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gue and distinct

박종호展 / PARKJONGHO / 朴鍾皓 / painting   2017_1130 ▶︎ 2017_1216 / 월요일 휴관

박종호_불꽃놀이_캔버스에 유채_194×112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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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블로그_blog.naver.com/noah250

초대일시 / 2017_1130_목요일_06: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 기획 / 이수정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온그라운드2 Onground 2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10길 23 (창성동 122-12번지) 2층 Tel. +82.(0)2.720.8260 www.on-ground.com

가을과 겨울 사이를 구분하는 정확한 일자나 기준점은 없다. 바람이 시원하다가 차가워지는 날, 두툼한 옷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날, 따뜻한 음료가 든든하게 느껴지는 날이 오면 우리는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고 말한다. 계절의 흐름처럼 사람에게도 변화가 일어난다. 딱 잘라 말할 수 있을 만한 기준점이 없더라도 더 이상 어제와 같은 기분이 아닌 날들을 맞이하곤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분이 밝아지지 않는 날이 닥쳤거나,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밝은 기분 속에 휩싸이는 순간이 온다. 사람의 기질이나 성격을 설명할 때 보통 하나로 규정지으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을 여러 기질들을 복합적으로 갖고 있으며, 여러 계기로 인해 조금씩 변화해간다. 그 변화는 무엇이라 한 마디로 정의하지 못하더라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박종호_어느 시절_캔버스에 유채_60×50cm_2017

2006년, 난지 스튜디오에서 박종호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돼지를 그린다는 말을 듣고 "왜?"라고 생각했다. '돼지의 모습에 현대인의 모습을 비유했다'는 설명도 들었지만, 솔직히는 왜 돼지라는 비유일까 의문을 가졌었다. 다음에 본 작품은 상표명이 제거된 빈 깡통으로 반가사유상과 같은 인물의 형태를 만든 「사유의 실패」 연작이었다. 이상의 작품에서 '현대인의 실존적 상황에 대한 우울한 초상'이라는 명쾌하게 떨어지는 설명을 역시 들었지만, 그 명쾌함이 오히려 불편했던 기억이다. 예술작품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이유는 거기 분명히 우리를 이끄는 뭔가가 존재하는 걸 분명히 알겠는데 그게 뭔지 한 번에 보여주지 않을 때다. 시간을 들여 집중해서 보고, 또 생각하면서 작품의 의미에 가 닿게 되고 그러한 되새김질의 과정에서 우리는 첫눈에 찾아내지 못했지만 왜 관심이 갔는지 분명해져 간다. 그에 비해 돼지나 깡통이라는 소재는 문제를 풀기도 전에 정답을 먼저 알려주는 듯했다. 왜일까. 왜 이렇게 친절할까. 궁금해 하지 말라고, 더 이상 묻거나 들여다보지 말라는 경고일까.

