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_의 Ordinary

윤동천展 / YOONDONGCHUN / 尹東天 / installation   2017_0412 ▶ 2017_0514 / 월요일 휴관

윤동천_벽에서 On The Wall_연작_종이에 수채_각 50×66cm×4_2016 출처) 금호미술관 제공, 권오열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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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0412_수요일_05:00pm

관람료 / 성인_3,000원 / 학생_2,000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삼청로 18(사간동 78번지) Tel. +82.(0)2.720.5114 www.kumhomuseum.com

다시 일상으로 ● 19번째 개인전인 이번 금호미술관의 전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상은 줄곧 윤동천의 기본 전제이자 출발점이었지만, 새삼 이 주제로 회귀한 것은 최근의 개인전들이 정치사회적 쟁점에 반응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윤동천 작가노트, 「19번째 개인전 전시개념」, 2017) 세월호, 탄핵 등 어느 때보다 생활밀착형 정치 이슈들이 역동적으로 벌어지는 현 시국을 생각하면 의외의 선택일 수도 있으나, 직접적인 사회 변혁이 아니라 예술과 사회의 균형이 중요한 작업의 성격을 생각하면 수긍이 갈 것이다.

윤동천_산실-문호리 54-4 The Cradle-Moonhori 54-4_C 프린트_각 50×38cm×100_2017
윤동천_아름다움의 산실 The Cradle of Beauty_C 프린트_각 70×100cm×9_2017

전체적으로 이번 전시는 '쉽고 명료하게'라는 기존의 방법론에 서정성이 가미된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듯하다. 작품 하나하나마다 정교하게 예술과 일상의 상호작용을 고안해 넣던 과거와는 달리, 이번 전시의 출품작은 개념적으로나 물성적으로나 가공을 많이 하지 않아 담백한 느낌을 준다. 예술과 일상이라는 전시의 주제를 가장 단순하게 대변하는 것은 지하의 두 작품 「산실(문호리 54-4)」(2017)과 「아름다움의 산실」(2017)이다. 특별히 손을 대지 않은 스트레이트 사진으로 이루어진 두 작품은 예술과 일상의 유사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미용실, 구두방, 꽃집, 세탁소, 목공소 등을 찍은 「아름다움의 산실」은 이 치열한 노동현장이 일상의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미의 산실임을 조용히 증언한다. 한편 이와 대구를 이루는 「산실(문호리 54-4)」은 작가의 문호리 작업실을 찍은 것이다. 작업실 풍경은 거창한 아우라 대신 강도 높은 노동의 흔적을 드러낸다. 어지럽게 흩어진 전선, 테이블을 가득채운 필기구와 물감, 목장갑과 각종 공구, 지난 전시에서 남은 오브제들까지 작업실은 전쟁터를 연상케 한다. 작업을 하는 과정에는 작업실을 유지하기 위해 뙤약볕에 잡초도 뽑고, 산더미 같은 프린트물을 읽으며 공부도 하며, 깎고 그리고 붙이는 육체노동도 포함된다. 이쯤 되면 작업실은 미의 산실이 아니라 노동의 산실이 된다.

윤동천_위대한 퍼포먼스 Great Performance_연작_C 프린트_각 70×100cm×8_2017

한편 1층의 「위대한 퍼포먼스」 연작은 정치적 사진을 활용하던 기존 작업의 연장이다. 하지만 제목과 내용을 대비시켜 풍자나 언어유희를 하던 과거와 달리, 「위대한 퍼포먼스」는 이 땅의 한국인들이 일구어낸 현실의 행위에 순수한 경의를 표한다. 1001마리 소떼를 몰고 방북한 정주영이나 오체투지로 저항한 비정규직 여성해고노동자, 이산가족 상봉보다 더 위대한 퍼포먼스가 어디 있겠는가하는 감탄 말이다. 감탄의 절정은 촛불시위를 호주 원주민 그림 풍으로 재현한 회화다. 촛불 하나하나를 점으로 찍으며 작가는 시민의 힘을 노동의 강도와 시간으로 체감하지 않았을까. 그 어떤 예술보다 위대한 일상의 퍼포먼스는 지금 여기 한국에 사는 자의 특권(이자 채무)일지도 모른다.

윤동천_그리다 Draw_종이에 수채_50×66cm_2016 출처) 금호미술관 제공, 권오열 촬영
윤동천_길에서-바닥표시 On the Street-Road Marking_종이에 수채_50×66cm_2016 출처) 금호미술관 제공, 권오열 촬영

2층과 3층의 작업은 형식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대비를 이룬다. 2층은 일상을 소재로 한 평면회화로 구성된다. 하드 엣지, 추상표현주의, 기하추상을 연상시키는 외형은 실상 극히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의 세부다. 특히 백미는 종이에 수채로 담백하고 가볍게 그린 드로잉이다. 직사각형이 중첩되며 구성의 리듬을 드러내는 「그리다」(2016)나 조각보 같은 기하학적 조합이 어우러진 「벽에서」(2016)는 형태의 조형미와 함께 물감이 겹치고 번지며 자아내는 서정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외견상 추상회화로 보이는 이 드로잉들은 실상 구상화다. 「그리다」는 박스테이프가 붙여진 모습을 그린 것이고 「벽에서」는 담벼락의 돌이 맞물린 형태를 그린 것이다. 여기서 작가의 역할은 화가보다는 사진가에 가깝다. 자의적 구성과 변형보다 이미지 채집과 선택, 잘라내기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엘즈워스 켈리(Ellsworth Kelly)의 계단 그림자처럼 일상의 사물은 작가의 눈으로 걸러져 화면 위에 남는다. 이때 그림의 내용을 암시하는 것은 제목이다. 화면 위에 아름답게 흩뿌려진 점들은 바닥에 눌어붙은 껌이고(「길에서-껌자국」(2016)), 표현적 추상을 연상시키는 선들은 아스팔트 바닥의 균열이다(「길에서-바닥표시)」(2016)). 최소한의 가공으로 일상의 단편에서 추상적 아름다움을 추출하는 방식은 2014년의 개인전에 출품했던 「하늘 연작」(2014)의 연장일 텐데, 전보다 간접적이고 은유적이며 서정적이다.

