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니마크리스운구이쿨라리스

박수지_손혜민_양유연_임솔아_차슬아_한지혜_홍금양展   2017_0801 ▶ 2017_0827 / 일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7_0801_화요일_06:00pm

라운드테이블-내가 이 이름인가? Am I that name? 2017_0819_토요일_03:00pm 페이스북 페이지 / goo.gl/XtpXXc * 해당 페이지에 링크된 구글폼을 통해 통해 신청 가능

후원 / 서울문화재단_트렁크갤러리 기획 / 이빛나_이연숙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트렁크갤러리 TRUNK GALLERY 서울 종로구 북촌로5길 66(소격동 128-3번지) Tel. +82.(0)2.3210.1233 www.trunkgallery.com

『오니마크리스운구이쿨라리스』展은 차세대 여성들의 위반적이고 부정적인 정체성과 에너지를 시각 예술에서 발굴, 확인, 확장하기 위해 기획된 전시다. 전시 제목인 '오니마크리스운구이쿨라리스'는 검색이 가능한 지시 대상이지만, 검색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국적 불명의 외국어이기도 하고, 비밀의 주문이 되기도 하며, 여성이면서 남성일 수도 있는, 완전히 번역될 수 없는 존재로 무한 변신한다. 그러므로 오니마크리스운구이쿨라리스를 검색하는 것은 전시를 감상하는데 별 도움은 안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전시를 구성하는 열 개의 작품은 오니마크리스운구이쿨라리스와 같은 변이체로서 그것들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복수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박수지_Surreptitious Stretch_단채널 HD 영상_00:04:44_2016

전시장 1층에는 오니마크리스운구이쿨라리스로 대변되는 불확실한 존재의 표면이 나열된다. 그 표면은 구체적이기보다 흐릿하고, 정지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작가 박수지의 영상 「Surreptitious Stretch」(2016)는 은밀한 꿈틀거림으로 존재의 '있음'을 알린다. 벽과의 구분이 애매한, 생물과 사물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는 온몸으로 자신의 언어를 전시장에 기입한다. 매 순간 사라지고 달아나는 무언가를 기록하는 그(것)는 보편이나 순리, 규범이나 체제에 의해 소거된 감각을 지금 여기로 불러들인다. 이러한 물성적 제스처는 그녀의 조각에서도 두드러진다. 영상 앞에 놓여있는 「Dol-0oOㅇ」(2017)은 순수한 자연물이 아니라 레진, 실리콘, 우레탄, 점토, 폴리에스터 등이 합쳐진 인공물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돌의 단단한 속성과 다르게 물컹하고, 끈적거리며 심지어 녹아내리기까지 하는 그것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빛을 발하며 돌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돌을 초과해 버린다.

양유연_아무도 붙잡지 않는다_장지에 채색_72.5×91cm_2011

비인(非人)적 형체는 작가 홍금양의 회화에서도 나타난다. 불이 환하게 켜진 집 앞 담벼락에는 치마를 걸친 두 다리가 빨래처럼 널려 있다. 너무 세게 몸을 던진 탓인지 담벼락에 균열이 생겼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2017)에 등장하는 '치마를 걸친 두 다리'는 여성을 상징하는 기호인 동시에 여성을 '연기'하는 자신을 폐기하는 자살 행위로도 읽힌다. 이처럼 '여성'이라는 규범에 저항하는 개체는 괴기스러운 이물감으로 제시되며 구원 없이 종결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신체는 작가 양유연의 회화에서도 발견된다. 「아무도 붙잡지 않는다」(2011)에 나오는 존재에게는 몸이 없다. 육중한 건물 위에 올라가 있는 얼굴은 밧줄에 매달린 채 무언으로 분노를 표하고 있다. 역시나 죽음을 연상시킨다. 문제적인 것은 이 두 작가의 작업이 적지 않은 시차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묘하게 포개진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해방적 전복을 원하는 이들의 행위는 내일이면 망각될 사고로 치부되어 반복적으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지난해 떠들썩했던 예술계 성폭력 사건뿐 아니라 상시적으로 발생하는 폭력에 기만당하는 여성 존재를 환기시키며, 무력할지언정 발언을 멈추지 않는 주체로서의 여성을 성찰하게 한다. 그러니 홍금양과 양유연이 택한 죽음은 삶으로의 귀환을 전제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 그러나 알지 못하는 존재의 표면이 언제나 어둡고 묵직한 것만은 아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 밀착된 작가 한지혜의 「Shadow Boxing」(2017)은 익살스러운 액션을 통해 존재의 발화를 시도한다. 주먹을 날리는 그/녀의 동작은 현실을 고통스럽게만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먹은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관객을 향하고 있다. 가상 공격인 줄 알면서도 관객은 몸을 움츠리게 된다. 이처럼 관객의 시선을 거칠게 잡아끄는 한지혜의 주먹질은 예정된 두려움, 미련, 불안, 실패, 좌절과 맞서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존재의 운동성을 보여준다. ● 주먹세례를 받으며 도달한 2층에는 오니마크리스운구이쿨라리스의 감각으로 형성된 세계가 펼쳐진다. 2층에 들어서자마자 관객을 맞이하는 것은 양유연의 「빛나는 것」(2017)이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그것은 다름 아닌 유리 파편들이다. 깨진 빈 병의 흔적일 수도 있고, 창문에서 떨어져 나온 것일 수도 있으며, 공사 현장에서 굴러온 것일지도 모르는 그것들은 바닥이 아닌 허공에서 빛나고 있다. 작가는 일부러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밖에 없는 자리에 위치시키고, 관객이 그것을 감각할 수 있도록 충분한 여백을 마련해 놓는다. 이는 아래층에서 보았던 죽음의 '다음' 장면일지도 모른다.

