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의 스펙타클, Spectacle of a

한슬展 / HANSL / painting   2017_1108 ▶︎ 2017_1120

한슬_스펙타클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9.5×122.5cm_201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40528d | 한슬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에이블 파인 아트 엔와이 갤러리 서울 ABLE FINE ART NY GALLERY SEOUL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69(화동 127-3번지) Tel. +82.(0)2.546.3057 www.ablefineartny.com

한슬은 매 전시마다 자신의 문제의식을 심화시키며 새로운 전망을 열어가고 있다. 이번 전시 제목 『ɑ의 스펙타클』展은 상황 주의 인터내셔널의 핵심 개념을 끌어들이면서 네오 팝, 누보 팝으로 이어지며 자본주의 소비체제와 결합하기 위해 한없이 가벼워지는 팝아트에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한슬의 비판성은 아마도 활동 초기부터 내재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09년 전시에서 다른 패션 소품들 중에서 유독 구두에 매혹되는 이유는 다른 것과 달리 구두는 몸매에 관계없이 착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패션상품들에 매혹되면서도 그것이 여성의 이상적인 신체를 제시하여, 현실에서 여성들의 육체를 통제하며 등급을 매기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 지금껏 작가는 작품을 통해 자신을 명품에 매혹된 상품물신 숭배자로 제시해왔다. 작가는 각각의 상품이 차이들을 상품에 새기는 방식을 섬세한 디자인 감각으로 포착하는 능력을 지녔다. 이 능력은 소비주의에 길든 욕망과 결합하여 작가로 하여금 상품의 외관을 그 자체로 오브제로 선택하게 해주었다. 꼭 명품이 아니더라도 대량생산된 다양한 일상용품 하나하나가 작가에게는 시각적 쾌락을 제공하였으며, 작가는 이 쾌락을 관람자와 나누기를 원했다. 이러한 전략은 1990년대 들어 한국사회에서 전개된 자본주의적 소비문화 및 동구권의 붕괴와 함께 급작스럽게 전개된 이데올로기적 이완, 혹은 이데올로기적 전향의 분위기 속에서는 구질구질한 이전 세대를 무색하게 만드는 발랄한 저항일 수 있었다. 이 분위기는 비록 1997년 IMF 위기로 잠시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2000년대 초중반까지 이어졌다. 바로 한슬이 자신을 팝아트 작가로 세상에 알린 시기였다. 이 "즐기라!"는 자본의 명령에 환호하던 시기에 팝아트 작가에게 심각한 문제의식은 불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 작가 자신을 물신숭배자로 제시하는 전술은 아마도 VOGUE지 연작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사이 작품이 선택하는 대상에 꾸준한 변화가 있었다. 오브제들은 일상용품에서 글로벌한 브랜드 가치를 갖는 패션 명품으로, 다시 명품이 디스플레이 된 고급매장이 있는 거리로, 결국 온갖 명품들이 비현실적인 외모를 자랑하는 패션모델과 함께 휘황찬란한 사진으로 수록된 패션잡지 표지를 회화적으로 복제하는 행위로 이어졌다. 이 행로는 상품물신에 대한 작가 자신의 매혹을 추상화하는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간 한슬의 팝아트에서 진정한 오브제는 물음표였다고도 할 수 있다. '대체 저 대상은 무엇이기에 나는 매혹되는가?' 이 집요한 물음에서 우리는 금욕적인 구도자의 이미지를 상상해서는 안 된다. 물론 명품이라는 연못 속의 거울 이미지에 고착된 나르시스의 모습을 떠올려서도 안 된다. 그것은 아마도 프로이트가 「나르시시즘 서론」에서 "새로운 심리적" 행동이라고 말한 것일 텐데, 대상에 매혹되어 자기의 정체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행위로서의 사랑, 혹은 오브제에 대한 매혹이 예술가를 끊임없이 새로운 존재로 고양시키는 승화이다.

