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않은 만남 ENCOUNTER

이환권展 / YIHWANKWON / 李桓權 / sculpture.installation   2017_0616 ▶ 2017_0715 / 일,공휴일 휴관

이환권_Traffic Jam_합성수지에 아크릴채색, 안료_101×215×54cm_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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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요일_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예화랑 GALLERY YEH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12길 18 Tel. +82.(0)2.542.5543 www.galleryyeh.com

관계의 타자들-이환권의 '없는 주체들'의 사회학 ● 1969년 현실동인은 그들의 선언문에서 '들끓는 현실' '모순에 찬 현실' '부조리한 현실'의 미학개념을 제시했다. 그들에게 '현실'은 들끓고 모순에 차 있으며 부조리했다. 그러므로 '현실'을 재현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의 재현'일지 모른다. 리얼리즘의 한국적 통섭이론이라 할 「현실동인 제1선언문」의 '현실주의 미학'은 수 십 년 동안 그런 현실모순의 내재적 표현에 깊게 천착했다. ● 권진규에서 본격화 된 형상조각에서의 실존적이고 내재적인 리얼리티는 1980년대의 심정수, 김광진, 1990년대의 윤석남, 류인, 정현, 구본주를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그들은 그들이 살았던 혼돈의 시대와 그 시대를 몰고 온 굴절된 근대사, 그리고 역사 주체로서의 '살아있는' 민중과 샐러리맨의 도시인을 형상화했다. 이환권의 조각은 그런 한국 형상조각의 계보에서 새롭게 갈래치기 한 신형상조각의 큰 줄기에 서 있는 듯하다. ● 그는 선배 세대와 달리 현실 리얼리티의 '내재적 표현'에 매료되지 않고, 오히려 '왜곡된' 현실 그 자체를 형상화하는데 관심을 갖는다. 현실동인이 간파했듯이 현실은 이미 왜곡된 실체로 존재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정상성'은 근대 이후 제대로 작동된 적이 거의 없을 것이다. '비정상화의 정상화'라는 테제가 한국사회의 정언명령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 자, 그렇다면 이환권에게 왜곡된 현실은 어떤 구조로 형상화 되었을까? 길쭉하거나 납작한 것이 왜곡의 실체일까? 물론 그것이 1차적 시각화의 한 양태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리얼리티를 완벽하게 재현했다고는 볼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의 조각과 조형미학, 그리고 그 서사적 조형미학의 구조가 알고리즘으로 촘촘히 엮어있다는 점이다.

이환권_Ali & Zahra_합성수지_137×90×36cm(Ali), 116×86×36cm(Zahra)_2010

닿지 않는 거리, 혹은 그림자 ● 마지드 마지디의 1997년 영화 「천국의 아이들」의 두 주인공 '알리'와 '자라'의 뛰는 모습을 형상화 한 「Ali&Zahra」(2010)는 서로 닿지 않는 거리를 유지한 채 설치되었다. 영화 속에서 두 인물은 한 켤레의 운동화를 번갈아 신기 위해 서로를 향해 뛰지만, 조각으로 재현된 두 아이는 영화 밖의 현실적 조건과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메타포로 창조된다. 아찔한 펜스 위에서 갤러리를 향해 뛰는 '자라'와 갤러리 건물의 수직면을 타고 오르며 뛰는 '알리'. 두 아이의 형상은 측면에서 볼 때는 정상이나 정면에서 보면 울타리의 폭 만큼 좌우가 납작하게 압축되어 있다. 울타리와 벽 위에서 아이들은 그 아슬아슬한 폭에 몸을 맞추고 마치 곡예를 하듯 뛰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 서사는 작가의 이렇듯 '배치하기'로 왜곡되고, 영화 속 주인공은 오롯이 '뛰는 형상'으로만 현실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위태로운 공간과 장소들에서 흥미를 유발시키며 출몰한다. 역설과 모순과 부조리가 현존하는 그 자리가 바로 이환권의 조각적 환기이며, 현실주의 미학의 풍자이고 상징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편적 윤리를 갖지 못한 우리 사회에 던지는 날카로운 해학적 침묵일 터이다. 그런 그의 작품 앞에 선 관객들은 우연한 목격자 혹은 방관자가 될 처지에 놓인다.

