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키스

원승덕展 / WONSEUNGDUK / 元承德 / painting   2018_0511 ▶︎ 2018_0523

원승덕_실크스크린_돌베개_110×79c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혜화아트센터 HYEHW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대학로 156(혜화동 90-7번지) Tel. +82.(0)2.747.6943 www.hyehwaart.com

「상황과 의식」 그리고 그 너머… 혜화동 시절의 원승덕 선생님 ● 학창시절, 강당을 지나 시계 반대방향으로 굽은 오르막길을 돌며 올라 고등학교 운동장에 이르면 바로 왼쪽, 철봉대 뒤로 청동으로 만든 작품이 있었다. 깊디깊은 내면의 심연에서 뭔가 뿜어올려져 분출하는 듯한 이미지. 약간 비대칭의 T자 모양에 가까운 추상 조각이지만 강렬하고 뚜렷한 이미지와 여운을 남기는 이 작품은 동성학교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한 선배님은 동성학교에 배정받은 뒤 학교에 등록하러 오던 날 교정에서 이 작품을 대했을 때의 인상을 내내 잊을 수 없다고 하셨다. ● 「상황과 의식」. 원승덕 선생님의 1973년 작품이다. 묵직하면서 다소 긴장하게 하는 이 제목에 '시대상황과 시대정신에 대한 함의와 열망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 작품이 놓여 있던 자리는 지금은 돌과 잔디와 수목으로 조경되어 있어, 아쉽게도 옛 모습은 사진에서만 볼 수 있다. 현재 이 작품은 스테파노관(강당) 2층 로비에 세워져 있다. 시인이자 영어선생님인 박희진 선생님(1931~2015, 1960~83년 동성학교에 재직)은 언젠가 수업 시간에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셨는데, 말미에 작품의 실제 형상처럼 양 팔을 옆으로 쫙 뻗으며 한껏 고조된 목소리로 말씀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박희진 선생님은 이 작품을 일명 '4·19탑'이라고 칭하기도 하셨다!) ● 이 작품 곁에서 우리는 철봉에 매달리고, 그 바로 앞에 있는 모래밭에서 제자리넓이뛰기를 했다. 좀더 떨어진 곳에 있는 농구 골대에서는 흙먼지 속에 땀 뻘뻘 흘리며 슛을 던지곤 했다. 경사진 언덕 아래와 주변의 수목들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기도 했고, 삼삼오오 모여 수다스럽게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그 열기, 그 함성, 하늘을 날 듯한 꿈과 소중한 것에 대한 갈망 그리고 동경(憧憬)…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 가던 그때의 많은 일들이 기억 저편 아득한 곳에서 반짝이는 별이 되어 갔건만, 그러한 우리 곁에서 묵묵히 함께한 선생님의 이 작품에 깃든, 언어를 넘어선 세계의 그 강렬한 힘의 이미지는 여전히 빛이 바래지지 않은 채로 있다.

원승덕_침묵_종이붙임에 덧칠_102×81.5cm

우리에게 이렇게 각인되어 있는 「상황과 의식」의 작가 원승덕 선생님은 이 작품이 태어나던 해에 동성학교에 오셔서 만 12년간 재직하셨다. 이른바 386 세대와 475 세대에 해당하는 동문들은 지금의 대운동장 내려가는 쪽 1층에 있던, 오후가 되면 약간 어둠침침해지는 미술실에서의 수업에 대한 기억들이 대부분 남아 있을 것이다. 1학년 1학기 때 어느 미술시간,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담고 싶은 학교의 풍경을 수채화 물감으로 그리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쓱 둘러보시면서 선생님은 문득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설악산에 간다고 좋은 그림이 나오는 게 아니다." 수업 시간은 물론 평소에도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 편인 선생님께서 불쑥 던지듯 하신 이 말씀이 내겐 섬광처럼 다가왔다. 아, 그거구나! 선생님의 이 한 마디는, 보는 방식과 표현하는 방식의 구태의연함에서 탈피해야 함을 함축적으로 말씀하신 것이었다. 촌철살인과도 같은 이 말씀에는 이후 우리가 청년기를 지나면서 접했던 철학·미학 이론이나 미술교육의 차원을 넘어, 일상에서 사고의 틀을 끊임없이 확장해야 하는 당위에 대한 많은 함의의 핵심이 담겨 있었다. '설악산 화두'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 말씀의 잔향은 마지막 미술 수업으로부터 40여 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내내 남아서, 때로 느슨해지려는 정신줄―관성적인 사고에 젖거나 익숙한 것에 안주하려는 것―의 끈을 다시금 조이게 한다.

