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t in Peace - 평안하길

제제展 / JEJE / sculpture   2018_0223 ▶ 2018_0322 / 월요일 휴관

제제_With you_FRP에 아크릴채색_47×29×35cm_2018 제제_easy come easy go_FRP에 아크릴채색_47×29×35cm_2018

작가와의 대화 / 2018_0223_금요일

관람시간 / 10:30am~07:00pm / 토,일요일_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소울아트스페이스 SOUL ART SPACE 부산시 해운대구 해운대 해변로 30 Tel. +82.(0)51.731.5878 www.soulartspace.com blog.naver.com/soulartspace www.facebook.com/soulartspace

실재 없는 복재의 역설적 지점에서 ● 같은 크기의 여럿 인물이 등장해서 두상과 상체, 팔다리, 발목으로 나눠져 색상을 달리 하거나 대머리나 단발로 남녀를 가르고, 흰색 흑색으로 인종을 나누지만 결국은 하나같다. 반들거리는 색상 그 위에 어떤 것도 덧붙일 수 없을 듯 완결미를 가진 개별체이지만 하나의 틀에서 찍혀 나온 인물들의 도열이다. 서핑보드를 들었든, 폭탄을 들었든, 꽃이나 장난감을 들었든, 주저앉았거나 토끼인형을 끌고 가든, 얼굴에 새겨진 주근깨와 눈, 입의 표시를 통해 얼굴이 다르다는 표지를 보여줄 뿐 복제된 그대로의 하나임을 보여준다. 같은 크기, 같은 인물이 상품처럼 대량생산되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끝없는 복제의 순환이 이런 것일 것이다.

제제_For you 3_FRP에 아크릴채색_73×28×17cm_2018

남녀의 차이도 인종의 차이도 없다. 표면의 무늬들이 차이로서 개별성을 보이지만 그 개별성은 표면의 효과에 지나지 않으며 굳이 차이를 부각시킬 이유도 없다. 아니 그것만이 겨우 차이로 부각된다. 원본을 알아볼 수 없는 복제된 인물이 놓인 정황에 따라 약간의 색상이나 몸에 새겨진 문양으로 차이가 날 뿐이지 개별적 인물로서 정체성을 구축해 보이거나 제시하고자 하지 않는다.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의 형상화를 통해 삶의 다양성을 말하고 현대사회의 서사를 펼쳐보려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삶에 대한 시선이나 경험이기보다 그저 한 개의 인물들이 끝없이 다른 것으로 순환하는 기표들의 세계를 보이는 것이다. ● 게다가 얼굴이나 몸통에 혹은 팔이나 다리 등에 새겨진 글자들, 영어, 일어, 한자어의 활용은 세계화된 정보로 보이지만 실은 국적 부정의 어떤 상황을 보여준다. 이마에 새겨진 일본어를 아는 사람은 그 의미와 발음을 통해 모르는 이와 다른 정서적 반응을 보일 것이고, 모르는 이는 그저 문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굳이 그 의미를 알아야 할 것도 아니다. 영어나 한자어도 마찬가지다. 알아도 좋고 몰라도 좋은 것이다. 언어의 혼성 혹은 다국적인 언어감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언어든 소용없는 순간, 그저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대화나 이해가 아니라 그저 보이는 것으로 거기 있는 것으로 족하다. 소비되는 이미지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 낙서화로 알려진 그림의 채용도 그렇다. 몸에 새겨진 문양들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누구의 것이든, 채용한 것이든 변주한 것이든 인물 위에 또 하나의 인물 문양이 새겨진 것이고, 그것이 기존의 것을 복제한 것이든 아니든 문제 삼지 않는다. 인물의 탄생이 아니라 하나의 정보로서 기호가 주어진 것이다. 그 정보 혹은 기호는 의미적 관계가 아니라 몸체에 새겨진 다른 무늬와 더불어 병치되는 기호일 뿐 의미의 변별을 내보이는 것이 아니다. 바스키아든 키스 헤링이든 어린이 그림 같은 낙서들의 채용이든 원본 없는 것들의 연속이자 낙서 위에 낙서를 하는 끝없는 자기부정의 하나다. 장화같기도 양말같기도 한 발은 검은색, 흰색, 분홍색, 연두색 등으로 차이를 만들어내면 그 뿐이다. 견고한 어떤 것 위에 불가피한 색상이나 모양이 아니다. 표면이면 충분하다. 어떤 실재의 지시도 없이 끝없이 순환 속에서 그 자체로 교환될 뿐이다.

