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뒤편

최진욱展 / CHOIGENEUK / 崔震旭 / painting   2018_0601 ▶ 2018_0624 / 월요일 휴관

최진욱_아파트 뒤편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130.3cm_201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60402h |최진욱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8_0601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30am~07:00pm / 월요일 휴관

인디프레스_서울 INDIPRESS 서울 종로구 효자로 31(통의동 7-25번지) www.facebook.com/INDIPRESS/

지각적-개념적-생태적 회화의 순환을 위하여"한국에 돌아와 (추상적 경향으로)(이하 강조는 필자) 좀 헤매다가, 1990년 회색으로 작업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유화를 그렸지만, 아크릴로 활달하고, 자유롭게 그리면서 다시 리얼리즘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그야말로 '현실'을 그려보려고 했다('감성적 리얼리즘'은 이 당시 명명한 것이다). 당시 민주화 운동이 대학가를 휩쓸었는데, 나의 현실은 답답하지만, 화실 안의 풍경과 나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바깥을 그리고 싶었다. 바깥을 그리자니 사진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는데……. 예전의 생생했던 느낌을 잡아낼수가 없었다. 그래서 몇 가지 개념적 장치를 했는데, 화면을 쪼개거나, 캔버스를 포개거나, 그림과 그림 속 그림을 병치하는 방식 등이었다. 내 친구이기도 한 미술평론가 심광현은 이것을 '개념적 회화'라고 불렀다……돌아보면 내 작품은 '감성적 리얼리즘'과 '개념적 회화' 사이를 오간 셈인데, 심광현의 말대로 나는 그저 아무거나 그린 것 같다. 풍경과 풍경 속 인물, 그리고 자화상과 작업실이 전부다. 현재도 작업실을 그리고 있는데, 언제나 시작하는 기분이고, 미숙하게 느껴진다……나는 내 그림이 어떤 포괄적 단계에 와있다고 느낀다. 더 이상 그림이 아닌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간혹 그렇게 그리려고 노력해오기도 했다. 세상 모든 것이 예술을 향해갈 때, 미술은 반미술을 향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림 같은 그림이란 내게 모욕적으로 다가온다. 역설적으로, 그림은 그림이 아닐 때 가장 그림답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작가노트: 2017. 8)

최진욱_욕망과 예의_삼부작_좌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130.3cm_2016

1. 들어가며 ● 「감성적 리얼리즘」은 30여 년 전(1990년 7월 「작가노트」에서) 작가 스스로 명명한 것이고, 「개념적 회화」는 20여 년 전(1997년 5회 개인전 서문에서) 내가 명명한 것이다. 다소 '자조적'으로 들리기도 하는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는 30여 년 동안 "아무거나 그리면서" 이 양자 사이를 오간 셈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로는 이 두 축 이외에 10년 전(2008년 8회 개인적 서문에서) 내가 명명했던 「생태적 회화」라는 다른 축이 하나 더 있다. 작가가 의식하지 않고 있는 이 축을 명시적으로 설정하면, 그가 최근에 이르렀다고 하는 "어떤 포괄적 단계"를 온전히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이를테면, 단순한 왕복 운동이 아니라 「감성적 리얼리즘→개념적 회화→생태적 회화→개념적 회화→감성적 리얼리즘→…….」라는 식으로 3축 사이에서 전개된 비선형적인 리듬에 대한 일종의 어렴풋한 자각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렇게 볼 경우 그가 막연히 느끼는 포괄적 단계의 의미를 구체화하면서 이번 전시의 가치와 의미를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차이와 반복의 생성적 순환이 빚어내는 포괄적 리듬」 같은 것 말이다. 먼저, 이 포괄적 리듬의 복잡한 형상과 구조를 온전히 파악하려면 세계와 「그림과 텍스트(문자/숫자)」와 사람 사이의 복잡다단한 관계를 거시적이고도 차분한 시각으로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역사적 조망을 위해서는 일종의 디딤돌이 필요한데, 여기서는 빌렘 플루서의 『그림의 혁명』1과 인지생태기호학이라는 두 종류의 디딤돌을 사용해 보고자 한다. ● 먼저, 플루서에 의하면 그림과 텍스트(글자/숫자)의 관계 변화는 단순한 매체/장르 변화의 문제가 아니라 [선사시대의 공시적-마술적인 「세계-그림」]에서 [통시적-선형적인 역사시대의 「그림-텍스트」]를 거쳐 오늘날에는 [공시적-비선형적인 탈-역사시대 혹은 본륜(epizyklisch: 큰 원 운동 위에서 움직이는 작은 원 운동) 시대의 「모델-그림」]으로 나아가고 있는 문명사적 변화의 핵심을 설명하는 기본 원리이다. 흔히 오해하는 것과 달리 그림은 –수천 년에 걸친 역사시대의 텍스트보다 더 오래된 –수만 년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문명사적 요동을 이끄는 「이상한 끌개」의 중핵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물론 매번 그림의 의미와 가치가 크게 변화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최진욱_욕망과 예의_삼부작_중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130.3cm_2016

