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Infinitum

전순영展 / SUNNY CHYUN / 全舜英 / painting   2017_0411 ▶ 2017_0422 / 일요일 휴관

전순영_For Love_캔버스에 혼합재료_43×134cm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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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파비욘드 Gallery Far Beyond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52길 22 시가이아팰리스 102호 Tel. +82.(0)2.790.1144 blog.naver.com/far__beyond

공간으로 변형된 시간 ● 여러 재료들과 기법들이 사용되고 적용된 전순영의 작품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재봉질로 하는 드로잉이다. 작가에게 재봉질은 떨어져 있는 것들을 계속 이어가는 매체다. 리넨 같이 침구류의 재료로도 사용되는 천을 수직으로 찌르며 나아가는 실과 바늘은 면의 앞과 뒤를 모두 공략한다. 오바로크는 가장자리까지 포함한다. 그래서 작품은 표면의 이면 또한 활성화 된다. 자수 시리즈는 마치 두 작품처럼 앞과 뒤, 두 개의 작품 사진이 존재한다. 작가는 재봉질을 포함하여 여러 기법으로 만들어진 작품의 면을 '스킨이나 막(membrane)'과 비유하는데, 이것은 앞면만큼이나 활성화된 뒷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스킨이나 막은 경계를 짓지만, 바깥과 완전히 차단되어 있지 않다. 경계는 항상성과 정체성이 유지되는 조건이지만, 만약 그 경계가 너무 견고하다면 생명과 생기를 잃을 것이다. 경계는 닫힘이 아닌 열림을 위해 존재한다. ● 그것들은 벽에 걸릴 뿐 아니라, 구름처럼 공중에 띄워지고 테이블 같은 일상용품 위에 깔리기도 한다. 작가는 평면적 이미지를 설치와 연출의 방식으로 확장한다. 이러한 확장성은 반드시 전체 공간을 스펙터클하게 아우를 필요는 없다. 큰 작품은 물론, 보자기나 테이블보만한 크기에도 확장성은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테이블보처럼 접힐 수 있는 형태는 차원의 변주에 대한 은유이다. 전순영의 작품 공간은 뉴턴의 공간처럼 무엇인가를 담는 상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공간 그자체가 사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만큼 유연하다. 마거릿 버트하임은 『공간의 역사』에서 2차원적인 냅킨을 3차원 공간에서 대각선으로 접을 수 있는 것처럼, 4차원 공간에서 3차원 공간의 두 부분을 서로 접을 수 있다는 발상을 소개한 바 있다. 이러한 4차원에서의 공간 접기를 통해 우리는 집에 앉아서도 지구 반대편의 풍경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전순영_Washed Out_캔버스에 혼합재료_69×92cm_2008~16
전순영_The Plankton or The Whale_#1, #2_캔버스에 혼합재료_66×57.3cm_2015~17

