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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태展 / HWANGGYUTAE / 黃圭泰 / photography   2017_1013 ▶ 2017_1112 / 월요일 휴무

황규태_pixel; white spectrum_피그먼트 프린트_100×300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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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1013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룩스 GALLERY LUX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7길 12(옥인동 62번지) Tel. +82.(0)2.720.8488 www.gallerylux.net

픽셀 탐험의 선구자 황규태 ● 내가 황규태에게 깊이 공감하는 것은 그의 사진도 있지만 루치아노 베리오나 루이지 노노, 지외르지 리게티, 칼하인츠 슈톡하우젠, 야니스 크세나키스(제나키스는 잘못된 영어식 표기) 같은 현대음악가들의 작업에 대한 관심 때문이기도 하다. 대학교 때부터 그런 음악을 챙겨들었던 나에게 황규태를 발견한 것은 깊고 캄캄한 숲에서 헤매다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운 일이었다. 대학교 때나 지금이나 그런 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은 주위에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도 그런 음악 얘기를 하면 책에 나오기 때문에 배우기는 하지만 그리 즐겨듣지는 않는다고들 얘기한다. ● 그런 와중에서 그런 음악을 일반인들 트로트 듣 듯이 즐겨 듣는 사람을 만났으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황규태가 요즘 집중해서 파고 있는 픽셀작업의 모든 것은 그런 음악들 속에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스탠리 큐브릭이 「2001 스페이스 오디시」에서 쓴 리게티의 「럭스 애테르나」는 황규태가 즐겨듣는 음악이기도 한데, 그 음악, 혹은 소리를 들으면 우주의 모든 것들이 분자 단위로 해체되고 토왕성이니 블랙홀이니 하는 이름조차 아무 의미 없는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 우주 전체의 차원에서 보면 하나의 먼지보다도 훨씬 작은 지구에서 그것도 아주 작은 한 인간이 만든 음악이 우주 전체를 상상하게 한다는 것은 분명히 예술의 위대한 힘이다. 그 힘은 황규태에게까지 뻗었고 그는 픽셀에 대한 사유를 시작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것을 픽셀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고 마침내 픽셀을 본격적으로 활용한 21세기의 시각 매체인 모니터들이 그의 눈에 들어 왔다. ● 그에게 모니터는 더 이상 무엇을 들여다보기 위한 거울이나 망원경 같은 장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용자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알고리즘을 가지고 작동하는 어떤 비밀의 기계였다. 거기서 하나 확실한 것은 상당히 많은 것들이 디지털화된 오늘날 우리가 의미와 표상의 영역으로 삼는 대부분의 것들이 픽셀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 픽셀 없는 컴퓨터, 픽셀 없는 스마트폰, 픽셀 없는 TV를 상상할 수 없다. 사랑도, 전쟁도, 문학도, 스포츠도, 결국은 픽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극적인 동점골을 넣었다고 기뻐하는 장면도 결국은 픽셀 놀음이며 지상에서 달아나는 탈레반 전사를 헬리콥터에서 사격하여 제압해 버리는 것도 결국 픽셀 놀음으로 귀결된다. 바꿔 말하면 강력한 창조자 같은 존재가 있어서 이 세상의 픽셀 놀음을 몽땅 통제하고 조작 할 수 있다면 그는 우리가 보는 모든 정보와 감각마저 조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픽셀들은 어느 한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점조직 같은 그물망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월드와이드웹도 랜선을 뽑아버리면 장님이 되고 만다.

황규태_pixel; R G B, 25 square & 4 cross_피그먼트 프린트_40×40cm
황규태_pixel; cross & square_피그먼트 프린트_35×35cm×3_2017

