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화展 / PARKCHUNHWA / 朴春花 / painting   2017_0616 ▶ 2017_0704 / 토,공휴일 휴관

박춘화_야산Ⅰ_장지에 채색_112.1×145.5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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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화 블로그_blog.naver.com/parkchunhwa200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09:00am~06:00pm / 토,공휴일 휴관

KSD갤러리 KSD GALLERY 서울 영등포구 여의나루로4길 23 한국예탁결제원 1층 Tel. +82.(0)2.3774.3314 www.ksdgallery.kr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풍경 ● 프랑수아 줄리앙에 의하면 16세기 중반 유럽에서 '풍경'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그 이전에 풍경이란 개념은 없었다. 당연히 풍경화란 장르는 풍경의 개념과 함께 등장한다. 당시 풍경이란 " 자연이 관찰자에게 보여주는 지역(또는 고장)의 부분" 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특정 주체의 " 시야가 닿는 곳까지 펼쳐진 영토" 를 의미했다. 본래 풍경이란 단어는 '고장'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최초의 본격적인 풍경화가 등장하는 플랑드르에서는 이를 'landschap'라 칭했고 그것은 '장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topos'에서 유래한 라틴어 'topiaria'로부터 기원한다. 그러니까 유럽은 시야가 머무르는 곳까지를 한정하여, 풍경이 '고장'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는 생각을 지녔던 것이다. 웅장한 장면(spectacle)을 단 하나의 '시점'으로 바라보면서 그 속의 조화와 다채로움을 관망하고 전체적인 구성을 음미하는 것이 풍경이자 풍경화라는 얘기다. 다시 말해 풍경은 시각에 제공되며 어떤 관점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반면 동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풍경을 대신해 이른바 산수라는 개념이 있었다. 산수는 산과 물로 대변되는 양과 음을 표상하며 인(仁)과 지(知)를 은유하고 나아가 우주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에 유사하다. 산수를 그린다는 것은 서구의 풍경을 보는 시선이나 그 제작술과는 무척 상이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우선 제한된 장소와 한정된 주체 개념에서 훌쩍 벗어나서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박춘화_Untitled_장지에 채색_112×125cm_2017
박춘화_낯섦_장지에 채색_91×116.8cm_2017

박춘화는 특정 산을 대상으로 그 내부의 어느 한 장소를 그렸다. 앞을 막아선 눈 덮인 겨울산의 대지, 잔가지로 빽빽한 숲 등인데 대부분 원근이 부재한 체 화면을 가득 채운 산의 내부이거나 자신의 몸이 접한, 적나라한 산의 신체성이다. 특히 땅과 나무의 물성과 생김새가 핍진하고 무척 '언캐니'하게 그려졌다. 작가는 장지에 아크릴물감을 매우 묽게 만들어 이를 무수히 반복해 칠해 올렸다. 휘발된 물감의 물성은 종이의 피부위로 어질하게 스며들고 얹히기를 거듭하면서 깊숙이 침윤된 '맛'을 낸다. 수성의 맛이 질펀하면서도 그것이 마르고 적셔져 만든 얼룩의 효과와 그 위로 갈필의 스친 효과 등이 어우러져 재미를 준다. 그것은 단지 발려진 물감이나 붓질로 칠해 놓은 상태가 아닌 작가의 몸짓과 감성과 감각을 절박하게 문질러 올린 표식으로 어른거린다. 다분히 영상적이면서도 기억과 잔상을 촉발시키는 효과를 거느린다. 명료한 형태와 선명한 윤곽선을 대신해서 '마구' 흔들리는, 겹쳐진 붓질과 투명하면서도 어둑한 색채의 기운이 분위기 있게 드리워져 있다. 평면 위에서 물질이 주는 다양한 인상, 이른바 회화적 사실, 즉 존재론적 조건을 발설하면서도 동시에 단순한 기록이나 그림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신체에 의해 해석된 풍경을 만들고자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자 현상적인 실제성의 세계가 뒷걸음질치고 대신 이 작가의 의해 해석된, 감각화 된 새로운 자연의 한 모습이 문득 드러난다. 그러니 이 그림은 특정 장소의 관찰에 의한 재현이나 현실을 재생하는 묘사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자연의 모습을 빌어 그 가시적 너머의 비가시적 기운이나 내밀한 생명력으로 끓어 넘치는 자연 혹은 우리가 미처 알 수 없는 타자성으로 빛나는 자연의 한 잔영이 마냥 유동하는 느낌이다. 나로서는 여기서 이 자연이 안겨주는 알 수 없는 타자성, 매혹과 낯설음과 같은 양가적 감정 같은 것들에 좀 더 방점을 두어야 한다고 본다. ● 결국 작가의 그림은 자신의 육체가 접한 세계(산)에 대한 모종의 정신적 가치 같은 것은 아닐까? 마음은 세계/대상으로부터 발원하니 이를 근거 삼아 더 밀고 나아가보는 것이다. 그러자 궁동산은 순간 매우 사적인 공간, 조형적 언어로 번안된 특이한 장소가 되었다.

