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의 정당성

송현주展 / SONGHYUNJU / 宋賢珠 / painting   2018_0410 ▶ 2018_0418 / 일요일 휴관

송현주_행위의 정당성_캔버스에 오일스틱_162×130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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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주 블로그_00709647.blog.me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아트와 ARTWA 서울 용산구 두텁바위로60길 49 (후암동 358-17번지) 대원빌딩 본관 3층 Tel. +82.(0)2.774.7747 www.artwa.net

예술이란 무엇인가 -반복으로써의 예술과 예술로써의 행위, 실재의 비고의적 인식방식으로써의 존재 연구 ● 1. "행위에 관심을 가지고 지우고 뭉개고 반복하며, 특정하게 주어진 이미지 없이도 예술인, 이것이 과연 옳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반복을 통해 예술가의 작품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작품은 예술이라는 것을 획득했다.(사실상 동시대에서 예술이란 무엇을 예술이게 하는 본질은 없고 예술사나 예술계와 같은 맥락만이 존재하기 일쑤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어떠한 행위로부터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나는 반복행위 중, 단순히 긋고 뭉개고 낙서하듯 일련의 행위로 증명했다." 위 글은 작가 송현주의 작가노트 중 일부이다. 반복을 통해 예술가의 작품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작품은 예술이라는 것을 획득했다와 그러므로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어떠한 행위로부터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가 핵심이다. 작품은 예술가로부터 비롯되고, 예술가의 행위가 결과를 완성한다는 얘기지만, 반복을 통해 작품의 정당성을 획득한다는 부분으로 인해 다소 아리송하게 들릴 수 있는 위 문장에 대해 작가는 같은 작가노트에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행위의 정당성은 예술가의 행위로부터 예술존재와 예술작품에 대한 정당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행위를 반복하면서, 채우고 지우는 과정을 통해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을 첫 번째 목적으로 한다. 즉 이러한 계획적 혹은 즉흥적 행위에서 예술이 되거나 아니거나 라는 존재성에 위협(?)을 받게 된다." 그의 연작 「행위의 정당성」(2017)에서 일견 드러나지만, 행위의 정당성이 예술존재와 작품의 정당을 연결한다는 위아래 두 문장을 조합하면 예술과 작품 간 자문자답이 완성된다. 예술이란 다분히 시간과 공간 밖에 있는 비지각적 존재일 수 있다면 행위의 정당성은 반드시 지각적일 수밖에 없다는 게 읽힌다. 행위는 순간적, 소비적일 수 있으나 작품은 그 순간을 포박한다. 정당성의 밑동엔 휘발되는 행위와 기록으로써의 행위라는 두 가지가 병치되어 있다. 송현주의 텍스트를 곰곰이 되새기면 생각해볼 지점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반복을 통해 예술가의 작품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작품은 예술이라는 것을 획득했다."는 대목에선 반복이 과연 작품의 정당성을 담보하는지 따져봐야 한다. 반복(행위)-작품-예술이라는 등식에 있어 반복이 작품으로 귀결되려면 반복과 행위의 구분이 이뤄져야 하며, 행위가 반복될 때 그것이 어떻게 예술일 수 있는지 소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궁극적으론 작품의 정당성이 옹립된다. 여기서의 답은 반복과 작품 간 간극을 채울 수 있는 예술일 수 있는 조건, 즉 '의미부여'에 있다. 반복, 행위, 작품, 예술 간 연결고리는 오로지 의미지정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의미지정은 작가의 몫이요, 이는 개념적-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야 한다. 앞선 문장인 "행위에 관심을 가지고 지우고 뭉개고 반복하며, 특정하게 주어진 이미지 없이도 예술인, 이것이 과연 옳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와 "예술이 되거나 아니라는 존재성에 위협(?)"도 따져볼 측면이 있긴 매한가지다. 동시대예술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어쩌면 개념과 철학의 영역일 수 있음을 고려한다면 가시적 이미지의 존재는 그다지 가치 있는 범주에 들지 않는다. 예술에 대한 정의에서도 중요한 건 예술로써의 행위가 어떻게 의미될 수 있는 지이지, 행위로써의 예술과는 층위가 다르다. 결국 이에 관한 한두 결, 다시 말해 작가 스스로의 예술에 관한 명료한 의식과 그 명료성을 바탕으로 한 외부 공인이 문제다. 그렇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반복(행위)의 의미부여란 무엇인가. 이를 효과적으로 파악하려면 예술은 예술 행위 자체를 대상화한다는 개념의 하단에 위치함을 이해하는 게 순서다. 개념부터 성립되어야 하고, 작품이 이미 개념에 종속되어 있음이 숙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개념종속이 바로 의미부여의 다른 말이다. 이는 '표현'이라는 명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표현은 행위의 실질적 도구인 신체가 될 수도 있고 결과물인 작품, 하다못해 선택된 오브제로 남을 수도 있다. 아예 모든 것이 타자의 몫으로 전이 될 가능성도 크다. 그것도 완전히. 이에 작가도 '바깥'을 예로 예술 정의의 주체로 타자를 소환하기도 한다. 아래 문장에서 '저마다의 다른 경험'이 그것이다. 실제로 작가는 "예술은 예술가의 행위로부터 나오지만(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정의는 어떻게 이뤄지는가도 되물어야할 지점이다.), 그것을 예술이게끔 증명하는 것은 저마다의 다른 경험이다."라고 주장한다. 당연히 그르지 않은 판단이다. 지각적 경험만으론 예술과 비예술을 구분할 수 없고 예술이란 어떤 환경에서 생성된, 무수히 많은 '어떤 것(들)'이기도 하니까.

