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기계-두 개의 시선

박은태展 / PARKEUNTAE / 朴銀泰 / painting   2018_0411 ▶︎ 2018_0417

박은태_늙은 기계-두 개의 시선展_세종문화회관 광화랑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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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8:30pm

세종문화회관 광화랑 GWANG GALLERY_sejong center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175(세종로 81-3번지) 5호선 광화문역 지하보도 내 Tel. +82.(0)2.399.1114,1027 www.sejongpac.or.kr

'막장 드라마', '막장 영화'라고 불리는 것들이 있다. '막장'으로 비판받는 영화나 드라마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대개 우연을 남발하거나 개연성이 떨어지거나, 난 데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에 의해 사건이 해결되거나 하는 작품들이 막장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황당하고 비현실적이어서 "말도 안 된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들 말이다.

박은태_늙은 기계-두 개의 시선展_세종문화회관 광화랑_2018

그러나 정말 '막장'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은 비현실적인가? 나는 가끔 그런 질문을 던진다. 우리 삶을 돌아보자. 그러면 우리 삶은 인과관계 또는 매끄러운 스토리 라인을 따라 진행되는 것으로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잘 만들어진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유기적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지만 우리 삶에서 사람들 사이에 그런 유기적인 상호작용이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차라리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삶", 또는 "파편화된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해 보일 정도다. 그렇게 우리 삶은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것으로 흩어져 있다. 그러니 어쩌면 막장 드라마는 다른 어떤 웰 메이드 드라마보다 우리 삶에 가까운 것일 수 있다.

박은태_늙은 기계-두 개의 시선展_세종문화회관 광화랑_2018

하지만 저 유명한 『시학』의 저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소환한다면 그는 이런 결론에 "아니요"라고 답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일견 우리 삶은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것으로 흩어져 있는 행위들로 채워져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전체적 맥락을 살피면 사건들의 심연에는 인과관계의 고리들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 판단에 근거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름지기 시인(예술가)이란 "사건들의 심연에 깔려있는 인과관계의 고리를 개연성과 필연성에 따라 꿰뚫어 보고 그것을 하나의 통일된 행동으로 재구성하여 가능성의 세계 속에 표상하는 자"라 했던 것이다. 그는 예술은 "삶의 모방"이라고 보았는데 이 때의 모방은 삶의 이모저모를 있는 그대로 받아 적는 일이 아니라 그 이모저모를 개연성과 필연성의 원칙에 따라 통일성있게 재구성하는 일에 해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소위 리얼리즘 예술의 이론적 토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수긍하면 우리는 여전히 리얼리즘의 편에 서서 우연으로 점철된 드라마나 영화를 "막장"이라고 비난할 수 있다.

박은태_늙은 기계-두 개의 시선展_세종문화회관 광화랑_2018

하지만 오늘날 예술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종자로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프레드릭 제임슨(Frederic Jameson)이 일찌감치 불평한대로 사건들의 심연을 꿰뚫어볼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일단 삶의 전체 맥락을 살필 정도로 삶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지기가 힘들다. 설령 그런 자리를 확보하여 거기 설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건들의 심연을 응시하여 개연성과 필연성의 고리를 찾아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그것을 통일성있게 재구성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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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우리 시대에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예술은 나날이 위축되고 있다. 물론 여전히 예술가가 막장을 거부하면서 리얼리스트로 살아가는 방식이 존재한다. 과거에 유효했던 리얼리즘의 관습과 관례에 따라 작품 제작에 임하는 방식 말이다. 그것은 여러모로 안전한 방식이긴 하지만 우리시대에 정당하고 필요한 예술의 존재방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그리고 현실)에서 개연성, 필연성, 통일성을 좀처럼 달성하기 어려운 시대, 예술은 우연적이고 개별(파편)적인 것들을 어떻게 결합하여 세상에 내놓을 것인가? 박은태의 회화는 이에 대한 하나의 응답일 것이다.