플루서는 최근의 「모델-그림」의 새로운 속성, 즉 공시적-비선형적-프랙탈한 속성을 숫자의 디지털화에서 찾았다. 하지만 이런 속성은 몸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뇌의 인지생태학적 회로와 퍼스의 다차원적 기호학을 연결한 인지생태기호학의 관점에서 보면 또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인지생태기호학적으로 수정-보완된 관점에서 보면 「수작업에 의한 세계-그림」을 통해서도 「과학기술적인 모델-그림」의 공시적-비선형적-프랙탈한 속성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최진욱의 그림은 「현상학적인 세계-그림」에서 「개념적인 그림-텍스트」를 거쳐 「인지생태기호학적인 모델-그림」으로, 혹은 각 단계들이 중첩되거나 어긋나는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고 볼 수 있다(계통발생의 개체발생적 반복). 물론 이런 주장은 어디까지나 그가 지난 30여 년 동안 「그림의 시작」이라는 화두를 짊어지고 제기해온 수많은 문제들과 고민들(과 그에 대한 필자의 기존의 해석)에 대해 현 시점에서 보다 체계적인 방식으로 응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적인 가정이다. 이런 가정 하에서 보면, 그의 그림은 30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시작 중」 혹은 「수업 중」인데, 그 의미론적 맥락은 크게 다르다. 과거의 그림이 현상학적인 그림의 시작이었다면, 오늘의 그림은 인지생태기호학적 관점에서 그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즉 「기존의 그림이 아닌 새로운 그림」으로 다시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플루서는 「테크노 모델-그림」의 시대에는 "우리의 지각, 상상, 감정, 의도, 인식, 결정은 갈수록 그러한 그림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이로써 모든 창조적인 학문 분야 –과학이나 정치 같은 – ● "지금 독일(일부 다른 국가들도)의 환경보호 운동은 사회적 생태계와 생물학의 생태계의 상호관계에서 이루어진 오늘의 변혁을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녹색'이라고 지칭한다. 이 운동은 아직도 신석기시대의 방식으로 사고한다. 그러나 경작에서 유전학, 정보학, 자동화로의 도약을 이루고 실제로 생태학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면, 그 운동은 '다채색'이라고 지칭하게 될 것이다."(플루서: 213) ● 회색의 그림에서 다채색의 그림으로, 현상학적 관점에서 인지생태기호학적 관점으로 이동할 경우 그림의 시작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화두에는 본래 하나의 정답이 없고 오직 다각적인 실천적 응답이 필요할 뿐이다. 이 질문을 던지는 이 글 역시 새로운 화두에 대한 수많은 실천적 응답, 보다 정확하게는 「이론적 실천」으로서 가능한 수많은 응답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런 전제 하에서 세 가지 그림의 순환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몇 가지 디딤돌을 건져 올려 보겠다.

최진욱_욕망과 예의_삼부작_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130.3cm_2016

2. 그림의 혁명 ● 빌렘 플루서의 『그림의 혁명』(김현진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4)은 커뮤니케이션은 물론 자연과 문화와 사회와 역사와 종교와 과학과 철학과 정치와 예술과 기술과 도시 등 인간사의 모든 측면에서 기존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고의 패러다임의 혁명적 전환을 요구했다. 이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이 과거에서 오늘에 이르는 「그림의 의미 변화」와 더불어, 새로운 그림이 옛 그림과 맺는 관계를 체계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필자 스스로 디딤돌을 정확히 추려내기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을 몇 가지로 나누어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다.

