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ft_초안_草案

조현선_김한결_김성윤_서재민展   2017_1109 ▶︎ 2017_1119 / 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175 Gallery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 Tel. +82.(0)2.720.9282 blog.naver.com/175gallery

이번 전시의 시작은 화가로서 드로잉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모종의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화가에게 드로잉은 마땅히 해야 할 책무처럼 느껴지는데, 드로잉은 왜 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우리의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에는 드로잉을 꾸준히 하는 참여자도 있었으므로 질문은 다음과 같이 두서없이 이어졌다. 드로잉이라는 것은 매체적 구분과는 별개로 실체가 있는 것인가? 회화와 드로잉의 경계는 여전히 유효한가? 드로잉을 필요로 하는 회화와 그렇지 않은 회화의 차이는 무엇인가? 드로잉과 회화는 어떻게 서로를 강제하는가? 드로잉을 꾸준히 한다는 것은 화가 개인의 화업에 무한한 미지의 영역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심어 주기도 하고, 경험한 바를 (전체성이나 완성에 대한 부담 없이) 투명하고 직접적으로 매개하고자 하는 욕망 또는 애써 붙잡으려 하는 의지의 표명과도 같다. 그러므로 누군가 작업실 테이블 한 켠에 쌓인 드로잉들을 들춰볼 때 순간 그의 손을 제지하고 싶다면 당신은 '드로잉'을 하고 있는 것이며, 드로잉을 '한다'는 것은 보여주고자 하는 욕망에 앞서야 하는 것이다. 당신은 드로잉을 하고 있는가? ● 오늘날 드로잉은 더이상 회화에 종속되는 부차적인 지위를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드로잉과 회화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처럼 느껴진다. 이미 불안정성을 담보로 시작된 회화는 비결정성을 약속하고 끝맺음 되며, 선은 표면을 뒤덮어 전면에 나선다. 여기서 드로잉과 회화는 서로를 모방하고 그 차이를 없애버린다. 연필과 종이로 상징되는 드로잉의 물리적 실체가 드로잉이라는 매체를 가시화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캔버스와 흑색 안료 또한 그러하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회화 또는 드로잉으로 구분되어 지칭되는 개별적인 이미지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 아니라, 애써 드로잉과 회화를 독립된 영역으로 나눠 어떤 굴레를 덧씌우는 시도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로잉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을 가르는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선과 색, 종이와 캔버스, 수채화와 유화 등과 같은 물리적 차이에 의존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회화에 비해 드로잉을 '한다'라는 행위에는 불완전한 상태가 야기시키는, 예기치 못한 무언가를 기대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드로잉이라는 매체에 관한 물질적인 조건이 아니라, 완성과 미완성, 결과와 과정, 선행하는 것과 뒤따르는 것, 위와 아래, 의식과 무의식, 계획했던 것과 수정된 것 등과 같은 비물질적 대립항을 각자가 진행해오던 회화적 실천 속에 놓아보는 것이었다. 무언가가 불완전하거나 불안정하다는 것은 완전하거나 안정적인 것이라는 대립항 속에서만 가능한 상태일 것이다. 그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은 대립하는 관계 사이에서 운동하기를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보다는 양자 사이를 오가며 갈등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였다. 이번 전시에서 우리가 기대했던 것은 각자의 회화적 실천에서 불완전한 상태로 이행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탐색해 보고, 그로 인해 발생 될 수 있을 어떤 잠재적인 가능성을 모색해 보는 것이었다.

조현선_Camouflaged Orange_캔버스에 유채, 스프레이_112×145cm_2016
조현선_Thumb-Index_종이에 왁스 오일 파스텔, 수성 왁스 파스텔_17.1×16.7cm_2017
조현선_Thumb-Index_종이에 왁스 오일 파스텔, 수성 왁스 파스텔_20.5×23cm_2017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드로잉이 회화를 위해 준비하거나 연습하는 사전 단계라면, 이번 전시에서 조현선은 역으로 완성된 회화를 앞에 두고 사후적으로 진행한 그림을 선보인다. 조현선은 도시를 산책하며 발견한 풍경의 파편적인 요소들을 여러 방식으로 채집-기록하는 것에서 작업을 시작하는데, 이를 작업실로 가져와 회화적 표식으로 가능할 조건을 탐색해보고 이런저런 가공을 통해 최초의 형상을 남긴다. 그림은 경험한 풍경의 어렴풋한 인상으로 촉발되지만 목적지 없이 배회하는 산책이라는 경험이 그러하듯 각각의 선택들이 현실화되고 배치되는 과정은 무작위적이다. 그러므로 다음 단계를 촉발하는 것은 항상 이전 단계의 형상이며, 최종적인 형상은 그림에 앞서 있던 계획이 아니라 각각의 지층들이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 총합은 결국 풀기 힘든 매듭처럼 꼬여버리게 되는데, 이번 전시에서 조현선은 2015년에 제작한 작업 「Camouflaged Orange」로 되돌아가 레이어가 축적되는 과정을 복기한다. 여기서 시간의 축을 되돌려 도출된 각각의 단서들을 좀 더 식별하기 쉬운 기호로 되돌려 놓고 풀어헤쳐 놓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묻는다. 무엇이 다음과 그다음을 결정짓게 만들었나?