또한 작품에 종종 뚫려있는 구멍은 웜홀(wormhole)처럼 공간 뿐 아니라 시간을 관통하는 여행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질 수 있는 다차원에의 비유는 작품 형식과 관련된다. 재봉질로 된 형태가 가장 두드러지지만, 그 아래에는 실크 스크린, 유화, 아크릴, 펜, 마카, 염료, 실 같은 수많은 재료와 그 재료에 따르는 기법이 깔려있다. 작품에 구멍이 나있는 경우에는 불로 태운 후 펀치 등으로 직접 뚫거나 징을 박아 넣기도 한다. 전순영의 작품은 그 자체가 중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조명이나 기타 상황에 따라 잘 안보이던 것이 보이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 한다. 거기에는 마치 비밀의 문서나 지도 같이 숨겨진 차원이 있다. 그것은 해석을 촉구하지만 동시에 결정적 해석을 회피한다.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이런저런 방식으로 새겨 넣은 기호가 드러나거나 숨겨지는 등의 유동성이 있다. 여기에 설치의 가변성이 보태진다. ● 전순영의 작품들은 설치할 때 표면/이면에 잠재해 있는 차원이 현실화된다. 다양하게 주름잡힌 표면에서 펼침과 접힘의 정도는 가변적이다. 바늘과 붓을 포함한 다양한 도구를 통해 자유롭게 횡단하는 선들은 수직 수평으로 질서정연하게 짜여 진 바탕 면을 변화시킨다. 다양한 방향으로 질주하는 횡단 선들은 표면을 변형시켜 굴곡 면을 만든다. 그래서 작품 표면은 매우 우툴두툴 하다. 유클리드 기하학처럼 매끈한 것이 아니라, 프랙탈 도형이나 카오스 이론 등의 배경이 되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처럼 변화무쌍하다. 대략적인 구도를 잡고 시작은 있지만, 시간차를 두고 내용/형식을 덧붙여가면서 복잡성과 우연성을 늘려나가는 작품은 누적과 와해, 연속성과 불연속성, 구조와 해체, 침묵과 아우성, 기억과 망각, 같은 상반된 범주들이 공존하고 상호작용한다. 자수 시리즈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형태는 마치 스파이더맨이 여기저기로 방사한 듯한 거미줄 모양의 선들이다.

전순영_Love Mandela #1, #2_캔버스에 혼합재료_103×73×23cm_2014~16
전순영_How Great Thou Art_캔버스에 혼합재료_61×92cm×5cm_2012~16

스파이더맨의 거미줄이 그렇듯이 이 그물망들은 이동이나 포획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그자체가 자족적인 구조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유목민의 거처가 그러하듯이 집은 순간적으로 지어지고 잠시 그 역할을 수행한 후 무너지고 다시 지어질 수 있다. 방사형으로 뻗는 거미줄 자체가 원근법적이지만, 한 평면에도 거미줄은 여러 개가 있을 수 있어서 다(多)중심적이다. 수렴 또는 발산하는 구멍은 도처에서 열리고 도처에서 닫힌다. 거기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하는 우회로와 순간 이동식의 지름길이 있을망정, 정해진 길(定道)은 없다. 망을 이룬 선들은 길이 되기도 하여 작품은 지도, 특히 오래된 지도같은 느낌이다. 따라서 망 사이에 있는 것들은 색에 따라 녹지가 되기도 하고 습지가 되기도 한다. 천정 같은 곳에 설치하는 작품의 가장자리는 사각형을 벗어나 있어 더 자연스러운 굴곡 면을 연출한다. 그것은 구름처럼 가변적인 경계를 만든다. 그것은 이전의 '응집(aggregating)' 시리즈처럼 그 내부에는 입자와 입자의 운동을 위한 허공을 포함할 것이다. ● 아크릴 판을 사용한 'illumination' 시리즈에서는 주름진 천과 달리 평면성은 유지되지만, 여러 판을 중첩하여 복합적인 화면을 연출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여기에 조명이 가세하기도 한다. 빛에 대한 감각은 이전의 '빛과 선' 시리즈에서도 나타난다. 캔버스에 유화와 마카, 매니큐어 에나멜같은 다양한 재료로 그려진 '빛과 선' 시리즈에서의 빛은 잔잔한 조명 정도가 아니라, 눈을 찌를 듯한 강렬한 빛의 환영이 특징적이다. 어떤 것은 급속히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급속히 멀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아크릴 판의 앞뒤로 이중, 삼중의 실크스크린 인쇄 후 다양한 유성 펜으로 가필한 비슷한 형태와 크기의 이미지가 겹쳐짐으로 인해 가상적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것은 관람자가 꽃이자 만다라인 형태 내부를 눈으로 거닐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번 전시의 부제 'Ad Infinitum'은 라틴어로 '영구히', '무한히'라는 의미를 가진다. 중층적 구조와 경계의 소멸을 특징으로 하는 전순영의 작품과 어울리는 주제이다.

