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과 음악이 없는 파티

윤결展 / YOONGYEOL / 尹焆 / mixed media   2018_0529 ▶ 2018_0611

윤결_기억이 담긴 엽서_디지털 프린트_10×15cm_2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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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0529_화요일_06:00pm

소네마리 신진작가 릴레이 개인展

후원 / 네오룩_수유너머104

관람시간 / 11:00am~07:00pm

복합공간 소네마리 서울 서대문구 성산로 315 1층 수유너머104 Tel. 070.8270.0910 www.nomadist.org/s104

2018년 문화복합공간 소네마리의 첫 전시로 '여성'의 언어를 담은 전시가 선정되었다는 점은 매우 인상 깊은 시작이다. '미투' 선언 이후, 가려졌던 목소리들이 세계의 벽들과 부딪혀가며 울리고 퍼지기 시작했다. 울림은 '일회성'도 '지나가는 흐름'도 아니다. 모든 옛 것이 흔들려 무너지지 않는 이상에야 그것은 멈추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담론의 장에서 소외되고 사소한 것들로 치부되어왔던 여성의 목소리가 '공론의 장'에 올라서기 시작했다. 울림은 성을 불문하고 온 세상의 무디고 견고한 구조에 균열을 낼 것이다. 그리고 균열 난 세계에서 소외된 목소리를 찾아낼 것이며, 미시적인 감정과 감각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할 것이다. ● 세 명의 신인 작가들은 각기 다른 매체를 이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윤 결 작가는 제3 세계의 억압 속 여성들의 욕망을 전시장 공간에 덮어 자연스럽게 한국 모습과 비교하게 하고, 이 다은 작가는 디지털 매체에서 여성의 이미지가 어떻게 소비되는가를 추적하며 이미지 담론을 선점하고 지배하는 '주체'를 겨냥해 카메라의 프레임에 날카롭게 담아낸다. 그리고 홍양무현 작가는 배제되었던 여성들의 감정과 촉각의 결들을 종이 위에 섬세하게 스미게 한다. 사실 이 이야기들은 이미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일상이며, 언제나 사소하기에 언급될 수 없던 또 하나의 '삶'이다. 하지만 이 일상에서 더는 오늘과 과거의 시간이 같은 감각을 공유할 수 없게 되고, 삶이 머무는 공간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되었으며, '누군가'의 호소가 더 이상 '사소함'에 머물 수 없는 상황에 진입했다. 기존의 평화로운 듯 보였던 삶은 작가들의 이야기를 통과하고 난 후,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 이슬람 여성들은 타국에서도 히잡과 니깝을 착용한다. 작가가 그들과 '관계 맺기'를 행하기 위해서는 그들 안에 내재한 문화의 규율과 규제를 통과해야 한다. 타국에서도 규율을 그리 철저하게 지키다니,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지키고 싶었던 것일까? ● 윤결 작가의 전시 공간은 이슬람 여성들과의 파티를 재현한 공간이다. 전시공간에는 이슬람 여성들을 감싼 규율과 그들이 파티를 즐긴 흔적들이 공존한다. 윤 결 작가는 그곳에서 보고 느끼고 교감한 것들을 전시 공간에 재현해낸다. 커튼에는 규제를 나열하고, 포도송이에는 내면화된 규율을 상징하는 눈알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파티를 즐긴 이들의 작품을 벽과 책상에 전시한다. 장소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이 공간 안에서는 강력한 규제들이 나타난다. ● 그러나 그들은 그 공간 안에서 사회에서 억제되어왔던 그들만의 자유와 은밀한 욕망의 힘을 보여준다. "이것이 저항적 발언으로 보이길 바란다."라는 작가의 말은 기존 저항의 관념들에 질문하게끔 한다. "저항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 고산