박종호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74×62cm_2017

2015년 고양 스튜디오에서 다시 만났을 때 작가는 자신의 아이들과 아버지,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다른 크기로 여러 번 그리고 있었다. 돼지나 깡통과 같은 누구나 쉽게 독해할 수 있는 대상을 빌리지 않았고, 그 작품들이 자신의 이야기라고 밝혔다. 전혀 위엄과는 거리가 있는 망토 차림으로 말을 탄 아버지를 그린 「백마 탄 아버지」(2014), 고개 숙인 아이의 얼굴을 그린 「괜찮을 거야」(2014), 어린 시절 성당에서 첫 세례 받던 순간의 모습을 그린 「두렵기만 했어」(2014) 등을 보여주었다. 그 당시 대화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세례식 장면이나 고개 숙인 아이의 표정과 같은 소재를 서로 다른 크기와 구도로 여러 번 반복해서 그리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지겹거나 기피하고 싶은 행위이다. 따라서 같은 도상을 반복해서 그린다는 것은 그 도상의 의미 이상의 의미가 존재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단순히 모티브에 대한 매혹일 수도 있겠지만, 유쾌하지 않은 순간, 혹은 특별하게 이유를 알기 힘든 순간과 장면을 여러 번 그리게 된다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반복의 또다른 효과는 그 대상을 익숙하게 만들고, 아우라를 벗겨버리는 것이다. 반복을 통해 익숙해지면 대상과의 거리가 좁혀지고, 그 대상이 환기시키는(환기시킬 지도 모를) 감정을 소진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을 통제의 대상으로 전환시킨다. 이 과정은 다소 복합적인데, 통제할 수 있을 때 대상에 대해서 표현할 수 있으며, 또한 표현을 통해 대상과 반복적으로 부딪힐 때 대상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되는 측면도 있다. 여러 번 그린 대표적인 그림은 「불꽃놀이」이다. 앞에 두 남자 아이 뒤로 남자 어른이 선 그림과 여자 어른이 서 있는 그림이 있다. 작가는 사진 속의 남자아이처럼 보였다가 다른 그림에서는 아이들 뒤에 선 남자 어른처럼 보인다. 아이(로서의 나),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나-에 대해 작가가 생각하고 나를 아버지와 아이 모두의 지위에 대입시켜가는 과정에서 아이의 시기에 대해서도, 어른의 시기에 대해서도 편안해져가는 듯해보였다. 작가는 이 시기에 대해서 "2014년 당시 아버지의 집에서 늙어 왜소해진 그가 여행지의 해변 가에서 백마를 타고 있는 사진 한 장을 발견하였다. 나는 여전히 그들과 공유했던 과거의 상기를 두려워했고, 그들의 언어가 불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진 속의 이미지는 내 안에 불안을 억누르고 희미해진 온기를 다시 불러 일으켰다. 문득 이제는 난장이처럼 작아진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기는 듯 했다. 작업실에 도착한 나는 공포와 불안을 일으키던 과거의 기억을 억누르고 다시 일어나는 감정에 몰두하려 했다. 그렇게 불안은 시야에 들어 온 이미지를 통해 억제되고 새로운 감정이 자신이 그린 이미지를 통해 표출된다."고 말한다. 불편했던 대상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점차 대상이 주는 공포나 불편함을 극복해낸 것이다. 소파 위 연인의 키스 장면을 그린 「붉은 소파」(2015)는 「키스」라는 제목의 에드바르도 뭉크의 여러 작품들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키스를 낭만적인 순간이 아니라 죽음과 연관된 격정과 공포의 순간으로 그렸다.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기 때문에 위협적이고,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나쁜 일은 덜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았고, 생각하지 못한 좋은 일은 더 일어난다. 그림으로 미리 재현해온 극적인 순간은 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순간에 대한 두려운 감정이 사라진다.

박종호_Parrot_캔버스에 유채_53×41cm_2015

2017년, 이번 전시를 앞두고 만난 작가는 변했다. 변하려고 애쓰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지만, 이미, 변화가 일어나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계절이 바뀌었고, 그 변화는 불가역적이다. 좀 과한 표현일지 모르나 '죽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서'로의 전환이 그간의 시간들을 통해 일어난 듯하다. '그간의 시간들'이란 표현은 함축적이다. 작가 자신처럼 두 명의 형제로 구성된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가 된 시간, 이제는 늙고 약해진 아버지를 마주한 시간, 건축학도에서 뭉크와의 조우를 통해 미술가가 되고 미술가로 살아온 시간, 같은 소재로 반복해서 그렸던 시간들을 포괄한다. 보편적인 소재를 빌어 일반적으로 표현하던 초기작에서 감정을 읽히지 않으려고, 애써 객관화하려고 시도했다면, 이후의 작품에서는 감정을 그냥 흘러나오도록, 주관적이고 사적인 기억과 사진 속의 경험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 결과 오히려 감정을 숨기려는 시도에서 오히려 숨겨야할 기억이 있다는 더 큰 사실이 노출되었다. 이후의 작품에서는 특정한 순간들-세례성사, 불꽃놀이-가 주제로 부각되어 있지만 그림 속 소년의 불편한 자세나 기억, 순간적으로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의 오락거리에 동참한 가족의 어색한 모습 등에 시선을 지나치게 뺏기지 않는 것이 좋겠다. 역기서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사건들 자체라기보다 그 사건들을 대면할 의지를 갖기 시작한 새로운 주체의 등장이다.