이환권_버스 정류장 Bus Station_혼합재료_143.5×323.5×55cm_2005

2005년 세종문화회관 야외에 설치되었던 「버스정류장」은 「Ali&Zahra」 보다 먼저 관계 맺지 못하는 '거리'(서로주체를 가장한 홀로 주체들의 '섬' '방' '울'의 간격)를 한 편의 단막극처럼 펼쳐낸 첫 작품이다. 그곳이 '세종문화회관역'이어서 더 극적인 상황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일곱 명의 등장인물은 한 곳의 장소에 모여 있으나 그 장소에서 모두는 하나의 섬이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어딘가를 응시하는 '가연',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강지', 술에 취해 누운 '노숙자', 주간지를 읽는 '대머리아저씨', 돈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힌 '뚱스', 쭈그려 앉아 상념에 빠진 '민형', 킥 보드를 타고 정류장으로 오는 '준석'. 이들의 관계는 '대머리아저씨'가 펼쳐들고 있는 잡지 속 머리기사가 힌트다. 그는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를 읽고 있다. 그 기사는 세계 최악의 분쟁지역 시리아의 참혹한 진상을 알린 '피로 얼룩진 소년'의 주제어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와, 에스토니아 자자 우루샤제의 영화 「텐저린즈: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2013년 작, 2015년 한국 개봉)를 떠올린다. 「텐저린즈」는 1992년의 조지아 내전(內戰)을 다룬 것인데, 목수 이보 노인이 부상당한 압하스 군인과 조지아 군인을 치료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두 명의 군인은 서로 적이다. 한 집에서 셋은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섬인 것. 영화 속 서사는 「버스정류장」 인물들의 고립으로 투영되고 반영되어서 단절된 '관계사회'의 이면을 보여준다. 관계가 없는 사회는 위험한 '불통사회'요, 고독한 '위기사회'다. 울리히 벡(Ulrich Beck, 1944~2015)은 '위험사회'라고 명명했으나, 이환권은 그것을 '고독사회'로 등장시킨다. 정류장은 어딘가로 떠나기 위한 장소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은 정류장에 정박되어 있을 뿐이다. 이 작품에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는 붉은 소화전이다. 위험과 불통과 위기와 고독의 '화'(禍/火)를 끄기 위한 상징적 장치로서. ● 두 작품의 사례에서 살필 수 있듯이 이환권의 미학적 장치인 '왜곡'은 인물의 상징을 극대화시키는 장치일 것이다. 「버스정류장」의 작품들이 '고독사회'로 해석될 만큼 개인의 고립을 강조한 것이라면, 2015년 서울광장의 전시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의 작품 「삼남매」는 국내 혼혈가족의 현실을 극대화한다. 「Ali&Zahra」는 납작한 왜곡이고, 「버스정류장」은 위아래로 길쭉한 왜곡인데, 「삼남매」는 아주 길쭉한 왜곡이다. 그 왜곡의 심도가 매우 심하다는 측면에서 그 상징의 폭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18일 '세계 이주자의 날' 캠페인이기도 했던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의 질문에 반응하는 아이는 둘째다. 둘째와 함께 한 누나와 남동생은 짐짓 딴 짓이거나 무표정이다. 2미터 70센터미터의 이 세 아이와 우리는 그러나 눈을 맞출 수 없다. 키의 편차만큼 우리 사회의 차별과 편견도 적지 않을 것이다. 반면 2008년 작품인 「장독대」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아들딸은 위아래를 납작하게 왜곡한 것인데 길쭉한 것과 달리 이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형상이 납작하게 눌리면서 형상의 덩어리도 풍만한데다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더 그렇다. 흥미로운 것은 길쭉한 작품에는 사실적이고 컬러풀한 색칠을 하고, 이렇듯 키를 납작하게 눌린 작품들은 그 관계성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단색을 가졌다는 점이다. '가족애(家族愛)'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은 어쩌면 그림자 환영으로서의 '가족'일지도 모른다.

