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생.사.육)

김재홍展 / KIMJAEHONG / 金宰弘 / painting   2018_0221 ▶ 2018_0313

김재홍_살_캔버스에 유채_58×28cm×108_2017_부분

초대일시 / 2018_0221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54-1 4층 Tel.+82.(0)2.722.7760

파편적이고 비규정적인 이미지, 새롭게 존재론적 지평을 열다 ● 오랜만에 김재홍의 유화작업들을 만난다. 2월 21일부터 3월 13일까지 인사동에 위치한 나무화랑에서 열리는 개인전으로. 14년만이다. 전시서문을 쓰기도 전에 화가 김재홍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SNS를 통해 전시될 작품들의 일부를 해상도 높은 사진 자료로 공개하였고, '살', '벌거벗은', '동행'의 세 가지 주제 범주에 따라 씌여진 작업노트도 공개하였다. 너무 선명한 작품 사진들과 작업의 의도를 매우 분명하게 밝힌 작업노트 때문에 전시 서문이 한낱 요식행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문을 쓴다면, 화가 자신이 전한 메시지와 화가가 그린 이미지 사이가 기울어진 경사면으로 이어지고 있고, 꽤 넓은 틈이 벌어져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경사 때문에 한 쪽으로 쏠리고, 틈새 때문에 새어나간 세계를 펴고 주워 메꿔서 사잇길을 다시 놓으려 한다. 이 사잇길에서 더 많은 세계들과 더 작고 더 짧고 더 긴 세계들이 만나기를, 불분명한 소리와 다양한 몸짓과 낯선 냄새로 소통하면서. ● 김재홍의 작업은 이미지를 일종의 텍스트로, 즉 인간이 서로의사소통하는 언어로 다루어왔다. 여기에서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는 일의적으로 확정될 수 없는 역사적 관계로 맺어져 있는데, 그 배면에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동질화 또는 이질화가 역사적 단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전제도 자리잡고 있었다(분단의 땅과 갈라터진 피부). 자연스럽게 화가는 이미지 자체를 사회적 실천의 산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지 자체를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담는 기호로 확장시키면서, 자신의 그림을 일정한 방식으로 의미작용의 조직체로 간주해서 상이한 단계에 맞춘 형상들을 작업해 왔다.

김재홍_동행_캔버스에 유채_182×91cm_2017

이미지와 텍스트가 장애없이 전환되거나 번역될 수 있고, 이미지와 텍스트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공통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는 화가의 입장에 근거해서야, 이미지를 이데올로기 비판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 작업의 내재적, 심층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언어와 시각이미지가 공통적인 근원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 그 생각이 아마도 의미론적 차원에서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 그림의 형태와 표현방식을 결정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림의 형태와 표현방식에 일정 코드를 개입시키고 이미지의 담론적 성격을 강화함으로써, 관람자들 이 그림과 직접 조우하는 대신 관람자들의 자유로운 접근과 능동적인 참여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공론장을 형성하고 공동의 가치와 공통의 의미를 확인코자 하였을 것이다. 그에게 그림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참된 가치와 동형적인 이미지였고, 이 이미지를 통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역사적으로 논쟁적인 사안들이 다루어지는 문화적 공론장의 중심을 세워가려는 참여적 실천행위였을 것이다. ● 이미지는 시각적으로 드러난 사상이라는 김재홍의 작업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김재홍은 하나의 동질적인 전체로 포괄될 수 없는 현실, 무한히 산재되어 있는 파편으로서의 세계, 세계와의 직접적 만남이 사라진 물화된 세계를 육감과 직관의 복귀를 통해 전면적으로 현전시킨다. 총체성을 파악하는 이미지의 종합으로서가 아니라, 이미지의 파편으로, 그리고 이미지의 비규정성을 토대로. 오랜만에 만나는 김재홍의 작업에서 우리는 균열의 시간, 비시간적 시간, 소멸의 시간이 흐르는 동요와 떨림을 '느낄' 수 있고, 죽어버린 시간에 자리한 어둠의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사라진 시간의 흔적을 '만질' 수 있다.