전순영_Day We Felt The Distance_캔버스에 혼합재료_148×136cm_2016~17
전순영_Shot in the Dark_캔버스에 혼합재료_187×150cm_2016~17

자수 시리즈의 기본 형태는 가장자리에 오바로크를 친 사각형인데 이 유한한 공간 속에 무한을 접어 넣는 것이다. 유한 속의 무한이라는 개념은 작품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기표들의 유희가 벌어지는 예술작품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인생 그자체가 유한 속의 무한 아닐까. 인간은 유한한 자신의 생애보다 긴 지평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 때문에 인간은 노동이나 생산 이상의 것을 욕망한다. 예술보다 더 오래되고 보편적인 뿌리를 가진 종교가 기대는 것도 그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이든, 불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회귀이든 간에 말이다. 전순영의 경우에는 유한한 형식체계로 환원되지 않는 방식이 무한과 관련된다. 작품에서 발견되는 장식적 요소는 근대에 확정된 순수예술에 대한 미학적 이데올로기를 교란하는 요소다. 여기에서 장식적 요소는 기계적 반복에 머물지 않는다. ● 작품을 이루는 요소들 각각은 자족적이지 않지만(불완전하지만), 차이 지어지는 요소들이 느슨하게 상호 보충하는 관계이다. 레베카 골드스타인은 수학자 괴델의 전기인 『불완전성』에서 수학자 괴델은 형식주의자들에 맞서서, 무한을 유한한 형식체계 안에 포함시킴으로서 수학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 말한다. 무한의 관념은 종교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신을 포함한 타자에게 활짝 열린 동일성을 사유했던 철학자 레비나스는 『신, 죽음 그리고 시간』에서 영감을 '무한이 유한을 지나가는 방식', '무한에 의한 유한의 넘쳐흐름'이라고 본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무한은 유한과 관계하는 가운데 유한을 불안정하게 하거나 유한을 깨운다. 그렇게 깨어난 주체성의 심성은 유한 안의 무한이나 마찬가지라고 본다. 전순영의 작품에서 무한이 감지되는 또 다른 방식은 '기호의 중층적 배열에 의한 표류현상'(푸코, 에코)이다. 그렇게 배열된 기호들은 복잡한 증후들로 나타나며, 조합 방식에 따라 해석이 열려 있다.

전순영_Falling Down(앞, 뒷면)_캔버스에 혼합재료_99×99cm_2012~16
전순영_Dialogue(앞, 뒷면)_캔버스에 혼합재료_99×100cm_2008~16

기호들의 그물망을 주파하는 속도는 작품마다 다르다. 어떤 것은 빛의 속도로 어떤 것은 미로와도 같은 길고 한가로운 우회로를 거친다. 네트워크상의 강력한 허브처럼 때로는 지배적인 그물망이 있기도 하지만, 대개 여러 개의 방사상의 공간이 그물망을 이루는 전순영의 작품은 신경세포부터 인터넷까지, 미시세계부터 거시세계에 이르는 유비관계가 있다. 물론 이전의 종교적 상징의 시대와 달리 유비(analogy)의 중심에 신이나 인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작업이란 여러 차원에 산포된 기호의 층들을 한데 모으는 것과 같다. 그러한 과제는 완성되기 힘든 무한한 과정이어서,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을 확정짓기 힘들다. 그러나 작가에게도 그렇겠지만 관객에게 그물망 사이의 표류는 낭비나 방황이 아니라. 즐거운 여행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무한한 연결과 접속을 시도하는 그물망 구조는 어디로든 뚫린 길들이 있는 지도와 같다. 매작품마다 달라지는 배치물에 따라 지도는 달라진다. 작가는 지도를 따라 간다기 보다는 지도를 만들면서 나아간다. ● 명확한 좌표에 위치하는 점에서 점으로의 정확한 이동이 아니라, 길 없는 길의 횡단이다. 이미 정해져 있는 길에 존재하는 수많은 재현적 행위로부터 탈주하려 한다. 대표적인 재현적 활동은 바로 노동과 생산이다. 예술마저도 무익한 사본을 생산하는 재현적 과정에 걸려들 수 있다. 재현은 권력이 불균등하게 배분되는 계층사회와 잘 어울리며, 재현주의가 득세하는 곳에서 자유로운 예술의 입지는 좁다. 전순영의 방식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묘사한 반(反) 직물적인 방식을 떠올린다. 작업은 씨줄과 날줄이 있는 직물에서 시작되지만, 이러한 질서정연한 표면은 이내 얽히고설킨 압축적 표면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반 직물은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어 '무한대'라는 전시부제에 상응한다. 그 양상은 유기체나 조직을 초월하는 중심 없는 체계, 즉 뿌리줄기이다. 뿌리줄기들은 판 전체를 덮을 정도로까지 늘어난다. 뿌리줄기는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남발하며 끝없는 결연관계로 이어진다. 관람자에게는 얽히고섥힌 미로와도 같은 길은 중층적 공간이자 시간이다. 즉 여기에서 시간은 강물처럼 선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공간 속에 널리 퍼져있다.

