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제선_무명 空際線_無名 skyline_nameless

정승운展 / CHUNGSEUNGUN / 鄭勝云 / painting.installation   2017_0422 ▶ 2017_0604 / 월요일 휴관

정승운_SL 160924_실에 유채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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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0422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소소 GALLERY SOSO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92 (법흥리 1652-569번지) 예술마을 헤이리 Tel. +82.31.949.8154 www.gallerysoso.com

정승운의 실 작업에 대한 하나의 해석 ● 일견 다양한 형식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이는 정승운의 작품을 관통하는 한 지점은 양면성이다. 이 양면성은 말랑말랑한 향수(鄕愁)과 수학적 엄밀함의 대립이라고 해야 할지, 멜랑콜리와 냉담함의 조화라고 해야 할지, 표현적 기질과 개념주의적 성향의 공존이라고 해야 할지, 작품에 따라 드러나는 양상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의 작품들 속에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정 반대의 것으로 보이는 어떤 기질이나 가치의 대립 혹은 공존은, 그의 '실' 작업에서 가장 가시적으로, 응축되어 드러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정승운_SL 160924_실에 유채_2016_부분

그는 무명실을 공중에 걸어놓고 제소를 바르는 등의 밑작업을 거친 후 무려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린다'. 농담 같지만, 대상이 캔버스 천이 아니라는 것을 제외하면 이 실작업들이 유화로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고 말할 근거는 거의 없다. 심지어 실의 좁은 면에 올려진 물감의 덩어리들을 들여다보면 여느 그림처럼 속도감이 느껴지는 거친 붓질과 세밀하게 공들인 부분 등이 구분되고, 더 가까이 다가가면 다채로운 풍경이 어른어른 어지럽게 피어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일반적인 회화와 다른 측면이라면 벽에 기대어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방을 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주변의 환경을 수용해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자세히 보면 실의 양 끝이 매달려 있는 지점들과 간격은 매우 세심하게 고려되어 있고, 아래로 곡선을 그리는 각도 역시 우연을 불허하는 듯한 엄밀함을 구현하고 있다. ● 그러나 이 작품이 그림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고 정말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라면 그는 왜 면(面)이 아닌 선(線)을 선택했는가. 사실 그림으로서의 실-유화 작업에서 관객이 읽어낼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습성상 실재하는 사물이나 풍경에 견주어 대상을 범주화하고 이미 아는 범주에 넣어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의 실 작업에서 알아볼 수 있는 어떤 것을 지속적으로 읽어내고자 하지만 실제로 구체적인 무엇이 구현되어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이 실 작품들은, 추상화와 같은 감흥을 주는가? 비교적 그렇다고도 볼 수 있다. 관객이 작품 앞에서 실제로 연상할 수 있는 것은 실을 걸어놓고 그 위에 색을 올리며 작가가 경험한 시간의 누적이며, 작품은 비슷비슷한 행위가 연속된 지난 시간들에 대한 증언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측면이 행위를 반복하고 집적하는 과정에 의미를 두는 추상 작품들과 해석의 지점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해석이 왜 작가가 면이 아닌 선을 화폭으로 선택했는가에 대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 ● 캔버스의 한 올에 해당되는 한 줄기의 무명실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의 의미는 돌고 돌아 정승운의 유학시절 드로잉과 연계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국내 학부시절에 보여주었던 표현주의적 성향을 독일 유학 시기에 버렸다. 그가 공개하는 유학시절 작품은 대개 절묘한 균형을 보여주는 설치 작업들이다. 무너져 내릴 듯한 아슬아슬함, 혹은 금방이라도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질 것 같은 같은 불안함, 서로 다른 오브제들이 서로의 무게를 절묘하게 기댐으로써 지탱하는 날선 감각이 그 시기 작업들에서 보여졌다. 유약해보이면서도 단단한, 우연적으로 보이면서도 철저히 계산된 그 작업들은 대개 전시에 임해 고안되고 제작되었을 것이다. 설치미술이라는 것이 본래 주어지거나 선택한 장소를 고려할 뿐 아니라 일시적으로 존재하고 해체될 운명을 지닌 것이기에, 그는 구현하고자 하는 어떤 상태 혹은 상황을 바로 그 공간에 가서 실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승운_SL 170106_실에 유채_2017
정승운_SL 170106_실에 유채_2017_부분

