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象石·문영태

문영태 유작展 / MOONYOUNGTAE / 文英台 / painting   2018_0519 ▶︎ 2018_0602

문영태_분단풍경_35mm슬라이드 7매_1991~6(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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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0519_토요일_04:00pm

주최 / 문영태 추모위원회 (신학철_조문호_홍선웅_장경호 인철_박불똥_박건_김진하_양정애)

민예사랑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문수산로 434 Tel. +82.(0)10.5357.5256

전시를 기획하며 ● 문영태 兄은 1980년대 문화를 통한 민주화운동으로, 엄혹했던 5ㆍ6공 독재권력을 관통했던 작가이자 기획자다. 작품·전시기획·출판기획·여타 시민들과의 현장문화운동·저술가로 활동했다. 이번 전시는 그 궤적 중 작품만으로 구성했다. ● 그리고 1990년대 사진작업 '분단풍경'까지 전시된다. 분단국의 작가로서 민주화와 분단 극복을 위해 실천했던 작업과정을 보이는 것이다. 문영태 兄은 문화적 관념성을 띤 70년대의 '심상석'으로부터 80년 광주를 통해서 상처받은 이웃을 그린 '심상석-狀況'으로 이웃과 시대현실을 작업에 수용하고, 마침내 직접 몸으로 횡단하며 촬영한 DMZ 250km '분단풍경'을 통해서 '국토문예학'적 리얼리스트로 변모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화운동가 문영태의 실천과 더불어 그의 작품이 한국현대미술사에서 가치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본다. ● 1980년대 초반부터 시대정신, 삶의 미술전, 해방 40년 역사전, 민족미술협회 창립, 그림마당 민, 여타의 출판기획과 전시기획, 민주화운동, 90년대의 민속학적 문화론에 의한 저술활동 등 다양한 문영태의 실천은 우리미술문화의 내·외곽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이번 전시는 그런 문영태 兄의 작고 3주기를 맞아 그의 헌신성을 기념하는 '문영태 추모위원회'에서 기획 및 진행했다. 동시에 문영태 兄의 화집 겸 활동 자료집인 『심상석·문영태』와 문집인 『누가 몰가부를 내놓겠는가-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性』도 함께 발간했다. ● 또 생전 문영태 兄이 거처하던 김포 <문수산방>이 이번에 전문 전시공간인 <민예사랑>으로 새로 단장하게 되어서, 그 첫 전시로 『심상석·문영태』전을 열게 되었다. 의미있는 일이다. 마침 남북간 종전과 평화 논의가 무르익고 있는 지금, 통일염원과 작업으로 긴 시간을 보낸 문영태 兄의 유작전이 열리는 건 더 반갑고 다행한 일이기도 하다. ● 문영태 兄의 추모와 더불어, 분단을 넘어 통일을 위해 애썼던 兄의 염원까지 함께 아우른 이 유작전과 출판 기념회에 많이 참석하셔서 고인의 민주화와 통일에의 의지, 문화예술에 대한 식견도 함께 느끼시길 바랍니다. ■ 문영태 추모위원회

문영태_분단풍경-을지전망대_35mm슬라이드_1991~6(추정)