한슬_스펙타클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9.5×122.5cm_2016

한슬이 매체를 다루는 방식도 이 물음과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작가는 오브제가 재현된 사진이미지를 매우 작은 평면들로 잘게 쪼갠다. 한슬이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인 마스킹 테이프 기법은 하나의 작품에 수백 번의 실크스크린 작업이 수행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작업은 부분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그리고 작업을 위해 화면에 접착된 테이프가 이미 작업된 면을 가리기 때문에, 작업된 부분이 기존의 전체 화면 안에서 발생시키는 효과는 작업을 마치고 아크릴물감이 마르기를 기다린 후 테이프를 떼어낸 후에나 알 수 있다. 효과가 부적절하다면 다시 작업해야 한다. 이는 부분이 전체에 미치는 효과를 탐색하는 집요한 과정이다. 이는 또한 물신숭배자로서 한갓 사용가치를 지닌 상품을 명품으로 만드는 X를 찾아 헤매는 반복강박이자 고통스러운 향락의 과정이다. 테이프를 떼어낼 때 발생하는 미세한 가는 선들은 도착된 쾌락의 전리품들이다. 매끄러운 표면을 지닌 실제의 상품 대상들과 그것을 재현한 사진 표면과 달리 작품 화면의 마티에르는 까슬까슬하다. 그 거친 표면들은 질문과 함께 수행된 집요한 분할작업의 결과물들이다. ● 이 미세한 흔적들은 작품의 제작과정을 이해하지 않고 또 화면을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는다면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이런 흔적들은 일종의 작가적 표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마나 한 얘기지만 작가가 일상용품이나 고급 명품 혹은 잡지 표지를 화면에 재현하는 것은 사실적인 재현 능력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작가는 자신의 내밀한 욕망을 드러내고 있으며, 소비사회를 사는 예술가로서 자신이 매혹된 대상 앞에서 자신은 물론 대상 그 자체와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하는 상품으로 유통되는 세계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시 행위에는 자신의 의문을 관람자와 공유하고자 하는 일종의 문제제기로 생각할 수 있다. ● 한슬의 작품이 상품 그 자체의 물신성에 대한 탐구에서 대상이 물신성을 갖게 되는 맥락에 관한 것으로 질문을 옮긴 시점은 VOGUE지 연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패션잡지의 지면을 차지하는 것은 대개 광고사진이지만, 이러저러한 기사들도 함께 제공된다. 연예계 및 유명인사들의 소식에서부터, 성공한 상류층들의 일상 그리고 인류학적 관심의 외양을 띠지만 실은 타자성에 대한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이국적인 문화나 사건에 관한 이야기들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 상품문화를 자연스럽고 영원한 것으로 만들며, 독자의 소비욕망을 자극하는 동시에 정당화한다. 패션 잡지는 광고 비즈니스, 유명인의 동정, 부르주아와 그 대리자들의 일상, 비서구의 문화 등 분명 현실의 일부를 제시하지만 그것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내는 세계는 분명 상품의 생산관계를 삭제하고 그것을 매혹적인 물신으로 나타나게 만드는 환상의 세계이다. 한슬은 상품이 물신이 되는 하나의 계기를 짚은 것이다. 그림 전체를 VOGUE지의 표지를 확대 복사한 이미지로 채우는 도발적인 시도는 자신을 물신숭배자로 제시하는 팝아트 예술가가 갈 수 있는 한계지점이자 문지방이었다. ● 2014년의 전시부터 한슬의 그림은 정물화, 혹은 "사물 초상"에서 풍경화로 바뀌었다. 패션모델의 이미지로 가득 채워진 대형광고판이 있는 거리 풍경을 잡지나 작가가 촬영한 사진 이미지를 예의 수많은 색면들로 분할하여 재조합하는 방식이다. 작가는 사진 이미지들을 일정하게 변형하였지만, 원근법으로 포착된 풍경 자체는 현실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점부터 작가는 자신을 더 이상 물신숭배자로 제시하지 않는다. 작가는 매혹적인 상품에 대해 거리를 확보했으며 이것들을 현실적인 맥락 안에서 보기 시작한다.