박춘화_Untitled_장지에 채색_72.7×53cm_2017
박춘화_붉은 흙_장지에 채색_130×162cm_2017

작가는 우연한 기회에 연희동에 자리한 궁동산의 여러 시간대를 찾아갔고 그때마다 접한 자연/산의 어느 한 장면을 그렸다. 궁동산 자체가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작가는 주변의 산, 자연을 찾아 본인의 몸으로 만난 어느 한 순간의 흔적을 그리기위한 매개로 궁동산이란 공간에 고리를 건 것이다. 해발 104m의 낮은 산이지만 이곳에도 다양한 수종의 나무와 풀과 다채로운 생명체가 공존하는 동시에 오랜 시간 인간의 삶의 흔적, 역사가 고여 있고 지금 현재의 시간성 또한 거칠고 폭력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그러한 요소들은 산 정상에 둘러친 펜스 등에서 엿보인다. 그러나 자연은 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면서 깊고 울울한 식물성의 자취들로 채워나간다. 그래서 작가는 숲의 내밀하고 컴컴하고 무서운 생장력으로 부산한 심층의 공간 역시 보여주고 있다. 자연은 결코 단일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고정된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다. 더구나 그 풍경을 바라보는 이들의 정신과 마음에 의해, 감각에 의해 매번 새롭게 환생한다.

박춘화_펜스Ⅰ_장지에 채색_91×65cm_2017

지각적인 것이 동시에 감정적인 것이 될 때 풍경이 나타나는 법이다. 풍경은 '나'와 '세상'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내가 직접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풍경이란, 결코 한정되고 확실하게 표식이 되어 정지될 수 없다. " 풍경을 가로지르면서 결과적으로 그것에서 발산되어 나와 경계 없이 널리 퍼져 나가는 것" 을 그리는 것이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풍경은 비로소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자면 모든 풍경은 일정한 관념, 드라마, 수사에 의해 포장되어 있기에 우선 그것을 지우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민낯이 된 풍경은 순간 낯선 존재로, 생각거리를 안겨주는 존재로 다가올 것이다. 이처럼 풍경이 예술이 되는 것은 습관적인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장면을 만나는 체험, 기존의 관습적인 사고나 이해가 문득 멈춰선 바로 그 지점이다. 이른바 특정 사물을 '우발적'으로 만날 때인 것이다.

박춘화_펜스Ⅱ_장지에 채색_180×200cm_2017

박춘화는 궁동산을 찾아갈 때마다 우연히 만난, 우발적으로 접촉한 특정 장소를 그렸다. 그곳에서 뿜어내는 알 수 없는 기운을 그리고자 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작가는 무엇보다도 선험적인 자아와 주체, 그리고 자연이란 대상에 달라붙은 신화와 관념, 풍경화가 지닌 뻔한 드라마를 가능한 지우면서 자신이 몸으로 만나 느낀 그것만을 온전히 표현하려 했고 그것이 지금의 그림이 되었다. ■ 박영택

Vol.20170616d | 박춘화展 / PARKCHUNHWA / 朴春花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