제제_Give me_FRP에 아크릴채색_73×17×28cm_2018 제제_For you 2_FRP에 아크릴채색_73×17×28cm_2018

Jeje의 밝은 색상과 반짝거리는 표면, 미끄럽고 완벽한 형태감과 색상은 단순하고 반복적이며 무겁고 힘든 의미들에서 자유롭다. 예술이라는 엄숙함보다 맛깔스런 표면이 더 친근하고 살갑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인 인상은 경쾌하다. 그러나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 우울한 의미맥락이 없지 않다. 문제는 그 우울한 정황이 언제나 볼거리의 가벼움으로 처리된다는 데 있다. 심각한 고통의 정황조차 피상적인 표면(문자)만 있을 뿐. 어떤 사건도 드러나지 않는다. 패턴으로 반복되는 인물은 우리를 길들이고 소비될 뿐, 숨 쉬는 삶으로 보이지 않는다. 소비되는 불온한 현실이 있을 뿐이다. 어떤 정황이든 그저 하나의 재미로 전환될 뿐 구체적 현실이 기입될 여지가 없다. 표면의 차이로 생산되는 복제는 기표의 미끄러움에 중심이 있으면 어떤 규정된 의미나 엄숙함, 오리지널한 원본성을 찾고자 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현실적으로 부각되는 의미를 부정하면서 자신을 해체시키고 의미가 들어설 자리를 지우려 한다. 가볍고 미끄러운 이미지로서 세계가 거기 있다.

제제_For you 1_FRP에 아크릴채색_73×17×28cm_2018

이런 특징에도 불구하고 전시에서 연출되는 서사적 정황은 의외적이다. 설치라는 방법을 통해 서사를 만들려는 것은 자기모순이거나 논리적 어긋남을 보여준다. 자신의 작업 특징이 무엇인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기존하는 의미의 강제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의 특징은 일관되고 앞뒤가 맞거나 시작과 끝이 있는 서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서사 자체의 가능성을 해체시키고 지우는 일에서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허황한 유행이거나 순간적인 장식성으로 기저로부터 강제되거나 정략적인 근엄함을 벗어나려는 가벼움과 의미 없음, 권위를 거부하고 자유를 구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몸의 부정, 의미의 부정, 언어의 부정, 남녀, 인종을 부정하는 태도이자 그가 기댈 언덕인 셈인데, 의미와 서사를 만들려한다? 설치를 통해 내용을 구상하고 서사를 만들려는 욕심은 실재를 인정하고 권위를 인정하고 기존하는 의미구성 논리로 환원하는 것이다. 한 작가 안에서 드러나는 것과 의도하는 것의 충돌이다. ● 그런데 한 발 물러나서 바라보면 그가 내보이는 표면은 항상 같은 모델 위에 새겨지는 것이지 않은가. 원본이 없다지만 출발은 있는 것이며, 다양한 변주의 바탕에는 변주를 받아내는 몸, 역설적으로 본질, 실체가 거기 있는 셈이다. 그 위에 온갖 것이 드러나는 것이라면 복제란 견고한 실체를 잊고 있는 삶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까. 온갖 것들이 우리의 감각을 현혹하고 있지만 그 아래는 여전히 언제나 어떤 것이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의지가 서사로 이끄는 것이 아닐까. 복제는 다만 한 개의 모델에 의해 수없이 드러나지만 그 변화와 현혹은 한 개의 틀 위에 새겨지는 무늬일 뿐이지 않은가. 굳이 자신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설치로 정황을 시도하고 특정한 의미를 가미하는 것이 미술계의 흐름을 타는 것이라기보다 작품 구축의 재료와 방법에서 드러나는 의미 부족에 대한 갈증은 아닐까 하는 읽기가 그런 것이다. 어디에서도 자신을 찾아보기 힘든,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자신을 대신하는 소비로 자신이 부정되고 있는 세태, 자아의 정체성을 주장할 수 없는 현시대의 실상에 대한 의지의 단면이 그런 것이다.

제제_Rest in peace_소울아트스페이스_2018

예술이 결코 삶의 온전함에 대한 언설임을 부정할 수 없다면 '사회적 복종'과 '기계적 예속'만이 우리에게 허용된 시대에, 실은 "'모든 것이 허용된다면' 어떻게 처신하고 살아야 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진실하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놓여 있다."(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신병현, 심성보 옮김, 기호와 기계, 갈무리, 2017, p.338)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의 틀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이미지의 변화만 있는, 그래서 자신의 틀이 무엇인지를 잃어버리고 종내는 지시하려는 대상이 없는 표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그런 의미를 간과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 강선학

Vol.20180326b | 제제展 / JEJE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