한슬_스펙타클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7cm_2017

이제 이번 전시 제목으로 사용된 개념들과 더불어 본격적인 그림 감상에 들어가 보자. 작품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스펙타클」이라는 제목 아래 일련번호가 붙은 작품들은 거대한 광고판이 있는 대도시의 거리 풍경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게 아니다. 광고판처럼 보이는 것에는 상품명은 물론 어떤 선전 문구도 없다. 단지 마네킹 모델의 얼굴을 마치 스냅사진처럼 포착한 클로즈업 이미지들이다. 이 이미지들은 패션지의 모델 사진이나 거리의 광고판을 찍은 사진에서 모델의 얼굴만 오려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원근법적으로 포착된 대도시 풍경으로 보이던 배경도 현실의 한 장면이 아니다. 대도시의 마천루나 광고판들이 있는 거리 사진들에서 오려온 것들이다. 그렇다면 「스펙타클」이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들은 포토몽타주를 회화로 재현한 것이다. 물론 먼저 포토몽타주를 제작하고 이를 회화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포토몽타주 과정은 작가의 구상 속에 있었을 것이다. ● 사진들을 몽타주하는 기법은 포토콜라주를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 다다의 일원인 한나 회흐, 라울 하우스만, 그리고 조지 그로스와 존 하트필드는 1919년 이래 포토몽타주 기획을 전개한다. 이곳저곳에서 구하거나 오려낸 사진들을 나열하고, 이를 회화적으로 처리한 그들의 작업은 강력한 정치 이데올로기적 비판성을 가졌다. 아울러 이미 사진 이미지가 시각세계에 보편화되어 자본주의 체제를 자연화하고 있는 상황을 미학적으로 저지하고자 하였다. 대중문화 생산물들을 통해 대중문화가 만들어내는 환상을 해체하려한 이들의 전략은, 한슬이 포토몽타주를 끌어들인 팝아트에 '스펙타클'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를 설명해준다. 물론 현실적 환영을 유지하기 위해 포토콜라주는 은밀하게 도입되었으며, 우리는 그림들 안에 모노톤으로 처리된 몇 개의 오브제들을 통해서 이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 한슬의 그림 제목 '스펙타클'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구경거리나 장관 등을 말하는 사전적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을 이끌었던 기 드보르의 저작 『스펙타클의 사회』 (이경숙 옮김, 현실문화연구 1996)를 참조한다. 221개의 테제들로 이루어진 이 책은 서구사회가 소비 자본주의로 진입하는 벽두에서, 이 흐름을 기계복제 이미지가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드보르는 이 흐름이 인간을 궁극적으로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 분리시키는 디스토피아로 귀결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 속에서, 이 흐름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와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가능한 자원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테제 34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스펙타클은 하나의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이다." 기 드보르에 따르면 "스펙타클은 상품이 사회적 삶을 총체적으로 점령하기에 이른 계기이다(테제 42)." 마르크스는 상품물신 개념을 설명하면서 상품들의 관계가 인간들의 관계를 대체한다고 주장하였다. 기 드보르는 이 대체 과정을 추동하는 기제가 광고 이미지를 비롯해 대량생산되어 유통되는 대중문화 이미지라고 본다. 우리의 삶은 넘치는 광고 이미지를 비롯해, 다양한 매체들이 쏟아내는 이미지들의 바다 속에 있다. 이미 우리들의 삶이 이미지들의 콜라주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드보르는 이 이미지들의 콜라주가 어떤 세계상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한슬_스펙타클7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7cm_2017