픽처와 엘레멘트를 합한 말인 픽셀이란 말을 처음 쓴 사람은 NASA의 제트추진연구소의 프레데릭 빌링슬리였다. 그는 1965년 달과 화성에 보낸 탐사선에서 찍은 비디오 이미지를 가리켜 'picture element'라는 말을 썼다. 픽셀이란 말이 오늘날과 같은 용법을 쓰인 것은 디지털 기술의 덕분이다. 브라운관 텔레비전에도 픽셀이란 개념이 적용될 수는 있지만 그것들 하나하나를 따로 제어할 수는 없었다. TV의 뒤에 있는 브라운관이 쏘는 음극선이 이미지를 통째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술을 통해 픽셀 하나하나를 통제할 수 있게 되고, 정보화된 픽셀은 더 이상 물질적 실체를 갖지 않기 때문에 어디든 어떤 형태로든 변환되어 보낼 수 있게 됐다. 이것이 오늘날 말 하는 픽셀의 중요한 점이다. ● 그러나 사실 픽셀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아니다. 픽셀은 어떤 것을 구성하는 기초단위라는 점에서 벽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라면 벽돌은 무겁고 픽셀은 가볍다는 점이다. 결국 픽셀은 정보가 실린 벽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픽셀은 무게가 거의 나가지 않으니 하이퍼 텍스트로 전환되어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고 어디에나 붙일 수 있다. 그리고 픽셀의 특성은 다루기 쉽다는 것이다. ● 누구나 포토샵만 할 줄 안다면 픽셀을 자유로이 뜯거나 조립하여 형상도 만들 수 있고 글자도 만들 수 있다. 반면 벽돌은 무겁기 때문에 일단 구축해 놓으면 옮기거나 고치기 힘들다. 그러나 픽셀과 벽돌의 공통점은 둘 다 정보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벽돌을 쌓을 때 아무렇게나 쌓지 않고 지을 집의 모양과 크기를 정해놓은 다음에 쌓는다. 그리고 벽돌들은 그 집의 어느 부분이 될 것인가에 따라 다른 위치값을 지닌다. 결국 벽돌은 하나의 집을 구성하는데 필요한 정보의 지배를 받아 하나하나 쌓이게 된다. 벽돌에는 집의 구조와 이력이라는 정보가 담겨 있다. 픽셀은 벽돌에서 무게를 빼고 정보를 담은 것이다.

황규태_pixel_피그먼트 프린트_70×120cm_2014
황규태_pixel_피그먼트 프린트_90×70cm_2017

픽셀의 원조가 벽돌이듯이, 픽셀에 대한 황규태의 관심도 디지털 이전의 물질적인 것에서 시작됐다. 그는 본격적으로 디지털 이미지를 다루기 전인 1990년대에 대형 카메라를 이용해서 사물을 바싹 접사해서 찍는 작업을 했었는데, 그때 그가 본 것은 물질을 이루는 기본입자였다. 그때 그는 TV나 컴퓨터 모니터를 현미경적으로 초근접 촬영하여 입자들을 보여주는 작업을 했으며 집안에서 먼지나 물표면의 빛의 반영 등을 찍었다. ● 이때 그가 본 것은 작은 입자 속에 들어 있는 무한한 우주였다. 한 알의 모래알에서 우주를 본다는 것은 황규태의 얘기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디지털 이미지의 단위인 픽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꽤 오래 된 일이다. 그는 디지털 아닌 것에서 디지털을 보아내는 혜안마저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 내가 황규태를 처음 만난 것이 1998년 금호미술관에서 있었던 개인전 《원풍경-다큐먼트》에서였는데, 그는 이때 길이 7미터의 대형 프린트로 광대한 우주를 보여주었다. 미술관에 앉아서 우주를 볼 수 있다는데 흥분한 나에게 그는 그것이 실은 우주가 아니라 자신의 집 거실에서 물 표면에 비치는 빛의 반사를 찍은 것일 뿐이며 검은 우주공간처럼 보이는 것은 사진을 노출부족으로 찍어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황규태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점과 원근법을 미시적인 것에서부터 우주적인 데로 마음껏 늘이고 줄이는 상상력과 배짱을 보여주고 있었다. ● 황규태 만큼 픽셀을 집중적으로 들여다 본 사람이 또 있었다. 1998년 무렵 용산전자상가에서 모니터를 살 때 사람들은 이른바 용팔이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 불량화소를 찾느라 눈이 빠지게 들여다보곤 했다. 그런 고객들이 찾던 것은 픽셀이 아니라 불량품이었다. 그것은 의미의 단위가 아니라 용팔이를 상대로 값을 깎기 위한 구실일 뿐이었다. ● 그것은 정보의 단위, 우주의 축소판으로서의 픽셀이 아니었다. 황규태가 보는 것은 용팔이건 값이건 다 떠나서 모든 표상들이 가장 추상적인 차원으로 환원됐을 때 가장 마지막에 남을 궁극의 밑바닥이다. ● 그러므로 픽셀에 대한 그의 관심은 표상의 가장 근본적인 차원이라면 어떤 것으로든 연결된다. 요즘 그가 다다른 지점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다. 말레비치의 그림 「검은 사각형」(1915)을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나로서는 황규태가 말레비치에 이른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구체적인 것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근원적인 형태로서의 추상에 대한 관심이라는 점에서 말레비치는 그의 대선배였던 것이다. 말레비치는 사각형이 무의 상태이며 중립적이고 보편적, 비계급적이라고 봤다. 그의 절대추상, 절대조형은 러시아 구축주의 활동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어, 한참 혁명의 물결이 러시아를 휩쓸 무렵 로드쳉코들은 절대추상으로 혁명에 복무하고자 했을 정도였다. ● 하지만 소비에트 러시아는 말레비치의 회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내러티브를 철저히 배제하고 오로지 형태의 근원을 추구한 그의 절대추상의 세계는 혁명의 구체적인 내러티브와 맞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혁명의 내러티브와 맞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내러티브 자체와 맞지 않았던 것이다. 말레비치에게 아쉬웠던 것은 오늘날의 디지털 컴퓨터가 없었다는 점이다. 만약 1915년에 디지털 컴퓨터가 있었더라면 말레비치는 틀림 없이 포토샵으로 픽셀 몇 개를 대폭 확대해서 보여주는 작업을 했을 것이다. 황규태는 자신과 말레비치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손으로 그린 말레비치의 그림과 컴퓨터에서 일어나는 픽셀의 반란과, 그 극한의 미니멀 하드 엣지를 비교 해본다. 픽셀 작업은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이다. 나는 만들지 않았고 픽셀들의 그러함을 취사선택 했을 뿐이다. 나는 나의 작업에 대해 말레비치 이후, 포스트 하드 엣지라고 말하고 다닌다."

