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12기 입주작가전

2018_0310 ▶ 2018_0422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8_0320_화요일_05:00pm

김경주『외계정원 vol.2(unknown garden vol.2)』展 조원득『지독한 숲(A violent forest)』展

창작스튜디오 12기 입주작가 오픈스튜디오& 아티스트톡/평론가 매칭프로그램 일시 / 2018_0320_화요일_03:30pm 장소 / 박수근미술관 참여작가 / 김경주_조원득

후원 / 양구군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Park Soo Keun Museum in Yanggu County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박수근로 265-15 (정림리 131-1번지) 박수근 미술관 내 파빌리온(3관) Tel. +82.(0)33.480.2655 www.parksookeun.or.kr

작가 김경주의 근작(2017-2018)을 중심으로 - '개인 시점에 의한 감정구조의 공유에 대해1) ● '눈으로 보는 경험’은 인간 감지를 거쳐 어떤 방식으로든 시각화될 수 있다. 사진을 찍거나 텍스트로 기록하거나 또는 영상매체를 통한 채록이 가능하다. 경험이란 각각의 관람자가 역시 개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긴 해도 체득으로 혹은 경험자체로 남아 흡수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눈으로 볼 수 없는 경험’은 과연 시각으로써의 완결이 불가능할까. ● 예술에서 가시적이지 않은 세계는 기호로 나타난다. 기호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건과 대상의 상태가 심리적 해석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현현에 저항하는 미학이다. 예술에서 이것은 대개 작화적 관점에서 발현되는데,2) 어떤 특정적이거나 비특정적인 소리로, 행동으로, 휘발되지 않을 문자로도 가능하다.3) 역대 많은 작가들이 개념미술을 비롯해 미니멀리즘, 사운드아트, 다원주의의 한 경향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경험의 시각화를 예술로 편입시켜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김경주_외계정원_드로잉 설치, 비닐에 잉크, 아크릴채색_2018

경험의 산출은 수용자를 반드시 피동적이도록 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경험 이전에 전제되는 본질로 정의될 수 없으며, 오히려 타자와의 적극적인 관계 속에서도 타자로 환원될 수 없는 차이를 인식적, 감성적 차원에서 생산해 낸다. 필자는 이를 기호의 유동성으로 본다. 다만 기호의 유동성은 경험 속에서 만들어지는, 그러나 경험 자체로 환원될 수 없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 이를 김경주의 작업과 연결하면 기호가 관념적 의미소통의 차원을 넘어, 물리적 감각적 측면을 강하게 지니게 되고, 이로써 일종의 신체적 환경에 개입/ 공유/ 구성해나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필룩스 조명 박물관에서 진행되었던 작가 김경주의 「외계정원」은 우선 개념적으론 존재의 언어이면서 직감의 언어 아래 놓이는 작업이다. 기호의 외변적 내재화이면서도 사실상 공간과 오브제의 물질성, 개인적 의도가 나란히 공존하는 작품이기도 하다.4) 특히 이 작업은 환경에 의한 경험을 중시한 무시형(無視形)애 가깝다. 이를 음악에 비유하자면 역사적 내러티브를 대리하는 일종의 무음곡과, 되레 없기에 경험이 강조되는 초음곡(超音曲)과 유사하다.

김경주_외계정원_하네뮬레페이퍼에 피그먼트 프린트_43×57cm_2018

「외계정원」은 김경주가 다양한 재료와 방식으로 접근해온 이미지의 변형적 특성을 내재하지만, 단지 관념적 매개물로만 간주되던 기호의 물리적, 신체적 감각을 강화시키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이런 해석만으로는 이 글을 읽는 이가 「외계정원」을 판독하기란 쉽지 않다. 미적 경험으로서 편재적 성질 탓이다. 이에 작가가 보내준 작가노트를 열람하는 것도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긍정적인 방법이다.5) ● 「외계정원」은 건조한 공간에서 무수한 점과 선으로 계획되고 유동하는 존재들 사이에서 어딘가 모를 침묵의 시간까지 포괄하는 작업이다. 그래서인지 필자의 시각에 이 작업은 직조된 시각이자 발견된 경험으로 읽힌다. 물론 투명한 PVC판 위에서 스퀘어 마커드로잉으로 채워진 「외계정원」은 관객의 참여가 원만하다는 점에서 예술 주체의 양도현상을 비롯해, 타자의 개입과 개방성을 엿볼 수 있다. ● 다양한 스토리가 내재된 각기 다른 군도의 공존적 집합을 소환해 관계를 맺고 통합이 아닌 차이를 이어나가되, 평면성과 공간성에 시간을 얹혀 '번역' 하는 상호교류적, 동시대적 역할까지 맡는다. 그렇게 하여 생성되는 작용은 아마 그 자체로 이전과 전혀 다른 미적 경험을 유도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새로운 예술적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 철학자 존 듀이는 경험이 성립하고 성장하려면 이 공간적 차원 이외에도 인간 내면의 시간적 차원에서 경험과 경험이 연결되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상호작용) 이것을 연속성의 원리라고 한다. 때문에 그의 작업을 구성주의로 단편화하는 것은 지나친 견해다.6)