최진욱_작업실_삼부작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130.3cm×3_2017

1. (세계-그림) "라스코 코드의 경우처럼 이차원적인 코드로 이루어진 상징들은 사차원적인 시공의 사태를 장면으로 축소시키는 가운데, 다시 말해 그것을 '상상하는' 가운데 '세계'를 의미한다. '상상'이란 정확히 말해 세계의 사태를 장면으로 축소시키는 능력이다. 또한 그와 반대로 장면을 사태의 대체로 해독하고 '지도'를 만들며 읽는 –예컨대 미래의 수렵(라스코)이나 생산될 광고물(청사진) 같은, 원하는 사태의 '지도'를 포함해 –능력이다."(플루서: 29) ● 2. (그림-텍스트) "그림은 그 의미가 한눈에 파악되는 하나의 표면이다. 즉, 그림은 장면으로서 그것이 의미하는 사태를 '동시화'한다. 그러나 시선으로 포착한 후 눈은 그림의 의미를 사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분석하면서 그 속을 두리번거려야 한다. '동시성'을 통시화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낮과 밤과 낮이, 씨앗과 수확물과 씨앗이, 또한 탄생과 죽음과 부활이 회귀하는 시간이다……그것은 시간의 순환 속에서 처해야 하는 사정에 따라 사물을 정돈 한다……. 글자의 발명은 말하자면 새로운 상징의 발명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림을 선('행')으로 풀어 놓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과 함께 선사가 끝났으며 진정한 의미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뜻하는바가 그림에서 벗어나 한심한 무(無) 속으로 내디딘 발걸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늘 의식하지 못한다.……그것은 장면을 풀어서 하나의 이야기로 변환시킨다. 그것은 모든 개개의 상징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세어가면서 장면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행('텍스트')이란 사태를 직접적으로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구체적인 사태'를 뜻하는 그림의 장면을 뜻 한다……. 텍스트는 그림보다 구체적 체험으로부터 한 걸음 더 떨어져 있다. 그리고 '작성한다'는 것은 '상상한다'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소외의 징조다……. 그 결과……선형의 시간, 철회할 수 없는 진보의 흐름, 반복 불가능성이라는 극적인 상황, 구상, 간단히 말해 역사라는 새로운 시간 체험이 생겨난다."(플루서: 29~31) ● 3. (모델-그림) "설명이라는 일직선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모델'이라는 테크노적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바로 우리가 '가치의 위기'라고 부르는 상황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어떠한 사정에 대한 장면이 아니고 하나의 모델, 즉 한 장면의 개념에 대한 그림[형상]이라는 것이 테크노 형상이 혁명적인 새로움이다. 그런데 정치, 철학, 과학과 같은 옛 프로그램은 텍스트를 벗어남으로써 무력화되고 새로운 프로그램에 의해 대체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은 일종의'위기'다."(플루서: 34~35) ● 4. (이념에서 모델로): "글을 아는 사람들의 의식, 즉 고전적이고 기독교적인 의식 속에서는 우리가 읽을 수 있고 거기에 맞춰 행동해야 하는 하나의 초월적 텍스트가 우리 위에 아치처럼 펼쳐져 있다. 이러한 텍스트 속에는 모든 정보(형태, 이념)가 불변의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또한 우리는 이론, 그리고/혹은 신앙에 힘입어 이 텍스트를 읽으며 관조할 수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의) 혁명적인 수공업자들에게 정보는 실습 자체를 거쳐서야 비로소 형성된다. 즉 노동은 모든 인식과 체험, 가치의 원천이다……. 정보(형태, 인식, 가치)는 영원불변 하는 것이 아니라 전진적으로 개선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정보는 '모델'이다."(플루서: 44)

