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 crying

우상호展 / WOOSANGHO / 禹相浩 / painting   2017_0419 ▶︎ 2017_0425

우상호_The Waste Land_패널에 아크릴채색_130.3×162.2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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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0419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인사아트센터 GANA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41-1(관훈동 188번지) 6층 Tel. +82.(0)2.736.1020 www.insaartcenter.com

몸을 닦는(修身) 예술 ● 우상호의 작업은 쉬운 듯 어렵다. 그가 그리는 그림의 소재는 우리 일상의 것들이어서 특별하지 않고, 우리의 감각과 감정을 흔드는 유인 요소가 없어 지극히 평범하다. 작가는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하나의 사건, 장면들을 포착해 쉽게 그리는 듯하다. 하지만 사람을 깊이 보듯, 주의 깊게 그의 평면적 작업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평범한 표면의 흔적들이 작게 요동을 치는 듯하다. 마치 지나온 과거를 말하듯. 그리고 그 진동의 시작은 물의 파동처럼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고 넓어진다. 그의 이미지는 정적인 평면이지만 유동하는 다면체, 확장하는 공간으로 다가온다. 그 둘이 같이 존재한다. 평면과 공간, 고요함과 움직임이 구별되게 존재한다. 내가 지금껏 그를 알고 봐왔던 이미지(2010년 이후)는 그 소재와 형식의 단순함으로 긴 이야기가 필요 없을 듯했다. 언뜻 봐서는 그렇다. 우리가 시각으로 쉽게 볼 수 있는 주변의 것들이다. 주변의 골목, 마트의 상품, 책…내가 처음 보았던 그의 작업들은 사진작가들이 주변의 감정적 인상(impression)을 포획하기 위해 담은 다른 형식의 사진이었다.

우상호_crying-KARMA(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6cm_2017

Karma & polishing time ● 그러기에 최근 보았던 그의 초기작은 충격이었다. 그가 미술대학 시절부터 십 수 년간 천착했던 작업, 카르마(Karma). 그에게 카르마의 인상은 '끈으로 엮인 굴비'의 모습이라고 한다. 그에게 강력하게 다가온 그 뜨거운 인상은 끈에 묶인 처참한 붉은 물고기의 이미지로 재생산된다. 낭자하게 뿌려진 선명한 붉은 피의 빛깔은 마치 작가의 피부를 벤 듯하다. 타의, 사회적 통제로 상징되는 굴비를 묶고 있는 끈이 스스로 자해하듯 고통스럽게 울고 있다. 작가가 느끼는 현실이 처참하다. 이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결합된 총체적인 것이다. 더욱이 이 고통은 지속되고 작가를 더 파고든다. 이렇듯 이어지는 그의 초기작들은 그 고통의 경험이 그의 붓을 압도하는 연작이다. 붓이 내면을 따라가지 못한다. 여기서 카르마란 단어는 현재 상태의 단어가 아니라 작가 고통 속에서 그가 간절히 원하는 내면과 현실의 염원일 것이다. ● 언젠가부터 그의 작업은 단순화된다. 넘치는 에너지는 가라앉고 오히려 건조해지는 듯하다. 내면을 찌르는 추상적 흐름은 단조로운 그의 일상으로 서서히 대체된다. 이런 작업의 전환은 단순한 표면적 형식과 내용의 전환을 뜻하지 않는다. '나'라는 큰 공간을 가정한다면 그 공간의 내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공간 속의 표피의 변화, 그 안정된 통로가 내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 유학의 시기인 듯하다. 아마도 작가를 담지 못했던 서양적 사유체계와 예술 양식이 비로소 그의 삶의 뿌리인 동아시아적 예술 세계 안에서 그 원초적 감정들이 질서의 길을 찾은 듯하다. 이미지를 삼키는 그의 원초적 감정들, 거대한 타자의 억눌림에 대한 저항은 그의 일상적 생활을 담은 이미지에 정돈되듯 앉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면과 표상의 간극이 깊어지고 커졌다. 작가는 그 빈 공간을 자신만의 작업 방식, 즉 칠화 기법의 고된 노력과 시간으로 채운다. 수십 회 아크릴로 착색하고 마른 후 갈고 닦아내는 그의 방식, 쌓아진 다양한 물감의 흔적은 경험을 뿌리로 둔 작가의 내면화된 피부이다. 과거 찢어지듯 고통스러웠던 경험의 감정들을 토사물처럼 여과 없이 뿌렸지만 작가는 이제 그 감정을 자신의 노동의 시간으로 환원시킨다. 반복의 연속이다. 그 작업을 마치는 순간은 모든 감정들이 반복된 작업의 흔적에 가라앉을 때까지다. 작가는 정지한다. 이는 작가만이 알 수 있는 모든 경험들이 멈추는 순간이요 내(self)가 만들어지는 시기다. 죽음으로 향하는 파괴적 에너지는 이제 잠잠해졌다. 스치듯 감상하는 관객은 그 긴 시간과 노력을 알 수 없다. 작가는 그것에 상관하지 않는다. 그 과정은 마치 작가만의 하나의 의식(ritual)처럼 느껴진다. 축적된 시간들, 노동, 그리고 그 시간에 따라 변화되어 쌓여진 이미지의 흔적들은 작가의 내면의 딱딱한 가죽, 즉 작가의 자기(self)를 형성한다. 세상에 널려 있는 가벼운 삶의 방식들의 동일시가 아니라 작가 내면의 피부 깊이 각인되는 과정이다. 인간의 기억이 나(self)를 형성하듯 작가의 경험이 예술의 과정으로 시간적 층위가 되어 작가의 자기를 만든다. 예술이 자기화하는 순간이다.