변혁기의 作家, 혹은 志士 - 작가·선비·지사 ● 영태형님은 사람들에게 인정 많고 관대했으되 그의 세계인식은 매우 단단한 분이었지 싶다. 80년대를 오로지 미술운동에 전적으로 투신하면서도 사적으로는 명예나 이익을 구하지 않았다. 신학철 선생 말씀처럼 큰 명분에 따라 행동하는 지사였다. 80년대 「서울미술공동체」등의 활동 땐 조직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후배들을 다독이며 지원을 했고, 「민미협」창립과 「그림마당 민」을 운영하며 운동의 전면에 나설 때도 그랬다. 90년대 이후 김포로 낙향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문화운동에 관한 자신의 전력을 자랑하거나, 타인들을 비방하거나, 서운해하는 일이 일체 없었다. 여러 지식에 관해서는 달변이었지만, 미술판 얘기가 나오면 먼저 상대방의 말을 조용하게 미소 지으며 듣고 나서 말했다. 선비 같은 담담함. 신사이자 지사였다. ● 그러나, 확고한 세계인식과 담백한 인격은 작가로서의 출세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던 듯싶다. 작가는 자신의 내·외면을 아우르는 세계에 대해서 집요한 욕망으로 표현하거나 발언하는 존재인데, 그러기엔 영태형님은 그 품성이 너무 담백했다. 또 개인적 작품보다는 미술운동이라는 명분을 우선시했다. 그러다 보니 자기 내면으로부터의 온존한 개별성과, 시대현실과 더불은 운동미술과의 사이에서 작업은 그리 순탄치가 않았을 것이다. 괴리와 간극이 컸고 고민이 많았을 터인데, 작가적 욕망보다는 문화운동가의 대의를 선택했기에 영태형님의 작업은 자연스레 소극적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보다는 "사람의 재주는 그릇과 같아서 모나고 둥글고 한 것을 함께 갖출 수는 없다"라는 이인로의 『파한집 破閑集』한 구절을 옮겨 썼듯이, 그 스스로가 대의와 명분에 따라 운동가의 길을 선택했다고 여겨진다. ● 그림마당 민 관장직을 내려놓은 이후인, 91년도 '경의선' 모임을 통한 분단현장과 DMZ를 탐사한 사진작업의 국토문예적 '다큐' 혹은 '르포르따쥬' 작업은 영태 형님의 미술운동가와 작가 사이 간극을 성공적으로 좁혀주었다. 민중미술의 역사적·정치적 맥락을 수용한 작업이고, 또 그 개념적 접근이 성공적이기도 한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찌프차와 발로 답사하며 기록한 이 작업들을 형님은 개인전으로 발표하지 않았다. 작가 문영태에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80년대 미술운동으로 중단되었던 작가로서의 위치를, 이 변주된 장르와 형식으로 다시 확보할 수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2000년대 이후엔 거의 형님을 만나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 부분이 가장 궁금하다. 왜 그랬을까. 세속의 출세에 초탈한 선비라서 그랬을까. 맑은 물에 사는 물고기가 탁류에선 살지 못하는 법이라서 그랬을까… ● 언급했듯이 문화운동가인 영태형님은 미술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적·사회적 네트워크로 진보운동권 및 문화운동 사이 각 장르 간의 연대와 공동활동을 많이 실행했다. 그러나 엄연히 그의 미술운동의 출발점은 화가였다. 80년대 초중반 당시 20대였던 나를 비롯한 또래의 후배들에게 문영태 형님(이하 존칭 생략)은 스타였다. 후배들의 미술운동을 뒤에서 진심으로 지원해서 그렇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81년도 개인전의 '심상석' 연작의 깊은 인상 때문이기도 했다. 그 '심상석'으로부터 문영태란 작가의 이후 작업과 운동은 시작된다.

문영태_분당풍경-경원선_35mm슬라이드_1991~6(추정)

심상석 心象石 ● 마음의 형상이 새겨진 돌. 혹은 돌에 새겨진 마음. 어떤 것이든 무형의 마음이 구체적 사물인 돌로 치환하는, 마음과 돌이 인과 혹은 등가의 의미를 띄는 단어다. 그리고 그 인과의 단서로 '상 象'이란 연결고리가 작용하는 보통명사다. 그런데 약간 갸웃거려지는 게 있다. 보통 '형상'이라고 하면 '코끼리 象'이 아니라 거기에 '사람人'이 붙은 '형상 像'을 쓰는데, 그래야 '마음이 새겨진 돌의 형상'이라는 의미가 정확해지는데, 문영태는 굳이 '象'을 쓴 것이다. 한문 내지는 한학에도 조예가 깊은 분이 왜 그랬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당연히 이유가 있을 터, 곰곰 생각하다가 얼마 전 우연히 본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정모 박사가 전한 '코끼리象' 문자가 만들어진 과정 얘기에서, 내 나름의 답을 얻었다. ● 거기에서의 설명은 이렇다. 본디 고대 중국에는 코끼리가 없었다. 인도에 다녀온 사람들이 코끼리를 묘사하는 설만 풍성했다. 말이 있으면 표기할 문자가 필요한 법. 코끼리를 묘사할 문자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문자를 만드는 사람은 코끼리를 본 적조차 없으니 난감한 일. 결국 살아있는 코끼리를 히말라야 넘어 중국으로 운송하기는 불가능해서 코끼리 뼈만이라도 갖고 오게 했다. 그리고는 갖고 오는 도중 순서가 바뀐 뼈를 바닥에 나열하고 살이 없는 그 형상에 다녀온 사람의 설명과, 문자를 만드는 사람의 상상을 첨가해서 '象'이란 문자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배치하며 그 상형을 본뜬 모양이다. 즉 '象'이란 글자는 상형이되, 입체가 아닌 평면적 형상이고 거기에 상상과 추리가 개입된 문자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문영태가 이미 개념적으로 규정된 형상을 의미하는 '像'을 선택하지 않고 관념과 상상이 개입된 '象'으로 '심상석 心象石'이란 작품제목을 정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사물이되, 자신의 관념과 상상이 개입된 돌이라는 의미. 즉 현상인 마음과 물질인 돌의 결합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그리고 기록되지 않은 개인으로서의 숱한 사람(민중)들의 접힌 주름 속의 삶과 상처와 애환에 대한 그의 마음을 표제화한 의도를 말이다. ● '심상석'연작은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진행되었다. 모두 종이에 연필로 그렸다. 종이는 펄프성분이 많은 다소 거친 마닐라지 계열 같다. 충무로 인쇄골목 지업사를 돌며 물어보니, '코끼리 똥지'라고 말하는 분도 있다. 그래서 습기에 약한 그 용지엔 현재 얼룩덜룩한 무늬가 자연스레 남아있다. 화강암 같은 형상들의 텍스쳐 효과를 위해서 표면이 거친 이 용지를 선택한 것으로 추측된다. 거기의 형상들은 대체적으로 무겁고 심각하다. 타제·마제석기를 연상시키는 돌의 형태로부터, 심리에 이르는 형상성, 기복적인 민중신앙과 같은 샤먼이나 토템적 아우라(1977-78), 마음이나 정서에 상처입은 사람들의 한恨(1979-80), 혹은 물리적인 폭력에 의해 몸과 두개골 등에 상흔이 새겨진 사람들(1980), 그리고 일상적인 삶의 무게와 민중적 생명력에 관한 작가의 시선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져 있다.