김경주_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12기 입주작가展_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파빌리온_2018
김경주_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12기 입주작가展_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파빌리온_2018
김경주_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12기 입주작가展_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파빌리온_2018

허면, 2017년을 잇는 올해의 작업은 어떤 방향일까. 작가의 말에 따르면 “박수근미술관에서 작업하는 내용은 투명에 투명을 더해 불투명이 되어가고 그 인위적으로 겹쳐지고 채색되어진 공간에서 카메라의 접사를 통해 작가의 또는 관객의 정원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박수근미술관의 「외계정원」은 그 터널을 개방된 진짜 정원과의 조우를 통해 시간, 온도, 조도 등에 의해 다르게 변화되는 터널 안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도 덧붙여있다. ● 2017년 작품과 2018년 박수근미술관에서의 작업은 동시대성 아래 놓인다는 점에서 결이 같다.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이고 개별적이면서 타인과 공유되는 경험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도 그렇다. 결국 구작이든 신작이든 「외계정원」은 동시대성에 드리운 문명적 삶과 그 삶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맥락과 상호 관련 속에서 미술을 바라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동시대성은 집단적 혹은 개별적으로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 새로운 방식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문화적 상태로의 역사적 전환을 촉발하며, 세계화와 중첩된 채 서로에게 투자하고 간섭하며 필요에 따라 개별적인 양태를 띠기 때문이다. ● 흥미롭게도 김경주의 근작은 공간의 접점을 확장하고 있다. 분명 과거의 공간과 박수근미술관에서의 공간은 다르지만, 그 다름의 직접성으로 인해 존재 가능하고, 이는 시간 안에 거주하는 다양한 방식, 우리와 시간성을 고르게 함의하지만 동시에 각자 고유의 시간성을 살아가는, 현재의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타인들과 지분하며 공존한다. 그것은 달리 말해 공간성과 더불어 '공소(空所)’의 미(美)라는 원리의 작동이다. 듀이의 표현처럼 시간성을 포괄한다. ● 동시에 근작은 각자 고유의 시간성을 살아가는 현재의 시간으로 파편화된다. 근작에서의 공간은 크게 실제의 공간과 기호의 공간으로 구분되고, 실제의 공간과 기호의 공간은 모두 시간의 공간으로 측정되는 공통분모 아래 놓여 있다.