윤결_위즈던의 드로잉과 물음표_캔버스에 유채(드로잉_وجدانWejdan), 손자수_2015~8

파티는 우리 손으로 창문을 닫는 것부터 시작한다. ● 스웨덴 작가인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라는 소설 그리고 마르크 샤갈의 1913년 작품인 '창문으로 보는 파리(Paris par la fenêtre)' 등 예로부터 창문은 현재 혹은 현실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출구이자 그 공간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꿀 수 있는 희망의 상징으로써 예술 창작에 널리 사용되어 왔다. 100세 생일날 창문을 넘은 노인은 자신의 세상 전부였던 양로원은 물론 자신을 짓누르던 시간의 속박으로부터도 벗어난다. 샤갈 또한 창문 너머 환상과 신비로 가득한 파리를 그려낸다. 꿈꿀 수 있는 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예술을 할 수 있다는 듯, 샤갈은 우리가 위화감이나 거부감 없이 자신의 꿈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 이후 미국 시카고에 선사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인 '미국의 창문(America Windows, 1977)'에 이르러 샤갈의 창문은 예술 그리고 자유에 대한 믿음과 희망의 상징 그 자체가 된다. 그런 창문을 반드시 닫고 가려야만 하는 공간에서의 파티는 어떤 느낌일까? 심지어 노랫말이 포함된 음악을 들어서도 안 된다면, 그 규칙들에 대해 꿈꾸는 이들인 예술가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더군다나, 파티의 참가자들이 여성에게 가장 억압적인 종교라 알려져 있는 이슬람 국가에서 건너온 여성들이라면 말이다. 윤결의 전시 『창문과 음악이 없는 파티』는 어쩌면 매우 어려운 미학적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이 질문에 정답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객관성이나 정치적 올바름과 같은 무거운 무장(武裝)없이 단지 함께 생각해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겠노라며 자신이 질문을 던지게 되었던 파티의 그 곳으로 우리 모두를 이끈다.

