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異相)한 전시

신성환展 / SHINSUNGHAWN / 申城丸 / media art   2017_1118 ▶︎ 2017_1126

신성환_꽃피는 봄이 오면 Spring ain't here yet_얼음, 생화, DSLR, 빔프로젝터_가변설치_2017 유투브URL_youtu.be/ege2O4EBT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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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7_1125_토요일_04:00pm

관람시간 / 10:30am~06:00pm

갤러리밈 GALLERY MEME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3 Tel. +82.(0)2.733.8877 www.gallerymeme.com

이상(異相)의 환영적 구조 ● '영양이 뿔을 건다'는 말이 있다. 선가(禪家)의 비유로, 『전등록(傳橙錄)』에서 설봉존자(雪峯尊者)가 전한 말이다. 뿔이 앞으로 둥글게 굽어 있는 염소과의 동물인 영양은 맹수들이 땅 위에 난 발자취를 좇아오지 못하게 하려고 잠을 잘 때 굽어진 뿔을 나뭇가지에 걸고 허공에 매달려 잔다고 한다. 그렇기에 영양의 발자취만을 보고 따라가다가는 어느 순간 발자취가 끊어져 버리고, 영양은 사라져버린 것처럼 느끼게 된다.

신성환_꽃피는 봄이 오면 Spring ain't here yet_얼음, 생화, DSLR, 빔프로젝터_가변설치_2017
신성환_꽃피는 봄이 오면 Spring ain't here yet_얼음, 생화, DSLR, 빔프로젝터_가변설치_2017

환영적 구조 ● 《이상(異相)한 전시》는 단어그대로 '이상(異相)'을 보여준다. 신성환 작가가 예술을 사유하는 방식이 이 전시에 고스란히 스며있다. 마치 영양의 발자취를 보며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그 실체를 잃어버리듯이, 신성환의 작품을 떠올리며 사유를 전개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실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작품들을 대했을 때 첫인상은 분명한 지향점을 가진 작품이라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 지향점에 이끌려 작품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지향점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느끼게 된다. 과연 작가가 정말로 그러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는지조차 의문에 빠지게 된다. 이 지점에서 작가가 제시한 것처럼 보이는 편안한 사유의 길은 끊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작품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한다. 분명하고 단일한 메시지를 던지던 작품은 한순간 의미의 무한 확장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치 영양의 발자취에만 관심을 집중하던 팔로워(follower)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영양을 발견하고 그 실체에 일어난 사건을 탐색하게 되는 것처럼, 시선의 전환이 그 지점에서 일어난다. 신성환은 이러한 시선의 전환, 혹은 시선의 교란으로 '이상(異相)'을 드러낸다.

신성환_이상(異相)한 전시展_갤러리밈_2017
신성환_이상(異相)한 전시展_갤러리밈_2017
신성환_이상(異相)한 전시展_갤러리밈_2017

작가의 예술에 대한 태도는 은유적이고 시적이다. 분명 작가는 지향점을 가지고 있고, 사회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자신의 견해도 분명하다. 하지만 작품에서는 그러한 자기 생각을 명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방향으로 작업에 접근했을 때, 모호한 지점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환영이고 환상이다. 신성환 작가는 여러 방식의 환영적 작업을 해왔다. 미학자 임성훈이 "신성환은 기술매체의 빛을 사용하여 볼 수 없었던 사물들을 볼 수 있게 한다"(「지성적이고 아름다운 빛」, 신성환 평론글)고 언급했던 것처럼, 작가의 주요 작업은 빛을 사용하여 환영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빛은 실체를 드러내기도 하고, 실체를 가리기도 한다. 빛은 어둠에서 보이지 않았던 실체를 밝히는 역할을 하지만, 빛으로 만든 이미지는 실체 위에 다른 이미지로 덧입혀 실체와는 전혀 다른 환영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양가적 특징은 단순히 빛을 사용하는 작업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보여준 일련의 설치 작업에서도 내러티브의 교란에 의한 환영적 상황이 연출된다. 작가가 사용했던 상징성이 강한 다양한 오브제들은 고정된 이미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고정된 이미지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양가적 내러티브가 작동하도록 조성해 놓는다. 설치되어 있는 실체에 엮여 있는 양가적 내러티브는 그로 인해 어떤 하나의 결론에 닿을 수 없는 모호한 환영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신성환의 작업 방식은 실체와 환상, 사실과 가능성 사이에서 의미의 자장을 확산시키는 모습이다.

