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 Blindness

안창홍展 / AHNCHANGHONG / 安昌鴻 / painting   2017_0526 ▶ 2017_0716 / 월요일 휴관

안창홍_가면 Mask_합성수지에 아크릴채색_155×110×50cm_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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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0602_금요일_07: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조현화랑 부산 JOHYUN GALLERY 부산시 해운대구 중동 달맞이길 65번길 171(중2동 1501-15번지) Tel. +82.(0)51.747.8853 www.johyungallery.com

안창홍, 눈먼 자들 ● 안창홍은 2014년 서울의 더 페이지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 맨드라미를 모티브로 제작한 회화 「뜰」연작과 함께 『눈먼 자들의 도시』라고 이름붙인 조각을 출품했다. 그는 이 개인전을 열기 몇 년 전부터 작업실 마당에 화초를 심고 있었는데 특히 맨드라미의 놀라운 생명력과 현란하고 강렬한 붉은 빛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 작품을 제작할 2014년은 그에게 가혹한 한 해였다. 공습으로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된 사건으로부터, 말레이시아항공 여객기의 실종에 이은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미사일에 의한 여객기의 피격, 이슬람국가(IS)에 의해 격화된 이라크와 시리아 내전, 서아프리카에서 창궐한 에볼라 출혈열로 육천여 명이 사망하는가 하면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과 살육 등의 국제분쟁과 질병은 그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으로 화초를 가꿀 수 없도록 만들었다. ● 그러나 이 해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침몰 참화는 모든 사람을 깊은 절망과 분노에 빠지게 만들었다. 수학여행을 가던 단원고 학생들을 싣고 인천항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진도 앞바다에서 좌초돼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장면을 실시간 중계를 통해 봐야만했던 우리들에게 세월호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후 많은 사람들은 안타까움과 죄책감, 분노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고 안창홍 역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세월호 참사 이전부터 '안창홍의 정원'을 그리고 있던 그는 이 사건이 불러일으킨 심리적 충격과 고통 속에 뜨거운 여름을 줄곧 거대한 화면에 군락을 이룬 맨드라미들이 핏빛 울음을 토해내는 그림을 그렸다. 여름이 지나갔지만 세월호 인양은 진전이 없었고,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은 황지현 양의 시신이 시월 말 인양돼 부모님 품으로 돌아갔다. 어른으로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작업에 쏟아붓던 그는 커다란 두상도 함께 제작했다. 길이가 십 미터에 이르는 삼면화에 그린 맨드라미와 함께 전시한 보라색의 조각 『눈먼 자들의 도시』가 바로 그것이다.

안창홍_가면 Mask_합성수지에 아크릴채색_155×110×50cm_2016_부분
안창홍_가면 Mask_합성수지에 아크릴채색_155×110×50cm_2016

이 조각의 제목은 포르투갈의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가 쓴 소설의 제목으로부터 따온 것이다. 소설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은 어느 도시에서 원인도 분명하지 않은 채 사람들이 갑자기 실명하는 전염병이 확산된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치유할 수 있는 방법도 찾지 못한 정부는 눈먼 사람과 정상적인 사람을 분리하여 이미 감염된 사람을 과거에 정신병원이었던 건물에 격리, 수용한다.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온갖 잔혹한 사건은 이 소설을 더욱 환상적으로 이끌고 있으나 소설은 폭력적인 권력구조에 의해 감시와 처벌이 횡행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의 한 대화에서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이라고 했던 것처럼 뜬 눈으로 침몰하는 세월호를 바라보아야 했던 우리는 어느새 눈먼 자들이 되어버렸다. ● 안창홍이 『눈먼 자들의 도시』란 조각을 제작하면서 느꼈을 분노와 절망은 얼굴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특징만 지닌 작품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눈·코·입을 지시하는 최소한의 형태는 있으나 눈은 볼 수 없도록 눈동자가 없고, 입은 말할 수 없도록 봉쇄돼 있다. 이것은 영혼이 없는 마네킹이자 가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조각을 출발로 그는 거대한 가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안창홍_가면 Mask_합성수지에 아크릴채색_155×110×50cm_2016

