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미술가들 2017 Artists of Tomorrow 2017

김경섭_김윤섭_노경민_배윤환_애나한_정진희展   2017_0725 ▶ 2017_1009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7_0803_목요일_02:00pm

주최 / 청주시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입장마감_06:00pm / 월요일 휴관

청주시립미술관 CHEONGJU MUSEUM OF ART 충북 청주시 서원구 충렬로18번길 50 (사직2동 604-26번지) Tel. +82.(0)43.201.2650 www.cmoa.or.kr

2017년 청주시립미술관이 주목한 여섯 명의 청년작가들 ● 공립미술관의 전시는 작품의 가치와 진위를 가르고 보증하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그 선정에는 책임이 따른다. 때문에 화력이 짧은 이삼십대 청년 작가들의 경우 특별한 주제가 있는 기획전에 이례적으로 포함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미술관 전시에는 미술계에서 어느 정도 역량을 인정받은 작가들이 선정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각 공립미술관들은 대부분 청년 작가들의 작품에 주목하는 전시를 연례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미술관에 따라 공모의 방식을 띠거나 자체적으로 선발하는 등 다양한 선정 방식을 가지고 있고, 지역 기반 미술관의 경우 대상 작가군을 지역 거주 청년 작가로 한정하는 경우도 있고 전국 단위로 넓히는 곳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공립미술관들이 젊은 작가들의 미술작품을 의도적으로 주목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 공립미술관들이 하나같이 연중행사로 청년작가전을 개최하는 이유 중 하나는 미술계의 생태계가 적정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공공적인 목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탄탄한 명성이 있는 작가들 뿐 아니라 새로이 성장하는 작가들이 평단의 주목을 받고 발을 디딜 수 있도록, 상업적인 매력을 가지는 작품 뿐 아니라 익숙치 않은 방식으로 관객을 불편하게 함으로써 의미를 창출하는 작품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는 미술관의 여러 정책들은 예술의 다양한 측면을 지원하고 보장하고자 하는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젊은 예술가들은 상대적으로 문화예술의 기반이 취약한 지방보다 기회가 더 많은 수도권으로 활동지를 옮기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러한 현상으로 말미암아 지역의 예술이 더 빈곤해지는 악순환을 초래하지 않도록 청년작가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전시를 비롯한 다양한 기회 제공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 이제 개관 1년을 맞이한 신생 공립미술관으로서 청주시립미술관은 올해부터 『내일의 미술가들』이라는 제명으로 청년작가들에 주목하는 전시를 연례적으로 개최할 계획이다. 많은 작가들의 포트폴리오를 검토하고 수차례의 학예팀 회의를 통해 올해는 여섯 명의 작가, 애나한, 김윤섭, 노경민, 정진희, 김경섭, 배윤환이 선정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이미 미술계의 상당한 주목을 받으며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는 작가들도 있고, 아직 화업의 시작 지점에 서 있는 작가들도 있다. ● 청주시립미술관이 주목한 올해의 청년 작가들, 주어진 공간에 대한 사유를 설치작품으로 풀어내는 애나한,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왔지만 최근 회화와 설치의 결합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김윤섭, 한국화라는 전통적 매체를 사용하면서도 소재와 주제 면에서 파격적인 실험을 하고 있는 노경민,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하여 일상의 작고 소소한 측면을 예민하게 기록하는 정진희, 과거와 현재를 조합하여 인간의 인지 방식에 대한 의구심을 표현하는 김경섭, 다양한 재료를 넘나들며 어마어마한 양의 서사를 풀어놓는 배윤환, 이 여섯 명의 작가는 작품을 통해 삶과 예술에 대한 각자의 독특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애나한_Fear Me Not_페인트,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우산, 프로젝터, 라이트, 쉬폰 천, 거울, 스피커, 선풍기, 네온_가변설치_2017