윤결_위즈던의 드로잉과 물음표_종이에 붓펜(드로잉_وجدانWejdan)_가변설치_2015~8

파티 입장 ● 윤결은 이슬람 이민 사회의 여성 억압적, 폐쇄적 젠더공간에 대한 '기록'이나 '보고'만으로 그칠 수도 있었던 자신의 작품들을, 이슬람 사회는 물론 한국 사회에 내재화된 젠더공간 인식과 그 권력구조를 함께 고민해볼 수 있도록 돕는 리트머스로써 제안한다. ● 이슬람 수니파 근본주의가 득세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이민 사회에 속한 4명의 이슬람 여성들과의 만남으로부터 출발한 작품이기에, 이슬람 여성 연구 혹은 이슬람 페미니즘 연구나 예술 작업들이 일반적으로 이민자나 유학생을 다룰 때 주목하는 서구-이슬람 관습/규범의 충돌과 정체성 혼란 등이 윤결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다루어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다소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오히려 작가는 문명, 관습, 규범, 종교의 충돌과 같은 거시적 문제를 직접 다루는 대신, 그러한 거시적 문제가 '자기 극복', '관습 부정', '자아 실현'과 같은 도식으로는 절대 해결될 수 없을 단 수 시간 동안 진행되었던 파티의 재현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사우디아라비아 여자 4명을 집에 초대했다. 그녀들은 남편과 가족을 따라 미국에 와서 지내며 어학학원에 다녔다. 그녀들은 히잡과 아바야 그리고 니깝을 착용하며, 모두 20살 초반의 여인들이었다. 나는 그녀의 가족과 남편에게 3개월에 걸쳐 집에 초대하는 것을 허락 받아야 했다. 조건이 있었다. 모든 창문은 닫아야 했고, 사람의 소리가 들어간 음악은 틀면 안됐다. 그리고 허락된 사람 외에 다른 사람, 그 중에서도 남자는 절대 있으면 안됐다. 이 사항들을 위반할 때에 나는 그녀들의 목숨을 위험하게 할 수 있었다. 약속된 시간에 맞춰 그녀들의 가족들이 운전하는 차가 집 앞에 도착하여 한 명씩 내려주었다. ● 그리고 모두 집안에 들어왔을 때 착용하였던 히잡 등을 풀었다. 우리들만의 방식으로 파티는 이뤄졌다. 나는 친구들에게 집안 벽에 붙여진 캔버스에 각자 그리고 싶은 혹은 남기고 싶은 것들을 그려 달라고 했다. 이후 채색은 내가 마무리하기로 하며 이날의 파티는 끝이 났다. 그녀들이 돌아간 후, 그리고 간 그림 위에 검정 펜으로 다시 한번 진하게 따라 그려보았다" (작가의 글에서) ● 위의 글에서 작가가 묘사하고 있는 낯설면서도 매우 사적인 파티를 통해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3점의 회화 작품들과 사진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이번 전시는 그때 당시의 파티를 가보지 않고도 상상해볼 수 있도록 돕는 정보 전달의 창구인 것인가? 우리는 단지 초대받지 못했던 파티를 엿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이슬람 문명권에서의 여성 억압 문제에 대한 각자의 생각에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면 되는 것일까? ● 여기서 나는 크로아티아의 유명 페미니즘 아티스트이자 비디오 아티스트인 산야 이베코비치(Sanja Ivekovic)의 퍼포먼스/사진 작품인 트라이앵글(Triangle, 1979)를 떠올려 본다. 트라이앵글은 크로아티아가 아직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속해 있을 당시, 나치에 대항한 독립투사이자 절대 권력자였던 티토가 작가가 살고 있는 도시를 찾아 벌인 거리 퍼레이드에 대한 퍼포먼스 작업이다. 사실 당시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은 남아있지 않으며, 대신 총 4점의 사진과 당시 상황을 기록한 텍스트를 통해 이베코비치의 퍼포먼스 모습을 상상해보는 수밖에 없다. 티토 당시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도시를 방문하니 (암살 등의) 불상사를 최소화하기 위한 발코니 소개령, 모두가 티토 대통령을 환영하라는 명령과 함께 도시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경찰들의 시선들에 대한 이베코비치의 '반응'과 '도발' 그리고 그 결과로 이어지는 내러티브는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과의 2015년 파티에 부과된 여러 약속/명령/계율들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도록 하는 강제력(공포심부터 물리력 그 자체에 이르는)이 이번 전시와 맺는 내러티브와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억지력을 가지고 있는 권력(국가, 종교, 총, 칼, 가정폭력, 가족의 권위)에 의해 이베코비치는 들어가면 안 된다고 규정된 공간에 들어가 퍼포먼스를 벌이며, 윤결은 거기만 가능하다고 규정된 공간에 들어가 파티를 연다. 또한, 비밀경찰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한 이베코비치의 퍼포먼스를 단 4장의 사진과 텍스트를 통해서만 되새겨 볼 수 있는 것처럼, 닫힌 창문 속에서 진행된 윤결의 2015년 파티 또한 그들이 함께 남긴 평면 작품 그리고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도록 찍은 사진 몇 장만을 남겼다.