신성환_꽃들에게 희망을 Hope for the flowers_ 2채널 비디오, 사운드, 빔프로젝터_가변설치_00:03:00_2017 유투브URL_youtu.be/NoFG7D1YcX4
신성환_꽃들에게 희망을 Hope for the flowers_ 2채널 비디오, 사운드, 빔프로젝터_가변설치_00:03:00_2017
신성환_꽃들에게 희망을 Hope for the flowers_ 2채널 비디오, 사운드, 빔프로젝터_가변설치_00:03:00_2017

길을 잃고 만나는 무한(無限) ● 작가가 제시하는 이미지와 상태는 명확하게 포커싱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성환의 작업에 쉽게 접근하게 된다. 하지만 그 명확성은 환영적 구성을 위한 하나의 장치로, 작업에 깊이 들어설수록 모호함은 점점 더 가중된다. 그렇다면 이 환영적 조건에서 우리는 작업에 대한 사유의 방향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일까? 모호함의 증대가 작업의 해석 불가능성을 불러오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낯섦이 가져온 심리적 불안이다. ● 익숙함으로 접근했던 실체가 낯섦의 얼굴을 내비쳤을 때, 낯섦에 내포된 위험과 익숙함에 안주(安住)하려는 마음 사이에서 긴장감이 발생하고 낯섦을 향한 모험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하지만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전체성과 무한』에서 말하고 있듯이, 익숙함을 고집하는 것은 자신을 갑갑한 한계 속에 집어넣는 것이고,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다. 낯섦은 언제나 곁에 있는 이웃이다. 우리는 낯섦이라는 이웃을 통해 자아중심적인 존재론적 유한을 벗어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신성환 작업에서 드러나는 낯섦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유한을 벗어나 무한(無限)으로 향하게 된다. ● 이것은 사유의 방향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사유의 방향을 열어주는 것이며, 해석 불가능성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해석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결국, 작가가 작업의 결론으로 향하는 길을 지운 것은 작업의 결론을 무한히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제시된) 사유의 길을 잃어버린 순간에 맞이하는 낯섦의 상태는 결론에 다다르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 상태인 것이다. 이것이 신성환의 작업이 지닌 환상성의 작동방식이다.

신성환_Top 10_2채널 비디오, 사운드, 빔프로젝터_가변크기_00:03:40_2017 유투브URL_youtu.be/2k4zrY5D-vM

'이상(異相)'에는 낯섦에 대한 인식과 환상성이 스며있다. 고정 관념화된 실체가 낯설게 다가올 때, 그것은 환상이자 또 다른 실체이다. 이 이상성은 쉽게 간과하여 지나쳤던 고정된 사유를 흐트러트린다. 신성환은 이 지점을 보았고, 그곳에서 영양이 나무에 뿔을 걸 듯, 실체를 허공에 띄웠다. 이 지점부터 사유는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변한다. 작가는 '이상'의 해석에 "사물이 생기면서부터 사라져 갈 때까지 변하여가는 모양을 이른다"는 불교사상까지 제시한다. 이것은 작가가 관찰자의 시선뿐만 아니라, 대상 자체의 변화와 관찰자 내부의 사유 변화까지 염두에 둔 해석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은 모두 정지되어 있지 않다. 그의 영상 작업이나 프로젝트 맵핑(projection mapping) 작업은 계속 움직이고 있으며, 설치 작업도 변하고 있거나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말하는 '이상'이 단순히 관찰자적 입장에서 '다르게 보이기'(외부)를 말하는 것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나 관찰자 자체가 '다르게 변하기'(내부)까지 모두 포함하는 개념임을 깨닫게 한다. '다르게 변하기'(내부)는 기본적으로 작업의 대상이 변하는 것을 의미하겠지만, 넓게는 작업을 보는 사람의 사유 변화, 즉 낯섦에 들어섰을 때 무한으로 뻗어 나가면서 변할 수 있는 사유 흐름의 변화까지도 포함된 확장 개념이다. ● 작가는 익숙함 속의 낯섦을 통해 '이상'을 보길 원한다. 그래서 신성환의 작업은 무척 익숙하지만, 어느 순간 매우 낯설게 다가온다. 이것이 작가가 예술에서 바랐던 은유이며, 시적 형태이다. 명확히 드러내면서도 그 명확함이 명확한 결론으로 다다르지 않게 하는 방식, 그것이 바로 신성환이 예술을 사유하는 방식이다. ■ 안진국

Vol.20171119f | 신성환展 / SHINSUNGHAWN / 申城丸 / media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