문영태_心象石 78-4_펄프지에 연필_122×168cm_1978

단단한 돌에 풍화작용처럼 마음이 흔적(心象)으로 새겨진다는 것은 뭇 생명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생존에의 의지가 긴 세월 인고의 세월을 부침하며 견딘 결과다. 문영태의 심상석에서 기층 민중들의 질긴 생명력과 한의 정서가 동시에 묻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 이 작가가 지향했던 세계가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도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단서다. 신학철 선생의 언급처럼, 문영태의 초기 작업은 오윤의 그것처럼 기층민중적 한·투박한 생명의지·토속신앙적 생명관 등이 얽혀져 있다. 문영태가 자신의 호를 귀신들을 불러 모으는 의미의 '집신集神'이라는 전통적 샤먼의 의미로 지칭했음을 보면 그것은 더 선명해진다. 또한 90년대 후반부터 글쓰기를 통해서 기층 민중들의 생활사에 기반 한 민속·민예 문화를 연구했음을 보면 그의 내면적 세계관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상처받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무할 수 있는 문화를 미술로 꿈꾸었고, 그런 민초들의 생명력에서 서로를 보듬는 미술의 민중성을 믿고 지향했을 터다. ● 그러니까 1977~79년에 이르는 작업에서는 자연 그대로의 돌 자체에 대한 관념성(일테면 청마의 '바위'처럼 원초적 생명력에 대한 의지나 경외심 같은 샤먼적 요소)이나 석기시대 도구 같은 호모사피엔스의 문화인류학적 시점이 공존한다면, 그 이후부터는 할아버지나 할머니 등 민중들의 주름진 삶의 표정이, 그리고 80년 광주항쟁 이후에는 두부에 가해진 물리적 상흔이 주 테마로 등장한다. 돌이라는 공통의 소재가 작가의 경험적 서사에 의해서 어떻게 심리적인 분위기에서 역사적인 민중성으로 바뀌어 가는지를 이 작품들은 증거해준다. 특히 마지막 심상석에서는 광주항쟁에서 군부가 광주시민들에게 가한 폭력성이 물리적 상흔(Scar)과 정신적 상처(Trauma)로 동시에 흔적화된 묵시적 형상성으로, 그리고 비판적 정치성으로 확장된다. 이 단계가 비로소 '심상석'이 당대의 정치사회적인 요소들을 그 내용으로 견인해나가려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심상석 연작은 여기에서 중단된다. 그 이유는 문영태가 80년대 내내 작업실에서의 작품제작보다는, 미술현장에서의 기획과 운동으로 활동의 방향성을 틀어버려서다. 작품의 소통을 통한 내용전달의 간접적 정치기능보다는, 실질적인 저항을 이끌어 내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문화운동가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 1984년의 '힘전'사태를 통해서 현실권력이 미술에 가하는 부당한 탄압과, 이에 대치하는 조직인「민족미술협의회」가 생기기 전 80년대 초반 미술운동의 양상은 다양했다. 현실과 발언을 필두로 광자협·임술년·실천그룹·에스파그룹·목판모임 나무 등과 같은 정기적 단체전은 차치하고라도, 젊은 의식전·80년대 미술의 조망전·횡단전·시대정신전·토해내기전·거대한 뿌리전, 삶의 미술전·푸른 깃발전… 등의 단발 기획전, 거기에 문영태가 주축이 된 민중들과의 직접적인 교류와 공동으로 작업과정을 공유하는 「시민미술학교」의 개설 등 그 양상들은 쉽게 분류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했다. 게다가 작품의 경향들은 풍자적인 사회적 발언뿐만 아니라, 서술적 역사성, 개인적 실존성과 심리, 문명비판, 꿈과 환영을 그린 초현실성 등 70년대 모노크롬 미학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형상성의 경연장이었다. ● 전두환정권의 탄압으로, 「민미협」이 조직화되기 시작한 시기부터, 독재권력에 구체적으로 대응하는 미술운동은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양상을 중심으로 전열이 가다듬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략 이 시기부터 문영태의 '심상석'작업은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사회과학적 입장과 정치적 선전선동이 필요한 조직적 미술운동의 입장에서 '심상석'과 같은 내용과 형식의 미술은 구체적인 기능이 어려운 것이었다. 미술운동의 중심에서 각종 기획과 더불어 「그림마당 민」의 전시까지 관여하면서 따로 작업을 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지만, 그런 정치미술의 환경과 문영태 본연의 민중적 생명관은 쉽게 용해되기가 어려울 정도로 가파른 시대였다. 정치와 미술전·통일전·반고문전·여성과 현실전·탄압사례전·풍자와 해학전 등을 통해 공권력과 마찰한 현장인 「그림마당 민」책임자로서 더더욱 '심상석'과 같은 상징적 관념성은 진행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작가는 체질적인 요소가 중요하다. 인식으로 작업할 순 있으나, 의식과 체질로 작업하는 이에게는 쉽지 않다. 심상석은 그런 체질을 반영하는 유형의 작업이었다. '심상석'과 90년대 분단현장을 가로지르는 현장 다큐사진작업 전인 83~87년 시기, 간간히 단체전에 발표한 복사기를 활용한 흑백 몽타쥬 작업의 게릴라성에 주력하되, 회화작업을 계속 진행하지 못한 이유는 여기에 있으리라 여겨진다.