"삶의 각각의 측면에서 떨어져 나온 이미지들은 공통의 흐름 속에서 융합된다. 그 흐름 속에서 삶의 통일성은 재건될 수 없다. 편파적으로 관찰된 현실이 자체의 고유한 일반적 통일성 속에서. 별개의 거짓 세계, 한갓된 관조의 세계로 펼쳐진다(테제 2)." ● 이제 우리는 어째서 한슬의 『스펙타클』展 연작들이 은밀하게 포토콜라주를 원용하면서도 현실적인 환영을 만들어내는지 이해할 수 있다. 작품 속의 세계는 스펙타클이 만들어내는 환영으로서의 현실이다. 이 현실의 대부분은 광고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성된 도시 풍경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그 자체로 이윤을 창출하는 상품이다. 지난 전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한슬의 도시에는 인간들이 없다. 상품들이 삶을 점령하고 인간들을 식민화했기 때문이다. 이 물신의 도시에 거주하는 시민들은 상품들이다. 이 도시는 원색의 상품들을 선전하는 광고이미지들로 인해 형형색색의 빛깔들을 지녔지만 어딘지 모르게 고요한 죽음의 분위기로 뒤덮여 있다. 광고판과 건물들 사이 혹은 그 위로 보이는 밤하늘의 구름들은 도시의 조명을 받아 비현실적인 색조를 띤다. 화면에서 유일하게 역동성을 가진 밤하늘은 그림 전체에 불길한 긴장을 드리우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 「스펙타클」 연작의 주요 모티브인 광고판 속의 마네킹 모델의 클로즈업을 보자. 한슬은 백인 여성 모델의 얼굴만을 클로즈업하고 있다. 광고에서 백인 여성 모델과 비서구 여성 모델의 역할은 분화되어 있다. 즉 그들이 소구하는 정동은 다른 것이다. 단순하게 구분해보면 백인 여성 모델은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제시되며, 상품에 권위를 부여한다. 반면 비서구 여성 모델은 상품을 오리엔탈리즘이 구축한 환상과 신비로 감싸는 기능을 한다. ● 광고, 특히 패션광고 속의 여성 모델들은 마치 낭만적이고 에로틱한 한 순간을 포착한 듯 스냅사진처럼 촬영된다. 모델들의 시선은 대개 정면을 응시한다. 그들의 눈길이 정면을 응시해 광고를 보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든 아니면 비스듬히 눈길을 피하든, 사진 속의 그녀들은 우리가 자신들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여기에는 단순한 유혹 이상의 것이 있다. 특히 백인 여성 모델들은 오늘날과 같은 이미지 시대에 결코 남성 가부장의 관음증적 시선의 희생자가 아니다. 오늘날 인기 연예인들이 사회지도층을 자임하듯, 백인 여성모델들은 현실 세계에서 사회적인 명사로 추앙되고 있다. 인기연예인들이 투자한 주식에 개미 투자자들이 몰리는 현상은 그들이 대중들의 선망 속에서 권위와 전문성을 가진 존재로 이미지화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한슬의 작품에 재현된 마네킹 모델의 클로즈업은 스펙타클의 기표, 즉 "하나의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의 기표이다. 다시 말해서 백인 여성 모델이 얼굴은 자본의 권위를 대표하고 있다. 물론 모델은 자본가가 아니며 자본 그 자체는 더더욱 아니다. 단지 모델은 신체적 아름다움을 통해 자본의 권력을 대리한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한슬_스펙타클8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7cm_2017

