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Confession)

윤주일_강예원 2인展   2017_0602 ▶ 2017_1101 / 일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7_0602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02:00pm~06:00pm / 일요일 휴관

살롱 아터테인 SALON ARTERTAIN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 32(연희동 708-2번지) Tel. +82.(0)2.6160.8445 www.artertain.com

두개의 고백, 내가 지닌 그것으로부터 시작하기 ● 고백은 근, 현대 정신사에서 자아에 대한 관념을 공고히한 양식이며 행위였다. 고백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내면과 접촉할 수 있었다. 내면의 접촉은 자신의 자아를 바깥 세계로부터 독립시킬 수 있다. 이렇게 외부 세계와 단절된 자아는 바로 나는 무엇인가라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해결되지 않을 물음을 시작하게 된다. 해결되지 않을 물음이라… 결국, 고백은 외부 세계와의 일단의 단절을 통한 자아에 대한 자기 성찰을 의미한다. 즉, 외부세계와 단절된 자아는 철저하게 정신적 활동에만 의존하게 됨으로써 우리의 삶속에 원천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고통과 고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윤주일_흐르고 덮고 채우고_세라믹 에폭시_30×20×22cm_2017
윤주일_흐르고 덮고 채우고_세라믹 에폭시_70×20×18cm_2017
윤주일_흐르고 덮고 채우고01_세라믹 에폭시_70×20×18cm_2017

고백은 자아 성찰과 같은 정신적 행위를 기반으로 자신만의 도덕적 영역을 확보해 나가는 종교적 제의로 확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고백은 지극히 개인적인 의식행위에서 비롯되어 개별적인 경험과 기억들이 그 행위를 뒷받침하게 된다. 다시말해 개인의 특수한 경험들이 고백을 통해 타자화 또는 객관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 반성 혹은 자기 치료가 진행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은 이러한 정신적 활동인 '고백'을 감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물질화 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에 있어 자기 반성과 치료는 아주 중요한 존재 가치였으니까.

강예원_갈등하는자아_캔버스에 유채_100×80.3cm_2014
강예원_젬마의기도_캔버스에 유채_100×80.3cm_2014
강예원_탈출_캔버스에 유채_100×80.3cm_2014

본 전시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배우이자 아터테이너인 강예원의 고백은 그리고자 하는 내용의 솔직함이다. 그리고 에폭시를 사용하여 시간을 쌓는 작업을 하는 윤주일은 제작 과정에서 오는 미술 자체의 고백이다. 내용과 형식의 독립적이면서 감각적인 결합이다. ● 수 없이 많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배우의 진짜 현실 속의 삶은 어떨까. 강예원의 작업은 철저하게 자신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다. 자신의 화폭에서 만큼은 세상 그 어느때보다 솔직하다. 가장 순수하면서 객관적으로 자신을 드려다 봤을 때, 그녀는 자신만의 고백적 양식을 그림 속에서 찾게 된다. 어쩌면 그림은 이렇게 솔직하고 단순한 이유에서 시작될 때, 그 자체 순수함을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 같다.

윤주일_흐르고 덮고 채우고_세라믹 에폭시_18×40×12cm_2017
윤주일_흐르고 쌓이고 채우고_세라믹 에폭시_120×13×10cm_2017
윤주일_흐르고 쌓이고 채우고_세라믹 에폭시_120×13×10cm_2017

캔버스 뒷면에 그린 작품을 보여주면서, 그녀는 '차마 캔버스의 정면에 그릴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하고 무엇인가에 자신의 감정이 갇혀 있는 것 같아 색이 잘 먹히지 않는 캔버스 뒷면에 힘겹게 그리면서 오히려 해방감을 느끼게 되었다' 고백한다. 인간의 정신적 경험을 표현하고자 하는 미술의 노력은 초현실주의 회화에서 그 꽃을 피우게 된다. 그들은 그리는 행위보다는 오히려 무의식적인 의식의 흐름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결국 인간의 정신 활동은 구체적인 대상에 이입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 떠오르는 이미지들에 얼마나 더 솔직하게 투사될 수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정신적 경험들을 바로 바로 이미지로 대입시키는 강예원의 작업들은 초현실적이다. 그러나 그 시작은 철저하게 자신만의 현실에서 부터였으니까 연기처럼 다른 인생을 통해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면 그녀의 작품은 그녀 스스로의 삶을 통해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에서 고백은 일인칭 서사로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더 큰 감동을 주었다면 그림을 통한 그녀의 고백은 보는 사람들의 경험들과 이어지면서 감동을 주게 된다. ● 미술은 시대가 개발하고 발명한 재료에 가장 민감하다. 미술 자체가 거대한 미디어의 담론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이. 윤주일의 고백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가성재료인 흙에서부터 최첨단 가성재료인 에폭시까지. 그의 재료에 대한 호기심은 끝을 헤아리기 어렵다.

강예원_가면의속삭임_캔버스에 유채_60×50cm_2015
강예원_ 의심_캔버스에 유채_100×80.3cm_2014
강예원_낙화(落花)_캔버스에 유채_100×80.3cm_2014

미술사를 관통하며 보여주었던 조형성의 실험은 곧 시대정신의 반영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윤주일 작가의 메시지는 단순히 재료적 실험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되는 무의식적인 미적 감성에 대한 표현의지다. 따라서 작가가 선택한 방법은 과정 그 자체를 감성적으로 즐기는 것이다. 결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흙을 빚어 불을 지필때와는 전혀 다른 작가적 태도다. 한 때 재현적 회화의 죽음을 선언하던 미니멀리즘이 모더니즘의 정점에 설 수 있었던 것은 회화에서 재현적 요소 즉, 일루전은 말그대로 허구일 뿐이라는 것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주일의 작업 과정은 재현이 아니라 표현으로 회화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모더니즘의 회화적 태도에 가깝다. 하지만 작가의 감정과 생각들을 철저하게 배제해야 순수 회화에 도달할 수 있다는 모더니즘은 직관과 감성을 중요시 하는 윤주일의 작업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단지 시간의 반복으로 쌓이는 우연의 효과를 즐기는 작가의 태도가 무엇을 표현해야 되는 강박에서 벗어나 있어 보다 더 순수해 보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 무위는 무엇을 해야하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정신적 자유의 산물이다. '일이 점점 커지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일이 생기지 않는다. 무위를 쉽게 혹은 간단하게 이해하자면 그렇다. 하지만 무위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해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잘해야 한다. 혹은 무엇이 되어야 한다. 신념과 집착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 그것이 무위다. 윤주일의 작업은 과정 그 자체다. 찰나와 같이 변화하는 우리의 무의식은 순간 순간 느껴지는 미적 감성으로 드러나는 것이지 어떠한 이미지로 결정되어야할 것은 아니다. 이것이 윤주일의 작가적 고백이다. ● 두개의 고백, 자신의 삶에 대한 솔직한 고백, 작업 과정 자체에 대한 순수한 고백. 강예원은 미술의 내용적 한계에서 자유롭고 윤주일은 미술의 형식적 견고함에서 자유롭다. 이제 관객들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울까. 고백하자. ■ 임대식

Vol.20170606e | 고백 (Confession)-윤주일_강예원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