최진욱_남쪽으로부터_삼부작_좌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97cm_2017

플루서가 30여 년 전에 내놓았던 이런 예측은 이제 인공지능 시대의 도래와 함께 현실적으로 실현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림-문자-숫자를 손과 입과 머리로 다루는 시대를 지나 이 모든 것들이 디지털 전산화를 통해서 연결되는 새로운 위상학적 그림의 세계와 마주하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그림 역시 외부의 객체를 조작하는 내적 주체라는 단순한 그림을 상상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신경-물리학적이고 생태학적이고 입자물리학적인 네트워크 속에 중첩된 상호주관성의 위상학적 관계망 속에서 프로젝션하는 복잡한 그림으로 새롭게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플루서는 이 새로운 단계를 역사주의 문화 모델에서 본륜적 문화 모델로의 이행이라고 말한다. [자연(과학)→문화(학)]로 나아가는 선형적인 모델에서 [자연(과학)→반제품(유전학/정보학/인공지능)→문화(학)→폐기물(고고학/생태학)→자연→…….]이라는 비선형적으로 순환하는 모델로 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플루서: 11). 이 경우 인간은 객체를 조작하는 주체가 아니라, 큰 원 운동 속에 포함된 크고 작은 원운동들(본륜 운동)을 「리모델링」 하면서 「상호주관적 관계를 새롭게 프로젝션 해야 하는 위상학적 네트워크들 속의 교차점」으로 파악된다(플루서: 160). ● 그러나 플루서가 강조했듯이 이 새로운 모델이 낡은 모델을 손쉽게 대체하지는 못한다: "개개의 제스처는 서로 떼어 내거나 해체할 수 없으며 서로를 덮고 맞물린다. 그림들의 합성과 병행해서 계속 그림이 그려지고 글이 쓰여지고 분석이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제스처들은 한데 어우러져 예측할 수 없는 긴장과 상호간의 결실에 이를 것"(플루서: 150)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세계-그림」, 「그림-텍스트」, 「모델-그림」이라는 3 가지 그림이, 그리고 글과 분석이 「서로를 덮고 맞물려」 「긴장되고 상호간에 결실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라는 문제가 그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뉴턴의 중력 이론을 「폐기-대체」한 것이 아니라 「포괄」할 수 있었던 것처럼, 새로운 「모델-그림」이 선사시대의 「세계-그림」과 역사시대의 「그림-텍스트」를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플루서가 제기는 했으나 해명하지는 않았던 이 「포괄」의 구체적 과정을 해명하려면 뇌과학과 기호학과 생태학을 연결한 인지생태기호학적 분석이 필요하다. ● 물론 이런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프레임의 구성은 아직은 밑그림 단계이므로, 여기서는 기초적인 윤곽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윤곽이 그려지면, 적어도 세계-그림-텍스트-사람 간의 중첩된 관계를 둘러싼 혼란스러운 생각에서 벗어나 오늘의 세계에 적합한 그림의 다차원적인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생산하고 향유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고 본다. (중략)

최진욱_남쪽으로부터_삼부작_중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130.3cm_2017