송현주_행위의 정당성_캔버스에 오일스틱_162×130cm_2018
송현주_행위의 정당성_캔버스에 오일스틱_2018
송현주_행위의 정당성_캔버스에 오일스틱_2018
송현주_행위의 정당성_53×45cm_2018
송현주_행위의 정당성_53×45cm_2018

2. 반복/행위의 시작은 작가이고, 그것의 동기는 (흔히들 말하듯)내면 혹은 그 무엇이다. '나' 자신 혹은 '나' 이외의 모든 것이라는 것이다. 기울어진 저울 같으나 송현주도 이를 알고 있는 듯하다. "행위를 통해 예술임을 드러내지만, 예술이게끔 존재하게 하는 것은 저마다 다른 경험을 지닌 모든 개체들이 증명하게 된다. 이로써 주체자인 예술가는 무수한 반복과, 드러내고 지움을 반복하여 예술의 순환성을 말하고자한다."는 문장만 봐도 그렇다. 즉, 예술이 예술로 존재할 수 있도록 타자의 각기 다른 '경험'(적어도 반복은 경험의 두께이고, 행위는 그것을 받쳐주는 '과정'이다. 경험의 두께는 과정의 지난함을 통해 드러나고, 시시콜콜한 사적 이야기에서부터 나름의 거시적 관점까지 그 '안쪽'엔 다양한 것들이 들어차 있다. )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작가에 의한 의미부여 자체가 무력한 건 아니다. 위 기술에선 경험이 일종의 소명이라 전제할 때 소명으로써의 경험은 무엇인지는 열람된다. 작가에 의하면 이것은 "각 객체가 주는 것,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주장은 "예술은 작가의 작품으로부터 그 바깥 어느 곳에 존재한다."와 맞닿는다. 다만 예술화되는 경험으로써의 소명이 누구에게나 공히 적용되는 건 아니다. 그의 말마따나 "발견되어 질 때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 '발화'는 누가 뭐라 하던 작가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의 작품에서 반복(행위)(송현주의 시리즈 작품 「선을 긋는 행위」(2017)을 연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에게 선을 긋는 행위를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자문을 나름의 방식으로 찾아가는 과정이다.)이 예술일 수 있음을 소명하는 '의미부여'에 관한 힌트는 적다. 예술은 작품성과 미술사적 선구성을 포함해, 어떤 것이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담당하는 어떤 제도에 의한 자격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이러한 면은 건드리지 않고 있는 탓이다. 사실 타자의 경험은 예술을 정의하는 하나의 알고리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또한 '바깥'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니란 건 아니다.(흥미롭게도 작가는 반복함으로써 '순환'을 잇는다. 순환은 그저 순환됨으로 인해 경험의 나이테를 좁거나 넓은 길로 인도한다. 지속적으로, 끝도 없이.) 설사 바깥이 다르더라도 송현주의 행위를 통한 '반복'과, 그로인한 '바깥'이 배척될 이유란 없다. 앞서 언급했듯 그 경험의 두께를 읽는 이가 모두도 아니다. '바깥'은 저마다의 여기다. '바깥'이 협소하다는 지점을 제외하면 「선을 긋는 행위」 시리즈와 「행위의 정당성」 연작은 하나의 연구로써 위치를 점한다. 그러므로 '행위연구를 위한 초보적 질문들' 및 '행위의 정당성'에 관한 작가 스스로의 문제제기도 합당하다. 허면 이러한 일련의 질문에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그 몇 개를 간추려 필자 또한 자문자답해 본다. 작가는 우선 채워진 화면에서 예술가의 행위를 지움으로써 이전의 예술가의 행위가 존재하지 않게 되고, 그렇다면 그것이 예술(작품)인가를 묻고 있다. 답은 "예술일 수 있다"이다. 채우는 것 또는 지우는 것에도 행위는 동일하게 적용되며 그것에 의미부여가 가능하다면 예술이다. 두 번째는 '지워진 존재'라는 두 단어가 양립 가능한 것인가를 묻고 있다. 결론은 "양립 가능하다"이다. 왜냐하면 그건 물리적 상황이 지워진 것이지 개념으로써의 존재마저 증발한 것은 아니고, 지워진 존재라도 필히 현존하고 있는 한 그 역시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설사 현실적 존재를 물리적으로 조건 지워낸 상태라 할지라도 그 본래적인 행위로써의 원형이 거세되지 않은 채 지속된 결과라면 충분히 가능한 논리다.

