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ther Ladder

조소희展 / CHOSOHEE / 趙素熙 / photography   2017_1115 ▶︎ 2017_1210 / 월요일 휴관

조소희_아홉개의 사다리_사진_190×146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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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1116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예술공간 수애뇨339 SUEÑO 339 서울 종로구 평창길 339 Tel. +82.(0)2.379.2970 sueno339.com

사다리에 대한 단상다락방으로 올라가는 사다리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갇힌 곳에서 열린 곳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 혼자 힘으로 좀처럼 다다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 때마다 사다리는 우리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데려다주는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 이를테면, 천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다락방은 사다리를 통해 올라갈 수 있다. 어린 시절 우리는 그 곳에서 부모의 눈을 피해 놀이세계를 펼쳤다. 종종걸음으로 사다리를 몇 걸음만 올라가면, 하늘을 나는 꿈도 바다를 항해하는 꿈도 실현되는 장소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 곳은 유토피아까지는 아닐지라도,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유토피아와 같은 기능을 하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헤테로토피아에는 사람들이 영원히 머물 수 없다. 해가 질 무렵, 엄마의 부름 소리가 들리면, 다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일상의 장소로 복귀해야 한다. 저문 해와 함께 우리의 어린 시절은 사라졌고, 다락방에 올라가는 사다리를 타기에는 우리의 몸집이 너무 커졌다.

조소희_아홉개의 사다리_사진_180×146cm_2017

벽에 기댄 사다리 ● 몸집이 커진 우리는 일상에서 계단을 더 자주 이용한다. 계단은 고정되어 있고 안정적인 데 반해 사다리는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는 대신 홀로 설 수 없다. 넓고 단단한 곳에 사다리의 한 쪽을 기대어야 한다. 그러나 견고한 존재에 잘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다리가 자신의 키를 늘이면 늘일수록, 높이 솟으면 솟을수록, 위에서 흔들림은 훨씬 크게 느껴진다. 불안감은 가중된다. 내가 발붙이고 살던 땅이 아닌 더 높은 곳을 꿈꾼 것이 실수였을까. 더 높은 곳으로, 밝은 곳으로, 열린 곳으로 가려는 것이 인간의 욕심일까. 더 이상 초월적인 세계를 꿈꾸면 안 되는 것일까. 지면에 발을 대고 사다리의 밑동을 잡아주고 있는 이는 과연 누구일까. 내가 아는 이일까, 믿을 만한 이일까. 아득하여 보이지 않는다.

조소희_아홉개의 사다리_사진_180×146cm_2017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 ● 야곱은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잔다. 그는 꿈(sueño)에서 천사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본다. 꿈에서 깨어난 후 야곱은 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깨닫는다. 신과 인간,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다리에 대한 생각은 비단 성경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느 시대의 신화나 민담에서 발견된다.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의 「무한주 Coloana Infinitului」 연작도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루마니아의 설화와 고대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초월을 향한 희망이자 외경심, 이것이 있었기에 브랑쿠시는 동일주제를 28년간이나 다룰 수 있었다. 이는 하늘에 닿고 싶은 인간의 염원을 담은 돌로 쌓은 탑과 같은 것이며, 또한 우리가 간절히 원할 때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생명의 동아줄과 같은 것이다.

조소희_아홉개의 사다리_사진_180×146cm_2017

도구존재로서 사다리 ● 한편 어떤 사다리는 누군가에게는 생계의 도구이며, 누군가에게는 생활의 불편을 덜어주는 실용품이기도 하다. 일상적 사물이 도구존재(Zeugsein)로 사용될 때는 사물적 특성, 즉 질료가 우리 눈에 띄지 않는다. 구두가 내 발에 너무나 편안히 맞으면, 걸어다닐 때 구두 가죽의 질감을 내가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알루미늄 사다리든, 목재 사다리든, 실용적인 목적 아래에서 사용될 때에는 알루미늄과 목재는 유용성 안에서 소실된다. 그러나 사다리가 작품존재(Werk-sein)가 될 때에는 질료가 그 성질 안에서 스스로를 보여준다. 예술작품에서 알루미늄은 가벼운 반짝임을 보여주고, 목재는 단단함과 유연함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이처럼 예술작품이 사물의 사물성을 드러내는 것을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탈은폐(aletheia)의 사건이라 했다.

조소희_아홉개의 사다리-빛_사진_65×50cm_2017

실로 된 사다리 ● 여기에 실로 된 사다리가 있다. 실로 된 사다리는 우리가 망각하고 있었던 실의 사물성을 탈은폐한다. 실은 홀로 있을 때는 쉽게 끊어지고, 연약하지만, 다른 실과 혹은 다른 재료와 연합할 때 강해지는 속성과, 서로 다른 두 영역을 매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것은 사다리의 속성과 능력이기도 하다. 사다리도 스스로 설 수 없고 넘어지기 마련이나, 양 극단을 만나면서 그 사이를 연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조소희가 실로 만든 사다리는 더 이상 사람이 그 위에 올라갈 수도, 이동시킬 수도 없기에 도구성을 상실했으나, 작품존재가 되어 전시장 내부도 외부도 아닌 곳에 우뚝 서 있다. 내부와 외부, 하늘과 땅, 현전과 부재, 꿈과 현실,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것이 사다리의 본질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소희_아홉개의 사다리-실_사진_65×50cm_2017

붉은 실로 된 사다리 ● 언젠가 맺어질 남녀는 보이지 않는 붉은 실로 이어져 있다는 동양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리 운명을 바꿔보려 발버둥 쳐도 결국은 그 보이지 않는 붉은 실의 짝대로 인연이 맺어진다는 것이다. 수애뇨339에 설치된 붉은 실로 된 사다리는 일상에서는 보이지 않던 붉은 실들의 가시화로 보인다. 나와 사물, 나와 타인, 타인과 타인, 타인과 사물, 나와 세계, 인간과 신... 무수히 많은 존재들이 맺어가고 있는 관계의 선들이 보여주는 지향성(Intentionalität)은 이처럼 맑은 하늘, 어린 시절 다락방에서 보았던 파아란 하늘이기를 바래본다. ■ 한의정

Vol.20171115h | 조소희展 / CHOSOHEE / 趙素熙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