문영태_心象石_종이에 복사작업_26×32cm_1983

문화운동 기획들 ● '심상석'개인전(1981, 관훈미술관)과, 겨울 대성리전(1981~83)의 현장 작업 이후, 종이판화(紙版畵)개인전(1983, 그로리치화랑)을 전후해서 문영태는 본격적으로 미술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그동안의 작업들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의 결과였을 것이다. 문영태 본인의 개인적인 관념세계와 시대현실과의 결절점에서, 작가이자 지식인의 실천적 미술을 지향한 것이다. 이미 '겨울 대성리전' 기획팀에의 참가도 기존 제도적 미술에 대한 거부의 태도를 띈 것이었지만, 보다 구체적이고 공고화한 사회적 미학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개인으로서의 '화가'가 아닌 동시대적 책무를 수행하는 '기획자'의 역할에 대한 정치적 행동이라 여겨진다. 여기서부터 문영태의 미술에 대한 실천은, 시민들을 향한 구체적인 소통을 담보하는 '문화운동'으로 바뀐다. ● 일반시민,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위한 「시민미술학교」(1984), 뜻이 맞는 후배들이 창립한 「서울미술공동체」(1984)의 회원가입, 화가 박건과 '시대정신기획위원회'를 결성하고 1983년 제1회 『시대정신展』기획 및 1984년 한국 최초의 미술무크지『시대정신』지 창간(1984~1986), 을축년 미술대동잔치(아랍미술관, 1985), '20대에 의한 힘전' 탄압사태 대책기구, '105인의 작가에 의한 삶의 미술전'(아랍미술관, 1985), '해방 40년 역사전'(광주, 대구, 부산, 마산, 서울, 1984)참여, 이후 「민족미술협의회」창립위원(1985), 김용태·홍선웅·유홍준과 더불어 「민미협」의 전시기구인 「그림마당 민」(1986)운영에 관여하고, 또 관장을 역임(1987~88)하면서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1987년 정치와 미술·우리시대의 판화전·장망 판화전·우리시대의 성전, 만화정신전, 통일전·천상병 시화전·반고문전·기금마련전·여성과 미술전·통일전·중국목판화전·풍자와 해학전·그리고 기타 여러 재야단체들과 연대하는 다양한 기금마련전 등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면서, 「그림마당 민」을 80년대 미술운동과 문화운동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만드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림마당 민」은 그 한 해 전에 개관한 비판적 형상미술 중심인 「한강미술관」과 더불어 우리나라 대안공간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그림마당 민」은 제도권 미술관이나 상업화랑에서 수용하지 못했던 당대의 정치·사회·문화적 이슈들을 과감히 수용하며 5공 정권하에서 민주화를 위한 미술문화운동의 중심공간이 되었다. 문영태의 진정성과 헌신성이 그 바탕에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문영태는 민중문화협의회(1984)-민중문화운동연합(1987)-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1989)에도 참가하며 문예운동을 실행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계 및 대학가의 각종 집회 현장과의 연대와 이미지 제공을 실행했다. 대표적으로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때의 시위현장에서의 대형 초상화와 소형전단목판화(류연복 판각)를 기획해서 미술의 현장적 기능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 이런 가파른 운동의 와중에 문영태가 개인 작업을 할 수 없었음은 자명하다. 