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라이

윤겸展 / YOONGYEOM / 尹兼 / painting.media   2017_0421 ▶ 2017_0520 / 일,공휴일 휴관

윤겸_아스라이展_메이크샵아트스페이스_2017

초대일시 / 2017_0421_금요일_06:00pm

STUDIO M17 5기 입주작가 릴레이개인展 3

후원 / (주)코리아센터닷컴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일,공휴일 휴관

메이크샵아트스페이스 Makeshop Art Space 경기도 파주시 광인사길 209 (문발동 500-14번지) 제1,2전시장 Tel. 070.7596.2500 www.makeartspace.com blog.naver.com/makeartspace

메이크샵아트스페이스에서는 4월 21일부터 5월 20일까지 윤겸 작가의 개인전 『아스라이』展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메이크샵아트스페이스에서 운영하고 있는 레지던시 프로그램 'STUDIO M17' 5기 입주작가들의 릴레이개인전 중 세 번째 순서이다. ● 윤겸은 불안정한 유년시절의 경험과 사고로 인한 시각적 손상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를 노동과 같은 반복적 작업행위를 통해 해소하고자 한다. 이러한 강박적 행위의 결과물인 화면을 가득 메운 단순하고 반복적인 선의 패턴들은 때로는 자연 이미지로, 때로는 미확정 심적 이미지로 변주한다.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고, 희미하게 아른거리는 가녀린 선들의 조합이, 그래서 그 만이 경험할 수 있는 아스라이 풍경과 고민을 공감하게 한다. ● 특히 이번 전시 『아스라이』에서는 예민한 시각을 초월한, 선의 경계에서 오는 포근함과 은은함, 그리고 부드러운 감각이 더해진 공감각적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빛의 흐름과 순간의 변화들은 작가에게 왜곡되어 전달되지만, 이러한 불완전한 시각으로 자연이 그에게 선물한 순간의 느낌을 전유 아닌 작품으로 세상에 펼쳐 놓으며 세상과의 조우를 시도하고 있다. ■ 메이크샵아트스페이스

윤겸_아스라이_캔버스에 유채_130×130cm×2_2017
윤겸_아스라이_캔버스에 유채_130×520cm_2017

또 다른 봄의 제전 ● 미술의 역사에 있어 회화만큼 극적이고 운명적인 해석이 뒤따르는 매체는 없을 것이다. 1918년 뒤샹은 그저 세계를 재현하기 위한 회화는 죽었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그는 평생 전통적 방식의 그리기를 거절하면서도 여전히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쉬지 않고 탐색했다. 고전주의에서 산업혁명 이후 삶의 조건과 세계의 체제가 바뀌자 미술 또한 새로운 운명을 맞이했다. 그 중에서 회화는 끊임없는 도전을 받으면서 죽음이라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중세 이후 미술은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우산 안에서 이상 세계를 재현하는 목적을 따랐지만, 20세기 전후 자본주의와 개인의 등장은 오랜 규범을 허물어트리면서 예술 행위의 이유를 새삼 다시 발견해야만 했다. 즉 미술을 정의내릴 수 있는 견고한 울타리가 사라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술은 시대와 언어를 초월한 범지구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대화 이후, 서구 중심의 역사관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예술관 또한 영원한 정신의 표상이란 관습이 우리의 인식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윤겸_아스라이_캔버스에 유채_45.5×228cm_2017

모더니즘은 완벽한 이상 세계를 추구한 고전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모던 미술은 숭고한 세계를 재현하는 대신 개인의 일회적이고 즉흥적인 감정의 적극적인 표출을 허용하였고 그래서 주어진 주제 바깥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졌다. 형상, 의미, 주제가 사라진 미국 모더니즘 회화는 고전주의 미술론이 제시했던 의미로 가득한 신화의 세계와 결별한다. 대신 모더니스트 화가들은 개인의 관점, 심리, 욕망을 화면 위에 쏟아냈다. 그들은 이젤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고, 부풀어진 자아만큼이나 캔버스의 크기도 커졌다. 이렇게 20세기 초 아방가르디스트와 모더니스트들의 등장은 아카데믹한 미술 문화에 타격을 가했다. 모더니즘 미학이 순수성을 지향하면 할수록 예술의 영토는 더더욱 현실로부터 격리되고 과도한 개인주의는 결국 미니멀리즘에 이르자 작가의 정체도 욕망의 흔적까지도 지워져버리고 말았다.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은 그 어떤 도그마, 이념, 시대, 양식도 재단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른바 회화를 둘러싼 맥락에 의한 해석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는 브러시 대신 스퀴즈나 스프레이로 방법을 바꾼 것에서 더 나아가 실제 사물 위에 채색을 하거나 기계분사기를 이용한 도색까지도 허용되기 시작했다.