황규태_pixel_피그먼트 프린트_90×70cm_2017
황규태_pixel; reverse_피그먼트 프린트_80×120cm_2017

황규태와 말레비치의 공통점은 '당장 눈에 보이는 구체성의 차원을 떠나서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 탐색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본다'는 영역에서 벌어지는 탐험이다. 극지에 가는 탐험은 잘못하면 죽을 수 있지만, 보는 영역에서 벌어지는 탐험은 죽음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 실존의 상당부분이 보는 것에 의존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보는 것에 대한 탐험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우리의 삶과 사고는 보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어느 미술사학자가 말해서 유명해진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틀렸다. ● 우리는 어떤 것을 머리로 미리 알고서 보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봐야 알 수 있다. 눈은 머리 속에 미리 내장된 지식을 확인하는 스캐너가 아니다. 인간의 지식이란 아무리 잘난 책에서 배웠어도 오류의 가능성이 있고 더 고차원적인 지식에 의해 극복될 수 있는데, 이는 열심히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찾아 나서서 봐야 가능한 것이다. 눈이 부지런히 탐색해서 아는 것을 부정할 때도 있고 보충해 줄 때도 있다. 그러므로 아는 것과 보는 것은 서로 긴장관계에 있다. 황규태는 우리가 픽셀을 통해서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다. 그 결과가 때로는 화려한 색채의 유희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말레비치보다 더 근엄한 형상으로 나타날 때도 있다. 그 근원이란 극단적인 등가성이다. 과거에는 인화지 위에 있는 티끌을 물감을 묻혀서 지워버렸다. ● 사진으로 나타나야 하는 정보에 비하면 티끌은 없어져야 할 노이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픽셀로 취급하면 노이즈고 뭐고 그런 차원이 다 사라져 버린다. 다 똑같이 생긴 픽셀만 남을 뿐이다. 그게 황규태가 추구하는 차원이다. ● 픽셀의 문제는 결국 시력과 재현의 문제인 것 같다. 즉 이미지를 볼 때 무엇을 보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사진하는 사람들은 이미지를 출력하거나 책에 인쇄할 때 dpi에 발발 떤다. dpi가 너무 적으면 픽셀이 튀기 때문이다. 사진에서 픽셀이 튀면 안 되는 이유는 큰 필름을 쓰는 이유와 같다. 그것은 입자와 대상의 재현성의 관계의 문제이다. 35mm 필름으로 찍은 사진을 1미터 크기로 인화하면 입자가 보여서 사진의 재현능력이 떨어진다. ● 사진을 보는 사람의 눈에 대상인물이나 풍경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필름 입자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4×5인치 필름으로 찍은 사진을 1미터로 확대인화해도 입자가 안 보이기 때문에 대단히 선명한 사실감과 현장감을 보여준다. 사진하는 사람들이 이른바 '짱짱하다'라고 말 하는 사진이 되는 것이다. 몇 년전만 해도 지하철역 안의 광고에 쓰는 사진들은 35mm 필름이나 저해상도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썼기 때문에 이미지가 거칠었고 매력적인 광고 이미지가 아니라 거친 입자를 보여주는데 그쳤다. ● 결국 그 이미지는 실패한 광고가 됐다. 상품을 보여주는게 아니라 입자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요즘은 화소수가 큰 카메라로 찍기 때문에 피사체가 실제로 거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게임 광고에 나온 아이유의 얼굴 솜털까지 보일 정도가 됐다. 디지털 사진에서는 '픽셀이 튈까봐 발발 떤다'가 마지노선이다.