애나한의 「Fear Me Not」은 거대한 푸른 공간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설치 작업은 늘 주어진 공간에 대한 사유로부터 시작하여 불특정한 전시 공간을 특정한 장소로 만든다. 청소년 시절에 유학을 떠나 해외에서 학업을 마치고 다시 들어와 여러 레지던시를 거쳤던,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떠돌았던 삶의 경험은 그로 하여금 공간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가지게 하였다. 작가는 '나의 이동과 이사는 진행형이며 한동안 정착할 수 없음을 아는 불안의 초석 위에 빛, 색, 면, 선 등의 조형적 언어로 나만의 일시적 공간을 장소화한다'고 진술함으로써 자신의 공간 설치가 자신의 삶의 여정과 관계되어 있음을 선선히 밝힌다. 그 태생부터 삶의 흔적이 말끔하게 제거되어 있는 모던한 전시장이라는 조건은 애나한의 손을 거쳐 삶과 예술의 중간 지대로 바뀌고, 내용을 담는 빈 그릇으로서의 전시장은 개성과 활기를 띠게 된다. ● 기존의 장소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작품은 공간 설치 작품이지만 대단히 회화적이다. 주조색의 선택이나 공간의 구획, 그리고 빛의 사용이라는 요소들의 어우러짐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Fear Me Not」에서는 이전 작품들에서 보이던 날카로운 색 대비와 기하학적 선들이 보이지 않는 대신, 안정된 감수성이 느껴진다. 둥근 발광체와 하늘거리는 쉬폰 소재의 천, 아치 형상의 문 등은 추상적인 요소들이지만 실제 풍경 속에 빠져 있는 느낌을 갖게 하기도 하고, 네온으로 만들어진 텍스트들은 풍경의 시정(詩情)을 북돋운다. 첫 눈에는 거대한 푸른 색이 들어오지만 그 속에서 거니는 과정에서 부분 부분의 소소한 요소들에 주목하게 만드는 방식도 자연 풍경을 경험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시간을 두고 그의 작품 속을 거니는 것은 작가가 만들어낸 새로운 자연을, 작가의 내면이 만들어낸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다.

김윤섭_누워있는 남자_캔버스에 유채_120×186cm_2017
김윤섭

애나한이 구축한 공간이 대단히 감성적이고 시적(詩的)인 특성을 띤다면, 김윤섭의 공간 활용은 재기가 넘치는 지적 사유의 결과물이다. 김윤섭은 구글 어스(google earth)에서 보았던 얼음처럼 고착된 풍경 속 사람들에 대한 인상으로부터 출발한다. 김윤섭은 위성을 통한 지구의 풍경이 인간이건 사물이건 관계없이 균질적으로 보이게 하는 현상, 마치 세계를 내 손안에 넣은 듯이 보이는 인터넷 위성사진에서 인간과 사물이 동일하게 취급되는 것 같은 느낌을 더 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한다. 사진이 발명되어 관련 기술이 발전되고 대중적으로 보급되던 1800년대 중반 이후 360도의 풍경을 담는 파노라마 사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화재 이전 1870년대의 샌프란시스코 풍경을 담은 머이브릿지(Edweard Muybridge)의 파노라마 사진을 시작으로 세계의 전방위를 손에 잡히는 이미지로 포획하고자 하는 욕망은 끊임없이 발전하여, 지구 밖에서 지구를 담아내는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 앉아서 세계 구석구석을 바라볼 수 있는 시대에 진입하였다. 이 이미지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손 안에 넣은 듯한 기분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과거의 파노라마 사진들로부터 동시대의 구글 어스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박피를 뜬 것 같은 이 이미지들에서 걸리는 인간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개성이 사라진 사물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 조물주의 시선으로 세계를 내려다보고자 하는 욕망의 결과로 오히려 인간이 사물화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김윤섭은 이러한 현상을 더 극단화시켜 실제의 사물들을 배치하고 그 사물들의 특수한 형태를 흉내내는 그려 병치시키는 방법을 취하였다. 세계를 사유하고 지배하는 주체임을 의심하지 않았던 인간이 오히려 인간이 만든 사물 객체의 흉내를 내는 것 같은 억지스러움을 통해, 김윤섭은 사물과 인간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노경민_밤 그림자_장지에 수묵채색_132×197cm_2016