윤결_백그라운드_캔버스에 유채(드로잉_مشاعلmashael, نجودnjood, امانيAmani)_160×200cm_2015~8

여기서 3점의 평면작품은 각각의 작품이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정보를 전달한다기보다는 이베코비치의 사진 4점처럼 그 때, 그 당시 그 방에서 있었던 파티 '행위'를 되새겨 볼 수 있도록 한다. 이베코비치의 퍼포먼스가 사진 4점과 이베코비치의 진술만을 통해 관객을 만날 수 있듯, 윤결 작가의 그 시간과 공간은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의 드로잉에 색을 입힌 윤결 작가의 평면작품, 그리고 사진들을 통해 퍼포먼스 예술로 승화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매번 새롭게 연출되는 퍼포먼스의 행위자이자, 퍼포먼스의 지시어를 읊는 연출자 혹은 배경설명을 전하는 나레이터인 작가 윤결의 손님들이다. ● 파티나 전시와 같은 사회적 행위는 상호작용을 그 존재 기반으로 삼는 이베코비치의 도발적 퍼포먼스와 마찬가지로 특정 '공간'에 대한 상호작용적 '일깨움'의 반복이자 연쇄반응에 가까운 것이다. 다만, 이베코비치가 공간에 대한 권력관계를 물리적으로 매개하는 경찰들을 상호작용의 직접적 말단으로써 지목할 수 있었던데 반해, 윤결의 파티는 가족의 권위와 종교적 관습이 규정하는 권력관계, 보다 정확히는 여성 억압적 젠더공간을 강제하는 매개로써의 말단을 지목하는 것이 어려웠으며 윤결 또한 당시 특정한 존재를 말단으로 요구하려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윤결의 파티가 지금 이 순간 매번 새롭게 연출되는 퍼포먼스(이베코비치도 상당기간 관객에 의해 새롭게 연출되고 해석되는 지시적 퍼포먼스라고도 볼 수 있다)라면, 그 젠더공간의 권력관계를 물리적으로 표출하는 말단의 역할은 바로 전시장을 찾은 관객 자신들의 몫이 될 것이다. 다만, 그 몫만큼의 역할을 해내는 우리의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날 때, 윤결 작업의 지향점 또한 명확해진다.

윤결_19송이 방울들_포도송이 조화, 눈알모형, 금방울, 실_가변크기_2018

무대의상: 짧은 치마와 히잡 | 지문: 투명인간으로 변신하라"히잡은 (가족이 아닌) 남성들의 저열한 혹은 음흉한 시선으로부터 여성의 순결을 지켜주기 위해, 여성을 투명한 존재로 만들어, 그 시선이 아예 닿을 수 없게 한다." (한 쿠웨이트 여성이 딸들에게 건넨 말) ● 위의 히잡 옹호 논리와 미니스커트 대신 단정한 옷차림을 하면 남성의 성욕을 '자극'하지 않기에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는 논리는 일맥상통할 뿐만 아니라, 양 극단의 사회들에 깊게 내재화되어 있는 젠더공간의 남성 중심의 권력구조를 공고히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는 공통점 또한 갖는다. ● 즉, 여성은 공공 공간에서는 '안전'하지 않으며 오직 가족 혹은 학교, 종교, 경찰과 같은 사회 권력기관에 의해 경계 지어진 사적 공간에서만 안전할 수 있다는 젠더공간 인식이 위의 이슬람 사회와 다수의 서구 사회에서 동일하게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여성에 대한 억압 논리가 (절대적이거나 상대적으로) 명확한 이슬람 사회와는 달리, 이른바 서구 가치를 수용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성차별적 젠더공간 인식은 내재화된 채 상식이나 관습 혹은 선입견 등의 형태로 그 해석권력을 휘두른다. 이슬람권의 샤리아에 의해 '공표'되거나 종교경찰에 의해 강요되는 성차별적 젠더공간 규정의 성문화 여부를 제외한다면 그 작동 원리 자체는 별반 다른 점이 없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윤결_창문과 음악이 없는 파티 [지켜야 할 것들]의 사항_커튼, 기계 손자수_270×440cm_2015~8