김경주_외계터널_포장테이프_공간설치드로잉_2018
김경주_외계정원 작업과정 스튜디오 전경_2018

작가는 그 공간의 영역을 점과 선들로 연결한다. 확장도 푸르디푸른 점과 선의 관계에서 개간된다. 단단하고 규칙적일 만큼 견고한 공간이 거듭해 속으로 들어서면 마이크로픽셀처럼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공간이 나타난다. 이는 “점과 선들은 본인에게 텍스트가 되고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의미가 되고 다시 추상적 이미지가 된다. 비닐은 천정에서부터 바닥까지 설치하고 접사 촬영 된 이미지는 다시 판화지로 옮겨져 작가의 외계정원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라는 작가의 말과 등치를 이룬다. ● 보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 작가의 작품은 마음 깊은 곳에 똬리 튼 내면의식과 외부와의 소통, 작가가 제시한 오브제로부터 빚어지는 주체와 타자 간 상호성의 문제를 되짚는다. 설치, 영상, 회화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같은 듯 다른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든 시공간을 오가는 탈영역화된 작업을 펼쳐 보인다. 어쩌면 이는 독자적이고 함의적인 현존성에 관한 자문을 포함해 '시각을 관통하는 감각의 이미지’라는 예술에 가까울 수도 있다. ● 그런 점에서 김경주의 작품들에선 공간적-시각적인 '작곡’이 일상을 무대로 연주되고 전개되어 온 반면, 일상 속에서 시각예술로 다시 소환-편곡된다는 것에 남다름이 있다. 시공을 가르고 나누며 그 내부에서 생성과 소멸-소환작용을 일으킨 채 있다와 없다, 없지만 있는 것들이 충돌하고 호흡하는, 그러면서도 시각이라는 고유함을 유지함으로써 공간 내 보이지 않는 파동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변별력을 찾을 수 있다. 겉보기엔 알 수 없으나 이는 일종의 무심결에 깨닫는 감각의 배반이라 해도 무리는 없다. ● 작가는 1999년부터 설치작업을 이어오며 다양한 실험적 제스처를 구현해 왔다. 그것은 대체로 진지하지만 때로 예상 밖의 날숨을 보여주곤 한다. 텍스트가 등장하고 입체가 공간에 머물며 호흡하는 일정한 방식은 하나의 맥락으로 남아 있다. 여기에 이번 박수근미술관에서 선보이는 작품처럼 실험적이고 돌연적인 작품도 시기 없이 출몰한다. 그곳엔 공간, 드로잉, 설치, 조우라는 명사들이 배어 있다.7)

김경주_외계정원vol1_파빌리온 야외설치_2017
김경주_외계정원vol1_파빌리온 야외설치_2017

김경주의 작품들은 자연과 연계된 투명의 불투명이라는 비닐을 통해 '대단히 체계적이나 즉흥적이고 임시적 공간’을 설정하고, 공감각적 상황을 연출하며 주체와 타자 간 직접적 소통으로 일상 속 예술의 심리성을 탐색한다. 이는 어쩌면 관객들의 인지와 사고, 개념에 혼란을 초래하는 작업들일 수 있음에도 그것을 통해 새로운 미적 가치를 일깨우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 비록 누구에게나 인식 가능할 만큼 이해가 원활한 것도 아니고, 취합의 구조 역시 이치를 따지기도 어렵지만 물리적, 심리적 제약을 작품에 그대로 끌어들여 자연스럽게 삶의 일상성이 미술에 침투하게 둔다. 그리고 목적과 동선에 따라 효율적으로 최적화된 기존의 반원형의 건축성에 이입되도록, 즉 무수한 점들의 세계 내에서 끊임없이 길을 잃고 헤매도록 공간을 설계한다. 이를 통해 삶의 일상성을 깨뜨리고, 관객에게 물리적, 심리적 해방감을 선사한다. 또한 비가시적이거나 숨겨진 공간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기존의 열린 공간을 구획 짓는다는 점에서 양가적 속성을 지닌다. ●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공간 속에서 병렬-중첩되면 기존 시각체계는 무너지고 새로운 영역이 만들어진다.(이는 예술에 있어 매우 유의미하고 재미있는 현상이다.) 여기엔 단조롭게 구성된 터널의 안전성에 반비례한 구분, 제지, 차단이라는 규칙적 용도의 의미까지 포함된다. 여기서 텍스트는 혼란스럽고 복잡한 수사학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수사학적 언어에서는 더 이상 모더니즘의 희망적 이념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호의 맹목성과 통찰력이라는 무기력한 모순이 우리를 압도할 뿐이다.8) ● 필자의 관점에서 김경주는 세상을 보는 자신만의 예술적 가치관과 미학적 언어의 관계를 현실계에 투영한 채 수사학적 메타포로 다뤄 왔다. 지루하고 지겨울 만큼 혹독한 작업과정에 덧대어진, 하지만 꼭 필요한 과정에서 생성된 점들이 공간에 혼재된 채 부유하고 떠돌며 흩뿌리는 상황과 그에 대한 반응을 유추하면 어렵지 않은 결론이다. 다만 이때 관객은 양립불가능성에 관한 가능성의 이미지를 훑으며, 특정 범주 내부로 스스로 귀속시켜온 각자의 기존 신체-관념을 해체함과 더불어 새로운 질서마저 맛보게 된다. 그건 바로 병치되고 대립하며 조화로운 성격을 지닌 자웅동체와 같은 의미론적인 것들과 결이 같다. ■ 홍경한