노경민은 여러 측면에서 놀라운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도시 변두리의 낡은 모텔방 내부를 배경으로 하여 남성의 누드가 등장한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남성 누드가 한국화의 재료인 장지에 수묵채색 방법으로 구현되어 있다는 점, 또한 그것이 한국의 이십대 여성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은 그의 작업에 여러 층위의 접근을 가능케 한다. 누드의 역사는 고대를 넘어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대개의 경우 그것은 남성적 응시(gaze)의 대상물으로서의 여성의 누드였다. 정치 경제는 물론 예술까지도 남성의 영역이었던 오랜 과거 속에서 여성의 누드는 특정한 서사와 관련하여 등장해왔고, 서사는 여성 누드를 그려도 되는 명분을 제공하면서 그 안에 숨겨진 에로틱한 욕망을 감추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긴 역사 속에서 남성적 응시의 대상으로서의, 남성적 에로티시즘의 표현으로서의 여성 누드는 '남성의 시각적 언어'로 자리 잡았다. 여성의 미술 분야 진출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최근까지도 남성 작가들의 여성 누드에 대한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여성 작가들조차도 관습적으로 여성의 누드를 그리는 형태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삶을 향한 욕망과 죽음에 대한 욕망, 즉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anatos)가 인간 존재의 근본 충동인 만큼 예술 작품에 있어서 에로티시즘의 표현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그것이 긴 예술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남성의 욕망만을 대변하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형성된 여성의 이미지들이 마치 에로티시즘 그 자체인 것처럼 고착되어 왔다면, 여성은 스스로의 욕망을 표현할 수 있는 이미지 언어를 이제부터 새로이 개발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고전적이고 자연스러운(?) 시선을 거슬러 여성 작가 노경민은 남성의 신체를 바라본다. 좁고 허름한 모텔방에서 노경민은 벌거벗은 남성 모델에게 멋진 남성미를 보여주는 자세가 아닌, 어딘지 허술한 자세를 취하게 한다. 이불을 반쯤 덮고 잠들었거나 웅크린 뒷모습을 보여주거나 구부정하게 서 있는 남성 누드는 사실 포즈를 취한 것이라기보다 막간의 모습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거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순간의 남성 신체는 어쩌면 가장 현실에 가까운 남성의 모습일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지점이 남성적 응시의 방식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노경민이 남성 모델에게 특정한 장소를 지정하고 특정한 요구를 하는 것은 기존의 성역할을 역전시키는 것 같은 행위이지만, 그 결과 그가 남성의 신체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어딘지 모르게 동종의 인간으로서 느끼는 연민이 서려 있는 것이다. 붉은 장지가 밀리고 일어날 때까지 붉은 색을 칠하는 노경민의 작품에는 내적인 불안과 갈망, 갈등이 배어나오고 있지만, 그럼에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면 남성이 여성신체를 바라 보아왔던 시선과는 사뭇 다른 특성들이 그 작품들을 감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진희_무제_루프 애니메이션_2015

정진희는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한 작업들을 보여주는 작가이다. 그림은 특정한 대상이나 사건을 고정시켜 이차원 평면에 안착시키는 것으로, 그려진 사건 이전과 이후의 시간이 포함되지 않는다. 물론 서양 중세 회화에서 하나의 프레임 안에 동일 인물이 시간 순으로 반복되는 등의 방식이 보이지만, 회화는 근본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매체는 아니다. 그래서 그림과 더불어 서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프레임의 구분으로 일련의 흐름을 보여주는 만화와 같은 방식이 사용되거나, 그림이 실제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애니메이션 기법이 채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구현되는 장면의 흐름은 단일한 이미지로 표현되기 어려운 서사를 포함하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 그런데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하는 정진희 작업의 경우, 움직임의 결과에 별다른 서사가 개입되지 않는다. 살랑거리는 풀꽃들을 배경으로 등장하는 동물들은 고개를 돌리거나 꼬리를 약간 움직이는 정도로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보인다. 고개를 돌리거나 꼬리를 움직이는 데는 별다른 사건이 개입되지 않기 때문에 그저 자연이 그러한 상태를 움직임을 통해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 일 없는 듯이 보이는 세상도 조금씩은 움직이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움직임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회화에 더 가까우며, 가로에 익숙한 모니터의 화면을 굳이 세로로 돌려세워 낯설게 보여주는 것도 작품을 화면이 아닌 그림으로 보게 만드는 장치이다.