차슬아_small size works_다채널 영상_2010~7

다시 도래한 존재는 홍금양의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2017)에서도 만날 수 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에서 보았던 갈라진 담벼락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거주는 불가능할 것 같은 그곳엔 낮잠을 부르는 해먹이 걸려 있고, 야자수가 자라며, 코코넛이 열리고, 자몽즙이 흐르며, 비둘기가 찾아온다. 이 낯선 풍경은 작가의 '유토피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그 유토피아 안에는 끔찍한 현실이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이곳의 삶을 견디기 위해 도피처가 될 만한 먼 곳을 절실하게 호출하고 있으나, 그 절실함만큼 이곳의 무게 또한 겸허히 수용하겠다는 태도를 내비치고 있다. 불행의 파편은 이렇게 '다른' 감각과 결합하여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 ● 그러나 여기에는 새로운 세계의 구축이 이미 생활이 된 작가도 있다. 작가 차슬아는 멀쩡히 일상을 유지하다가도 돌연 방향을 틀어 현실을 이탈한다. 여덟 개의 채널로 이루어진 「small size works」(2010-2017)는 내용과 형식을 따질 새도 없이 관객을 그 안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세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자 적자면) 각각의 영상은 몇 십 초에서부터 삼분을 넘지 않는 짧은 분량으로 즉흥적이며 우발적인 상황을 포함한 일인극의 형태를 띤다. 쉽게 말하면, 그것은 '난이도 상(上)인 혼자 놀기'인 셈이다. 영상 속 행위자에게는 명징한 목적이 있으나 그것은 과정 중에 휘발되며, 기승전결이 없는 대신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쾌락이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상 속에서 차슬아를 찾는 일은 매번 흥미진진하다. 요컨대, 그녀는 제 스스로 존재 가능성을 조직하고 있는 중이다.

홍금양_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116.8cm_2017
손혜민×임솔아_웅크려 앉은 소녀들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7

앞서 살펴봤듯이 전시의 배치구조는 '이접'이라는 관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전시장 안의 모든 작업은 이웃해 있는 작업과 (긴밀하게 또는 느슨하게) 호응하며, 서로에게 덧대고 바라는 몸짓을 보여준다. 이러한 낯선 접합은 윈도 갤러리를 점유한 「웅크려 앉은 소녀들」(2017)에서 정점을 찍는다. 그것은 미술인 손혜민과 문학인 임솔아의 협업의 결과물이다. 두 작가는 하나의 작업을 위해 자신들의 언어를, 즉 이미지와 문자를 교환하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한 작업을 단순히 이미지가 문자로 또는 문자가 이미지로 전환된 결과로 보는 것은 작업을 왜소하게 만드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감정과 상태, 의미를 차츰 무화시키는 말을 담아내기 위해 (온전한) 이미지도 아닌 (가독성이 높은) 문장도 아닌 그사이 어딘가에 있을 제3의 것을 고안해낸다. 실로 처음 보는 대화법이다. ● 이렇듯 전시는 보편적 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여성들, 그들의 움직임, 시선, 스타일을 제시함으로써 여성주의의 새로운 면면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여성'들'을 위한 시각 예술의 확산을 도모하는 수행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수행적 실천은 전시에 참여한 일곱 명의 작가들의 '말하기'로 발현된다. 그들은 오니마크리스운구이쿨라리스라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를 구현하기 위해 그것의 외피를 상상하고, 갖가지 표정을 새겨 넣으며 미지를 현실로 이동시킨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어느새 오니마크리스운구이쿨라리스라는 기표 밖에서 편견과 통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신과 타자를 오가는 감각을 체험하게 된다. 전시는 바로 그 지점을 관객과 나누고 싶은 것이다. 그 무수한 결을 '같이' 이야기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 이빛나

Vol.20170802c | 오니마크리스운구이쿨라리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