각주 1) 본 비평의 제목은 김경주 작가의 작가노트에서 따왔다. 이것만큼 적절한 주제의식은 찾을 수 없기에 그대로 인용했다. 2) 과거 김경주의 설치 일루미네이트 텍스트와 회화 텍스트-ohohooh 텍스트-의 확장과 같은 일련의 작업만 봐도 그렇다. 다양한 변주를 담보했던 이 작업은 오브제가 아닌 텍스트를 시각으로 옮겼다. 작가에 따르면 텍스트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는 2002년이다. 3) 휘발되지 않을 비특정성은 1999년 이후 빛과 투명성을 관통하는 여러 작업들이 이를 증명한다. 빛은 2013년부터 시작된 OHP필름 작업, 아날로그 다이얼로그 드로잉 등으로 전개되며, 공간과 공간, 공간과 경계, 사물과 공간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4) 공간에 관한 작가의 관심은 1997년부터 2001년까지 미국에 머물며 시도한 공간읽기에서 비롯해, 이후 김경주 작업의 조형을 대리하는 요소로 기능한다. 전시 화이트큐브식 전형적 공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라 추측된다. 5) 그는 이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밀폐된 미술관 공간 안에서 터널을 시각화 하고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공간이 사진 촬영을 통해 반사되고 투영되는 환영처럼 보이는 공간”이다. 6) 회화의 평면성은 공간 확장을 위한 장치다. 따라서 이 둘의 관계를 구성주의에 입각해 설명하면 지나치게 경직되어 진다. 7) 이와 관련해 작가는 “주로 사용하는 '하이덴’이라는 대형 비닐은 작게 자르면 포장이나 쓰레기 봉지로 사용되는 목적의 일상 비닐이다. 그러나 그 일상 목적의 재료들은 사이즈를 다르게 하면 많은 의미를 갖는 작가의 예술적 재료로 치환된다. 과거 고양창작스튜디오 등에서도 본 적 있던 작업의 재료들, 즉 작가가 그동안 사용해왔던 테이프, OHP 필름, 밴드 등을 사용하며 보여주었던 것과 같다. 0.025두께의 하이덴 비닐을 구기고 물감을 뿌리고 겹치고 벽에 걸고 다시 물감을 뿌리고 굳히는 반복적인 행위가 지나면 내가 의식하며 만들어 내지 못한 흥미로운 비밀스런 공간들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8) 물론 김경주가 이런 시선에서 작업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원득_지독한 숲_한지에 채색_91×91cm_2017

지독한 숲 - 환자인 동시에 의사인, '상처 입은 치료자’로서의 한 전형 ● 작년(2017) 늦가을의 어느 한 날, 필자는 바람도 쐴 겸, 전시도 볼 겸 해서 집사람과 함께 양구에 있는 박수근 미술관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날 일정이 다 끝나고 막 집으로 돌아가려는 찰나에 엄선미 관장님께서 미술관의 입주 작가 스튜디오를 안내하면서 그 곳에서 몇 달간 작업을 하고 계셨다는 젊은 작가 한 분을 소개시켜 주셨다. 차분하고 단정한 외모나 말없이 조용한 태도와는 달리, 스튜디오 벽에 걸려 있는 작품들의 면면에선 주로 폭력이나 죽음, 사체나 절단의 이미지들이 즐비했다. 화가에 대한 느낌이 표면이라면 그림에 등장하는 도상은 이면이다. 그런데 만일 보이는 표면과 보이지 않는 이면 사이에 서로 맞닿기 어려운 극단적인 이격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감추어진 이면의 역동을 억압하는 드러난 표면의 은폐 역시 현저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극적 불일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작가 자신의 정서적 생존을 위한 긴박한 방어기제가 적극적으로 개입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림의 광포함과 작가의 수줍음, 이 두 대립면의 간극에 대한 합당한 설명의 과정이야말로 그녀의 내면 풍경을 독해하기 위한 일련의 심리적 여정이 될 것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조원득_숲_한지에 채색_102×135cm_2017

