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된 일상

강덕봉展 / KANGDUCKBONG / 姜德奉 / sculpture   2018_0226 ▶︎ 2018_0303

강덕봉_정지된 일상_PVC 파이프, 지관, 우레탄 페인트_190×260×190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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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봉 홈페이지_www.duckbong.com

초대일시 / 2018_0226_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Hongik Museum of Art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 94 문헌관 4층 1관 Tel. +82.(0)2.320.3272~3 homa.hongik.ac.kr

지금 우리의 삶은 속도의 가속화로 이리저리로 이동하며 '더 빠르게', '더 높이'를 열망한다. 그러나 우리를 우리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던 가속은 우리가 기대하던 탈출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끊임없는 불안정한 상태임을 자인하면서 결국 우리 스스로 안정을 갈구하게 하며, 척도와 규범을 요구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 모순적 구조는 '좀 더 빠르게'를 외치며 지금의 속도에 만족하지 않게 하며, 이내 그 속도에 다시 내성을 생기게 하여 더 빠른 속도의 욕망으로 순환시킨다. 이러한 속도는 오로지 출발점과 도착점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 과정의 흐름을 과감히 흘려보낸다. 빠른 속도에 의해 흘려보내진 그 과정의 흐름을 잡아내는 것은 우리가 질주하는 기차에서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지각하는 순간과도 유사하다. 이처럼 속도에 의해 소멸되고 단지 남는 것은 시각에 남아있는 이미지의 잔상들뿐이며, 그것은 세상을 보는 우리에게 일종의 착시까지 불러일으킨다. ● 나의 작업은 그러한 속도의 광기 어린 욕망을 포착하는데서 출발한다. 그것은 스피드하게 전개되는 영화의 한 장면을 캡처한 것처럼 빠른 속도에서 순간적으로 포착한 잔상의 다발(cluster)들이다. 이 다발들은 각각의 형상을 통해서 다양한 속도로 운동하며, 스쳐 지나가는 것들의 실체를 파악하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스쳐지나가는 것들을 포착하는 순간 동안에도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속도를 갖는 흐름들과 접속 중인 것이다. 즉, 나의 작업은 단일한 속도를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과정의 흐름을 지워버리는 속도에서 무언가와 마주침을 경험하고, 그 마주침을 통해서 속도의 사이, 사이를 생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다발의 형상을 통해 속도가 마비시킨 그 과정의 흐름을 관람자에게 다시 매개시키고자 한다. 이 지점의 관계들이 바로 내가 관람자와 대화 하려는 것이다. ■ 강덕봉

강덕봉_정지된 일상_PVC 파이프, 지관, 우레탄 페인트_190×260×190cm_2018
강덕봉_인식하는 신체_쉬폰천, 디지털 프린트_가변크기_2018
강덕봉_인식하는 신체_쉬폰천, 디지털 프린트_가변크기_2018

속도의 고고학_강덕봉의 근작들 ● 강덕봉의 근작들은 "속도의 광기어린 욕망을 포착하는"데서 출발한다. 여기서 속도의 욕망을 포착하는 일은 "빠른 속도에 의해 흘려보내진 과정의 흐름들"을 잡아내는 일과 통한다(작업노트, 2015). 이를 통해 그는 비릴리오(Paul Virilio)가 요청한 '속도의 정치학'을 예술적으로 수행하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드로몰로지(dromologie)로 명명된 비릴리오의 속도 이론은 "속도의 비장소성이 지닌 전략적 가치가 장소의 전략적 가치를 결정적으로 대체한" 현대적 상황에 천착한다. 속도가 극대화되면서, 즉 "떠나기도 전에 도착해 있는 상태"가 지배적으로 되면서 지리적 공간의 가치도 소멸해간다. 이런 상황에서 저항은 지리적(공간적) 거점을 확보하는 일이 아니라 차라리 속도를 변화시키거나 지속을 방해하는 일로 가능하다는 것이 비릴리오의 판단이다. 속도를 정치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강덕봉은 "기술의 속도가 가속화되어가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예술의 저항적 형태를 탐구"(작업노트, 2015)한다. 그런데 이 일은 실제로 어떻게 가능한가? 즉 예술 실천을 통해 속도를 정치화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 일단 우리는 대상-이미지를 분할, 해체하여 얻은 단편들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재결합하는 식으로 근대적 '속도'와 공간의 '힘선들(force lines)'을 가시화했던 과거 미래파 예술가들-이를테면 보치오니(Umberto Boccioni), 발라(Giacomo Balla)-의 작업들을 떠올려볼 수 있다. 뒤샹(Marcel Duchamp)의 저 유명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1912)를 연상해봄직도 하다. 실제로 강덕봉의 근작들은 단편들-PVC 파이프 조각들-을 이어 붙여 형태를 구축하는 식으로 속도와 운동의 감각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미래파나 뒤샹의 선례를 상기시킨다. 하지만 강덕봉의 근작들은 단순히"속도와 힘선을 가시화하는" 수준을 넘어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미래파적인 작업"으로 규정하려는 순간에 시야에 들어오는 '독특한 요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강덕봉_and you?_PVC 파이프, 아크릴 거울, 우레탄 페인트_110×140×40cm_2018
강덕봉_and you?_PVC 파이프, 아크릴 거울, 우레탄 페인트_110×140×40cm_2018