붓을 꺾고(?) 삼차원의 실제 공간을 대상으로 하면서 전시장이 아닌 작업실에서 할 수 있는 실행은 대개 모의(模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작업이라는 것은 전시 의뢰가 있을 때 실현되는, 거칠게 말하자면 발주를 받아 제작되는 일시적 이벤트 같은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특성은, 작품이 영구히 보존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그래서 작가의 손을 떠나 안전하게 유통되고 환전되는, 작가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가서 안착될 수 있는 모더니즘 계열 미술로부터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었던 설치미술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사로운 개인으로서의 작가의 일상은 어느 누구와도 다르지 않은 항상성과 지속성을 필요로 한다는 데서, 작가와 작품의 유격(裕隔)이 발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침에 해가 뜨면 출근도장을 찍고 주어진 업무를 시작하는 것처럼, 때가 되면 밥을 먹는 것처럼 할 수 있는 작업, 전시장이 아닌 작업실에서 일상적으로 행할 수 있는 작업이 그에게는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이 같은 시기에 했던 선 드로잉 작업이다. ● 이 선 드로잉 작업은 글자 그대로 선 드로잉이다. 종이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균일하게 힘을 주어 최대한 직선으로 그어 나간 선들, 속도감 있게 휙 긋는 방식이 아니라 정성껏 천천히 이어나가는 선들이 화면 내에서 모종의 법칙을 가지고 나열된 것이 이 시기의 선 드로잉 작업들이다. 전술했다시피 추상성을 익숙한 대상으로 범주화하고자 하는 것이 감상자의 심리이므로, 그의 선 드로잉 작업들은 쉽게 수평선이나 지평선을 연상시키고 그래서 때로는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감상자가 무엇을 바라보건 이 작품의 작가적 의도는 한 줄 한 줄 시간을 보내기이다. 이 대목에서도 그가 스스로에게 가장 익숙한 매체인 붓과 캔버스를 들지 않았다는 점, 무엇을 구현하거나 내적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 대신 선 긋기라는 '장치'에 스스로를 가두고자 했던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작품을 제작하면서 사고의 흐름이나 익숙한 손놀림을 스스로 정한 '장치'에 의해 제한하려는 경향은 이후의 다른 작품에서도 끊임없이 견지된다. 「집 꿈 숲」이라는 다소 동화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귀국 이후의 작품 연작에서도, '집'과 '꿈'과 '숲'이라는 한글의 형상 자체가 작품의 제어장치로 기능한다. 이때 다시 유화나 콘테를 이용한 회화 작업도 등장하지만, 그것은 글자를 기하학적 모티프로 해석하여 평면의 네 모서리를 단단하게 채워나가는데 한정되어 있다. 또한 나무 각재로 세 글자를 쌓아올려 만드는 공간 설치 작업도, 각 글자들이 배열되는 방식은 피보나치 수열이라는 수학적 법칙에 기대고 있다. ● 이전 수의 합이 다음 수가 되는, 13세기 초 이탈리아 수학자가 발견했다는 피보나치 수열은 「집 꿈 숲」 연작 이후에도 정승운의 작품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장치'이다.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법칙을 지속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개인적 특성이 드러나는 것을 제어하고 구조의 문제로 전향시키려는 의도를 숨기는 장치라는 것이다. 그는 이른바 '표현적(expressive)'이라고 부를만한 요소들을 극도로 제한하고 있다. 때문에 그의 작품 곳곳에서 등장하는 피보나치 수열은 그 스스로 설정한 장치일 뿐 아니라 심리적 방어기재가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든다. 「집 꿈 숲」 연작에서처럼 개인적인 기억들과 성향이 구조적인 엄밀함의 표면을 뚫고 흘러나올 때, 혹은 그렇게 해석될 때, 정승운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업 전반에서 보이는 금욕적 채색의 방식도 이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먹(墨)이나 경면주사(鏡面朱砂)처럼 사물성을 가진 단일한 색을 사용하거나, 때로 다양한 색채가 보이더라도 사물과 일체가 되어 단단해 보이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가 팔레트의 색을 마음껏 다채롭게 사용하는 경우는 그의 실 작업뿐인 것으로 보인다.