박종호_Kiss_캔버스에 유채_45×33cm_2017

이번 전시에는 반복적으로 그렸던 소재들을 다룬 최근작들과 새로운 분위기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전시된다. 먼저 「불꽃놀이」(2017)는 작가가 여러 번 그려온 대표적 장면이다. 하늘이 캄캄하고 어두울수록 더 눈부시게 빛나는 불꽃의 순간, 어둠 속에서 그 찰나의 아름다움을 함께 감상하는 가족의 순간. 예전 작품과 달라진 점은 인물들의 표정이다. 예전의 작품들에서 검고 또렷한 눈동자들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한다. 반면 「불꽃놀이」(2017)에는 표정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표정(감정)이 드러날 얼굴 위에 물감을 부었다. 이 그림에서 불꽃처럼 빛나서 퍼져나가는 것은 얼굴에 칠해진 물감들이다. 그 아래의 표정이 감탄일지, 두려움일지, 슬픔일지 알 수 없다. 그 어느 감정 중 하나일 필요가 없다. 그 모두였을 수도 있고, 그 중 몇 가지가 혼재된 감정이었을 수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중 어느 것이었다 해도, 지금까지 살아내면서 그 여러 감정들을 느끼고 표정할 수 있는 자율성과 주체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대상이나 타자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한 가지 색이 아니다. 삶과 죽음, 사랑과 미움, 절망과 강렬한 삶의 의지 이 극단적인 감정들조차 함께 서로를 더 격렬하게 상승시킨다. 예전작과 달리 푸른빛이 몸과 옷을 감싸고 있는데, 덜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동시에 푸른빛이 지낸 속성 때문에 신비스럽고 고양된 이미지를 갖는다. ● 「키스」(2017)는 「붉은 소파」의 부분에 집중해서 그린 작품이다. 검은 옷, 혹은 검은 머리의 여인과의 키스의 순간을 그린 장면인데 검정색 때문에 더 직접적으로 죽음이라는 19세기 말의 상징을 연상시킨다. 「어떤 시절」(2017)은 매서운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본 소년의 모습을 그렸다. 우연히도 십자 모양의 선 앞에 소년은 왼쪽 눈을 제외하면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상태이지만, 여기서 그의 감정을 짐작할 수 없더라도 명확히 읽을 수 있는 것은 피하지 않고 마주보려는 결연한 의지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며, 놀라더라도 그게 내 모든 것을 뒤흔들 일은 아닐 거라고 이미 알고, 믿고 있는 사람의 눈빛, 살아 있는 사람의 눈빛이다. 예전 작품들이 창백하고 억제된 느낌을 주었다면, 이번 전시의 신작들은 꾹 누르고 있던 억압이 사라진 듯하다. 피부에 푸른빛을 얹고, 쓱 그은 검은 붓질로 소년의 턱을 그렸다. 자줏빛 붉은 소파에서는 물감이 흘러내린다. 창백하던 색이 살아 있고, 여러 번의 덧칠로 숨어있던 붓자국이 화면 위로 튀어 오른다.

박종호_붉은 소파_캔버스에 유채_181×227cm_2015

기억에서 사람이 벗어나지 못하고 사로잡혀 있는 상태도,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애쓰는 상태도 모두 살기 위해서이다. 무거운 기억에 짓눌린 사람이 그 기억에 대해서 입을 다무는 것도, 고통스러운 기억을 계속해서 되새기는 것도 역시 어떻게든 그 기억을 이해하고 납득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박종호의 그림은 타인의 눈에 보이기 위해 그린 것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과정이다. 그가 대면하게 될 것은 무엇일까. 그 답을 찾기가 쉽지 않겠지만, 질문은 시작되었고 그는 이미 그 길 위에 있다. ■ 이수정

Vol.20171130j | 박종호展 / PARKJONGHO / 朴鍾皓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