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동도 부동도아닌:fluid scape

전은숙展 / JEONEUNSUK / 全恩淑 / painting   2017_1106 ▶ 2018_0102 / 일요일 휴관

전은숙_몬스테라, 트로피칼, 카멜리아_캔버스에 유채_161×161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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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1110_금요일_07:00pm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마리 GALLERY MARIE 서울 종로구 경희궁 1길 35 Tel. +82.(0)2.737.7600 www.gallerymarie.org www.facebook.com/gallerymarie.org www.instagram.com/gallerymarie_

껍질깎기로서의 회화 : 전은숙 ● 전은숙은 작지만 잘 벼린 과도를 들고 자신이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무대를 마주한다. 이윽고 휘두르는 칼날은 일상의 껍질만을 얇게도 깎아낸다. 아니, 저미어낸다. 정성들여 곱게 밑칠한 화폭에 툭툭 던져놓은 껍질들은 깊이가 없고 위계도 없는 무차별의 화면을 구성한다. 그림의 무게중심도 따로 없고 때로는 사이키델릭 펑크한 형광색도 구사하며 수채화처럼 경쾌하고 투명하게 붓질을 해나간다. 특히나 최근의 작업들에서 더욱 그러하다. ● 요즘엔 누구나, 나 같은 아재에게는 노출증이나 허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음식사진, 여행사진 등 나르시스적인 셀카사진들을 끊임없이 찍어대고 SNS에 올린다. 자신이 특별해 보이는 가상 세계를 구축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모두가 엇비슷해 보이는 편재(遍在)하는 범속함에 스스로도 속해 있음을 재확인할 뿐이다. 하지만 뻔한 사진을 찍으면서 소비하는 것과 그것을 그림으로 생산해 내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전은숙_등교길에 남아 있는 풀_캔버스에 유채_161×161cm_2017
전은숙_bomb dummy unit(모의탄)_캔버스에 유채_161×161cm_2017

전통적으로 현실을 그리는 화가는 각종 렌즈를 통해 세계를 해부하거나 거울을 들고 현실을 비추어 왔지만 전은숙은 무심하게 분산된 시선으로 찍은 액정 이미지를, 그 표피의 관능을 세련되게 감각화한다. 마치 관광지의 볼거리에 매료된 여행객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서 출발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깊게 빠져들지는 않는다. 어차피 거주할 것은 아니니까. 그녀는 본질을 괄호 친다. 심지어 대상조차도 괄호 친다. 최소한의 원근감만을 유지함으로써 보는 주체가 두드러지지 않게 하고 인물과 사물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크하고 패셔너블하고 스타일리쉬한 매끈한 회화표면을 만들어낸다. 세상을 해석하는 것도 반영하는 것도 아니고 즉 씹어 먹거나 삼키는 것도 아니고 단지 자신의 섬세한 점막을 자극하는 감각소여에 대해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듯하다.

전은숙_사라진 그림자_캔버스에 유채_45.5×38cm_2016
전은숙_껍질(표피질감) 연구_캔버스에 유채_40×40cm_2017

"나를 내버려두란 말이에요. 나는 깊이가 없어요."(P.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 中)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겠다는 태도. 그렇다고 그녀의 사사로운 그림들을 얕잡아 보지는 말자. 항상 자신을 소실점에 놓고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권력욕에 젖어있는 비평과 이론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감각적인 쾌락에 원초적인 죄의식을 가진 엄숙주의가 얼마나 종종 폭력적이었던가. '나'는 본래 분열되어 있는 것이고 애초에 해체되어 있는 것이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분열적인 '내'가 보는 세상도 파편적일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무정부주의적으로 인정하는 것. 시에 대해 말하기 전에 시적으로 느끼는 것. 그럼으로써 예술가의 감각과 상상력을 미지의 영역으로 끌고 가는 것. 그것이 전은숙이 소녀처럼 함초롬히 앉아 세상의 껍질만으로 마련해 준 풍성한 성찬이 말해주는 것이리라. ■ 공성훈

Vol.20171109h | 전은숙展 / JEONEUNSUK / 全恩淑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