강덕봉의 작업노트를 살펴보면 여기에는 광학적 미디어(optical media)에 대한 관심이 유난히 두드러진다. "스피디하게 전개되는 영화의 한 장면을 캡처한 것과도 같은 나의 형상들" 또는 "다양한 크기의 파이프로 이루어진 나의 형상들은 빠른 속도에서 순간적으로 포착한 잔상의 다발들"(작업노트, 2015) 같은 서술들 말이다. 속도란 '움직이는 기계, 곧 모터 영화(moteur cinematographique)의 발명품"이라는 비릴리오의 인식을 고려하면 속도에 천착하는 강덕봉이 영화에 주의를 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강덕봉의 근작들에서 영화. 정확히는 영화의 전사(前史)에 등장하는 다양한 광학 미디어들은 개념적으로 참조되기보다는 작업의 물질적 양상에 실질적으로 개입된 모양새다. 가령 「99:59:59:99」(2013)는 하나의 머리를 공유하는 세 개의 몸 다발들이 그 머리를 중심으로 빙빙 돌아가는 모습을 선보인다. 이렇게 몸-다발들이 어지럽게 빙빙 돌아가는 느낌을 선사하는 「99:59:59:99」는 물리학자 조제프 플라토(Joseph plateau)가 1832년에 선보인 어떤 기계의 형태를 닮았다. 플라토가 페나키스토스코프(Phénakistoscope)라고 명명한 이 기계는 원반 형태인데 그 원반 가장자리에 16개의 이미지가 있고 그 사이 사이에 같은 숫자의 슬릿(slit)이 있다. 관객이 거울 앞에 원반을 놓고 어느 한 슬릿에 눈을 대고 원반을 돌리면 댄서가 끝없이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페나키스토스코프는 광학적 환영을 기술적으로 구현하는 식으로 영화발명을 촉진한 여러 스트로보스코브 장치 가운데 하나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일상이 된다는 것」(2017)에서 3차원 공간을 점유하고 한 점을 중심으로 빙빙 도는 상태에 있는 몸-다발들은 마레(Étienne-Jules Marey)의 3차원 조에트로프(zoetrope, 1837) 기계를 연상시킨다. 조에트로프는 '삶'을 뜻하는 '조에 ζωή'와 회전을 의미하는 '트로포스 τρόπος'가 결합된 단어로 굳이 번역하면 '생명의 바퀴' 라 할 만한 것이다. ● 「99:59:59:99」나 「일상이 된다는 것」에서 보듯 강덕봉이 집중하는 형태는 둥근 원반, 또는 원통 형태들이다. 그가 자기 작업의 기본재료로 쓰는 PVC 파이프가 기본적으로 속이 빈 원통 형태임에 주목할 수도 있다. 그 파이프의 원통 형태는 마레의 광학 미디어, 연발사진총(fusil chronophotographique, 1881)을 연상시킨다. 연발사진총 촬영자는 장치를 어깨에 고정한 후 조준기로 표적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겨 사진을 찍었다-정확히는 "쐈다shoot'. 그러면 11개의 네거티브 필름이 담긴 원통이 30도 회전하고 다음 11개의 네거티브가 준비될 것이다. ● 장 뤽 고다르(Jean Luc Godard)는 "영화는 초당 24번의 진실이다!"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런데 우리의 눈이 영화적 운동의 외견상 연속성을 진실된 것으로 믿으려면 영사된 이미지는 충분히 빨리 깜빡여야 한다. 이것은 광학 미디어가 감각 생리학과 불가분의 관계임을 시사한다. 실제로 19세기의 미디어 기술은 생리적으로 지각 가능한 최소한의 차이보다 더 세밀하게 작동하는 기계를 추구했다. 그 과정에서 기술적 질문은 생리적 질문으로, 기계를 만드는 일은 인간의 감각을 측정하는 일로 전환했다. 결국 광학 미디어는 "생리적으로 강요되는 환영"을 추구하고 있었던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각기관을 자극하는 빛과 그림자의 흔들림이었다. 다시 비릴리오를 인용하면 영화에서 "현실효과는 빛의 방출로 창출"되었고 "형태의 변화는 조명의 강도에 따라 생겨"났다. 강덕봉의 「부유하는 공간」 연작(2015~2018)에서 네거티브 형태로 제시된 신체 이미지의 현실감, 운동감이 빛(과 그림자)의 효과인 것처럼 말이다. 「부유하는 공간」들은 움직이는 빛의 비정형 세계를 연출한다. 이와 유사하게 강덕봉이 필름처럼 투명한 것들에 열중하는 현상에 주목할 수도 있겠다. 「인식하는 신체」(2018)들에서 빛이 투과되는 투명한 표면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덕봉_부유하는 공간 1_PVC 파이프, 우레탄 페인트_94×173×5cm_2018
강덕봉_부유하는 공간 2_PVC 파이프, 우레탄 페인트_94×176×5cm_2011
강덕봉_부유하는 공간 3_PVC 파이프, 우레탄 페인트_94×165×5cm_2011
강덕봉_일상이 된다는 것_PVC 파이프, 우레탄 페인트_가변크기_2011