전순영_Artificial Sweeteners(앞, 뒷면)_캔버스에 혼합재료_94×97cm_2007~16

자크 아탈리가 『미로』에서 말하듯이, 미로들은 공간으로 변형된 시간이다. 이 한정된 공간 안에 많은 길을 만드는 것이다. 전순영의 작품에서 '미로의 시간성'은 단지 무작위적으로 선들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이야기를 짜나가는데 필요하다. 그 점에서 미로에서의 여로는 단순한 방황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정해놓은 시간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시간을 찾는 것'(자크 아탈리)에 가깝다. 자크 아탈리는 미로가 무리를 지어 다녔던 원시인들의 유목생활을 상기시켜주는 어떤 여행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미로에 관한 모든 신화는 여행, 시련, 깨우침, 그리고 부활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인간 최초의 오락이었으며 일상생활에서 도피였고 가상 유목생활이었다고 본다. 또한 미로는 광명으로 향함과 동시에 의식 깊숙이 숨겨진 지역을 향해 다가가는 방법이라고 한다. 천위에 수놓이거나 작은 상자를 떠올리는 전순영의 작품은 유목민들의 소지품을 떠오르게 한다. 미국과 싱가포르, 한국을 오가며 배우고 작업했던 작가에게 매우 어울리는 형식이자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 유목적 삶은 유목적 주체를 낳는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유목적 주체』에서 유목민은 이동 가능한 다양성을 나타내며, 유목민의 정체성은 흔적들의 일람표라고 말한다. 유목이란 물리적인 이동 뿐 아니라, 지성의 스타일이기도 하다. 들뢰즈가 말한대로, 지적인 유목민이 되는 것은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것에 대한 것이요, 목적지와 상관없이 가는 행위에 대한 것이다. 『유목적 주체』는 유목민이 쉽사리 동화되지 않는다고 한다. 오직 통과해 지나갈 뿐인 유목민의 의식은 여하한 류의 정체성도 영구적인 것으로 취하지 않는다. 유목민들은 복제와 재현을 요구하는 '긴 기억대신에 찬란하게 빛나는 짧은 기억'(들뢰즈와 가타리)을 가지고 끝없이 연결한다. 그것이 강렬한 상호관련성을 낳는다. 지도 또한 고착되지 않고 끊임없이 다시 작성된다. 어디에서든지 집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 유목에서 각 텍스트는 야영지와도 같다. 어디서든 깔고 펼칠 수 있는 작품들은 작가가 통과해 왔던 시공간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전순영은 자신이 통과해온 길에 대한 기호들의 거대한 지도를 그려왔고 그려갈 것이다. ■ 이선영

Vol.20170411d | 전순영展 / SUNNY CHYUN / 全舜英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