누군가가 투명인간이 되어야 하는 사회 ● 이 전시를 접하게 될 거의 모든 이들은 윤결 작가의 작품이 재현하는 그 친밀하면서도 매우 사적인 시간들에 대해서 기꺼이 동참의 의사를 표할 것이다. 동시에 이슬람 그 중에서도 상당히 엄격한, 그리고 가혹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여성에 대한 관습과 법률에 찬성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이슬람 율법, 즉 신으로부터의 규범인 '샤리아'가 이슬람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우리 사회의 관습, 터부, 법률 그리고 상식이라는 것이 대신 앉아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권위 있는 율법학자가 판단을 내리는 대신 우리는 그 규모가 작든 크든 이른바 '집단지성'이라는 미명하에 율법학자의 일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마다의 상식과 가치관(율법)으로 자기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에게 '투명인간'이 되라 요구한다. ● 규율과 관습 그리고 터부와 상식에 의한 강요, 그에 대한 반발이 만들어온 타자화된 존재로써의 자신을 우리는 윤결의 퍼포먼스에 동참함으로써 깨닫는다. 이러한 자각의 정도는 젠더공간으로써 전시장의 물리적 크기에 좌우되지 않는다. 오직, 전시장에 설치된 베일 저 너머가 형상하는 관습과 상식 그리고 규범의 경계 그 안팎에 서있는 존재의 이름에 좌우될 뿐이다. 물리적 공간의 크기를 바탕으로 젠더권력에 대한 주체적 상호작용을 논하는 것은 경계 저편에서 모든 상식과 규범에 이름을 붙일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 남성들에게 우선권을 허락할 뿐이다. ● 윤결의 전시는 이러한 상대적 젠더공간 인식에 있어 흥미로운 접근을 한다. 성인 여성임을 암시하는 장신구 외에는 누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도록 손과 다리만을 찍은 사진들을 식탁 위에 늘어놓은 것이나, 커튼에 자수로 명령들을 짜 넣은 작품을 예로 들어보자. 이는 얼마나 넓은 공간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자유로운 공간의 '경계'를 누가 정하고 누가 그 경계에 물리적인 힘을 부여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는 젠더공간에 대한 해석권력을 두고 벌어지는 투쟁인 것이다.

윤결_부분적 동의_흑백사진 9점, 촛농, 수유너머104 밥상, 사진_28.5×38.3cm, 가변크기_2015~8

베일의 안에서 숨을 쉬고 눈을 뜨다. / "XX" 안에서 숨을 쉬고 눈을 뜨다. ● 쿠웨이트 및 팔레스타인 혼혈인 무슬림 페미니즘 학자 사라 아부 바크르(Sarah W. Abu Bakr, 이하 아부 바크르)가 쿠웨이트 여성 살와(Salwa)와 가진 인터뷰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 아부 바크르: "신을 위해 (히잡을) 쓴 적이 있습니까?" 살와: "아니요, (침묵) 아니요" ... 중략 ... "나는 신을 위해 히잡을 쓰지도 종교 때문에 쓴 것도 아닙니다. 단지 내 아버지를 위해, 내 아버지의 체면을 위해 쓰고 있는 것뿐입니다." ● 윤결의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까지 우리는 일상공간 곳곳에서 시각언어, 몸짓언어, 음성언어를 통해 젠더권력 관계에 지속적으로 노출된다. 이 노출은 특정한 상황에서 규범, 상식, 터부로서 가시화되며 트라우마에 가까운 개인적 경험이나 비가역적인 집단적 기억화를 통해 명문화되고 물리적 강제력을 획득한다. 대표적 예로는 성평등 화장실 도입 논란을 들 수 있다. 가장 개인적 공간일 수 있는 화장실은 이미 불법적 촬영, 엿보기와 잇따른 성폭력 사건 등을 통해 마치 윤결의 파티에 부과된 '명령'과 같은 가부장적 젠더권력에 의해 그 경계가 규정되고 있다. ● 윤결 전시에 있어 파티 공간의 재현은 윤결 자신의 개인적 기억의 반추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퍼포먼스에 새롭게 행위자로 참여하는 개별 관객들이 한국 사회의 젠더지형에서 경험해온 집단 기억을 소환하는 것에 가깝다. 이를 통해 우리는 수 평방미터의 전시장 그리고 그 수백 수천 배에 달하는 한국 사회에 내면화되어 있는 젠더공간과 히잡이나 니캅으로 경계 지워진 이슬람 여성에게 허락된 자유 공간, 그 수 밀리미터에 불과한 얼굴과 검은 천 사이에 존재하는 미시 공간의 젠더 권력구조를 통해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창문을 닫고, 히잡을 쓰고 그들로부터 투명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이슬람 문화,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마음껏 입고 싶은 것들을 입는' 대신 내 자신으로부터 투명한 존재, 내 자신을 알 수 없게 되는 어떤 사회. 이 모든 극단 사회로부터 우리는 자신의 맨 얼굴을 잊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전시를 본 후 규범과 관습의 이식에 대한 이성적 가정(假定) 혹은 관념적 숭배에 대한 감정몰입을 통해 소환된 개인적 기억들을 소리 내어 표현할 필요는 없다. 블라인드, 음식덮개로 가려지고, 창문이 닫혀 있는 이 곳 윤결의 파티장은, 관습, 터부, 상식 그리고 성역할이라는 베일에 가려져 있던 관객 바로 우리 자신의 맨 얼굴을 스스로 마주하게 되는 곳이다. ● 이제 창문은 우리가 닫고 우리가 연다. 그리고 파티가 시작하고 또 다른 파티가 막을 내린다. ■ 정필주