박은태_늙은 기계-두 개의 시선展_세종문화회관 광화랑_2018

지금 박은태의 시선은 노숙자들, 거리의 노인들을 향한다. 그들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또는 조국근대화가 한창일 때, 그 '세계 내 존재'로서 세계 구성에 기여했던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그 세계로부터 버려지거나 방치된 존재들이다. 산업화의 성과로부터 소외된 자들이라고 해도 좋다. 그들을 단독으로 리얼하게 재현한 박은태의 회화에서는 종종(빈번하게) 배경이 생략되어 있는데 나는 이것이 그들의 동떨어진 상태, 버려져 방치된 상태를 함축한다고 본다. 여기서 형상-배경(figure-ground)의 긴밀한 관계는 깨어져 있고 배경에서 떨어진 형상만이 존재한다. 어떤 의미에서 박은태는 그 노인들의 형상을 특정 배경과 연결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는 어쩔 수 없이 세월호를 떠올리게 하는 「기다림」(2015)에서와 같이 한 화면에 여러 사람(아이들)이 등장하는 경우에도 이 인물들을 외부와 매끄럽게 연결하는 유기적, 통일적 관계를 찾기가 힘들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현실에서 거리의 노인들(형상)을 사회(배경)과 연결하는 유대, 세월호의 아이들을 손잡아 끌어올려준 구조의 끈은 그 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박은태_늙은 기계-두 개의 시선展_세종문화회관 광화랑_2018

그러나 화가는 배경에서 떨어진 형상에 다시 배경을 부여해주고 싶고 분리된 개체들을 이어주고 싶다. 여전히 그는 주어진 객관세계에 주관적으로 개입할 것을 꿈꾼다. 물론 그에게 막장드라마의 해결책은 무책임해 보인다. 그러나 종래의 리얼리스트들처럼 그것을 현실의 심연을 응시하는 식으로, 즉 심연에서 개연성과 필연성을 찾아내는 식으로 수행할 수는 없다. 오히려 심연을 응시하는 것을 회피해야 할지 모른다. 그 심연에서 개연성과 필연성의 끈이 모두 끊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박은태_늙은 기계-두 개의 시선展_세종문화회관 광화랑_2018

서로 무관해 보이는 것들을 연결하는 시인의 방식이 하나의 단서가 될지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이의 형태, 의미, 시간의 유대를 찾아 연결하는 은유나 환유가 그것이다. 김포 어느 시골마을에 버려진 낡은 기계들(의 이미지)은 그렇게 배경과 동떨어진 노인(의 이미지)와 연결됐다. 화가에게 페인트 벗겨진 낡은 기계의 헐벗은 이미지는 기계처럼 쓰이다가 방치된 노인의 이미지와 겹쳐졌고 그 기계를 덮은 낡은 덮개들은 노숙자들이 덮고 있던 담요, 상자들과 겹쳐졌다. 기계의 형상은 사진이미지로, 노인의 형상은 회화이미지로 드러나는데 두 형상은 나란히 놓여 상호작용한다. 분리된 형상과 배경, 기계의 시선과 노인의 시선, 객관과 주관은 그렇게 하나의 장(field)에서 결합하고 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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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분명 몽타주의 형식인데 여느 몽타주와 달리 여기서 화가에 의해 이어 붙여진(또는 나란히 놓여진) 이질적인 것들은 충돌하면서 사람들에게 자극과 충격을 주는 식으로 작동하기보다는 헐벗은 존재들, 방치된 것들을 만나게 하여 묘한 감정의 울림을 자아내는 식으로 기능한다. 그 경험은 자극적이기보다는 정감적이라 할 만한 것으로서 확실히 뜬금없고 비현실적인 상황을 조성하지만 나는 그것을 뜬금없고 비현실적인 막장 드라마를 볼 때처럼 손가락질할 수 없다. 오히려 나는 그 앞에서 어떤 먹먹함을 경험한다. 그러면서 그 먹먹함이 어쩌면 리얼리즘의 또 다른 존재이유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 홍지석

Vol.20180411j | 박은태展 / PARKEUNTAE / 朴銀泰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