그림의 내용을 하나의 증상으로 이해하고 본다면, 거기서 우선적으로 읽혀지는 문맥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가학과 피학의 꼬리 물기이다. 화면 속 쓰러진 사슴들의 주검 - 피학자 - 이면에는 활을 쏘는 과녁의 존재가 암시하는, 사슴을 쏘아 죽인 인간 - 가학자 - 이 숨어있는 것이다(지독한 숲, 2017). 과녁을 맞히겠다는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무고한 생명들의 희생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그 활 든 자들의 잔혹함이 바로 고금의 권력자들이 공유했던 가장 보편적 지독함이 아닐까?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불공정한 규칙을 만들고 그 부당한 규칙에 저항하거나 거스르는 모든 자들을 혹독하게 탄압하거나 사정없이 제거해 버린다. 또한 산야 위에 여기저기 흩어져 쌓여 있는 절단된 나무들 - 피학자 - 의 이면에는 그 나무들을 사정없이 베어버린, 표면으로부터 감추어진 벌목자 - 가학자 - 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숲, 2017-2018). 또 다른 한 점의 그림(잘못된 게임, 2016)에서는 아예 주먹을 날리는 사람과 주먹에 맞는 사람이 동시에 한 화면 속에서 마치 돌직구를 날리듯 직설로서 폭로되고 있다. 이러한 화면의 내용들은, 병리적 증상으로서의 폭력에 대한 지독한 은유와 직유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작품(요동치다, 2016)에선 수직적 권력구조에서 유래하는, 그리고 폭력을 매개로 하는 가학과 피학에 대한 심리적 불안감이 매우 선명하게 노출되고 있다.

조원득_기억의 그림자_한지에 채색_60×60cm_2018

이러한 작업 결과물로서 드러난 현상의 이면에는 그 현상 이전에 이미 선재(先在)하고 있는, 인자(因子)로서의 원체험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작가 자신의 발달사적 경험이 바로 그것인데, 알코올 의존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와 그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가했던 가정 내 폭력의 장면들이 유년기 작가의 내면에 가학과 피학의 원형으로서 깊이 각인되어진 것이었으리라. 그녀의 작업에 등장하는 가학자의 원형은 자신의 아버지라 볼 수 있고, 피학자의 원형은 자신의 어머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현장에서 이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상당히 긴 세월에 걸쳐 누적되어온 크리티컬(critical)한 트라우마(trauma)야말로 지금의 작품 안에 드리워져 있는 작가 자신의 심리적 불안감의 아키타입(archetype)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실로 그녀의 작업은 피학자로서의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고 달래는, 애절한 자기 치유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 그러나 그럼에도 이러한 개인적 경험이 표현되고 있는 작업의 내용들을 그저 작가 자신의 사적 내러티브만의 나열이라거나 반복으로서만 한정해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물론 자신의 내적 경험들이 가학이나 피학의 문제에 대해 남들보다 유독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극도로 예민한 촉수를 형성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 사회 안에서도 전술한 가정 내에서의 병리적 패턴이 그대로 반복, 재현되고 있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인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 그렇다면 결국 작가의 심리적 문제는 이 사회가 지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기술하는 하나의 단초가 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자신의 불행했던 개인적 경험이 오히려 이 사회 안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유사 현상들을 고발하고 파헤칠 수 있는 유용한 맥락을 형성해 나가게 된 것으로 파악해 볼 수도 있겠다. 어쩌면 그녀는 이 작업들을 통해, 또 자신의 고통스런 체험을 통해, 이 사회의 병적 구조 속에서 희생양이 되어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불특정 다수들을 위한 '상처 입은 치료자(wounded healer)’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조원득_여기 아닌 거기_한지에 채색_210×150cm_2017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 : 15) ●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브리서 2 : 18) ● 그리스도는 무한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하셨다. 초월자가 연약함의 옷을 입고 다가와야 비로소 유한자는 무한을 감지하고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 히브리서의 저자는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體恤)하시는 분으로 기술하고 있다. 실로 그러하다. 우리의 대제사장께 치유의 능력이 흘러나오는 까닭은 이미 그 자신이 모든 고난을 몸소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 고난의 체험이 바로 그와 동일한 고난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낮고 연약한 자들을 지금껏 신실하게 돕고 계시는 것이다. '체휼’이란, 함께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체휼함’은 아픔을 겪지 않았거나 고통을 받아보지 않은 자들로서는 결코 수행해 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감정 전달의 방식이자 상호 연합의 체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에게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타인의 아픔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한 마음은 물론, 지금-여기에서 아픔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위로자가 될 수 있는 합당한 자격도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다.

