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박拙朴을 넘어 여餘의 세계로: 산동 오태학의 작품세계

오태학展 / OHTAEHAK / 吳泰鶴 / painting   2018_0419 ▶ 2018_0617 / 월요일 휴관

오태학_바닷가_지본암채_162×130cm2007

초대일시 / 2018_0419_목요일_03:00pm

관람료 / 성인 2,000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입장마감_05:30pm / 월요일 휴관

이천시립월전미술관 WOLJEON MUSEUM OF ART ICHEON 경기도 이천시 경충대로2709번길 185 Tel. +82.(0)31.637.0033 www.iwoljeon.org

大巧若拙의 美學: 산동 오태학의 작품세계 ● 20세기 후반 이래 현재까지의 한국 미술은 대대적인 서구미술 수용과 도입이라는 새로운 국면 속에 이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으로 점철되어왔다. 이미 조선후기에 서양화풍이 들어왔고, 20세기 전반에도 큰 충격을 준 바 있지만, 서구 미술이 전면적이고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의 일이다. 이에 대한 작가들의 반응은 적극적 수용, 전면적 거부로 크게 갈라지며 혼란을 낳았다. 이는 한국 미술 전반에 해당되는 것이긴 하지만, 조선시대의 오랜 회화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는 수묵채색화의 경우 한층 첨예하고 심각했다. ● 전통을 고수하는 화가는 시대와 유리될 수밖에 없었고, 서구의 미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화가는 정체성 문제로 혼란을 겪어야했다. 산동山童 오태학吳泰鶴은 이러한 혼돈의 20세기 후반을 오롯이 돌파하며 그림에 대한 열정과 인내를 통해 수묵채색화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이 글에서는 이번 이천시립월전미술관 회고전의 출품작을 중심으로 오태학 작품세계의 흐름과 특징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오태학_월하月下_선지수묵_160×124cm_1969
오태학_물고기魚_선지수간채색_83×83cm_1975

오태학이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에 입학한 1958년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시기는 그의 전체 화력畵歷에 있어서 초기이자 모색기에 해당된다. 「전우戰友」는 젊은 오태학의 야심찬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전우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군인들의 모습을 제재로 했는데 형상성에 기반하되 이를 해체, 재구성하는 방법을 취했다. 오태학은 피카소의 대표작 「아비뇽의 처녀들」이 자신의 초기 작품세계에 감화를 주었음을 밝힌 바 있다. 오태학의 경우도 당시 몰아닥치던 서구 추상미술의 조류를 일정부분 수용한 것이다. ● 이는 전지구화시대에 서구미술의 적극적 수용을 통해 전통성과 보수성이 강한 수묵채색화를 바꾸어 보려는 작가적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렇지만 결코 그가 전통으로부터 떠났던 것은 아니다. 1967년 작 「월하月下」의 경우 달 아래 게들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추상성이 강한 가운데에서도 먹의 농담과 바림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지식인 화가들이 구사했던 간결하고 분방하면서도 대상의 요체를 포착하는 이른바 문인화풍文人畵風과 연결된다. 당시 오태학이 동서양 미술의 방법을 조화시키려 했음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전우」의 경우에도 불균일한 필선이 중요한 조형요소로 활용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는 동아시아의 전통 회화에서 줄곧 중시되었던 것이다.

오태학_골목안_지본암채_162×130cm_1985

1970년대는 오태학에게 있어서 중요한 전환기였다. 이후 그의 작품에서 중점적으로 활용되는 벽화적壁畵的 표현방식의 전조前兆가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1974년 작 「천고千古」는 당시의 양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퇴락한 질감과 고풍스러움이 화면 가득 펼쳐져있어 벽화와의 관련성을 암시해준다. 제재가 된 고대의 영물靈物이자 장수의 상징인 거북이나 '아주 오랜 세월'이라는 의미를 지닌 제목 '천고'도 작품의 표현방식과 잘 호응하고 있다. 세련된 작품이 오랜 세월 풍상을 거치며 인위성을 덜어내고 더욱 아름다운 문화재로 거듭난 것과 같은 늬앙스를 준다. ● 오태학의 벽화에 대한 관심은 그의 고향인 부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부여는 백제의 수도로서 많은 문화재로 인해 오늘날에도 백제의 유풍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오태학은 고향 부여에 위치한 능산리 고분의 벽화 등으로부터 감화를 받을 수 있었다. 백제 벽화 특유의 부드러움과 여유로움, 오랜 세월로 인한 질박함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고, 이를 작품의 조형적 요소로서 수렴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산마애삼존불이나 태안마애삼존불과 같은 오랜 시간을 견디며 미감을 축적해온 백제 특유의 불상 역시 그에게 미적 원천을 제공했을 것이다.

오태학_붓다의 소년들_지본암채_22×27cm_1995_개인소장

부여라는 오태학의 지역적 기반이 작품의 기법과 양식에 영향을 주었던 셈이다. 그는 이 무렵을 기점으로 점차 추상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데, 이미 「천고」에서 예견되고 있다. 이는 그가 추상 작업과 함께 지속적으로 병행했던 수묵화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동아시아의 수묵화에는 기본적으로 '형태가 아닌 뜻을 그린다'는 의미의 '사의寫意'의 개념이 기저에 깔려있었다. 초상화肖像畵나 기록화記錄畵와 같은 기능성이 강한 그림이 아닌 경우, 사의는 작품의 가장 중요한 지향 가운데 하나였다. 구상과 추상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한 셈이다. ● 즉 그는 현대라는 시점에 서구 미술의 표현 방식을 소화해내면서도 수묵채색화 본연의 미감을 끌어내기 위해 수묵화의 끈을 놓지 않았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구상성具象性의 회복으로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즉 서양의 추상에서 동양의 사의로 전환된 셈이다. 어찌보면 이는 백제의 벽화를 비롯한 전통에 대한 탐구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기도 했다.

