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정을 돌아보다

이상권展 / LEESANGKWON / 李相權 / painting   2017_0501 ▶ 2017_0602

이상권_북정마을 3번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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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24시간 관람가능

스페이스 이끼 SPACE IKKI 서울 성북구 성북로23길 164 www.spaceikki.com

꽤 오래 전, 구경꾼으로 성북동 산성 길을 걷다 돌담 너머로 마을을 보았다. 비현실의 풍경처럼 마을은 멀리 있었다. 우연히 발견한 좁은 통로, 그곳으로 걸어가 마을을 만났다. 당연하게도 그 길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던 마을의 통로였겠지만, 그때의 나에겐 마치 비밀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신기한 문처럼 느껴졌다. ● 오밀조밀한 길과 사연을 담은 담벼락이 내 시선에 들어왔다. 마을버스가 힘겹게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오래된 여느 마을에 불과했다. 이후로도 가끔 그곳을 찾았고, 알 수 없는 아늑함에 한결 가까워졌다.

이상권_북정마을

한참의 시간이 지나 인터넷의 위성촬영 지도 속에서 그곳을 보았다. 마을의 생김새가 특이했다. 올가미 모양을 닮았다. 모퉁이를 돌아서면 뭐가 있을까, 걸으면서 가졌던 궁금증을 위성사진이 압도해 버렸다. ● 자연스럽게 북정마을을 그리게 되었다. 변한 듯 그대로인 듯 느리게 변화하는 마을은 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그 자리엔 그 사람들이 있다. ● 지난해 성북동 초입의 가로수 두 그루가 잘려나갔다. 가지치기 작업이려니 생각하고 무심히 봤다. 다음날 휑한 낯선 풍경! 사람은 이렇게 일을 저지르는구나 싶었다. 시간이 지나 이런 저런 곡절 끝에 나무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거짓말처럼 잎을 틔어냈다. 오가는 사람들에게 그 연한 잎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게 나무의 일이라고 말하듯이. 난 이렇게 생각했다. 사람의 짓! 나무의 일! ■ 스페이스 이끼

이상권_북정에서 보기

3시 17분 ●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3시 17분은 생각을 하기에 좋은 시각이라고. ● 3시 37분. 버스가 올라간다. / 4시 13분. 버스가 내려간다. / 7시 26분. 버스가 올라간다. / 7시 27분. 버스가 주춤한다. / 7시 28분. 버스는 언제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 ● 항상 저 시각에 버스는 주춤한다. 동시에 아기를 등에 업은 할머니가 흘러내린 포대기를 바짝 챙긴다. 버스가 살짝 뒤로 밀리는 가 싶더니 바퀴가 공회전을 한다. 그러면 주춤한 할머니 등에서 어느새 껑충 올라간 아기가 기침을 한다, 콜록. 아기의 두 다리가 할머니 허리 아래서 달랑거린다. 버스가 다시 힘겹게 출발한다. 어부바를 하기엔 아기의 다리가 유난히 길게 내려와 있었다. ● 할머니 아직이야? / - 으응? / 아직이냐고! / - 올 때 안됐다. //

이상권_성북동 가로수

아니다. 올 때다. 7시 27분, 주춤한 버스가 올라가고 나면 지혜는 매연을 마시고 한 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기침을 하지 않게 됐다. 매연에 익숙해져 그런지 버스가 올라갈 때까지 지혜는 그렇게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지혜가 없다. ● 7시 29분. 지혜가 내리지 않았다. / 8시 41분. 지혜가 내리지 않았다. / 9시 3분. 버스가 가볍게 공회전을 하지 않는다. // ● 유난히 긴 다리를 달랑거리던 아기와 할머니는 어느새 집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가로등이 켜진지 오래다. 날벌레 몇 마리가 공회전을 흉내 낸다. 가로등이 꺼진다. ● 6시 1분. 가벼운 버스에서 지혜가 내린다. / 6시 2분. 할머니와 다리가 긴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 6시 3분. 지혜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 6시 3분. 날벌레는 보이지 않았다. //