조원득_가득 차있지만 텅 빈 것_종이에 채색_29.7×42cm_2018

그녀의 작업 행위 안에는 스스로의 체험을 반추하며 이를 내면화하는 겪음(suffering)의 과정과 이를 다시 화면 속으로 투사하고 해소하는 치유(healing)의 과정 - Intra-process, 그림을 매개로 하는 자기내적 와병 및 회복의 과정 - 이 함께 공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내적 경험을 통해 타인의 감정에 다가서고 공감하려는 측면 - Inter-process, 그림을 매개로 타자를 자신의 경험 체계 속으로 편입시키려는 과정 - 까지도 더불어 포괄하고 있다. ● 그간의 작업 과정들을 통해 그녀가 주목하게 된 중요한 지점은 '규칙’의 문제이다. 그녀의 작가 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게임에는 항상 규칙이 존재하고 게임의 참여자는 반드시 그 규칙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나는 정해진 규칙에 잘 따르던 그들이 애초에 게임의 규칙 자체가 잘못 설정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으로부터 출발하여 현재까지 그것을 여러 작업들을 통해 예증하고 있다. ● 아마도 게임이란 우리의 인생을 은유하는 것이리라. 이 게임을 유지하게 하는 규칙의 핵심은 공정함과 평등함, 즉 공평과 정의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덕들은 힘의 위계에 의해 순식간에 압도되거나 붕괴되어져 버리게 된다. 이것은 자고이래(自古以來)로 인간사에서 끊임없이 벌어져온 무수한 전쟁들, 그리고 전제 군주나 독재자들의 압제, 나면서부터 절대로 바뀔 수 없이 고착되어진 신분과 계층구조 등에서 그 예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인데, 이것은 가정 내 부부간 혹은 부모 자식 간에 일어날 수 있는 폭력 행사들의 외연적 확장 현상이기도 하다. 어떤 사회든 이 무참한 가학에 노출된 희생양을 통해 전체 집단 구성원들의 공포를 최대치로 증폭시키면서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그 규칙에 순응하도록 만들어버린다. 일종의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되는 것이다. ● 체제의 모순이나 부조리에 노출된, 그래서 깊은 불안에 휩싸인 한 피학자로서의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단 두 가지뿐이다. 첫째는 가학자의 초인간적 권위를 내면화하면서 자신의 상처를 은폐시키거나 굴욕의 감정을 부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노출시켜 동일한 상처를 가진 다수와 연대하면서 부당한 규칙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녀의 그림에 등장하는 벌거벗은 군상들은 자신의 상처를 전적으로 과감하게 드러내고 이를 새로운 방식으로 극복해 보겠다는 정신내적 외침이자 절규이다. 그녀가 자신의 방어적 억압 속에서만 그저 머무르지 않고 이를 오픈하면서 다수의 상처 입은 대상들과의 연대를 통해 피학적 상처의 경험을 마침내 역전시키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이 벌거벗은 인물들의 형상으로 압축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가장 드러내기 어려운 개인적 경험들을 힘겹지만 과감하게 외부로 표현하는 용기 있는 모습 속에서, 은유로서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그 전말을 폭로하고 있는 과정 속에서 이미 선명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숲으로 은유되는 이 지독한 세계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서로 죽고 죽이는 대립항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응시란, 자신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것임과 동시에, 결국 그 세계를 피학자들의 연대를 통해 역전시키겠다는 견강한 의지의 표명이기도 한 것이다.

조원득_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 위한 발견_한지에 채색_102×135cm_2018

필자가 금년(2018) 2월 초에 작가의 스튜디오를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 전에는 미완의 단계에 있었던 작품들 - '여기 아닌 저기(2017)', '숲(2017-2018)' 등 – 이 완성되거나 그때보다는 훨씬 더 많이 그려져 있었다. 작년 11월 말의 첫 번째 방문 당시에는 전반적으로 엷게 그려져 있었던 작품들이, 반복해 쌓아 올린 채색의 효과로 인해 완성도가 상당히 높아져 있었음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 전반적으로 그녀의 작업은 일상적인 풍경 속에 낯선 기분이나 의외의 느낌을 풍기는 어떤 하나의 대상을 화면에 돌연히 제시하면서, 평범한 공간 속에 갑작스러우면서도 기이한 기운을 강렬하게 주입시키고 있었다. 풀숲에 물웅덩이 하나를 그려 넣는다든지(가득 차있지만 텅 빈 것, 2018), 평범한 마당 안에 뿌리가 드러난 나무의 그루터기를 턱하니 놓아둔다든지(이율배반, 2018), 시멘트 블록 벽으로 둘러싸인 평범한 공지(空地) 한쪽에 눈 맞은 모래더미를 난데없이 그려 넣음으로서(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 위한 발견, 2018), 어떤 원인을 알 수 없는 긴장감이나 심상치 않은 정서들을 불쑥 환기시키고 있었다. 작품 '여기 아닌 저기(2017)’에서 사슴이 있는 숲에 지뢰 표시를 그려 넣은 것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들은 모두 자신이 표현하려고 하는 주제의식을 전면으로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암시적 무대장치로서의 후경(後景)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는 임옥상(林玉相)이 1980년대에 제작한 그림들 일부에서 풍기는 에이리언(alien)한 분위기나 감흥과도 일면 유사했다.