김경섭_수영장_캔버스에 유채_145.5×194cm_2017

자신의 기억을 줄곧 작품의 소재로 삼는 김경섭의 경우, 가족과 자신의 과거 사진, 자신이 겪은 사건들, 기성의 이미지들, 그리고 현재의 요소들을 뒤섞어 그린다. 그 결과 하나의 화면 속에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뒤섞이고, 실제 겪은 사건과 상상이 혼합되어 혼란스러운 장면이 연출된다. 이처럼 시공간이 뒤섞인 화면의 단초는 김경섭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한 에피소드에서 출발한다. 그는 예닐곱 살 즈음 오로라를 보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오로라는 주로 북극지방에서 볼 수 있는 신비한 대기 현상으로 그 지역에 가지 않았다면 김경섭의 어린 시절 기억은 사실일 리가 없다. 때문에 그는 중학생이 되었을 때 자신이 오로라를 보았던 기억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러한 기억의 혼돈은 이후 그의 화두가 되었으며 오히려 기억의 혼돈을 조직화하는 것을 작품의 모티프로 삼게 된 것이다. ● 김경섭은 여러 이미지를 하나의 화면에 뒤섞기도 하지만 단일한 이미지를 대상으로 하기도 하는데, 예컨대 2016년의 작품 「아이와 돼지저금통」은 단순한 하나의 사진 이미지를 재현한 것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기이한 감상에 휩싸이게 된다. 파란색 비단 한복을 입은 소년은 이불을 깔지 않은 방바닥에 누워 깊이 잠들어 있고 누군가 두꺼운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아이의 배게 옆면에 지금은 생산되지 않는 솔담배가 기대어 있고 그 옆에 빨간색 돼지 저금통이 놓여 있다. 아이의 머리맡에는 하얀색 다이얼 전화기가, 아이의 발치에는 서 있는 남자 어른의 다리가 보인다. 이 날은 무슨 날인지, 아이가 자는 모습을 왜 찍은 것인지, 아이 머리맡에 있는 담배는 누구의 것이고 돼지저금통은 왜 바닥에 있으며,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사진이라면 방바닥이 이렇게 넓게 찍힌 이유가 무엇인지, 이 장면은 보면 볼수록 의구심을 낳는다. 일견 아무런 신기할 것 없는 일상의 사진이지만 그것을 주목하여 재현한 작가의 눈을 통해, 지나간 과거의 한 장면이 품었을지도 모르는 모종의 비밀이 관객을 사로잡는다는 것이다.

배윤환_부대 차렷 경례!_오일 파스텔,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65.1cm_2017

배윤환의 작업은 작가 내면의 엄청난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과거 재료의 실험을 거치던 시기 그의 작업은 세상의 색채들이 다 뛰어나와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발산의 에너지가 느껴졌고, 최근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는 드로잉 베이스의 작업들에서는 기막힌 서사들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내면에서 들끓는 이러한 작업의 에너지에 대해 작가는 한 때 괴로움을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여전히 내 생각에는 개미와 애벌레가 우글거렸고 쥐들이 드나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아무런 제어 없이 작업의 형태로 전이되었다"라고 고백하면서, 도저히 정리가 되는 것 같지 않은 작업의 양상을 해결하기 위해 "정리된 텃밭을 가꾸기 위해 시도와 반성을 거듭했다"라고 과거 자신의 괴로움을 토로한 바 있다. 그것이 일종의 장애가 아닐까 의심도 하게 되었으나, 결국 그러한 특성은 억지로 교정할 수도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 그는 자신에게 떠오른 생각의 단초를 부여잡고 드로잉을 시작하는데, 그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우화와 상징들은 전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코드가 아니다. 예컨대 이번 전시에서 보여지는 거대한 작품 「곰을 위해 장전된 붓들」에서는 붓을 든 화가의 손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와 연합되고, 손-연어는 거대한 곰들의 먹잇감이 되는데, 그 이야기가 전개되는 장대한 장면들은 이야기의 시작이 어디이고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전개된다. 크기가 작은 작품들에서도 이러한 특성이 마찬가지로 나타나는데, 이를테면 목탄을 제조하는 개구리 연작, 금으로 스프를 끓여먹는 광부들 등의 작업들, 그밖에 거의 모든 작업들이 전하는 이야기들에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우화적 비유들이 넘쳐나는 것이다. 이러한 매우 개인적인 상징들과 서사 전개 방식이 향하는 곳은 작가 자신의 예술가적 생존에 대한 갈등이다. 예술가로서의 엄청난 에너지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제반 상호아들에 대한 비유를 생성하고 그 결과로서의 작품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작가의 서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 한 인간으로서의 예술가의 삶은 소수의 몇몇 (그리고 우연한) 성공사례를 제외하면 참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는 과정이다.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떠오르는 정형화된 패턴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의 자유가 주어진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잡을 것 없이 내던져진 존재들이기도 하다는 반증이다. 그러한 예술가로서의 삶의 과정에 첫 발을 내딛고 몇 걸음을 걸어온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그래서 기성의 작품들보다 더 실존적인 문제들이 들끓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내적 불안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만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예술적 지향을 지켜나가는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은, 작가에게는 고통의 결과일 수 있겠으나 관객에게는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예술적 매혹의 지정인 것이다. ■ 이윤희

Vol.20170725c | 내일의 미술가들 2017 Artists of Tomorrow 2017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