그 결과, 90년대가 되었을 때, 화가의 리듬과 체질적인 내면의 드러냄이 중단되어 버린 상태에서 다시 화가로의 복귀는 쉽지 않았다. 그대신 변혁기 미술의 대 사회적·정치적·역사적·문예적 기능과 가치를 깨달았던 문영태는 사진매체를 통해서 다큐사진으로 작업을 전환한다. 80년대를 통해서 대중적 미디어가 갖는 위력을 절감한 터라, 사진이라는 매체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며 90년대식 역사적 담론을 위해 분단된 국토의 현장을 직접 답사하게 된다. 『분단풍경 : 열일곱 사람의 경의선 사진작업』이라는 그룹을 결성하고, 그 활동의 결과물들로 책을 기획하고 출판한다. 또한 시인 김정환과 공동으로 『이 시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두사람』이라는 글+사진집도 간행한다. 사진과 미술과 출판과 춤을 엮어낸 실험적 기획이었다. 90년대라는 바뀐 문화지형에서의 능동적인 발언을 모색한 운동의 일환이었다. 동시에 전통적인 민중문화와 민속문화의 연구와 글쓰기에 몰두하게 된다. 1996~1998 월간 『사회평론 길』에 연재한 「문영태의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性)」과, 2001년 사진가 이지누와 공동으로 발간한 계간『디새집』에 연재한 「궁시렁궁시렁 문영태의 집 이야기」와 같은 민속사회학적 글이 그것이다. ● 사실, 문화운동가로서 문영태는 일찌기 출판미디어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미술보다 대중적인 출판미디어의 소통성을 일찍 깨달아서 그렇겠지만, 그 자신의 독서열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전시장 미술로부터, 현장미술, 그리고 출판미디어의 활용 모두를 아우르며 미술이 어떻게 동시대적 문화로 그 정치성을 확보해야 할지에 대한 전략적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한 시대를 증거하는 아카이빙 기능에 대한 판단도 있었을 것이었다. 분단풍경 이전인 80년대에도 부정기 간행물이자 전시도록을 겸한 『시대정신』1·2·3권을 비롯해서, 정기간행물이자 민미협 회지인 『민족미술』, 『80년대 탄압미술사례집』등의 발간에 관여하며 동시대 문화의 정치적 운동성과 그 당위에 대한 소통공간을 확보하려고 애썼다. ● 기획력과 실행력, 그리고 순수한 열정으로 80~90년대를 관통하면서 민족민중미술에 뚜렷한 문화운동의 족적을 남긴 문영태였지만, 작가로서는 다소 불운했다고 볼 수 있다. 미술운동으로 인한 본인의 작업단절도 그렇지만, 90년대 야심차게 진행한 '분단풍경' 사진작업도 결국 빛을 보지 못해서다. 화가가 다큐사진으로 자신의 입지를 세우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천성이 무욕인 문영태는 자신의 작업이 상업적으로 성공하거나, 작가로서의 지명도를 확보하는 데 대해선 무심했을테니 더 그렇다. 그래서 힘들게 DMZ를 답사하면서 찍은 사진들을 발표도 하지 않고, 타계할 때까지 그의 서재 깊숙한 곳에 보관만 한 것이다. 물론 90년대 후반의 『사회평론 길』과 『디새집』 연재에 대한 글쓰기의 연구와 부담감이 작용했었을 터이지만, 어떻게 보면 문영태는 참으로 욕심 없는 사람이라서 한편으론 아쉽다. 운동가로 또 한 인격체로서는 지금까지도 존경할 만한 선배지만, 그의 투명한 빈 마음으로 인해 축소된 작가적 활동은 우리 미술계에선 공실률이 커서 그렇다. 다만 이번에 그가 불편한 몸으로 직접 국토를 횡단하면서 남긴 90년대 '분단풍경' 다큐사진의 발견은, 비록 만시지탄이지만, 작가로서 문영태의 삶과 내공도 기획자로서의 그것 못지않게 결코 녹록치 않았음을 증명하는 증거들이라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팔방미인. 속되지 않음으로 속세의 출세는 못했으나 많은 사람의 기억에 오롯이 순수한 사람이자 운동가이자 작가로 남는 존재. 문영태는 바로 그런 선배였다.