우상호_crying-KARMA(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6cm_2017

인과의 틀에 자신을 엮음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깊은 사유, 카르마의 결과이다. 격동하는 감정적 인과의 연결이 작가의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신분석에서 성격 구조와 그 길이 닿는다. 인간의 의식이 닿지 않은 무의식의 심연에서 거대하게 움직이는 그 구조의 시끄러움은 우리 동물적 인간이 이 사회에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복잡한 통로인 것이다. 휘몰아치는 거대한 타자의 위협과 본능적 위험에 반응했던 작가만의 인과의 질서, 즉 카르마는 이제 그 안정감 속에 작가의 소중한 일상, 주변을 소재로 나(self)를 채운다. 작가만의 일상에서 인상적 경험, 작가 주변의 소소한 소재들이 하나의 큰 의미가 되어 작가 내면으로 진입한다. 이는 자본에 의해 지배된 대중문화의 표상을 목표로 하는 팝아트와는 다르다. 작가의 인상은 작가의 방법으로 재생산된다. 이는 단순한 시각적 인상이 작가만의 카르마를 통과한다는 말이다. 그 결과는 극단적인 명암의 대비, 디테일의 소거로 인한 강력한 색감, 과감한 배경의 생략으로 보이는 일관됨이다. 작가가 보는 현실의 변화다. 빛과 어둠의 공존, 즉 마치 긴 시간을 통과한 듯한 작가만의 표상적 인지는 무의식의 세계를 통과한 의식적 시각체계, 백일몽(daydream)을 보는 듯하다. 백일몽, 일상에서 꿈꾸는 무의식을 통과한 작가의 소원이다. 이렇게 작가의 소중한 일상은 작가의 내면적 자기(self)로 전환된다. ●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미술의 주된 주제는 관념의 이미지화, 즉 이상(ideal)의 표현이었다. 그 이상은 유학과 도교의 배경을 기반으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예술의 양식이 변하였지만 그 이상의 표현은 놓치지 않는다. 이미지는 곧 작가의 이상이요 그 시대 공유했던 이상의 공유였다. 하지만 수천 년간 동아시아 예술 양식의 주류를 차지했던 이미지 안에서의 이상의 실현은 근대 서양 예술 양식의 변천사에 중요한 지점인 본능적 감정이나 감각의 표현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면 모든 인간의 속성인 동물과 같은 본능적 속성은 삶에서 또는 이미지에서 어떻게 되었을까? 이러한 동아시아 예술 양식의 일관성은 정신분석에서 자아 이상(ego ideal)이라는 정신내적 구조의 성격으로 설명이 되는 듯하다. 자아 이상은 인간의 발달이 선택한 사회화의 방법이다.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듯 본능적 에너지는 발달의 과정에서 이상화된 대상, 이상화된 사회로 전환되고 그 이상은 인간의 무의식적, 의식적 삶의 목표가 된다. 개인의 가장 소중한 가치가 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작가의 초기 카르마 작업에서 보였던 뜨거운 에너지의 행방을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터질 듯한 본능적 감정들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카르마적 방법, 즉 작가만의 고된 과정을 통과하여 이상화(idealized)된 산물로 가는 그 길을 만든 것이 아닐까? 작가는 여기서 작가만의 방법으로 사회가 부여하는 이상적 가치가 아닌 자신만의 가치로 넘어가는 도약을 한다. 권력체계가 시각을 지배하여 만든 가치체계를 거부하고, 주변의 평범한 대상들과 사물에 작가만의 개별적 가치를 부여한다. 또한 이러한 작가의 감각과 감정적 경험은 시간의 흐름 속에 지나가는 표상적 인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만의 작업 방법으로 자기화한다. 그래서 작가 주변의 소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이 작가만의 특별한 가치를 얻어 작가의 몸이 되어가는 것이다.