라깡은 프랑스 68혁명 이듬해에 "정신분석의 이면"이라는 제목이 붙은 자신의 17번째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상황이 변화했으며 주인담론의 시대에서 대학담론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다. 그는 자신의 독특한 담론이론을 통해 인간이 구성할 수 있는 네 가지 사회적 관계들을 수식으로 보여준다. 이 수식을 구성하는 수학소들은 네 개, 즉 S1, S2, $ 그리고 ɑ다. S1은 주인기표를 S2는 지식을 그리고 $는 주체를 ɑ는 잉여향유를 의미한다. 이 수학소들이 도식에 놓이는 위치에 따라 담론의 유형이 결정되며 그것은 주인담론, 히스테리담론, 대학담론, 분석가담론이다. 도식은 다음과 같다.         행위자         타 자     --------   --------       진 리         생산물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참조하고 있는 이 도식을 문장으로 만들어 읽으면 이렇다. '행위자는 타자의 정체를 규정하고 그에게 행위자를 위한 노동을 요구한다. 타자의 노동은 생산물을 낳으며 그것은 행위자의 진리 혹은 진실이다.' 가장 기본적인 담론은 주인담론이며 다음과 같이 표시된다.         S1        S2     ----- → -----       $          ɑ   문장으로 읽어보면, '주인의 진실은 분열된 주체이다. 주인은 지식을 규정하며 자신을 위한 생산물을 요구한다. 지식은 잉여향유을 생산한다.' 여기에서 타자의 자리에 위치한 지식은 주인의 요구에 따라 일하는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외되지 않은 노동은 그 자체로 지식이다. 대학담론은 다음과 같이 표시된다.         S2          ɑ     ----- → -----       S1          $   역시 문장으로 읽어보자. '지식은 잉여향유에 요구하고 잉여향유는 분열된 주체를 생산한다. 지식의 진실은 주인, 즉 주인의 권력이다. 라깡은 대학담론이 주인담론의 다른 판본이라고 주장한다. ● 복잡해 보이지만 이 도식은 「스펙타클」 연작 속의 환영적인 도시를 압도하는 백인 여성 모델들의 얼굴 클로즈업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명쾌하게 밝혀준다. 다시 강조하지만, 모델 이미지는 여성의 이미지이지만, 온갖 촬영기법과 사진 텍스트 외부의 맥락에 의해 신적으로 격상된 지식의 이미지이다. 소비자본주의의 광고논리를 의식하며 대학담론을 다시 읽어보자. '지식은 실재적인 존재를 상징적으로 규정한다. 지식에 의해 그들은 소비주체가 된다. 그러므로 지식의 진실은 소비자본주의의 진정한 권력, 즉 자본이다.' 소비자본주의는 억압적인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테크노크라트들이 '객관적'이라고 강변하는 지식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세계의 진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학의 인기학과를 결정하는 것은 그 학과가 다루는 지식이 인간의 삶과 관련된 중요한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그 학문이 보장하는 경제적인 미래이다. 우리는 케이블 TV에서 지식의 진실이 자본 권력이라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체험한다. 예를 들어 채널 A에서 방송되는 건강정보 프로그램에서 유명한 의사가 나와 특정한 질병에 좋은 음식을 소개하고 있다면, 동시에 홈쇼핑 채널 B에서는 바로 그 식품을 판매하고 있는 것이다.

한슬_스펙타클9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7cm_2017

다시 기 드보르의 말에 귀 기울여 보자. ● 스펙타클이 번쩍거리며 다양하게 바뀌는 중에도, 진부함이 현대사회를 지배한다(테제59). ● 유명인사, 즉 살아있는 인간의 스펙타클적 표상은, 그럴듯한 역할의 이미지를 체현함으로써 이런 진부성을 체현하고 있다. 스타가 된다는 것은 겉치레로 살아가기에서 전문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스타는 실제로 삶을 지배하는 파편화된 생산적 진부화를 보장받아야만 하는 텅 빈 겉치레 삶의 동일시 대상이다(테제60). ● 그렇다. 스펙타클은 소비주체의 삶을 몰개성으로, 겉치레로, 궁극적으로 자기 소외로 이끈다. 하지만 한슬의 그림이 결국 절망에 이르는 바로 이런 비판을 위한 것인가? ● 이제 「ɑ」 연작들을 보자. 「스펙타클」 연작에 비해 소품들인 「ɑ」 연작들도 동일한 형식을 가졌다. 광고판의 프레임에 갇힌 백인 여성 모델의 얼굴이 극단적으로 클로즈업되었으며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광고프레임 밖으로 보이는 다른 간판들이나 수풀이 광고판이 세워진 장소를 불확실하게 지시해줄 뿐이다. 특별한 점은 광고프레임 안의 모델의 얼굴이 흑백 모노톤으로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화면 상의 가장 중요한 오브제를 모노톤으로 처리하고 주변 배경에 색감을 준 것은 모델의 얼굴에 흑백 다큐멘터리 영화가 자아내는 진실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것일까? 그렇다면, 「ɑ」 연작들은 소비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여성적 이상에 대한 작가의 선망과 "텅 빈 겉치레 삶에 대한 동일시"를 보여주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만약 거기에 선망과 동일시가 있다면 그 흔적들일 뿐이다. 우리는 모노톤을 흔적의 표시로 보아야 한다. ● 우선 'ɑ'가 어떤 의미를 갖는 상징인지 살펴보자. ɑ는 라깡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 중의 하나로 욕망의 원인 대상을 말한다. 오브제 쁘띠 아(objet petit ɑ)라고 읽는다. ɑ는 '타자'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autre의 첫 글자이다. 라깡 사상 초기에는 상상적 동일시의 대상인 '소타자'를 의미했지만, 후기로 갈수록 그 의미는 약화되고, 획득할 수 없는 불가능한 대상이라는 의미가 중요해진다. 그것은 욕망을 작동시키는 대상이자 충동의 대상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라깡 정신분석학은 어머니의 젖과 젖가슴을 구분하는데, 젖이 아이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실재적인 대상이라면, 젖가슴은 거세 이전의 아이와 어머니의 신화적인 관계를 환기하는 영원히 상실된 대상이다. 이 완전한 만족이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되는 어머니와 아이의 이자관계는, 곧 금지하는 아버지에 의해 중지되어야 할 근친상간 관계이기도 하다. 인간이 타자나 어떤 사물에 매혹되는 이유는 대상에게서 바로 이 대상 ɑ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환영적 대상인 동시에 실재적 대상이며 또 상징적인 대상이다. 이 이유는 대상 ɑ가 상징계와 실재의 경계에서 존재하면서 완전한 향유의 환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소비자본주의 사회의 상업광고는 특정한 상품소비로 완전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기만적인 약속을 한다. 물론 완전한 만족은 없으며 약속은 파기된다. 소비자본주의는 신상품이라는 새로운 약속으로 유혹한다.