김재홍_동행_캔버스에 유채_182×91cm×3_2017

이번에 전시되는 그의 회화작업들은 이전 작업들처럼 서사와 구상을 미적 체험의 의미론적 조건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14년 전인 2004년 '사비나 미술관'에서 보여준 리얼리즘적 재현 형식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역사적 현상에 총체적인 시각을 부과하려던 유토피아적 추동력은 약화되거나 소멸되었고, 역사적 상황을 현실적인 매개로 단단하게 연결시켜 서로를 상관적으로 입증하려는 서사 구성의 유기적인 특성도 사라졌다. 또한 형식에 대한 주된 관심을 형태의 개별화와 단편화에 집중함으로써, 시각적 중심원근법에 따른 묘사의 일관성과 이미지의 안정적인 의미생산 코드를 동요시키고, 추상적 보편성과 초역사적인 함축에 갇혀 있던 리얼리즘 회화의 진부한 전통에서도 벗어나 있다. ● 놀랍게도 이번 전시 작품들의 서사와 구상은 전적으로 언어적 의미작용에 따라 이미 도식화되어 고정성을 획득한 것만을 직접 관계하지 않는다. 오히려 혼란스러운 감각을 용인하고 고정성을 유동화시키며 층위간의 상호전환을 활성화하는 잠재적 공간(예컨대 간간이 붓질의 흔적이 남겨진 검은 색조 띤 중립적 배경으로 이루어진 빈 공간, 그림 전체에 위치한 차갑고 음울한 배경면, 그리고 몸의 형상에 끼인 그림자)도 함께 관계 맺는다. 작가가 느낌으로 열어 보이는 세계인 이 잠재적 공간은 번역불가능하고 코드화되지 않고 비재현적이다. 잠재적 공간, 또는 잠재적 비존재가 출현함으로써 그의 그림에는 새롭게 존재론적 지평이 열렸다. 전시되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서사와 구상(형상)은 탈서사와 비구상(비형상)과 동시에, 언어와 이미지가 동시에, 형태의 출몰을 동시에,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풀고 엮는다. ● 관습적으로 선행경험에 의존하던 의미는 경험 중에, 경험의 경과 속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고통과 분노, 기쁨과 슬픔은 고통과 분노의 기억이나 기쁨과 슬픔의 기억에 의해서만 사후적으로 그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나 분노를 그리고 기쁨이나 슬픔을 느끼는 그 순간에도 새롭고 독특한 의미가 생겨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통과 분노,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신체의 다양한 반응들, 몸짓과 표정, 근육의 수축과 이완, 피부의 땡김과 쳐짐처럼 의식의 통제를 벗어난 감각적 표현이라 해서 의미의 목록이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김재홍의 이번 전시에는 이전에 작품의 의미체계에 속해있지 않던, 또는 은폐되어 있던 감각적 표현이라는 항목이 추가되었고, 모호함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감각적 표현(또는 이미지의 세부)은 변형된 소재(도축된 닭의 몸통 그리고 그 위에 중첩된 인간의 몸), 주제의 특이함('육식의 종말'), 정서적 폭력성, 그리고 강한 색채감과 더불어 새로운 의미를 구성한다.

김재홍_Undressed_캔버스에 유채_182×91cm_2017

동일한 규격(28×58cm)의 캔버스에 그려진 108점, 244×122cm 크기의 작품, 91×181cm 크기의 6점 작품 등 모든 전시작품의 회화적 이미지는 시간의 어떤 순간을 그대로 담은 듯한 사진 이미지처럼 현재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 현재란 실제로는 공간적으로 '여기와 저기'(here and there), 시간적으로 '이미와 아직'(yet and not yet)의 사이에서 규정되지 못하고 긴장 속에 존재한다. 김재홍의 그림은 현재성에 담긴 이중 구조를 하나로 통합하지 않고 오히려 각도와 구성, 화면배치를 통하여 관람자들이 균열의 긴장을 느낄 수 있도록, 균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균열의 단면을 만질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의 배려는 균열적 성격을 극대화하거 나 강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훼손되거나 약화되지 않도록 적정수준을 가늠하는 일이다. 그래서 화면은 동적이며 정적이다. 균열의 방향이 화면 바깥의 외부를 향하기도 하고, 화면 안, 내부로도 향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균열의 정도가 크거나 깊지 않아서인지 잠재적으로 내비치는 불안한 감각은 때때로 안정과 지속의 가짜 현실을 좇아 균열의 긴장을 완화시키려 하거나 균열을 봉합하고자 한다. ● 화가는 닭의 몸통을 성적으로 모호한 모습으로 그렸다. 닭이건 사람이건 동물의 몸통을 비틀어 생식기가 관람자를 향해 정면에서 보이도록 배치했다. 몸에는 공공연한 털이 남아 있지 않고, 성기는 다리 사이로 길게 뽑혀져 있거나 두툼한살 사이에 베어져 들어가 있다. 때로는 양 성징(수탉과 암탉, 여자와 남자)이 함께 드러난 몸을 그렸고, 생물학적 성이 비워진 몸을 그렸다. 화가는 몸을 권력의 작동방식에 따라 함락당하는 수동적 육체의 궤적으로 드러내면서, 몸을 죽음, 폐기, 말소, 비어있음에 소속시켜 육체적 접촉이 차단당한 분리된 개별 이미지로 보여준다. 몸의 움직임이 생물학적 활동의 원리로서 중요성을 가지면 서야, 움직임의 자유로움은 생물을 자극하는 육체의 새로운 상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김재홍의 몸(살)의 이미지가 감각의 자극적인 교란(이것을 종교에서는 쾌락이라 부르지만)을 배제하고 죽어버린 시간에 갇혀버린다면, 흐르는 현재, 언제나 변화하는 현재, 미미하기 이를 데 없는 순간적인 운동, 작고 작은 순간적인 시간의 존재를 느끼는 것이 가능 할까를 묻게 된다. ● 화가 김재홍이 현실에서 취한 소재는 화가가 그것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해석적인 의도에 봉사하면서 변형되었고, 결국 생생하게 살아있는 소재(현실 소재)는 화가의 의도 속에 소멸되어 버린 것이다. 닭들이 공장식으로 사육된다 해도 숨 쉬고, 알을 품고, 모이를 쪼아 먹고, 소리 내고, 심지어 날기도 한다. 작품의 완성과 함께 소재에 해당하는 현실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닭들의 몸이 화가의 의도를 따라 변형되어 하나의 동질적 전체에 포괄되어서 관람자들의 놀라움과 감탄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현실에서 '다른' 현실의 생성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닭의 몸, 닭 껍질, 닭 피부 등의 소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결코 보지 못하고 지나친 세계를 촉각적 표면으로 가시화해 준다는 점에서, 전통적 리얼리즘 회화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감각적 표현의 의미화 과정을 새롭게 만나게 한다.