원승덕_포스트모던, 팝다다_종이붙임에 덧칠(철분)_109×79cm

매주 두 시간씩 짜인 학과 수업 외에 미술실 안팎에서 선생님께 많은 지도를 받은 미술반 동문들은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훨씬 각별하다. 주로 문과반에 있었던 미술반 동문들 가운데는 회화와 디자인 전공을 희망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특히 조소(彫塑)에 소질 있는 인재를 발굴하여 역량을 갖춘 꿈나무로 길러내신 선생님의 지도는 한 세대가 넘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회자된다. '설악산…'과는 다른 맥락이지만, 개성 있는 표현 가운데 대상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이 꽉 차게 담겨 아우라가 느껴지게 해야 하는, 바로 그 기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거나 간극이 보이면 가차 없이 다시 시작하게 하시며 스스로 깨닫고 터득해가게 하시는 것이 선생님의 가르침의 요체였다. ● 미술, 하면 먼저 떠오르며 대체로 부담과 장벽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기법/기술적인 면의 연마도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어떤 것'을 선생님은 강조하셨고 추구하셨다. 선생님을 대할 기회가 수업시간 외에는 별로 없었을 대부분의 동문들에게 선생님이 왠지 범상치 않은 분으로 기억되는 것은, 바로 그런 선생님 나름의 철학이 스며 있는 일상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때로 자연스러운 '탈속(脫俗)'이나 '파탈(擺脫)'의 모습으로 비치기도 했던 선생님은 질풍노도시기를 거쳐가는 우리에게 파토스를 어떻게 다스리고 승화시킬 수 있으며 왜 그래야 하는지를, 특히 예술가를 꿈꾸는 후학들에게 깨닫고 행하게 하셨다.

원승덕_호미_실크스크린_109×79cm

선생님이 재직하시던 시절의 동성학교는 사계절의 변화 속에 때로 우리를 시심(詩心)에 젖게 했다.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어우러진 곳곳의 풍광들이 그랬고, 학교 밖을 나와서 대학로로 이어지는 길목도 그러했다. 그런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푸근함이 느껴지는 학교 분위기 속에 우리는 교과서와 참고서 너머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 길목에 여러 훌륭한 선생님들께서 길잡이 역할을 해주셨다.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시공을 초월한 예술작품에 눈 뜨는 마중물이 되어 주신 선생님, 우리 전통문화의 가치와 소중함을 각별히 일깨워주신 선생님, 절대자와 인간의 관계 속에서 삶의 본질에 다가가게 하신 선생님… 그 외에도 많은 선생님께서 우리의 내면을 풍성하게 해주셨고, 중년에 접어든 동문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그때 그 시절'의 자양분이 되어 주셨다. ● 80년대를 전후해서 학교 분위기가 달라졌다고들 한다. 모든 것이 변할 수밖에 없는 게 세상 정리(定理)이긴 하지만, 적잖은 동문들이 아쉬움 속에 학창시절을 회고한다. 원승덕 선생님도 85년 봄 동성학교를 떠나셨고, 새로운 터전인 항도(港都) 부산에서 후학 지도와 창작에 전념하다 은퇴를 맞이하셨다. 어찌 보면, 동성학교를 떠나신 후 선생님의 작품 세계는 그 폭과 깊이를 더해갔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좀더 많은 작품을 대할 수 없어 아쉽긴 하지만, 선생님의 작품들은 우리의 눈과 머리와 가슴을 통해 뚜렷한 느낌표와 의문부호를 남긴다. 그것은―주어진 '상황' 가운데 깨어있는 '의식'으로 찾고 간직해야 할 것(들)에 대한 진지한 돌아봄과 끊임없는 성찰이 아닐까…. ■ 송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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