한슬_스펙타클10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7cm_2017

「ɑ」 연작이 선망과 동일시의 표현이라면, 그래서 상품에 대한 예찬이며, 그 상품을 통해 주체의 정체를 확인해주는 신적인 권위자에 대한 경배라면, 백인 마네킹 모델들의 얼굴은 화사한 색채로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모노톤으로 처리된 얼굴들은 선망과 동일시의 흔적이다. 과거에 선망과 동일시가 있었고 강력한 리비도 투자가 있었다면 이제는 빛이 바랬고 투자는 회수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또한 작가 자신의 과거의 정체에 대한 애도이기도 하다. 백인 마네킹 모델을 선망하고 동일시하던 한슬은 이제 여기에 없다. 흑백 모노톤이 죽음을 암시한다면 거기에는 물신주의자의 죽음이 적혀있다. ● 한슬은 어떻게 물신주의자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그것의 죽음을 바라볼 수 있었을까? '승화'라는 개념이 그것을 설명해 줄 수 있다. 대상 ɑ는 매혹의 원인이지만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대상 ɑ는 욕망을 작동시키기도 하지만 정작 욕망은 그것에 가까워졌을 때 불안에 떨며 물러선다. 그것은 거세 공포를 환기하기 때문이다. 주체는 거세를 통해 구성되기 때문에 대상 ɑ가 환기하는 거세 이전의 완전한 향유는 주체가 무로 되돌려지는 불안으로 육박한다. ɑ는 욕망의 대상이자 충동의 대상이기도 한데, 충동은 그 주위를 선회하면서 만족을 얻는다. 충동만족, 그것은 가상의 만족이다. 이유기의 아이가 '공갈' 젖꼭지를 물고 평화를 얻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향유과정은 주체가 불안정해지는 과정인 동시에 만족을 얻는 과정이기도 하다. 향유가 '고통 속의 쾌락'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한슬의 작품들이, 「ɑ」 연작은 물론이고 「스펙타클」 연작까지 모두 대상 ɑ에 접근하여 주체를 불안에 빠뜨리고 중동만족을 획득하는 과정이라면 이는 또한 탁월한 승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 과정은 욕망을 억압하지 않고 만족을 획득하는 동시에, 나르시시즘에 고착된 리비도를 되돌려 대상에 투자하였다가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주체를 새로운 존재로 고양 혹은 추락시키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즉 승화는 자기 정체를 위기에 빠뜨리는 과정에서 충동만족을 얻는 동시에 새로운 정체로 고양되는 과정이다. 한슬의 창작과정은 자신을 매혹하는 대상을 회화적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이 과정은 또한 대상 ɑ에 접근하여 자신의 정체를 무와 만나게 하는 과정이며, 새로운 존재로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과정은 한슬의 활동 초기부터, 다시 말해서 자신을 스스럼없이 물신주의자로 공표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자신의 대상을 끊임없이 바꾸고 그 맥락을 쉬지 않고 확장시킬 수 있었던 힘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 과정은 작가 자신의 정체를 다시 또 다시 갱신하는 과정이었다. 한슬은 이제 물신주의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다른 무엇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한슬은 자기를 갱신하는 과정 속에서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 라깡은 승화의 일환인 사랑관계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들의 관계는 1 + ɑ로 표시할 수 있다. 조운 콥젝은 여기에서 ɑ는 사랑받는 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상에게 리비도 투자한 주체의 나르시시즘은 빈곤해진다. 그는 자신을 비운다. 그리하여 자신을 넘어선다. ● 한슬의 작품들은 반미학 혹은 탈승화의 자장 안에 있는 팝아트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으면서도 승화의 제스처로 장르의 경계를 내부에서 동요시킨다. 작가의 작품 세계가 작가와 더불어 열려 있는 만큼, 팝아트의 영역도 열려 있다. 예술은 죽을 수 없다. ■ 정혁현