황규태_pixel; form and color_피그먼트 프린트_50×50cm_2017

그런데 이는 이미지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원근감의 문제다. 아무리 입자가 거친 사진이라도 멀리서 보면 입자가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입자가 고운 사진도 아주 가까이서 보면 입자가 보인다. 결국 문제는 원근감이 어디에 맞춰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즉 이미지에서 대상을 볼 것인가, 아니면 이미지 자체를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진은 오래 동안, 그리고 지금도 재현의 굴레에 묶여 있다. 내가 이런 엄청난 거 봤는데 너희도 좀 보고 같이 놀라자는 것이다. ● 그러나 그런 사진은 전혀 놀랍지 않다. 국내외의 진기한 풍경들과 인물들을 섬세한 톤과 색으로 묘사한 사진은 관광홍보용으로 쓸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기 때문에 동시대 예술의 반열에 놓기는 힘들다. 동시대 예술은 단순한 재현은 취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황규태의 원근감은 대단히 독특하다.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는 픽셀의 질서가 그의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 그런 점에서 그는 독특한 시력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시력은 대형 카메라로 먼지 입자를 볼 때나 디지털 사진의 픽셀을 다룰 때나 똑같이 근원적인 차원에 맞춰져 있다. 다시 한 번, 그것은 '이미지에서 무엇을 보는가'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 입자가 튀는 사진을 영어로는 grainy라고 한다. 그런데 그레인은 곡식이라는 뜻도 있다. 결국은 작은 입자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룬다는 점에서는 곡식으로 이루어진 밥이나 입자로 이루어진 이미지나 같은 차원에 속한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 낱알 하나씩 먹지 않고, 이미지를 볼 때 입자를 보지 않고 전체적인 형상으로 보는 점도 공통적이다. 숲의 입자는 나무다.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 한다'는 속담은 입자에만 집중하다 보니 전체적인 그림인 숲을 못 본다는 얘기다. 픽셀과 곡물의 차이는 곡물은 무게가 나가고 많이 먹으면 살이 찌지만 픽셀은 아무리 봐도 살이 찌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매일 일정한 양의 곡물을 밥, 빵 등 일정한 방식으로 먹으면서 곡물의 질서, 혹은 곡물의 원근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즉 곡물을 소비하는 패턴을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곡물을 소비한 수 천 년의 역사 동안 곡물을 소비하는 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한국 사람은 수 천 년 동안 쌀을 끓여 밥을 먹고 있고, 서양 사람들은 수 천 년 동안 밀을 빻아 빵을 구워 먹고 있다. ● 물질적 특성에 강력하게 묶여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곡물을 대하는 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반면, 픽셀을 대하는 방식은 디지털 기술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크게 변했다. 즉 누군가 픽셀에 명령을 주기 시작하면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픽셀이 아무리 디지털 세계의 의미의 근간이자 토대라고 해도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의미체계에 따라 픽셀을 배치해주는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에서 중요한 것은 그 물질적 속성이 아니라 그것을 작동하게 하는 알고리즘이다. 그래서 미디어 이론가 레브 마노비치는 주장한다. "소프트웨어가 명령한다"라고. 그의 책제목이기도 한 이 말은 『Software Takes Command』의 번역인데, 나는 "소프트웨어가 장악한다"라고 번역하고 싶다. 이는 내가 대형 컨테이너선을 탔을 때 직접 확인한 것이었다. 컨커테이너 1만 1천개를 싣는 10만 톤의 쇠 덩어리로 된 배를 지배하는 것은 결국 소프트웨어였다. 배의 항법을 정해주는 오토파일럿에서부터 그 많은 컨테이너들을 어디에 어떤 순서로 실을지 정해주는 것도, 바다의 험한 날씨에 배가 어떻게 적응하여 항해할지 정해주는 것도 소프트웨어였다.