작년 여름, 그의 작업실로 갔을 때 그는 2미터에 이르는 큰 두상과 가면을 제작하고 있었다. ● 흙으로 얼굴의 형태를 만들고 그것을 합성수지로 주조한 후 세로로 잘라 다시 이어붙인 얼굴은 아직 형태만 지닌 흰색의 플라스틱 상태였기 때문에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그 후 그는 일 년간 이 얼굴 위에 색을 입혀갔다. 몇 차례 더 작업실을 방문하여 작품 제작과정을 지켜봐왔기 때문에 나는 이 작품이 어떻게 바뀌는가를 지켜볼 수 있었다. 마치 기초화장을 하듯 밑색을 바르고, 테이프를 붙여 형태의 윤곽을 만든 후 다시 여러 겹의 채색을 하는 공정은 재료의 낭비로 보일 정도로 엄청난 안료를 필요로 했고 그만큼 노동의 시간도 많이 들었다. 그렇게 꼬박 일 년간 제작한 작품은 화려하면서 다소 기괴한 가면으로 태어났다. ● 1979년과 1980년 사이에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가족사진」에서 인물의 얼굴을 지우고 눈을 퀭하게 파낸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가면이미지는 안창홍에게서 오래전부터 중요한 소재로 나타나고 있다. 아들이 전쟁놀이를 하면서 썼던 가면에서 착안한 「위험한 놀이」에서도 가면은 자주 등장한다. 1986년에는 종이부조를 이용해 탈을 제작하기도 했다. 도시의 주변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주제로 그린 농염하면서 퇴폐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회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대체로 가면처럼 표정을 숨기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는 왜 이토록 오랫동안 가면에 집착하고 있는 것일까.

안창홍_가면 Mask_합성수지에 아크릴채색_155×110×50cm_2016
안창홍_가면 Mask_합성수지에 아크릴채색_155×110×50cm_2016_부분

역사적으로 인간은 여러 용도로 가면을 사용했다. 제의(祭儀)를 위한 신령한 소품에서부터 전사(戰士)의 전투의지를 강화하고 적을 제압하기 위한 용도에 이르기까지 그 목적도 다양하다. 가면을 착용한다는 것은 자신의 약점을 은폐하기 위한 위장술의 연장일 수도 있고,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다. 때로는 축제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신라의 향가에 등장하는 처용의 얼굴은 나중에 기이하고 이국적인 외모의 가면으로 만들어졌으며, 하회별신굿탈놀이의 탈은 다양한 계급과 성격을 상징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가면은 개인의 정체성을 숨기기도 하지만 하회탈처럼 풍자와 저항의 상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처럼 가면은 동물의 형상으로부터 상상된 괴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얼굴에 뒤집어씀으로써 나를 또 다른 존재로 만드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맨얼굴은 어떤가. ●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페로소나(persona)라고 했다. 이것을 심리학 용어로 발전시킨 학자는 융(Carl Gustav Jung)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대인관계를 맺을 때 쓰는 가면' 즉, 사회적 가면을 페르소나라고 불렀다. 융이 '인간에게는 천 개의 페르소나가 있다'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마치 중국의 전통극인 천극(川劇)에서 배우들이 순식간에 가면을 바꾸는 변검(變臉)처럼 일상적으로 많은 페르소나를 지닌 채 살아간다. 겉으로 드러난 얼굴에 대응하여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또 다른 자아가 있는데 융은 이것을 '그림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페르소나와 그림자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안창홍은 페르소나를 한 개인의 심리나 성격에 한정하지 않고 사회로 확장시키고 있다.

안창홍_눈먼 자들 Blindness_합성수지에 아크릴채색_213×117×110cm_2016
안창홍_눈먼 자들 Blindness_합성수지에 아크릴채색_213×117×110cm_2016

안창홍의 거대한 가면은 특정개인의 초상이 아니다. 하나의 거푸집으로 찍어낸 것이니 기본적으로는 같은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형태는 작가에 의해 절단, 재조립된 후 그 위에 채색까지 덧입혔으므로 같은 얼굴이라고 할 수도 없다. ● 표범의 무늬처럼 얼룩으로 뒤덮인 얼굴은 거의 무표정하다고 할 만큼 성격이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것은 벽면 위로 부풀어 올라 융기된 덩어리이자 화려한 색채로 위장된 가면이다. 공격적으로 위협하지도 않고, 호소하거나 주장하지도 않지만 원색으로 치장한 채 허공만 바라보는 이 가면의 퀭한 눈은 초점이 없고 어쩐지 무기력하게 보이기조차 한다. 이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가면제작에 영감을 준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이 소설은 2008년에 같은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칼 융의 분석심리학, 그리고 작가 자신이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가졌던 생각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먼저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공동체의 붕괴는 질병이 그 원인을 제공했지만 인간의 심리 속에 잠재해 있는 파괴적 본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나 야수적 본능이 아니라 그것을 조장하고 서로를 파멸로 치닫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부추긴 권력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문명에 의해 억압받는 개인은 예상치 않은 상황에 직면하여 모두 '눈먼 자들'로 전락하고 만다. 눈먼 자들의 출현은 단지 개인의 실명이 아니라 집단적인 실명, 즉 비정상이 정상을 압도하는 불공정 사회에 대한 진단이기도 하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자본주의의 화려한 진열장인 도시를 지배하는 물신의 미학화에 의해 인간조차 상품으로 전락한 사회를 은유한다. 개인들의 실명(失明)은 소유가 곧 윤리인 이 비정한 도시에서 개인은 실명(失名)하여 익명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가 신으로부터 징벌 받아 마땅한 소돔과 고모라는 아니지만 물질적 풍요 뒤에 가려진 빈곤이 공존하는 공간이자 무한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생존을 위해 각축하도록 강요하는 전투장이며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본이 걸어놓은 최면에 빠지게 만드는 공연장이자 권모술수와 위선이 횡행하는 비열한 거리이기도 하다. 도시의 화려한 외양에 감추어진 상흔(傷痕)은 안창홍이 줄곧 추구해온 주제였다. 그는 도시의 변두리에서 살고 있는 부랑아, 역사의 주변부로 밀려난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삶은 물론 권력과 성, 소비와 마약, 탐욕과 착취, 욕망과 죽음이란 주제에 천착해 왔다. 그런 점에서 가면 역시 그가 지금까지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작업해 왔던 도시적 삶에 대한 작가 특유의 비판적인 시각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창홍_눈먼 자들 Blindness_합성수지에 아크릴채색_213×117×110cm_2016