윤동천_서로_기대다 Leaning Against Each Other_스테인리스 볼_23×28×11cm_2017 출처) 금호미술관 제공, 권오열 촬영
윤동천_서울은 만원이다 Seoul Is a Full House_수세미_41×86×11cm_2017 출처) 금호미술관 제공, 권오열 촬영

한편 3층은 일상의 사물들이 지닌 조형성을 그 자체로 드러내는 작업들로 채워진다. 2층의 회화가 일상을 소재로 한 것이라면, 여기서는 사물 자체가 가공 없이 오브제로 제시된다. 본래 기능을 지니던 도구들은 여기서 의외의 형식미를 선보인다. 변기의 물막이 볼, 공사장에서 주운 철사, 수세미, 간판은 일상용품에서 오브제로 전치된다. 기능을 제거하고 장소(맥락)를 바꿈으로써 사물을 용도 변경하는 전략은 고전적인 레디메이드의 방식이나, 작가의 선택과 명명을 강조하던 레디메이드와는 달리 여기서의 초점은 도구(기능)에서 오브제(형식)로의 전환에 있다. 하찮게 굴리던 일상의 남루한 사물들의 조형적 가능성을 발견하고, 작품과 일상용품의 위계를 허무는 것이 이 발견된 사물 연작의 의의일 것이다. 제목은 여기서도 의미 전환에 기여하는데, 과거처럼 강한 아이러니나 풍자의 형태를 띠기보다 한발 뒤로 빠져 관객의 연상을 돕거나 유머를 자아낸다. 미끄러움 주의 간판에 붙은 '역전의 용사'처럼 일상은 예술에 못지않은 불굴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 ● 정확히 30년 전 윤동천은 "서로 나눔, 함께 누림의 확대는 공유이며, 공유의 극대화는 일상이다"라는 말을 했다.(윤동천 작가노트, 「예술과 일상」, 1987.) 그가 주목하는 일상은 예술의 가치를 누구나 제대로 즐기고 나누어서 더 이상 예술이 특별하지 않은 그런 세계다.(윤동천 작가노트, 「19번째 개인전 전시개념」, 2017.) 우연이겠지만 일상을 전면에 내세운 이번 전시는 전 작업이 신작임에도 시기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윤동천의 미술관과 그간의 궤적을 되돌아보는 중간 점검의 의미로 다가온다. 30년 전과 비교해서 미술은 어떻게 달라졌고 일상은 어떻게 바뀌었는가. 이제 현대미술은 결코 현실과 유리된 초월적인 영역이 아니며, 신자유주의 질서에 적극적으로 공모하는 기호 자본주의의 주전 선수다.(Hito Steyerl, "Politics of Art: Contemporary Art and the Transition to Post-Democracy," The Wretched of the Screen, Sternberg Press, 2012, p. 94.) 하지만 다른 한편 미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삶과 멀어졌다. 전시 행정과 열정 노동, 스펙터클, 젠트리피케이션, SNS의 점령 하에 미술은 거꾸로 삶을 삼켰다. 아방가르드가 꿈꾸던 예술의 정치화(politicalicalization of art) 대신 삶의 미학화(aestheticization of life)가 도래했다.(Hito Steyerl, "Art as Occupation: Claims for an Autonomy of Life," The Wretched of the Screen, Sternberg Press, 2012, pp. 109-111.) 여기에 눈만 뜨면 영화보다 자극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한국의 일상은 또 어떠한가. 문제는 여전하되 모순은 심화되었고 상황은 복잡해졌다. 이런 현실에서 뉴스보다 더 새롭고, 뉴스보다 더 예리하며, 뉴스보다 더 세상 같은 그림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 걸까. 이 답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윤동천의 일관성에서 찾고 싶다. 그림이 곧 시대정신이요, 나(self)이며, 일상임을 30년 동안 믿고 실천해 온 그의 확신에 희망을 거는 것이다. 그림과 일상의 완전한 통합은 불가능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과 도전하지 않는 것은 같지 않다.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식으로 말하자면 예술과 일상은 화합이나 통일성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불화로 규정되는 것일 테고, 그 불일치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연결의 출발이다. 그것이 결국 꿈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그 아방가르드의 꿈을 믿고 싶다. 자본에 대한 "자멸적 포옹"과 "냉소적 대체"만이 가능한 유일한 미술이라면 그런 미술을 왜 해야 하나.(인용구는 할 포스터의 다음 글에서 따 왔다. 할 포스터, 「냉소적 이성의 미술」, 『실재의 귀환』, 이영욱 외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03, 188쪽.) 재빠른 포기나 공모보다는 이율배반의 꿈을 꾸는 것이 미술답지 않은가. 그것이 냉소적 이성을 넘어서는 그림의 힘일 것이다. ■ 문혜진

문혜진, 「냉소적 이성을 넘어서: 일상성, 이율배반, 윤동천의 민주예술」, 윤동천 초대전 『일상_의 Ordinary』 도록, 2017,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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