한슬_스펙타클1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1.5×122.5cm_2017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접할 수 있는 모델의 이미지들이 나를 매혹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서양인의 화려한 외모와 서구식 생활 방식과 문화를 동경하며 '아름답고',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것으로 당연히 받아들인 것일까? 우리는 서양의 이미지를 잠재의식 속에서 당연한 것으로 흡수하고 생활에서 표준으로 삼으며 일상적으로 소비해 왔다. 나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께 선물(옷, 신발 등)을 받을 때 '○○ 메이커야'라고 하는 말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상품의 사용가치보다는 브랜드의 이데올로기적 의미가 작용하는 시대를 살아온 듯하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고3인 성시원이 아버지에게 그 당시 유행하던 브랜드(마리떼 프랑소와 저버)의 청바지를 사달라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그 시기에 여러 브랜드(게스, 유즈드, 닉스 캘빈 클라인 등)들이 유행했고, 그 때쯤 나는 처음으로 몇 달치의 용돈을 모아서 친구들과 백화점에 가서 청바지를 샀던 기억이 있다. 더 좋은 브랜드를 살 수 있는 친구를 부러워했던 기억도 있다. 더 좋은 브랜드는 더 비싼 가격이었기 때문에. 그 시기에는 청바지를 입은 것이 아니라 메이커 브랜드의 가치를 입었다. 그것을 입지 않으면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라도 되는 듯이…. 나는 광고 속 인물과의 동일시가 제품 구매를 통해 가능할 수 있다는 광고의 작용들로 인해 자본주의 시스템이 요구하는 대로 길들여지고 맞추어진 소비의 주체이기만 한 것일까? 그러한 이유로 내가 선택하는 모델의 이미지가 모두 신격화되고 미의 상징이자 기준이 되는 '서양인' 모델인 것은 아닐까? ● 어느 도시이건 화려하고 번화한 쇼핑거리를 볼 수 있다. 그곳은 언제나 사람들이 부쩍 거리고, 관광명소로 손꼽히기도 한다. 소비 환상을 만들어내는 쇼핑거리의 화려한 쇼윈도우, 백화점의 디스플레이, 명품 매장이나 상품의 소비를 부추기는 광고 이미지들은 사람들을 더 끌기 위해 저마다의 모습을 뽐내듯이 즐비하다. 이곳에서는 개개인의 주머니 사정이 어떤지 그 개개인들의 개인사나 취향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의 개별성은 사라지고 '소비하라'는 하나의 목적만을 강요받는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반복적인 소비 시스템에 자발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소비 시스템은 그들을 하나의 목적에 순응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기획에 의해 환상은 현실을 포장하고, 소비자는 부지불식간에 소비자의 생활태도, 가치, 습관 등이 변화된다.

