는 이 가슴은 핑크빛으로 칠해져 있는데 마치 가짜같이 매끈하다. 이에 비해 「Slowly」의 백색 가슴은 아이를 낳아 키운 어머니, 할머니의 탄력 없이 쪼그라진 가슴 형태와 유사하다. 하지만 프로젝션 영상을 통해 낙지는 가슴에 기생하듯 살아 움직이며 강인한 생명력을 내뿜는다. 마치 여성들이 젖먹이들을 쪼그라진 가슴으로 길러낸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8개의 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하나의 화면에 담아 송출하며 시공간을 뛰어넘어 익명의 여성사를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나는 최근 육아에 전념하면서 아기가 힘껏 빨아야 젖이 분출하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젖은 양이 아무리 많아도 아기의 흡입 없이는 아주 조금 새어 나올 뿐이다. 낙지의 먹물 역시 마찬가지다. 위기 상황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내뿜는 일종의 무기로 생명의 위협 없이는 뿜어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상호 관계를 통해 생명력을 느끼는 순간에 젖, 먹물, 그리고 정액과 같은 액체는 몸의 바깥으로 발산된다. 마치 터지는 불꽃처럼 황홀한 순간의 흔적과도 같다. 그러고 보면 촉각적 감각은 전지윤의 작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접촉은 마주함 그 자체이며, 존재가 존재를 만나서 서로 교감할 수 있는 순간이다. 전지윤의 구작을 떠올리면 당시만 해도 디지털 터치기술이 미흡해, 관객이 영상 속 얼굴을 쓰다듬기 위해 마우스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근본적으로 손과 마우스는 감각적 차원에서 간극이 너무 크기 때문에 아날로그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실패에 가까웠다. 하지만 전지윤은 실패에 주저하지 않고 항상 다른 차원의 접촉을 시도해왔다. 촉감은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하는 감각이기 때문에 그것은 디지털 기술 시대에 타자에 대한 사유라 할 수 있다. 터치 하나로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진화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손이나 촉각이 아니라 스크린과 그것을 떠받치는 수많은 기술이다. 이 때문에 촉각에 대한 무감각은 타자에 대한 무감각으로 연결되기 쉽다. 전지윤은 최근 한 철학가에게 깊이 매료되었다고 한다. 타자에 관한 사유를 윤리적 차원으로 이끌어낸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개념은 그녀의 작업과도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 나에게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유대인인 그가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일화다. 레비나스는 수용소라는 순간순간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현실 속에서 오히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해 작은 돌멩이 하나, 풀꽃 하나에서 생명의 신비를 느끼고, 타자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구체적인 실존의 황홀함을 느꼈다고 한다. 쇠약하고 혈색 없는 사람들이 노동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 죽임을 당할 때 그는 마지막까지 생명의 환희에 가득 찬 얼굴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죽음과 타자에 관한 그의 철학적 사유는 생생한 경험과 실천 속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으며 생존의 동력이 된 것이다. 레비나스가 타자와 만나는 주요 개념으로 존재의 통로인 '얼굴'을 제시했다면 전지윤은 이번 전시에서 흥미롭게도 두 개의 얼굴을 대비시켰다. 「Have Some More?」에서 파편화된 화면으로 연출된 얼굴은 붉게 충혈된 눈, 그리고 입 주변의 얼룩진 립스틱 자국을 통해 기계적으로 먹는 행위가 강조되어 있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먹는 장면에도 불구하고 허기는 영원히 충족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반면 증강현실 기술로 구현된 「Hello」에서 드러나는 얼굴은 강한 빛을 발산하며 눈코입만 겨우 보인다. 관객이 아이패드를 똑똑 두드리면 한 여성이 뒤를 돌아보고, 손가락으로 좌우를 움직이면 360도 회전한 사람의 모습이 하나의 스크린 속에서 구현된다. 사실 이 작업은 특별한 내용을 담기보다 관객 참여를 통해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타자와의 만남 그 자체를 구현한 것이다. 전지윤의 작업에서는 형식과 내용의 관계를 설정하고 구조화하는 것이 중대한 과제다. 특히 이번 전시의 경우 인터랙티브 아트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일부 작업에서는 언캐니한 감정을 극대화해 관객의 물리적 참여보다 심리적 참여를 유도한다. 최근 철학뿐 아니라 예술에서도 윤리적인 측면이 눈에 띈다. 윤리가 인간이 지켜야 할 규범을 세우는 것이라면 윤리적인 것은 타자에 대한 소외 없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고민에 가깝다. 기술의 발달로 인터넷과 스마트폰 등 소통을 위한 도구는 진화했지만 직접적인 대면의 기회는 줄었고, 타자의 빈자리는 더욱 커졌다. 타자의 부재에 둔감해진 사회가 되면서 많은 예술가가 타자의 소멸에 저항하며 타자의 고통을 위무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잘못하면 타자에 대한 오만이 되기 쉽다. 타자의 영역은 결코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차원이기 때문이다. 타자는 의식 안쪽에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사유 바깥을 통해 무수히 다른 모습들로 현현하는 것이다. 전지윤은 미디어를 기반으로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구조적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한다. 타자에 대한 사유는 언제나 나 자신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타자는 나의 삶을 지탱하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 이슬비

Vol.20170409f | 전지윤展 / CHUNJIYOON / 全志胤 / media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