우상호_crying-KARMA(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6cm_2017

Symposion & crying ● 작가만의 고통스러운 타자의 해체 그리고 재조합의 과정을 통해 얻어진 작가만의 순환체계, 작가의 몸이 되어버린 카르마는 이제 자신 스스로 해체한 그 대상, 무한한 타자의 세계로 자발적인 발을 딛는다. 역사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건들을 하나의 단어와 테스트에 담고 있는 언어의 집합체인 책을 작가 내부로 편입시키는 것이다. 거대한 경험과 관념적 타자의 세계와의 접촉점인 책, 이러한 추상적 소재 역시 작가의 카르마를 통과하며 작가만의 몸 내부에서 교류한다. 작가 주변의 책들, 우리 주변의 책들이 그 작가의 공간 내에서 사고와 지혜의 광장이 된다. 작가의 심포지온인 것이다. 작가는 작가 내부에서 책들과 교류하며 무한히 확장하면서 자기를 만든다. 그 안에서 작가는 도저히 양립이 불가능할 것 같은 종교, 정치, 이데올로기를 만나게 한다. 비이성이 되어버린 이성의 체계를 작가는 보고 있는 듯하다. 이런 비이성과 이성이 존재하는 세계,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는 세계, 이는 현실과 판타지가 함께하는 독특한 세계이다. 작가가 만든 그 공간은 다채로운 색과 단색, 구상과 추상이 공존하는 작가만의 세계이고 이 역시 작가의 몸이 된다. ● 이렇게 타자와 순환하는 작가 내부 체계를 만든 작가는 이제 현실로 그 발을 한발 더 내딛는다. 작가는 심포지온의 소통에서 외침(crying)의 적극적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책 소재의 작업의 흐름에서 작가는 제목을 바꿈으로써 자신 내부의 것을 말한다. 어쩌면 작가가 처한 그 당시의 시대적 현실이 첫 카르마의 고통의 찢어짐만큼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차한 현실은 비슷하지만 작가의 방식이 다르다. 예전에는 붉고 뜨거운 피의 외침이었지만 지금은 작가 내부에서 자신과 순환하는 카르마, 이미 작가의 몸이 되어버린 타자의 관념체계로 말을 하는 것이다. 작가의 예술은 폭발적 힘을 분산시키는 그물 같은 실핏줄이 된 듯하다.

우상호_느지막한 시간에 본 풍경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50cm_2016

Post-crying ● 갈대 하지만 그 고된 고통의 과정으로 만든 통로 역시 현실을 버티기엔 버겁다. 빛의 흔적을 찾지만 짙은 어둠이 덮는다. 갈대의 혼란스러움, 작가는 작업 속에 자신의 암흑 같은, 무질서한 자신의 경험을 작업 속에 투사한다. 휘몰아치는 분노와 두려움의 감정들이 작가만의 채를 통과하고도 그 흔적들은 어둡다. 아니 작가는 이러한 감정들 속에서, 자신의 삶과 수양으로도 뿜어져 나오는 감정의 힘들을 여과시키지 못한다. 그냥 어두움 그 자체인 것이다. 작가는 그래도 거기에서 멈춘다. 뭔가 승화시키면서 정지했던 과거의 작업과는 다르게 어둠 속에서 작가의 몸짓이 멈추었다. 받아들일 수 없던 혼돈, 그 자체가 작가의 몸이 되는 것이다. 뭔가 깊은 통증이 몰려온다. 통제되지 않은 마음의 칼들이 몸에 갈가리 상처를 낸다. 작가는 그 무질서 자체, 형식의 질서가 도달하지 않은 그 끝에 선 것이다. 수십 년의 작업을 해체한 끝에 질서를 만들었다. 하지만 다시 형식은 없어지고 무질서와 혼돈의 어지러움 앞에 작가는 선 것이다. 작가의 형식은 무의미해졌다. ● 여기서 작가는 희미한 길을 찾는다. 억지로 만든 길이 아니다. 자연 속의 길, 존재하는 길이다. 누군가 걸어갔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길, 그 앞에 무엇이 있지 않는 예측할 수 없는 길이다. 인간이 만들었지만 그 누구도 걸어갔을 것 같지 않은 길, 색의 구별로 길을 나누었지만 암흑의 배경이 더 마음을 누르는 길이다.