황규태_pixel; 봄_피그먼트 프린트_100×75cm_2017

황규태에게는 어떤 소프트웨어가 있을까? 그 문제는 황규태의 작업의 제일 밑바닥에 무엇이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나는 그것을 유희하는 정신이라고 부르고 싶다. 즉 노는 정신이다. 물론 우리는 항상 픽셀을 가지고 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정해진 방식과 경로에 따라 다루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노는 것은 아니다. 논다는 것은 고정된 것을 풀어헤쳐서 다른 조합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즉 사고의 유연성과 유머가 결합해야 진정으로 놀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진을 대하는 방식에는 유머가 결여돼 있다. 그저 남들에게 배운 대로만 하는 것은 유머가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비틀어서 엉뚱한 맥락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유머다. 황규태의 작업에는 유희와 유머가 넘친다. 그가 픽셀을 풀어헤쳐서 화려한 색의 패턴으로 만든 작업에서는 색의 유희가 보이고, 심각한 것을 심각하지 않게 풀어내는 그의 유머가 보인다. ● 황규태에 대한 글을 쓰면서 딱딱해지면 뭔가 걸맞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장난삼아 황규태의 작업이 담긴 jpg 파일을 확대해 본다. 그 끝에는 역시 픽셀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 픽셀들을 또 확대해 본다. 또 픽셀이 나타난다. 인형 속에 또 작은 인형이 끊임없이 들어 있는 러시아의 전통인형 마트료시카처럼, 픽셀 속에 또 픽셀이 있고 이런 사이클은 끝이 없다. 기호에 궁극적인 의미인 기의(signified)는 없고 기표(signifier)만 있다는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의 말은 픽셀에 대해 아주 정확히 들어맞는다. 픽셀을 아무리 확대해 봐도 픽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픽셀을 지배하는 원리도 찾아낼 수 없다. 그런 것들은 픽셀을 떠난 차원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황규태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을 '픽셀 탐험의 선구자 황규태'라고 한 것이다. ■ 이영준

황규태_pixel; 가을_피그먼트 프린트_100×75cm_2017

사진이 갖고 있는 기능을 인정하면서 ● 나는 사진에 대해서 오랫동안 이의를 제기 해왔다. 여기에 보여주는 사각형의 반복된 증식은 010101(2진법)의 수학이기도 하고, 기계가 놀아낸 마술이기도 하며, 사진을 확대하였고 인화지 위에 인화했으니 사진이기도 하다. ● 내 사진은 기계의 내장에서 소화되어 形態素로 전환된 '자동기술 복제시대'의 사생아이다. 그러나 무엇을 흉내냈거나 모조품은 아니다. 진짜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더 생생하게 '파생실재(장 보드리야르의 Hyperreal)'로 파종했을 뿐이다.(파종; 의학용어로 장기에서 장기로 전이되는 것) 나는 사진에 불충하면서 창조적 행위에 집중하지 않는 데까지 왔다. ● 나의 작업이 재현을, 대상을 파괴하는 자멸행위였든 '차갑거나 매우 차가우면서도 완전히 유희(앤디 워홀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말 중에서)'와 환희가 되는 것은 무의미의 내 제전(rite)에서 추는 내 무의미의 춤이기 때문이다. 나의 pixel 작업은 사진에 대한 나의 異意이면서 사진에 바치는 헌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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