윤결_은밀한 방_블라인드, 캔버스에 유채(드로잉_مشاعلmashael), 기계 손자수, 사진2점, 반짝조명, 로즈향, 조화, 구두, 실크천, 의자, 옷걸이대_가변크기_2015~8

그녀들은 남편과 가족을 따라 타국에 머무는 동안 어학학원에 다녔다. Njood, Mashael, Amani는 결혼을 했고, 임신 중이다. Wejan는 아직 미혼이다. 20살 초반의 여인들. 그녀들은 항상 히잡과 니깝 그리고 아바야를 착용한다. ● 사우디아라비아 여인 4명을 집에 초대했다. 집에 초대하기까지 3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나는 우선 그녀의 가족과 남편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조건이 있었다. 집안에 모든 창문은 닫아야 했고, 사람 소리가 들어간 음악은 틀면 안 됐다. 그리고 허락된 사람 외에 다른 사람, 남자가 있으면 안 됐다. 이 사항들을 위반할 때에 내가 그녀들을 위험하게 하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약속된 시간에 맞춰 그녀들의 가족 자동차가 집 앞에 왔고, 한 명씩 내렸다. 나는 및 낫에 가장 편한 옷으로 친구들을 맞이했다. 약속된 모두가 집안에 들어온 뒤 그녀들은 히잡과 니깝을 풀었다. 처음으로 이들의 머리카락을 볼 수가 있었다. Njood, Mashael은 긴 생머리였고, Amani은 긴 웨이브 파마머리였으며, Wejan은 어깨 단발의 곱슬머리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온몸을 둘러 쌓던 아바야를 벗었다. ● 집이라는 공간이 불러주는 편안함과 은밀함. 나는 이 은밀함을 제공했다. 여인의 옷차림은 야하고도 아름다웠다. 망사스타킹, 화려한 패턴의 원피스, 윗 가슴이 보이는 민소매, 짙은 향수 냄새와 화장, 반짝이는 다이야반지 ● 마치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이 공간에서 각자의 성적 매력을 뽐냈다. 나는 그녀들의 야함이 너무나 매혹적이었고, 여성의 순결이라는 막에 감춰져 덮여있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했던 욕망은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의 것이라는 선언 같아 보였다. ● 우리들만의 방식으로 파티는 이어졌다. 나는 친구들이 가기 전 집안 벽에 붙여 놓은 캔버스 천에 남기고 싶은 것들을 그려 달라고 했다. 그녀들이 돌아간 후, 그리고 간 그림 위에 검정 펜으로 진하게 따라 그려보았다. 그날 정말 우리에게 창문과 음악이 없었을까? ■ 윤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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