이상권_북정을 돌아보다展_스페이스 이끼_2017
이상권_북정을 돌아보다展_스페이스 이끼_2017

지혜는 집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와 아기는 꼭 붙어 잠이 들었다. 자면서도 어부바를 하고 있는 듯 아기는 할머니 등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지혜는 조용히 교복을 벗고 아기 옆에 눕는다. 아기는 인기척에 할머니 등으로 더욱 밀착하고 지혜는 벽에 몸을 붙인다. 피곤한 눈이 저절로 감기다 차갑고 눅눅한 기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할머니의 마른기침 소리. 진짜 아침이 시작될 모양이다. 그 소리에 쓕쓕 아기가 힘차게 손가락을 빤다. 할머니는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아기쪽으로 몸을 돌려 눕니다. 아기의 손 위에 할머니의 손이 겹쳐진다. 아기의 다른 손이 할머니의 굵은 파마머리로 향한다. ● 지혜 왔나? / - 응. / 전화라도 하지. / - 할머니가 하면 되잖아. / ……. 애기 깬다. / - 애기 아니야. 다섯 살이면 어린이야. 이제 그만 업어. 피곤해. 잔다. // ● 토요일 아침이면 다섯 살 어린이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난다. 지혜가 잠들고 바로 어린이가 깨어난다. 어린이가 할머니 하고 부르자 할머니는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댄다, 쉬-. ● 할머니, 쉬? 응. ● 어린이가 쉬를 한다. 할머니는 웃으며 그런 어린이의 고추를 턴다. ● 아가, 누나 자니께 쉬쉬. / - 쉬 했어. / 쉬쉬-. //

이상권_북정을 돌아보다展_스페이스 이끼_2017

할머니는 연신 쉬-다. 아가는 티비를 틀어 달라 한다. 할머니는 볼륨을 최대한 줄여 아가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틀어준다. 아가는 티비에 바짝 붙어 작은 소리에 집중한다. 지혜가 돌아눕는다. 정말 잠이 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간간히 작은 티비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지혜가 꿈을 꾼다. 지혜가 꿈을 꾸면 나도 꿈을 꾼다. 나는 벽이다.(1) 구효서 「풍경소리』 중 "나, 나를 드러내고야 말았으니(···) 나는 다만 그런 소리일 뿐이다.) ● 꿈속에 지혜가 서 있다. 5시 29분. / 새벽안개가 공기를 채운다, 5시 29분. / 쓰레기차 한 대가 힘겹게 경사를 올라간다, 5시 29분. / 참새가 내려 앉아, 작은 돌멩이를 콩콩 쪼다 날아간다, 5시 29분. // ● 첫 차가 오려면 더 기다려야 한다. 이른 시각에 대한 지혜의 꿈이다. 지혜는 한 남자를 기다렸다. 저 멀리 안개 속에서 한 남자가 보인다. 아빠라는 말이 목구멍에 걸린다. 손가락을 넣어 그 말을 꺼내고 싶다고 지혜가 생각하는 듯하다. 지혜는 연신 벙긋거린다. 아빠, 아빠, 아빠라는 벙긋거림이 지혜의 입안을 채운다. 남자가 지혜 앞에 섰다. 얼굴이 희미한 남자가 지혜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첫 차가 온다. 한 바퀴 종점을 돌고 온 버스가 위태롭게 내리막길에 정차한다. 남자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지혜가 버스를 탄다. 지혜는 결국 아빠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 누나. ● 아가가 누나를 깨운다. 좋아하는 만화가 끝났다. 누나를 깨워야 한다. 흔들어 깨워도 안 되자 발로 누나 배를 찬다. ● 너, 죽을래? ● 누나가 벌떡 일어난다. 지혜다. 지혜는 누나다. 지혜가 어린이라 생각하는 저 아가의 누나. ● 끝났어. 틀어줘. / - 야! 그만 봐. / 할머니, 누나가 나보고 '야'라 그랬어! / - 야! 남창수 까불지마. //