얼굴을 덮고 있는 화려한 색채는 도시의 민낯을 가리는 분칠이자 위장무늬(camouflage)이며, 합리성과 기능성, 경제논리를 앞세워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권력구조를 은폐하는 시각적 자극물에 불과하다. 가면은 이 관리된 사회의 행동규범에 이미 길들여진 우리들의 집단페르소나이자 눈먼 자들의 초상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 뒤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우리의 또 하나의 자아가 있다. 융은 의식에 가장 가까이 있는 개인적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에 대해 그림자라고 불렀다. 아마 안창홍은 가면을 쓴 광대들이 무대 위에서 유혹하는 원색의 가면 뒤에 감추어진 우리의 은폐하고 싶은 욕망인 그림자에 더 주목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지난 몇 년간 억압당하고 있지만 사라지지 않는 우리의 열등한 인격이 투사된 그림자를 껴안은 채 살아왔다. 침몰하는 세월호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고 구조에 무능한 정부당국의 대응에 치를 떨며 몸서리치기는 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우리의 비겁함,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분노로 가리기에 현실은 너무도 참혹했다. 그래서 그는 먼 길을 마다하고 광장으로 나가고, 팽목항으로 달려갔는지 모른다. 따라서 그는 가면 뒤에 감춰진 그림자를 드러내기 위해 거대한 가면을 제작했을 것이다. 이것이 그의 가면작업이 지닌 긍정적인 힘이다. 도시를 장악하는 집단페르소나가 표정을 잃은 가면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에 대한 저항의 그림자는 통제되지 않는 욕망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있는 자책감과 윤리의식이지 않을까.

안창홍_눈먼 자들 Blindness_합성수지에 아크릴채색_213×117×110cm_2016

나아가 안창홍은 조각과 회화라는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가 살고 있는 '스펙타클 사회'의 종양을 폭로하고 있다. 이를테면 인조안구와도 같은 눈을 지닌 두상의 얼굴에 마치 문신처럼 새겨진 '격투기'란 글씨를 보면 격투장면마저 유흥으로 즐기는 매스미디어의 폭력성에 대한 그의 비평을 읽을 수 있다. 피부 위로 핏물처럼 흘러내리는 붉은 안료가 불러일으키는 끔찍함은 잔혹성을 판매하는 오락문화의 비인간성을 드러낸다. 이 두상의 뒤통수에 적어놓은 전사(戰士)라는 글씨 또한 모두가 전사가 되기를 강요하는 경쟁사회의 구호를 은유한다. 이 작품은 대중문화의 만연하는 시각이미지에 의해 길들여진 우리 사회가 하나의 극장이자 원형경기장임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생존의 법칙이 되어버린 현대도시의 비정함을 폭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얼굴과 목을 바코드로 뒤덮고 있는 두상은 우리 자신이 바코드처럼 분류된 존재임을 드러낸다. 바코드는 존재를 인정하기보다 존재를 규정하는 낙인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기술만능주의에 의해 인간이 기계처럼 조직화된 사회의 부속인 것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이 바코드는 개인의 인격조차 상품으로 판매될 수 있는 위험한 사회, 즉 포스트휴먼 시대에 도래할 디스토피아에 대한 불안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성과 폭력만을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얼굴에 새겨진 19800518, 2014416850과 같은 숫자를 보면 우리가 살아왔던 삶의 시간 중에서 특정한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지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안창홍의 입체작업은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에 대해 환기하기를 제안하고 있다. ● 개성이나 성격을 박탈당한 무표정한 얼굴은 제도에 의해 규격화된 우리의 삶이 하나의 가면임을 일깨우고 있다. 가면은 우리를 집단망각의 수렁으로 내몰아간다. 가면을 착용한 우리는 눈먼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 누가 눈먼 자들을 격리하여 '타자'로 취급할 수 있을까. ● 우리 모두 눈먼 자들이지 않은가. 우리는 그의 작품을 바라보며 볼 수 있지만 보지 않았던 시간에 대해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 최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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