문영태_心象石_펄프지에 연필_61×267cm_1982

분단풍경 ● 1991년 문영태는 사진가 이지누와 화가 16인, 총 17명으로 '경의선' 그룹을 조직한다. 「그림마당 민」관장을 그만두고 난 얼마 뒤다. 이때 활동한 내용들을 엮은 책이『분단풍경 : 열일곱 사람의 경의선 사진작업』이다. 그리고 곧 이 그룹은 해체되었으나 문영태는 본격적으로 분단된 국토의 현장과 현실을 조망하는 작업을 자신의 작업테마로 잡고 사진가 이지누·소설가 김하기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 분단현장. 그 공간은 한반도 왼쪽 끝 서해 백령도부터 오른쪽 끝인 동해 고성·양양의 7번 국도에 이르는 DMZ 남쪽, 북위 38~37°사이에 한정되어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서해안 교동도부터 서도면-강화도-김포반도-자신의 집이 있는 월곶면 보구곶리-임진강-오두산전망대-전곡-통일촌-도라산전망대-경의선잔해-경원선-전진교-철원-월정리-구철원-백마고지-태풍전망대-평화의 댐-생창리-백골전망대-땅굴-적근산·대성산-명월리-양대리-해안분지-땅굴-심곡사-을지전망대-도솔산-대암산-삼재령-까치봉-통일전망대-7번 도로 해안 등 한반도의 중앙을 수시로 횡단하면서, 90년대의 분단현장·분단현상·분단문화·야생식물·문화재·풍경·사람들의 모습 등 인문지리적 요소까지 모두 카메라에 담았다(35mm 슬라이드가 대략 수천 장 남아있으나, 96년부터 『사회평론 길』과 『디새집』에 연재하는 글쓰기에 몰입하면서 20년 이상 장기보관만 한 탓인지, 슬라이드 표면의 화학적 변용으로 상태가 좋지 않다. 아쉽다). ● '심상석'과 같은 내면적 관념으로부터의 회화작업에 비해서, 역사적 현실인식이 구체적으로 반영되는 다큐사진의 소통성은 문영태에겐 분명 매력적이었다. 주관적 '관념'으로부터 객관적 '인식'으로의 작업태도 변화는 결국 '회화'에서 '사진'이라는 미디어의 탈바꿈으로 연결되었다. 그런데 10여년 만의 사진을 통한 개인 작업으로의 전환도 결코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문영태는 이 작업도 공동체적인 입장과 미학을 바탕에 두고자 했다. '경의선'모임을 조직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사진이라는 미디어를 통해서, 기존의 사진가들과는 또 다르게 화가들의 시선이 반영된 미적 형식을 추구했을 것이고, 동시에 사진가들과 보다 풍부한 내러티브와 형식의 결합도 바라서였을 것이었다. 분단시대 '분단'의 전형성을 찾기 위해서 동료작가들과의 공동체적인 협업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동시대적인 공론화를 시도한 것으로 여겨진다. 평소 선후배나 동료들과의 인간적인 스킨십을 좋아했던 그의 성격상 작업과정도 '함께하는' 것에 의미를 두었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발간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 '경의선'은 각 작가들마다의 스케줄로 인해 활동을 종료했다. 그리고 얼마 후 문영태는 앞서 언급했듯이 사진가 이지누, 소설가 김하기와 함께 155마일 DMZ를 횡단하는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이때 동행한 김하기는 이 경험을 써서 답사기행집 『마침내 철책 끝에 서다』(문학동네, 1995)를 발간했다. ● 회화·지판화·드로잉·복사와 마스타 인쇄방식의 판화·사진작업을 진행했던 문영태의 궤적 중에서 80년대 초반의 '심상석'과 90년대의 '분단풍경' 사진작업이 문영태 작가궤적의 뼈대로 보인다. 대략 15년여의 간극을 둔 시각물 작업인데, 이 두 작업의 내용만큼이나 그 장르와 매체적 특성도 다르다. 또한, 주관적인 내면·이웃들의 삶의 애환·거기에 80년 광주의 상흔을 오버랩하면서 민중적 서정성과 서사성을 확보하는 단계가 '심상석'의 진행과정이었다면, 10여 년의 문화운동가를 거친 후 진행한 '분단풍경' 사진에선 철저하게 역사적 현장성을 기록하는 국토문예학적 리얼리스트가 된 점이 달라진 점이다. 이 분단풍경 사진 작업으로 인해, 문영태가 문화운동가가 아닌 분단을 말하는 작가로서 최소한의 자기 소임이자 책임을 다했다고 여겨진다. ● 현재 남아있는 수천 장의 분단풍경 사진들은 동시대 현실과 역사를 관통하려는 문영태의 실존적·실천적인 작가적 '태도'를 증명하는 것이며, 동시에 겸허하고 성실하게 분단현장을 답사하고 연구한 정직성의 증거물이다. 작가적 성공에 대한 어떤 욕심도 없이, 이 땅의 민중미술가로서 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작업이었던 듯싶다. 그래서인가, 이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미술'에 대한, 혹은 '작업'이라는 것에 대한, 아니 '작품'이라는 것에 대한 어떤 선험적·제도적 명제를 버리고 그저 담백한 인간 문영태의 흔적인 자연스런 작품을 느낄 수 있었다. 미술 이전에 민중미술가·문화운동가·인간 문영태의, 속기나 작위성 없는, 선비·지사·민중적 작가의 풍모가 환기되어서 그럴 것이다.