이상권_북정을 돌아보다展_스페이스 이끼_2017

남창수와 지혜가 다투는 사이 할머니가 아침상을 들고 들어온다. 지혜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상을 받아 온다. 할머니, 남창수, 지혜가 상에 나란히 둘러앉는다. 지혜는 지혜밥을 먹고, 할머니는 할머니밥을 먹고, 남창수는 자기 밥을 먹지 못한다. 할머니 숟가락이 자꾸만 남창수 입으로 들어간다. ● 자꾸 그러지마. 야! 남창수 니가 먹어. ● 그러다 지혜가 한마디 한다. 남창수는 그냥 그대로 입만 벌린다. 식사가 끝났다. 지혜가 티브이를 튼다. 소리를 키우고 채널을 돌린다. 남창수가 좋아하는 프로에 채널을 멈춘다. 할머니가 세탁기를 돌리려 지혜의 블라우스에서 명찰을 떼어낸다. 오지혜.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엄마다. 오지혜와 남창수의 엄마. 할머니의 딸. 여자는 집으로 들어와 지혜가 막 나온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말도 안하고 갔냐며 지혜에게 눈을 흘긴다. 남창수가 지혜보다 먼저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간다. 여자는 남창수를 꼭 껴안는다. 지혜도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이불이 산처럼 높아졌다. ● 그냥, 잠이 안와서. / - 방에 없어서 놀랬잖아. 언제 올 거야? 어때? 방 마음에 들지? / 응. 근데 몰라, 나도. // ● 여자와 지혜가 말하는 사이, 남창수가 잠이 들었다. 할머니가 들어온다. ● 차는 어데 댔나. / - 몰라, 그냥 빈 데 아무데나 주차했어. 여자와 할머니의 대화가 이어진다. / 전화 오겠지 뭐. //

이상권_북정을 돌아보다展_스페이스 이끼_2017

주차장이 있는 여자의 집과는 달리 지혜 동네는 주차장이 따로 없다. 지정주차구역이 있을 뿐. 지혜의 집에는 차가 없다. 여자는 지혜더러 언제 올거냐며 재촉한다. 여자는 결혼을 새로 했다. 이번엔 시집을 잘 갔다는 소문이 동네 할머니들 사이에서 자주 오르내렸다. 지혜는 금요일마다 여자의 집에 갔다. 자신의 집과는 달리 커다란 대문이 따로 있고 그 안으로 한 참을 걸어 들어가야 나오는 그야말로 대궐 같은 집이었다. 여자의 집은 지혜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마을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가면 바로다. 그런 거리를 여자는 기어코 차를 가지고 온다. 구두 때문이다. ● 그럼, 창수는? ● 여자는 갑자기 조용해진다. ● 창수는 안 된다, 내가 안 된다, 창수 없이는. 그리고 지혜 니는 성도 다르면서 그런다. ● 할머니가 톡 쏘아 붙인다. 지혜 너라도 가서 편해지고 싶다고도 덧붙인다. 여자가 서둘러 집을 나선다. 지혜가 마중을 나온다. 생각해 볼게라는 말과 함께 운전에 서툰 여자를 바라본다. ● 10시 10분. 버스가 내려온다. / 여자는 당황한다. 버스가 멈춘다. 10시 11분. / 여자는 핸들을 이리저리 돌린다. 10시 11분에서 15분. / 버스가 여자 차를 스치듯 간신히 지나간다. 10시 17분. / 버스 안 사람들이 여자와 차를 쳐다본다. 10시 17분까지. / 간신히 차를 돌려 집으로 향한다. 10시 30분. //

이상권_북정을 돌아보다展_스페이스 이끼_2017

동네가 조용하다. 간간히 버스가 지나간다. 지혜와 남창수는 성이 다르다. 그래도 둘은 여자를 엄마로 부른다. 간간히 창문 사이로 티브이 소리가 들린다. 같은 버스가 시간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사람들이 오르내리고 지혜는 생각한다. 그 생각이 너무도 긴밀해서 알 수 가 없다. 주말 낮 집집마다 흘러나오는 티브이 소리처럼. ● 8시 40분. 교복을 입은 지혜가 버스에 오른다. / 8시 40분. 버스가 지나간 자리에 할머니와 남창수가 서 있다. / 8시 40분.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남창수가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든다. / 7시 29분. 지혜가 내리지 않았다. / 8시 41분. 지혜가 내리지 않았다. // ● 할머니 등에 업힌 남창수 다리가 축 늘어진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 지혜는 버스에 타지 않았다. 그 다음 다음 다음 날도. 남창수는 이제 할머니 등에서 내려왔다. 그들은 더 이상 지혜를 기다리지 않는다. ● 00: 10분. 막차가 내려간다. 할머니가 잠을 이루지 못한다. ■ 피서라

Vol.20170505e | 이상권展 / LEESANGKWON / 李相權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