우상호_crying_패널에 아크릴채색_116.8×91cm_2017
우상호_crying_패널에 아크릴채색_53.5×87cm_2016

촛불 ● 작가는 광장의 경험을 한다. 작은 촛불이 모인다. 하나씩 모인 촛불은 하나의 거대한 물결이 된다. 백만 개의 빛의 물결이 작가의 촛불과 결합이 되는 극적인 순간을 경험한다. 나와 남의 구별이 없어진다. 백만은 내가 되고 나는 백만이 된다. 단순한 물리적 결합이 아니라 우리가 공유한 '염원들'의 결합이다. 작가만의 것이 거대한 타자 속에 묻혀 있지만 갇히지 않는다. 작가와 거대한 타자는 이미 한 몸이 되었다. ● 타자와 하나가 되어 모인 염원, 촛불은 이제 현실을 넘어 역사의 종과 횡으로, 즉 평면과 길이로 무한대의 확장을 한다. 어둠 속에 움츠렸던 에너지는 거침이 없는 듯하다. 이런 힘들은 작가만의 역사 속 타자로 향한다. 이름과 흔적 없이 역사의 긴 몸을 이루며 자신의 주어진 삶을 살아간 자들, 시간만 다를 뿐 우리의 삶과 함께한 역사 속 민중들의 소리, 그들의 염원을 듣는다. 그들의 염원은 우리의 염원이요, 작가의 간절한 염원이다. 역사의 지평선을 넘나드는 작가의 상상력은 결국 그 염원들이 모아진 곳이자 그 염원을 이룬 종교적 관념체, '부처'의 형상으로 모인다. 작가가 선택한 형상은 어떤 갈등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그곳에 서 있어 우리를 바라본다. 그는 과거에도 봐왔고 지금도 보고 있다. 존재하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쌓여온 수없이 많은 민초들의 삶과 염원이 모인 곳, 그 대상 안에 작가는 정지한다. 그곳은 지금도 조용하다. 작가가 통과한 갈등과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인류의 초월자 앞에 작가는 선 것이다. ● 여기서 작가는 앞서 이상화(idealization)의 씨앗을 뿌린 작가 주변 대상의 가치를 완성한다. 본능의 파괴적 에너지는 작가가 동일시한 현재적, 역사적 군중들과 함께 궁극의 이상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로 향하는 이 군중의 염원은 작가가 이미지로 형상화한 세 부처의 형상으로 구별된다. 과거시대 미래의 부처로 약속받은 제화갈라보살, 미래를 상징하는 미륵보살, 그리고 이름 없는 현재로 보이는 부처상. 특히 현재의 부처상은 과거의 존재, 미래의 약속보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우리들의 모든 모습을 포용하는 듯하다. 모든 폭발적 분노와 함성들을 품지만 그 온화한 미소 속에 그것들은 산화하는 아름다운 꽃처럼 퍼져 날아간다. 작가의 이상은 여기서 이루어졌다.