한슬_a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38cm_2017

그림 안에서 이러한 쇼핑거리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도심부의 곳곳엔 여러 전광판들이 서로 경쟁하듯 나열되어 있고, 그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위치의 모델 이미지는 소비자들을 현혹한다. 광고 속의 모델들이 가장 이상적인 기준으로 제시하는 세계를 우리는 자신들의 구체적인 현실로 인정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동일한 존재, 어떤 개별성도 없이 대체 가능한 대량생산된 부품들로 전락한다. 개개인의 사정이나 인생 등은 사라지고 작품 속 그 어디에도 사람들은 없다. 그저 빌딩 사이로 보이는 하늘만이 개개인의 사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 이글거린다. ● 개별성도 없이 동일화되고 그것을 요구하는 시스템에 의해 포장된 환상의 세계, 대타자의 욕망만만을 쫓으라고 요구하는 무분별한 세계, 욕망의 주체는 사라지고 소비의 주체만 존재하도록 종용하는 세계를 작품 안에서 재구성한다. 나는 이번 작품들에서 모델의 이미지/ 쇼핑거리의 이미지/ 건물의 이미지/ 광고 이미지들을 퍼즐을 맞추듯이 이미지를 재구성하여 다른 공간(다양하고 흥미로운 시각적 요소가 가득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 이렇게 재구성된 도시는 (인형과 곱사등 난쟁이에서 장기자동기계의 조작처럼) 소비 자본주의 시스템을 보여준다. 현재 소비문화에서 크게 대두되고 있는 고객의 구매정보를 분석하는 빅데이터 마케팅이 있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감시당하고, 우리의 구매의사까지 파악하고, 구매를 종용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는 쉽게 경험할 수 있는 리타겟팅 광고가 있다. 인터넷상에서 내가 검색했던 상품들에 관한 광고가 인터넷 뉴스나 동영상을 보는 동안에 그 인터넷 창 주변에서 베너 광고로 얼쩡거린다. '너 이거 필요하지?'라고 하는 것만 같다.

한슬_a7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38cm_2017

●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러한 세계는 (영화)매트릭스와 무엇이 다를까? 이글거리는 하늘은 매트릭스 세계 밖의 황무지 같은 실제의 하늘, 조작된 세계가 아니라 어떠한 사건이라도 일어날 수 있을 법 한 분위기를 암시한다. 환상이미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조작하는 배후의 모습, 혼돈의 하늘과 환상이미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사건이 벌어지고 그것을 다 알기라도 하는 것 같은 모델들의 표정은 작품 속에 쇼핑거리를 지배한다. ● 나의작업은 쇼핑거리의 풍경을 반복적으로 재현한다. 이러한 반복은 작품제작 방법에서도 찾을 수 있다. 화면에 테이프를 찢어 붙이고 색칠을 한 후 그 테이프를 떼어내는 행위를 반복한다. 그런 작업 방식에서 작품의 이미지는 균일하지 않은, 중첩된 여러 겹의 층이 생긴다. 이렇게 표현된 표면은 우연한 효과가 나타나고, 가까이 들여다보면 뜯겨진 껍질처럼 거칠다. 색 면들을 껍질처럼 쌓아 올리는 과정은 소비의 반복 강박과 닮아있다. 같은 행위라도 여러 번 반복되어 다른 결과를 낳는 반성성이 행위가 아니라 자본이 만들어낸 환상의 참조 점에 기대어 똑같은 행동과 결과만을 무수히 반복할 뿐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재현하는 강박이 아닐까? 그동안 거대한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가 생활의 일상 이미지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당연한 결과인 듯하다. 우리는 더 이상 무언가를 스스로 결정 할 수 있는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자본에 의해 대상화된 주체가 되어버린 것 같다. ● 그러한 색 면들을 쌓아가는 반복 행위들을 통해 만들어진 쇼핑거리의 풍경은 자본주의의 소비문화가 '아름답고', '현대적'이며, '진보적'인 것이라며 매혹적인 눈길로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지만,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환상의 장막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나는 캔버스위에 환상의 공간을 재구성하는 반복된 행위를 이어간다. 반복적으로 집요하게 쌓아올린 면들이 그림으로 완성되었을 때 나는 대상화된 주체가 아니라 욕망의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저 반복된 행위 같지만 다른 행위로서 나의 작업을 이어가고 싶다. 이렇게 작업을 통해 동일한 반복 속에 작은 간극을 열어놓길 바란다. ■ 한슬

Vol.20171108d | 한슬展 / HANSL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