오태학_피리부는 소년_지본암채_145×112cm_1997_개인소장

오태학은 1980년대부터 벽화기법을 보다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선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장지를 여러 차례 배접해서 장대한 벽화와 같은 화판을 만든 뒤 무게감 있는 석채石彩를 여러 차례 덧발랐다. 이후 부드러운 모필 대신 연필, 죽필竹筆, 유화 나이프 등을 이용하여 디테일을 그려나갔다. 1988년 작 「모래 언덕」은 바로 이러한 결과물이다. 표현방식에 있어서의 치열한 모색을 거쳐 고대 벽화 기법의 복원에 성공한 셈이다. 실제로 1980년대의 작품들은 시각적으로만 벽화와 유사한 느낌을 주던 1970년대의 작품에서 더 나아가 물질적, 촉각적으로도 벽화와 유사해지게 되었다. ● 「모래 언덕」에서 드러나듯 1980년대부터는 주제와 제재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보여준다. 특정 제재의 의미보다 제재를 통해 강한 표현성을 획득하는 데에 몰두했던 이전과 달리 천진난만한 아동이 제재이자 주제가 된 것이다. 아래와 같은 오태학의 언급은 그가 아동상兒童像에 심취하게 된 것이 어린 시절의 추억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 부여에서 서너 살까지 벌거숭이로 다녔어요. 제 그림 속 아이들처럼 항상 아랫도리 벗고 옷을 줘도 안 입었어요. …… 저는 그때를 못 잊어요. 그래서 늘 그 어린 시절 벌거숭이 그림을 많이 그려요. 그 추억 때문이랄까. 저는 들이나 강을 보면 항상 그 속에 퐁당 빠진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오태학_소와 아이들_지본암채_136×346cm_2003

그가 고향 부여의 문화유산을 토대로 벽화기법을 연구, 개발했듯이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기억을 끌어온 셈이다. 오태학 자신의 과거를 제제로 부여의 과거를 양식으로 삼아 화폭 속에서 융합, 절충한 것이다. 죽필을 그어 완성한 「모래 언덕」의 아동상은 바로 어린 시절 작가의 모습이자 동무들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 함께 그려진 물고기는 어린 시절 낚았던 물고기이기도 하고, 고대古代의 사회문화에 있어서 중요했던 다산과 풍요로움의 상징으로서의 물고기의 차용이기도 하다. 일정 부분 여타 고대 미술의 조형의식 및 제재의식과도 통하는 것이다. ● 여기에서 아동과 물고기를 그린 선과 그 선으로 그려진 형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태학의 선묘는 시각적으로 능수능란하기 보다는 소박하고, 대담하다. 그럼에도 대상의 특징을 매우 효과적으로 포착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과장, 변형, 생략이 이루어졌지만 어린이와 물고기는 오히려 시각적으로 매우 자연스럽다. 동아시아의 인물화에서 가장 중요시되어왔던 일종의 전신傳神이 이루어진 셈이다. 이후 1990년대에 오태학은 더욱 질박한 선으로, 한층 요점적으로 대상의 형태를 포착하는 한편 벽화기법을 심화시키면서 더욱 완숙한 조형미를 선보이게 된다. 맑고 청정한 부처님과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이미지가 중첩된 「붓다와 소년들」은 그러한 대표적인 예이다. 이 작품은 1980년대 이래 그가 점차 많은 관심을 가져왔던 불교적인 주제를 활용했다는 점에서도 의미 깊다.

오태학_풍어豊魚_지본암채_91×73cm_2007

오태학의 작품은 이후 2000년대를 기점으로 또 한 차례 전환기를 맞이한다. 병고病苦를 극복한 이후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특유의 표현이 한층 심화된 것이다. 늘 그림을 그렸던, 능숙한 오른손이 아닌, 익숙하지 못한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지만 그는 이를 극복했다. 작가로서는 오히려 본인이 다가가려던 본질인 질박함에 더욱 가까워 진 것이 아닌가 싶다. 2007년 작 「바닷가」는 바로 그러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 오태학이 이러한 벽화기법에 근간한 예술세계를 펼쳐가는 와중에도 스케치는 매우 중요했다. 얼핏 오태학의 작품은 재현성보다는 표현성이 중시되었기 스케치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는 특징만을 포착해낼 수 있는 요점적인 표현을 위해서 누구보다도 스케치에 열심이었다. 실제로 그는 "지금은 얕은 재주로 될지 몰라도 나이 들어서는 스케치 없이 작품을 절대 더 잘 할 수 없다. 내가 하루에 30장씩 그렸으니 너희도 똑같이 해라"며 스스로는 물론 제자들에게도 스케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노자老子의 저서로 알려져 있는 『도덕경道德經』에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이란 말이 있다. 아주 능숙한 사람은 자연스럽고 꾀도 쓰지 않으며 자랑하지도 않으므로 졸拙한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이다. 이를 회화에 대입해본다면 아주 좋은 그림은 과장하지 않아서 소박해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살펴보았듯이 오태학의 그림은 질박하지만 그 안에 대상의 참 모습을 함축하고 있으며, 본인이 지향한 바대로 여유로움도 내재해 있다. 오태학 만큼 대교약졸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 장준구

Vol.20180419g | 오태학展 / OHTAEHAK / 吳泰鶴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