우상호_生命_패널에 아크릴채색_60×120cm_2016

배추(生命) ● 하지만 이는 작가만의 염원, 이상이 아니다. 작가의 시선은 작가 옆에 늘 같이 있는 이름이 없고 얼굴이 없는 이들, 이들은 과거부터 존재해왔고 미래에도 있을 이들을 향한다. 인고의 세월을 버티며 지낸 이들, 작가는 이런 민중들의 모습을 잊지 않는다. 역사책의 한 줄, 권력자의 이미지 속에 흔적조차 없지만 긴 역사의 물결에 생명의 뜨거움을 부여했던 이들이다. 짙은 어둠의 역사의 통로에서 끈질긴 생명의 힘으로 현재의 우리를 있게 한 이들 속에서 작가는 그들의 긴 삶을 자신도 모르는 시절부터 먹어왔고 입맛에 길들여왔던 김치, 배추 속에서 찾는다. 그래서 작가의 배추는 무겁다. 생명이지만 작가가 경험했던 짙은 어둠이 배추의 생명을 침범한다. 하지만 그 뿌리 깊은 침범에도 자신의 생명, 녹색의 색을 잃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이상 속에 그들이 품고 있는 질고의 생명력을 동일시한다. 그 힘이 외부로 표출된 것이 촛불이며, 이는 그들의 이상이자 작가의 이상이 된 것이다.

우상호_生命_패널에 아크릴채색_116.8×91cm_2016

만찬 ● 작가는 다시 개별적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다. 작가의 일상, 작가의 공간으로 장면을 전환한다. 격정의 감정과 승화를 거친 작가의 세계는 다시 작가가 소중히 생각하는, 아무도 중요치 않게 여기는 작가의 주변에 시선을 고정한다. 이미지의 '만찬'이란 재목은 재미있지만 당황스러울 수 있다. 우리들의 먹고 마실 최고의 밥상이 '약'과 '소주'라니. 작가의 이야기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비극 속에 갇힌 듯했다. 하지만 작가의 색은 변하였다. 어둠이 변하여 과장스러운 빛이 된 것이 아닌 어둠과 빛은 일상의 푸른빛이 되었다. 불교적 승화에서 작가는 다시 기독교적 승화로 넘어간다. 최후의 만찬, 예수가 자신의 육신의 삶을 찢어 새로운 구원의 세계로 가기 전 제자들을 위해 만든 최고의 식사. 자신의 피와 살을 상징적으로 교환함으로써 제자들에게 자신의 길을 알려주었던 장면. 이 현대의 작가는 지금 우리 서민들이 서있는 '일상의 만찬'을 보여준다. 그것이 죽음이 될지, 구원이 될지 작가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단지 그 앞에 서있을 뿐이다. 복잡한 슬픔과 희망이 교차한다. 작가는 우리 역시 그 앞에 서 있게 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우상호_祭亡妹歌_패널에 아크릴채색_120×80cm_2016

마치며 ● 작가는 오늘도 예술로 자기(self)를 만들어간다. 살아있기에 분출하는 자신의 감각과 기억, 감정들을 작가의 예술 과정으로, 작업으로 만들어간다. 이렇게 쌓여진 기억과 시간들은 작가의 자기(self), 작가만의 몸이 된다. 역사적 긴 몸과 작가의 개별적 몸이 서로 순환한다. 이는 인과로 엮인 작가가 경험하는 카르마, 인간 상호간 순환적 삶의 질서다. 어쩌면 이렇게 시간을 초월하여 순환하는 과정 자체가 작가의 존재요, 작가의 몸인지 모르겠다. 작가가 그 뿌리를 둔 동아시아 사상체계는 몸과 마음을 구별하지 않는다. 몸이 곧 마음이고 마음속에 몸이 함께한다. 그래서 유학의 관념과 사고는 바로 몸으로 교환된다. 몸(體)과 삶의 형식의 틀인 예(禮)의 문자가 유사한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이미지 형식은 작가의 몸/마음의 형식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독특한 카르마적 작업 방식으로 동아시아 관념을 계승하여 예술 자체가 작가의 몸/마음이 된 듯하다. 이렇게 작가는 지금도 자신의 몸을 닦듯 예술 행위를 한다. 자기 연마, 인격의 도야가 예술인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 예술로 정신과 몸이 하나가 된 작가, 카르마로 인해 역사적 타자와 작가의 타자와 순환하는 존재로서 작가는 과연 그 예술/몸/마음이 어디로 향하게 될까? 물론 이러한 질문에 답할 수가 없다. 하지만 문득 스치는 중용(中庸)의 성실함(誠)에 대한 아름다운 어구는 그의 예술 작업의 과거, 현재, 미래를 통과하지 않을까 한다. ● 성실함(誠)은 사물의 처음이자 끝이다. / 성실하지 않으면 어떠한 사물도 없다 // (…) 성실함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완성한다. / 뿐만 아니라 만물을 완성한다. // 자기 자신을 완성함은 인자함이고 / 만물을 완성함은 지혜로움이다. // ■ 이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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