정승운_SL_실에 유채_가변크기_2017
정승운_SL_실에 유채_가변크기_2017
정승운_SL 170104_실에 유채_2017_부분

여기서 그의 실 작업으로 돌아가 왜 그가 면이 아닌 선에 유화 작업을 하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보자. 실 작업은 전시장에서 구현되는 설치 작품이면서 동시에 유학 시기의 선 작업처럼 작업실에서 정기적으로 시간을 투여해야 하는 회화 작품이다. 매일의 일상을 기록하는 일기처럼 그는 하루의 일정한 시간을 실 작업에 쏟아 붓는다. 여느 화가들과 똑같은 과정을 거쳐 색을 올리지만, 그것이 다른 여타의 회화 작업들과 구별되는 것은 면이 아니라 선이라는 제어장치 때문이다. 그는 수열 대신 회화성을 제어할 수 있는 다른 장치를 개발한 것이다. 붓질을 통한 채색이라는 매체의 역사는 과거 작품들에 대한 수많은 연상을 자동적으로 불러일으키지만, 그는 면이 아닌 선을 선택하여 예기치 않은 감상을 붙들어 맨다. 또한 붓과 유화물감을 쥐는 순간 손에 익은 익숙한 표현이 절로 드러나는 양상을 제어하는 것 역시 선을 색의 지지체로 선택함으로써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전시장에 이 작품들을 배열하는 방식 역시 일시적인 감흥에 의지하기보다는 벽면의 구조에 대한 숙고와 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화랑의 한쪽 벽면을 원형의 일부인 호(弧)의 모양으로 개조하여 그 위에 실을 걸었다. 영구히 이어질 것 같은 원형의 공간은 일시적으로 실제의 시간과 공간을 잊게 하며, 단절이 아닌 지속을 느끼게 한다. 원형의 공간 위에 걸쳐진, 지난 시간들의 집적물인 실 작업은 과거와 현재, 시간과 공간, 순간과 영원 등의 큰 개념들과 맞닿게 되는 것이다. ● 회화작업이면서도 면이 아닌 선을 선택한 점, 다양한 색과 자유로운 붓질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작품들이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을 확보했다는 점, 중력에 의해 자연적으로 아래로 늘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계획된 현수선의 형태과 원형 벽면에서의 면밀한 배치, 실 작업의 이러한 특성들은 그의 작업에서 늘 보여 왔던 양면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색채의 선택과 붓질이라는 도저히 개인성을 탈피할 수 없는 매체를 사용하면서도 무명(無名)이라는 전시 제목조차도 한 작가 안에 존재하는 양면성의 역설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승운_SL_실에 유채_가변크기_2017
정승운_SL_실에 유채_가변크기_2017
정승운_SL 161119_실에 유채_2016_부분

너무도 약해 보이는 것이 철저하게 의도된 규칙을 가지고 매달려 있는 이 단단하고도 허술한 광경, 총천연색의 극성스러운 발화가 한 줄의 선으로 쪼그라들어있는 이 아이러니, 넓고 비옥한 정원을 놔두고 갈라진 아스팔트 갈라진 틈에서 굳이 싹을 틔워 비집고 나오는 식물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극도의 제한과 그 안에 납작하게 한 줄로 꿰어진 천지만물이 시치미를 떼고 침묵하는 반전, 이 모든 모순된 감흥이 그의 실 작업으로부터 생성된다. 작가가 의도했던 의도치 않았던, 이 양면성으로부터 더 넓고 깊은 상징들, 삶과 작품의 유비(類比)적 의미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이다. ■ 이윤희

Vol.20170422c | 정승운展 / CHUNGSEUNGUN / 鄭勝云 / painting.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