문영태_心象石-狀況_펄프지에 연필_53×53cm×4_1980

글쓰기 ● 다재다능한 사람은 남기는 것도 여러 가지다. 문영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화가로서의 작업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습득한 여러 지식의 잡학/박학다식, 미술에 관한 전문적 지식, 여타 인문학에 관한 폭넓은 독서는 문영태의 평소 언변과 잡설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평소 과문하다가도 대화가 될 양이면 그의 눈은 반짝이고 집중도는 깊었다. 특히 술자리에서 문영태는 대화의 흐름에 따라, 예의 그 느리되 약한 경상도식 억양으로 즉흥적이고 재미있는 얘기를 엮어냈다. 이쪽저쪽, 전통/현대, 한국/외국, 미술/인문, 고전/뉴스 등을 넘나들면서 여타의 우스개 농담에 이르기까지 사통팔달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인가 그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 즐겁게 얘기할 때면, 말뚝이의 그것처럼 재미와 흡입력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이 형님은 장편을 쓰면 정말 잘 쓰시겠다."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 글쓰기도 그랬다. '분단풍경' 사진작업 이후 1996년부터 1998년까지 김포에서 집중한 글쓰기, 특히 『사회평론 길』에 연재한 「한국의 문화, 한국인의 성(性)」을 보면 온갖 지식들이 종횡으로 엮여진 이야기꾼의 기질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독특한 문장과, 구어체, 가끔씩 구사되는 비문, 그리고 술에 취해서 쓴 듯이 널뛰는 단락 넘나들기 등은 그야말로 생생하게 날 것의 이야기체다. 재미지다. 잘 다듬어진 글쟁이들의 세련됨에 비하면 이 덜 다듬어진 문체의 맛은 묘하게 중독성이 있다. 진중하다가도 가볍게 직진하고, 심각하다가도 농담이 튀어나오고, 인문적이다가도 세속적 세태가 엮어지면서 한바탕 판소리나 마당극처럼 풍자적이고도 해학적인 입담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성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에 이르면 철저하게 남녀평등의 젠더적 사유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걸진 음담패설로 전통적 풍속에 대한 재미를 돋우면서도 그 행간에서 남성중심의 위계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도 한 예다. ● 과거와 현재, 그리고 동서양을 넘나드는 정치·사회·민속·민예·미술·여성·역사·신화·그리고 풍속에 관한 다양한 시점(視點)으로 통섭한 한국의 문화와 한국인의 성에 관한 이 글은, 글이 나온 지 2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새로운 서술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고담준론의 학자가 아닌, 전래적 이야기꾼이나 판소리 한가락처럼 민중적이다. 탁빼기 왕대포 한 잔 마시며 말하고 듣는 얘기처럼 흥취도 돋는다. 술술 읽힌다. 찰지다. 그래서 문영태'적(的)'이다. 거기에 비하면 2001년에 『디새집』에 연재한 「문영태의 궁시렁궁시렁-한국의 집 이야기」는 훨씬 소담하다. 재미진 요소를 빼고 다소 담백하게 썼다. 집을 의인화해서 접근한 민속적 생태성에 관한 서술방식이 새롭다. 아마도 화가의 글쓰기라 그런 모양이다. 원근법이나 명암법에 의한 서술성보다는, 그런 고착된 시선이나 감성의 서술방식을 전복하는 입체적 시각과 태도로부터 유래하는 파격에 대한 문영태의 기호(嗜好)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아무튼, 이 글쓰기는 문영태의 작품·미술운동과는 또 다른 인문과 그의 삶이 교직된 세계다. '학자'라고 하는 특정한 영역으로 좁혀지지 않는 지식인이자 이야기꾼으로 자기 역할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이었던 셈이다. 김포에 은거하며 평소 관심 있었던 전통적 민중성과 민속적 영역에 대한 홀로서기 같은 작업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 글쓰기에서도 문화운동가로서 문제의식은 여전히 드러난다. 미술운동판을 떠나 유유자적하게 책읽기와 한학(漢學), 그리고 낙서들을 즐기면서도 세계에 대한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통찰은 가려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기질이다. 