조원득_가짜나무_한지에 채색_116.8×91cm_2017

또 불타는 숲속에서도 타들어가지 않고 있는 인물상을 그린 작품(끝까지 서있는 사람, 2017-2018)의 경우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동상(銅像)을 그린 것이라 했다. 작가는 과거에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일어날 수 있는 감당하기 어려운 파국적인 사건들 – 불타는 숲과도 같은 지독한 상황들 – 속에서도, 마치 불타지 않는 아니 불탈 수 없는 동상처럼 그렇게 꼭 살아남아야만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그림 속에서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불타는 숲, 바로 그 지독스런 생의 파란과 곡절들을 오롯이 다 겪어낼지언정, 절대로 그 속에서 치명상(致命傷)을 입지 않기 위해서는 이처럼 견고한 동상이 되어, 철피(鐵皮)나 동피(銅皮)로서 부드럽고 연약한 내피(內皮)들을 꽁꽁 싸매고 그 전부를 덮어버려야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은 무정하고 잔혹한 세상의 구조 속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비인간화 되어져버린 존재들의 깊은 슬픔과, 온몸에 철갑을 두르고서라도 꼭 살아남고 싶었던 약자들의 모든 비극을 절절하고도 생생하게 일깨우고 있었다. ● 그 옆으로는 시멘트로 만든 가짜 나무 하나를 가져와 숲속에 세운 다음, 여러 개의 철골들을 그 가지에 붙여서 마치 그것이 진짜 살아 있는 나무처럼 보이도록 꾸미고 있는 장면을 담은 그림(가짜 나무, 2018)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시멘트로 만든 나무는 실제로 살아있는 나무처럼 상처받거나 쉽게 잘려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단단하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로 살아 있는 나무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감수성을 잃어버린 죽은 나무들의 가장 전형적인 속성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 마치 죽은 나무처럼 단단해져야만 하는 비정한 조건 - 지독한 숲 - 속으로 몰리고 몰려진 인간 - 나무 - 들의 처지에 대한 애도로서의 절묘한 은유에 다름 아닌 것이다. ● 나무 밑동에 백기가 꽂힌 모습이 그려져 있는 또 다른 한 작품(치열한 각축전에서 탈락한 사람, 2018)은 불공정한 생존 경쟁에서 밀려난 패배자들이 외치는 고통스럽고 처절한 아우성을 소리 없이 들려주고 있었다. 또한 이것은 소외된 낙오자들에게 동병상련의 애달픈 심정을 투영하고 이입시키면서, 애정 어린 눈빛과 따스한 손길로 그들을 보듬고 있는 작가의 결 고운 심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조원득_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12기 입주작가展_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파빌리온_2018
조원득_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12기 입주작가展_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파빌리온_2018
조원득_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12기 입주작가展_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파빌리온_2018

요컨대 예술 작품 - 회화 - 이 한 작가 개인의 고유하고 대체 불가능한 문제의식에 대한 형상적 해석이라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구체적인 삶의 문맥과 지평 속에서 도출되는 것이며, 다시 그것이 보편적 인류(mankind)와 근원적 인간성(humanity)에 대한 문제의식, 즉 사회적, 역사적, 구조적 지평으로까지 끊임없이 확장되어 해석되어질 수 있는데, 그간 지속되어온 조원득의 다년간에 걸친 작업들이야말로 지극히 내밀한 개인사적 내러티브인 동시에, 종내는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의 왜곡되고 삐뚤어진 현실상(現實相)의 고발과 그 해석에 대한, 가장 오래된 아키타입(archetype)이자 가장 새로운 키노타입(kenotype)으로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 김동화

Vol.20180310c | 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 12기 입주작가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