송현주_선을 긋는 행위_130×162cm_2017
송현주_행위의 정당성_91×117cm_2017
송현주_행위의 정당성_72×90cm_2018
송현주_행위의 정당성_72×90cm_2018

3. 말이 나와 덧대지만, 심지어 무의식 속에서 지워진 것조차 일정한 구조 아래 기표로 존재하게 된다. 이와 관련해 작가도 "작품이 행위자를 통해 존재성을 획득하기도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즉, 존재는 구조화된 것이며 한정된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은 움직이는 것이지만 구조 없이 무한의 부동의 것과는 대척점에 놓인다는 것을 작가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각각의 의문부호를 뒤섞어 마침표를 찍더니 다시 의문으로 연결하기에 뭐가 뭔지 헷갈리게 나타나고 있을 따름이다. 마지막 자문은 "흔적으로나마 존재를 드러냈으므로 그것이 예술이 되는 것일까?"이다. 필자의 판단에 '흔적'과 '존재'는 표상체계의 언어로 각각 옹립될 수 있으며, 존재는 흔적의 유무를 외면할 이유가 될 순 있어도 시각예술에선 존재가 곧 흔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예술일 수 있음을 결정하는 요인은 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존재의 가치를 결정짓는 건 타자의 존재에 의하지만, 가시적 구조에서 드러난 존재의 흔적이 어떤 의미인지는 자발적 규정여부와 '바깥'의 공인이 요구된다. 그것에 동시 적용됨으로써 예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작가의 '바깥'(각자 개인의 경험을 바깥으로 규정한 것 외, 예술은 간혹 '바깥'에 의해 결정되며 여기서의 바깥은 '나'를 둘러싼 타자, 공동체의 승인, 작품 바깥의 나와 같은 다양한 모든 것이다.)에 견줘 말하자면, 작가가 예술이라고 내세운 대상을 대상으로 예술인지 아닌지 판단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질문은 다시 행위와 반복의 이유를 불러들인다. 왜 그렇게 하는지를 포함해 작가가 말한 '정당성'과 결이 같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의 연장에서 볼 때 송현주는 예술의 의미를 표(表)와 표(表) 되지 않은 것들 사이의 갈등과 대립에 의해서 끊임없이 물으며 답하는 상황에 있으며, 이 상황은 결국 물질적인 결과를 뒤로 미룬 채 사고와 개념의 문제로 텍스트화(이는 일종의 실재가 고의적으로 인식되지 않도록 하는 방식으로써의 존재이기도 하다.) 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송현주의 여러 시리즈가 이를 효과적으로 증명한다. 이 일련의 작품들은 그 출발인 내면과 본질의 종횡, 존재를 외면에서 하나의 구조체로의 전개로 드러내고 있다. 이 본질의 외화는 정화된 형태를 현현하고 이는 실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여러 연작들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물질적인 결과 보다 사고와 개념을 숙주삼아 텍스트화 시키는 경향이 강하고, 때문에 본 글 역시 작품 자체에 집중하기보단 그가 적시한 텍스트 해석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작품자체를 양념삼아 그 배경을 탐구하는 건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 홍경한

Vol.20180410e | 송현주展 / SONGHYUNJU / 宋賢珠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