그 기질이 오롯이 드러난 작업이 글쓰기였다고 생각된다. 서로 다른 장르이자 내용인 그림도, 사진도, 글쓰기도 모두 문영태'적(的)'이다. 팔방미인이되, 무엇을 하든간에 여전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잘 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문영태는 '자기인생'을 자연스럽게 잘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그의 인격 아닌가. 영태형님 ● 전 민예총 이사장 김용태 선생이 타계했을 때 영태형님은 한겨레신문의 「길을 찾아서-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란 연재기획에 추모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거기서 민미협과 그림마당 민 시절의 추억 중에 이름 장난의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았다. 김용태 이사장, 문영태 본인, 후배인 미술평론가 최석태의 이름 마지막 글자로 말장난 농을 한 것이다. 이렇듯 이름자로 농을 할 만큼 80년대 미술운동과 문화운동현장에서 작고한 김용태 선생과 영태형의 헌신적인 역할과 동지애가 깊었다는 뜻이다.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이들은 치열했으되 여유가 있었고, 긴박했으되 위트가 있었고, 조직적이었으되 인간적 의리가 있었다. 게다가 문화운동의 중심에서 동지애까지 끈끈했다. 그렇게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을 가로지르며 맺은 인연의 끈은 아직도 그를 흠모하는 많은 후배들의 기억에 질기게 남아있다. ● 문화운동 하는 입장이니 본인도 별로 수입이나 여유가 없었을 터인데도 어려운 후배의 전시에서는 그림을 사주었고 술값도 도맡아 내주었다. 그리고 명분 있는 사업엔 사재를 아낌없이 냈다. 『시대정신』 발간도 그랬고, 「그림마당 민」의 운영도 그랬고, 또 『디새집』 발간 때도 그런 태도였다. ● 나는 다른 동료들에 비해선 영태형님과 비교적 적게 어울린 어린 후배였다. 술자리도 그리 많이 가지지는 않았다. 다른 동료작가들과는 달리 화곡동이나 김포 형님 댁으로 가서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미술판에서 형님의 순수한 활동은 늘 보았고, 그런 형님을 마음으로 존중했다. 90년대 이후 가끔 내 사무실에 들러 장익화 형과 나를 앉혀놓곤 신명나게 얘기하거나, 인사동 길에서 홀로 마주칠 때의 다소 쓸쓸한 듯 조용한 미소를 대할 때나, 형수님과 퇴근하는 형님께 예의바른 인사를 할 때면 악수를 하며 인자한 표정으로 지긋하게 바라보던 그 눈빛이 좋았다. ● 사람은 그릇에 담긴 물처럼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게 확실한 모양이다. 영태형님은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나 후배라는 형태 없는 물을 담아내는 형태가 있는 큰 그릇이기도 했고, 또 그런 여러 타인이라는 그릇들이 둥글든지 모나던지간에 각자의 그릇 형태에 담담하게 자신을 맞추어 주는 물이기도 했다.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이란 노자와, 이율곡의 '水逐方圓器 空隨小大甁'이라는 구절도 떠오른다. 그 많은 선배·동료·후배들과 함께하며, 그 다른 여러 개성들을 담아내는 그의 유연함의 크기는, 자신의 욕망을 비워서 커진 마음으로 인해 가능했을 거다. ● 화단의 선배나 또래 작가들을 만나서 영태형님 얘기가 나오면 모두가 이렇듯 같은 말을 한다. 그랬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태형님은 인자한 선배이자, 열정적인 문화운동가의 순수한 모습으로 비친다. 고행의 한 시대를 그리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문득 생각해본다. 그런 삶은 쉽지도 않고 또 별로 많지도 않을 것이다. 80~90년대 작가시절, 그리고 인사동 문화운동시대, 그 이후 김포로 은거한 90년대 말부터의 고독한 글쓰기 세월, 그 격랑을 영태형님은 작가로, 문화운동가로, 학자로, 의리있는 사람으로 온전하게 자신의 진짜 삶을 품위있게 살아냈다. 그래서 나는 영태 형님을, 그 삶의 궤적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그는 사유가 깊었던 작가, 言과 行이 일치했던 문화운동가, 보고 따를 만한 진짜 '선배'이자 '형님'이었다는 생각에 말이다. ■ 김진하

Vol.20180519b | 문영태 유작展 / MOONYOUNGTAE / 文英台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