김한결_구석_종이에 젯소, 검정 젯소, 목탄, 포스터칼라, 아크릴 바인더_30×30cm_2017
김한결_방 안_종이에 젯소, 검정 젯소, 목탄, 포스터칼라, 아크릴 바인더_30×30cm_2017
김한결_창문_종이에 젯소, 검정 젯소, 목탄, 포스터칼라, 아크릴 바인더_30×30cm_2017

조현선이 그림의 시작으로 되돌아가 계획했던 바와 그에 따르는 일련의 선택들을 신중하게 재검토한다면, 김한결의 그림은 어떤 뚜렷한 계획이나 완성에 대한 의지 없이도 얼마든지 시작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작업실을 옮기게 된 김한결은 갑작스러운 물리적 조건의 변화에 반응하여 그린 작은 회화 6점을 선보인다. 새로 구한 오래된 다가구 주택 작업실의 습한 분위기에 주목한 김한결은 그것을 즉각적으로 그림의 주제로 삼는다. 눅눅함은 재현 가능한 것일까? 눅눅함은 눈에 보이는 것이라기보다는 촉각적인 성질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므로 벽에 핀 곰팡이 같은 공간의 시각적 특질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그 분위기를 환기시키는데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김한결이 그러한 분위기를 담지해낼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하면서 주목한 것은 젯소가 가진 물질성이다. 전시장의 흰 벽에서 미미하게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하얀 얼룩처럼 보이는 그림들은 모두 젯소를 활용한 것이다. 젯소는 물감을 받아들이기에 좋은 조건을 형성해주는 준비 재료이며, 보통은 물감에 뒤덮여 마감 단계에서는 가려진다. 물감 대신 젯소를 그림의 미디엄으로 사용하게 된 계기는 물감을 포함한 짐을 미처 다 옮기지 못한 상황 탓이었는데, 그림을 그리기에 준비가 미흡했던 상황이 눅눅한 작업실 환경에 화학적으로 반응했고, 즉각적으로 그것을 주제로 삼았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젯소는 다른 재료를 붙잡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함께 사용한 건식재료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건식재료의 거친 입자와 뒤섞여 더럽혀진 흔적으로 남게 된다. 이 얼룩들이 눅눅함을 환기시키는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유화나 아크릴의 흰색과는 다른 젯소의 물질성에 의해서일 것이다.

김성윤_Drawing for Staedtler_아르쉬지에 UV 큐어 프린트, 흑연_36×26cm_2017
김성윤_Drawing for Staedtler_아르쉬지에 UV 큐어 프린트, 흑연_36×26cm_2017
김성윤_Drawing for Tombow_아르쉬지에 UV 큐어 프린트, 흑연_36×26cm_2017

김성윤은 종이의 흰 배경과 연필이라는 드로잉의 상징적인 물질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외견상 가장 '드로잉'에 가까운 작업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 김성윤은 앵그르의 드로잉을 가능한 한 똑같이 베끼고, 드로잉에 사용한 해당 제품의 이미지와 함께 구성하여 드로잉을 상품의 이미지로 제시한다. 여기서 드로잉은 거장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자 배움의 의지, 온고지신의 정신을 체현하지만, 상품 로고와 결합된 드로잉은 구매자를 매혹하는 상품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회화를 모사하는 것과는 달리 드로잉을 모사하는 일은 연필 선의 강도나 굵기, 속도를 포함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그 미숙함이 더 크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반면에 구체적인 원본을 갖고 있지 않은 다른 드로잉들은 강도나 굵기, 속도를 달리하며 자유롭게 흰 여백을 가로지른다. 전통은 억압과 굴레로 기능하지만 제 존재를 과시하는 것 외엔 아무런 목적성을 띠지 않는 선들은 약간의 해방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 또 다른 작업은 드로잉과 상업적인 이미지와의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드러낸다. 최종적으로 프린트로 제시되는 이 작업은 스케치북의 레이아웃을 일러스트로 옮겨내고 (스케치북 중앙을 장식하던) 아마츄어 화가가 그린 원래의 그림 대신에, 그가 그린 방식을 따라 제작한 드로잉을 촬영하는 과정을 거치 것이다. 여기에서 종이의 흰 여백은 무언가를 그리게끔 욕망하게 하지만 이내 상업적 이미지로 전락하고 만다.

서재민_호랑이가 있는 방_캔버스에 유채_162.1×227.3cm_2017

서재민은 사전 드로잉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회화로 완성해내는 과정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업은 보통 침실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자신이 꿨던 꿈을 노트에 풀어쓰고, 서술된 내용과 기억을 오가며 그 이미지를 드로잉으로 옮겨낸 후 최종적으로 회화로 완성한다. 이러한 과정은 무엇보다도 정확하게 자신의 무의식을 그려내고자 하는 욕망에서 기인하지만, 이러한 욕망은 텍스트에서 드로잉, 회화에 이르는 의식적이고 구성적인 과정과 분명하게 상충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에 선보이는 신작 「호랑이가 있는 방」은 이러한 모순을 애써 봉합하지 않고, 꿈의 내용보다는 꿈이 발화되는 방식에 주목하고 이를 가시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노트에 쓰인 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큰 방 작업실에 호랑이 한 마리. 날 들여 보내주지 않는다. 에스키모인들의 버려진 가죽 신발을 씹으며 놀고 있다.' 이 수수께끼 같은 메모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림은 메모를 따라 지체없이 그 내용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듯하다. 이 그림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꿈의 분석을 통해 작가의 심리 상태에 접근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물론 그보다 확실한 사실은 그림 속 호랑이는 덧그려지고 더듬거려진 상태로, 크기나 자세 등이 계속해서 수정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 갤러리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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