지금까지의 관찰에 따르면 강덕봉의 근작들은 옛 광학 미디어들로부터 조형요소들을 절취해 자기 작업의 요소들로 삼는다. 이것은 영화의 전사(前史)를 꽤 기이한 방식으로 재상연한다. 키틀러(Friedrich Kittler)는 "영화의 기술적 요소들이 단계적으로 아주 천천히 하나로 조합됐다"고 서술했다. 즉 기술미디어는 페나키스토스코프, 조에트로프, 연발사진총 따위의 성과들을 하나씩 조합하는 식으로 영화의 완성을 향해 나아갔다. "그것은 때때로 하나로 합심해서 뭉치고 때때로 자연스레 결정화하는 아상블라주의 형태(chain of assemblage)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강덕봉이 그것들을 영화의 익숙한 방식으로 조합하지 않고 자신만의 매우 독특한 조각 어법으로 조합한다는 점이다. 강덕봉은 「정지된 일상」(2018)에서 마침내 소리 이미지마저 덧붙이는 식으로 "무성영화로부터 유성영화로의 발전"을 비틀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강덕봉의 근작들은 영화라는 상상계에 균열을 가하는 작업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시 "속도란 움직이는 기계, 곧 모터 영화의 발명품"이라는 비릴리오의 발언을 떠올려보면 강덕봉은 속도가 발생한 기원 시점에 개입하여 속도의 크기와 벡터, 효과를 변형 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강덕봉의 근작들을 '속도의 고고학'으로 명명하면 어떨까? 아무튼 나는 이 기묘한 아상블라주의 묘한 반짝임에 끌리는데 이러한 끌림은 영화에 적응한 내 몸틀이 반응한 것인지, 아니면 조각언어에 친숙한 내 인식틀이 반응한 것인지 오리무중이다. ■ 홍지석

Vol.20180226g | 강덕봉展 / KANGDUCKBONG / 姜德奉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