이환권_A Puddle 2_시멘트, 스틸_42.4×102×56.4cm_2014

그림자 환영, 없는 현실의 실존 ●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할 작품 중의 하나는 2층에 전시된 「A Puddle」 연작이다. 서 있는 형상들을 늘이고 줄이고 하던 그가 이번에는 '물웅덩이'(우물/거울)이라는 그림자 장치를 미학화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 환영을 현실에 재현하거나, 왜곡된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왜곡'[개념적으로 '왜상'(anamorphosis)에 더 가까울 것이다]이라는 미학적 장치를 실험해 온 그가 우물에 어린 그림자의 실체를 현실로 불러들였다. 문제는 늘이든 줄이든, 영화 속이든 현실이든, 그것들은 하나의 존재로서 조형화 된 것이기에 왜곡이라는 조형적 현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었는데, 그림자 실체로 등장하는 이 작품은 "없는 현실의 실존(일종의 일루전으로서 '다른 차원의 타자적 세계')"를 찾아야 하는 난제에 봉착하도록 만든다. 물론 이것은 비평의 문제다. ● 그는 그동안 작품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쉬운 '제명'(題名)을 제시해 왔다. 그것은 아주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이름이기도 했다. 그러나 「A Puddle」은 어떤 상황이요, 반영이어서 비실존적일 뿐만 아니라 비현실, 아니 초현실에 가까운 제목이다. 게다가 그것들은 그림자의 주체가 사라진 상태에서 오롯이 비춰진 모습으로 제작되었고 또 그렇게 바닥에 드러눕듯이 설치되었다. 분명히 그것들은 발바닥에 붙어 있어야 할 자신들의 실존을 잃어 버렸다. 게다가 이 작품들은 길거나 줄인, 그러니까 의도된 왜곡의 형상이라고도 할 수 없다. 물웅덩이에 비친 모습 그대로의 그림자일 뿐이다. 자연 그대로의 왜상적 형상인 것이다. ● 전시공간에서 이 왜상의 형상들은 바닥보다 다소 높게 눕혀서 설치했으나 사실 이것은 관객의 발바닥 면과 붙어서 보일 때 제대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니까 관객이 어느 순간 이 여성의 발바닥과 딱 붙어서 서 있을 때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어 있는 이 우물 속 형상이 '나'의 그림자로 환영되면서 어떤 전도된 상징에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비가 온 뒤의 물웅덩이는 거울이기도 하고 우물이기도 하다. 거울이론은 나르시시즘(홀로주체: 관계없는 '일자')에 가깝고, 우물이론은 전신사조(傳神寫照)로서 내적 관계주의(서로주체: '일자와 타자'의 관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일자와 타자의 개념으로 해석한 「A Puddle」의 미학적 개념은 현실계의 일자적 세계가 환영으로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타자들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타자'는 일자에 억압받는 존재들이다. 이데아-이미지, 원본-복제, 나-타인의 대립 쌍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극단적으로 타자의 개념을 일자의 폭력으로 규정하며 해체를 주장했고, 장 보드리야(Jean Baudrillard, 1929~2007)는 시뮬라크르(simulacre: 자기 동일성이 없는 복제)로 개념화 했다. ● 결과적으로 이환권의 조형적 질문은 '타자적 관계'에 있고, 그것은 왜곡(또는 왜상)을 통해 등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타자들이 일자에 의해 억압받는 존재들이라 할 때, 그의 존재 형상들은 역설적일지 모르나 스스로 억압받는 존재들일 수 있다. 「삼남매」가 사회 내에 존재하는 '억압'일 수도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스스로가 타자화 된 존재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일자의 억압에 저항하는 방법은 스스로를 타자화 된 객체로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모든 작업들이 사회의 이면을 왜곡의 실체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Unification」은 그 의미대로 '통일', '통합'의 상징이다.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에 출품된 이 작품에 대해 작가는 "북에서 이주한 남자 그리고 대한민국의 여자. 둘의 행복한 결혼에서 작은 통일을 보았다."고 고백한다. 새터민 학교에서 선생과 제자로 만나 결혼한 '남녀북남'의 이 커플 조각상은 길고 납작하게 눌린 둥근 원형으로 되어 있다. 위아래가 아니라 좌우 몸통이 아주 얇고 둥글게 눌린 형상이다. 「A Puddle」이 우물 밑 그림자라면 「Unification」은 그러므로 둥근 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우물의 상징은 현실계('우물 밖의 주체')와 상징계('우물 밑의 그림자')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한 손을 맞잡고 있는 그들은 우물 면 위에서 당당히 실체로서의 '현실 리얼리티'를 표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형상에서 '왜곡'은 부정(그림자)에 있지 않고 긍정(주체)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환권_Unification_합성수지, 연필, 채색_49.6×27.2×27.1cm_2017

전시는 2000년 이후 17년간 지속된 이환권의 조형미학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1층에서 3층까지 그의 작품들은 각각의 서사와 상징을 경계 지으면서 한국사회의 현실을 되비추고 있다. 그의 형상들은 현실주의 미학이 미처 다 밝히지 못했던 것들까지도 담아내려 하고 있다. 현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현실이지만, 차원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다양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신형상조각의 미래는 그러므로 어떤 차원, 왜곡/왜상의 시선이 다층적으로 변화하는 곳에 위치할 지도 모른다. 「A Puddle」이 하나의 단서가 되어서 보여주듯이. ■ 김종길

Vol.20170616b | 이환권展 / YIHWANKWON / 李桓權 / sculpture.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