김재홍_Undressed_캔버스에 유채_182×91cm×3_2017

육식문화에 공고하게 다져진 특별한 관계는 여러 시기에 걸쳐 여러 장소에서 결합하였고, 모든 사회의 생태환경적·정치경제적·사회문화적인 원동력 형성에 도움이 되는 정교한 네트워크를 구축하였으며, 그 네트워크의 다양한 경로는 우리의 삶과 세계관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도축(살)장, 자동화된 공장형 비육장, 거대 축산단지 형성과 문화적·역사적 세력들과의 독특한 결합, 그리고 그것으로 초래되는 환경적 위협과 생태계 파괴, 인간을 위한 식량에서 가축을 위한 사료로 전환된 전 세계 곡물 등 김재홍의 전시 주제는 우리의 삶을 사회의 제반 현상과 연관시킨다. 시간성이 개입할 수 없는 회화의 매체적 한계 때문에 회화적 주제는 이미지를 읽기 대상으로 만들면서도, 이미지를 읽기에 저항하는 대상으로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미지는 이중 계열, 또는 상반된 두 흐름의 지속적인 긴장관계 안에 서만, 흐르는 시간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육식의 종말'이라는 주제는 어느 한쪽으로 파악될 때 더 올바르다거나 더 정확하다고 파악되는 것이 아니어서 중첩과 분리의 이중성을 이미지로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김재홍의 작업에서는 주제가 두 흐름으로 다루어지기는 하지만, 때때로 화가 자신이 내린 올바름의 판단이 흐름 간의 이동을 방해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미지 안에는 언제나 이질적인 두 흐름이 존재하고 어떤 흐름도 제거하지 않으며, 하나로 통합되지 않는다. ■ 임정희

김재홍_동행-4_캔버스에 유채_122×244cm_2017

살(생·사·육) ● 가축. 인간에 의해 생명을 얻은 후, 더럽고 비좁은 공장식 사육환경과 천의를 무시한 인공사료로 미쳐가고, 오로지 인간의 먹거리인 맛있는 고기로서만 살찌 워지는데 그 존재 의미가 강제지워진다. 뿐인가, 최소한의 생명윤리조차 배제된 도살로 생이 마감된다. 죽어서도 스스로가 아닌, 인간의 살이나 배설물이 된 뒤 에야 비로소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는 운명. '살-연작' 108개 중 가축형상은 인체가 연상되어지게 그렸고, 여러 개의 인체 도 가축과 혼돈되어지게 배치했는데, 지배자(인간)와 피지배자(가축)를 동등 하게 보도록 의도한 것이다. Undressed ● 털과 가죽을 벗긴 후 드러난 살을 보는 순간, 온갖 치장과 위선의 거죽 밑에 가 려져 있는, 가축의 그것과 다를 것 없는 인간의 본질이 오버랩 된다. 그 벗겨지 는 가죽은 인간의 옷 같다. 제복, 발레리나 무용복, 드레스… 등. 이런 인간과 가축간의 비윤리적이고 참혹한 '지배/피지배자의 관계', '식/육'의 관계가 인간과 인간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깊고 넓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 그 비극성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동행 ● 우주에서 볼 때, 극히 미미한 존재인 인간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매우 우스꽝스 러울 게다. 티끌보다 못한 지배욕구가 가진 비윤리성의 크기가 끝이 없어서다. 만약 내가 신이라면, 이 폭력적 권력자와 힘없는 약자의 위치를 동등하게 해 주고 싶다. 인간의 힘은 낮추고, 지배 당하는 생명들의 지위는 높게 해서 같은 계급을 갖게끔. 그래서 그려본 것이 둘이 공평하게 뒤섞인 새로운 종으로서의 생명체다. 人과 獸의 경계가 사라진 존재. 그리고 인간 ● 인간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선택적 살생을 넘어, 더 많이 먹고·저장하고·이 윤을 추구하기 위해 타 생명체들의 살륙을 합리화한다. 진짜 인간적 야만과 폭 력은 바로 이 지점부터 시작한다. 모든 죽임의 목적이 잉여자본의 힘으로 타자 에 군림하려는 탐욕, 즉, 과대욕망과 폭력성으로 진화하고 질주하는 신자유주 의와 같은 제도가 웃고 있는 바로 여기…, 말이다. ■ 김재홍

Vol.20180218a | 김재홍展 / KIMJAEHONG / 金宰弘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