윤겸_아스라이_캔버스에 유채_100×80.3cm_2017

이러한 예술가의 자율성은 결국 예술 종말론과 조우한다. 그러니까 공적으로 규정된 예술의 세계는 확실히 종말을 고한 셈이다. 이제 예술가의 역할은 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졌다. 왜냐하면 예술가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을 매번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예술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3년도 베니스 비엔날레의 주제가 백과사전을 다룬 이유를 떠올려보자. 미술의 조건은 더 이상 잘 그린 그림, 아름다운 회화가 아닌 세상의 모든 사물들과 행위들이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동시대 회화란 단순히 작가의 심리 상태, 주제에 관한 해석,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내러티브로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이 되었다. 윤겸의 회화도 위의 범주에 속한다. 그는 돌기 혹은 입자처럼 보이는 형태를 기계적일 만큼 반복적으로 그린다. 화면 전체를 채우고 있는 이 돌기들은 물방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본 자연물 또는 인공물의 단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번 전시 표제인 '아스라이'는 봄볕의 아지랑이처럼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균형이 틀어진 상태를 엿보게 한다. 태양빛에 의해 뜨거워진 대기의 복사열은 공기가 위로 움직이자 아직은 차가운 대기와 부딪히게 될 때 빛의 굴절이 일어나 착시 현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사실 작가는 몇 해 전 사고로 눈을 다치면서 시각이 불안정해졌다고 한다. 저주파처럼 낮게 흔들리는 돌기들의 움직임과 파스텔톤 색채의 흐름은 작가가 지각하는 시각적 세계를 반영한다.

윤겸_아스라이_캔버스에 유채_91×133.5cm_2017

작가는 자신에 관하여 '불안정한 노동자'라 칭하며 작업 행위를 노동과 동일시한다. 여기서 불안정성은 현실 기반과 신체적 한계를 빗댄 개념으로 보인다. 강박증에 걸린 사람처럼 동일한 형태를 반복적으로 그린 결과는 마치 하늘에서 본 자연 풍경을 연상시킨다. 그가 개인의 심리 상태를 의도적으로 표현하거나 회화적(paintery)으로 과장하지 않은 점은 미니멀리즘과 유사하다. 미니멀리스트들은 화면 안에 감정의 흔적이나 징후가 남겨지는 것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였다. 결벽증에 걸린 사람처럼 그들은 철저히 자신을 익명화시켰고 개인적 표현은 극도로 자제함으로써 관람자가 스스로 자신이 보는 행위를 질문하도록 유도하였다. 윤겸은 전작에서 시각과 인식 사이의 간극을 재현함으로써 작가가 보는 세계를 어느 정도 설명하고 있는 반면, 근작의 경우 이와 같은 구체적인 세계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고 그 대신 미묘하게 겹쳐진 혼성적인 색채의 파동이 첫 인상을 지배한다. 그러니까 전작에 비하여 시각적 정보(기표)가 사라졌기에 추상성이 보다 강해졌다고 볼 수 있다. 화면에서의 기표의 부재 또는 배제는 언어적으로 작품을 해석하기보다 감각적인 경험을 부각시키는 효과로 이어진다. 이는 마치 터너가 그린 변덕스럽고 불안정적인 대기의 모습 일부를 확대한 소립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윤겸_아스라이_캔버스에 유채_145×282cm_2017

평론가 존 버거는 터너의 어린 시절 이발사인 아버지의 조수를 한 경험을 두고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해석을 덧붙인 바 있다. "뒷골목 가게의 물, 거품, 증기, 번쩍이는 금속,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 이발사가 면도용 솔로 휘저어 놓은 비누거품이 이는 액체와 부스러기가 달라붙어 있는 흰 사발, 또는 세면대에 대하여 상상해 보라."(본다는 것의 의미, 208쪽) 바슐라르도 대기의 상상력에 대하여 논하면서 터너를 예로 들었던 적이 있다. 사고로 다친 망막이 빛의 굴절을 일으키기에 그는 왜곡된 세계를 시각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기억과 현실 사이의 인식의 차이는 우리의 시각이 얼마나 불안정한 감각인지를 새삼 의식하게 만들어준다.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인 심장박동처럼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모방 진행으로 구성된 스트라빈스키의 발레곡 「봄의 제전」처럼 윤겸은 세계를 더 정확하게 보고자 하는 의지와 어쩔 수 없이 부분적으로 유실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시각 사이의 측정 불가능한 인식의 한계를 기록하기 위하여 이처럼 그림을 그린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그 어떤 매체로도 포착할 수 없는 세계의 얼룩을 반복적으로 화면 위에 남기는 중이다. '아스라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틈새에서 작가가 본 대기와 빛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봄의 제전인 셈이다. ■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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