4. 『남쪽으로부터』의 흐름을 가로막는 『아파트 뒤편』에서 ● 작가에 의하면 이번 전시의 제목은 『남쪽으로부터』에서 『아파트 뒤편』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남북정상회담으로 인한 국내외적인 사회변동의 예측 불가능성 때문이라고 한다. 은유적인 제목이 환기시키는 연상 작용을 따라가 보면, 남쪽에서 북쪽으로 나아가는 어떤 흐름을 아파트가 가로막고 있는 형국이 일종의 방향성을 가진 다이어그램처럼 펼쳐진다. 실제로 이런 다이어그램적인 연상은 「아파트 뒤편」(1), 「압록강 보트놀이」(2), 「작업실」(3), 「욕망과 예의 삼부작」(4), 「작업실 삼부작」(5), 「남쪽으로부터 삼부작」(6), 「남쪽으로부터 A」(7), 「남쪽으로부터 B」(8) 순으로 전개되는 카탈로그의 배치에 의해 실증되는 것 같다. 이때 (1)과 (8) 사이에는 압록강을 구경하는 남한 관광객을 그린 「그림-2」와 한강에서 개와 아이를 데리고 산책하는 여자와 강변을 청소하는 두 남자를 그린 「그림-6」이 일종의 아이러니를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그림-1」과 「그림-4」와 「그림-7과 8」은 이 아이러니를 강화하는 알레고리적인 고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소비문화적 욕망에 의해 교란되고 있는 남북의 두 강을 「예」를 갖추고 정화하려는 의지가 아파트의 물질성과 세례라는 이데올로기적 제스처에 의해 교란되는 것 같은 스토리텔링이 연상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스토리텔링은 작품의 제목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고, 보기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해석이 불가피한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세계-그림」의 「이미지」는 기호학적으로 「그림-문자」와 연결되는 「메타포」 (은유적-환유적-담론적 해석)와 불가분하게 연결되는 데서 기인한다. 동시에 이 이미지들은 기호학적 「다이어그램」의 변화와도 연결된다. 이전에도 그랬듯이 어떤 그림은 독립적이지만, 일부는 이 그림들의 작업 과정을 그리는 그림 속의 그림이고, (2)를 제외하면 모든 그림은 그림과 그림이 놓여 있는 작업실 바닥을 함께 포함하는(일부는 여기에 더해 화가의 팔과 다리가 포함되기도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림 바깥의 화가의 작업실 바닥과 자신의 신체의 일부가 그림의 프레임 안으로 이전 보다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이 때 그 신체가 지표적-이미지보다는 다이어그램의 형태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진욱_남쪽으로부터_삼부작_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97cm_2017

이와 같은 다이어그램적 요소의 강화 속에서 특히 흥미를 끄는 작품은 「남쪽으로부터의 삼부작」(6)이다. 왼편과 중앙의 두 그림에서 상단의 한강물은 그려진 그림의 형태로 수직 방향을 취하고 있는 반면, 하단의 바닥은 강둑이라기보다는 화실의 타일바닥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오른편의 그림에서는 그림과 바닥이 뚜렷이 구별되지 않고 연속적으로 연결된 것처럼 보임과 동시에 화면의 오른쪽은 엉클어진 풀숲처럼 휘갈겨져 있다. 두 개의 이질적인 다이어그램의 경계가 부분적으로 혼합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형상은 마그리뜨의 그림과 같은 착시 효과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기호학적인 헝클어짐과 같아 보인다. 이는 들뢰즈가 「정동-이미지」(1차성)와 「행동-이미지」(2차성) 사이에 있는 「충동-이미지」(1.5차성)라고 불렀던, 비규정적인 파토스가 요동치는 근원적 세계의 이미지가 화면에 침입하고 있는 것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제어할 수 없는 파토스의 야생적 에너지가 정교하게 연출된 세례의 세레모니와 충돌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이런 상반된 벡터들의 어긋남 때문에 세례 장면의 도상들의 형상들이 다른 그림에서처럼 촉각적-지표적 물질성을 상실하고 순수 시각적인 색채들의 띠와 같이 환각적으로 보여지는 것일까? 퍼스가 강조했듯이 기호 삼각형은 서로 순환하면서 무한한 해석의 우주를 펼쳐 보이기 때문에 이런 식의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내놓아도 그 질문과 답은 고정된 위치를 갖지 못하고 상호주관성의 해석적 네트워크의 역동적 파도를 떠다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런 상대론적 네트워크의 파도 속에서 기호 삼각형을 운용하는 우리의 뇌가 대지와 상호작용하는 신체 속에서 움직이는 해석학적 장치라는 사실, 그 장치의 중심에는 언제나 「세계-내-신체의 지각-생각-행동 고리」라는 가장 기본적인 생태학적 네트워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체화' 해나가는 새로운 항해법을 배운다면 그 어떤 해석학적 현기증도 이겨내면서 대화적 관계를 확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최진욱_남쪽으로부터 A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7.3×168.5m_2018

5. 나가며 ●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뇌는 지각과 행동 고리 사이에 감정과 충동과 성찰과 상상력과 같은 다양한 중간 고리들이 3차원적으로 중첩되어 있다. 여기에 무한한 해석 가능성을 함축한 기호학적 네트워크가 결합되면서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점점 더 복잡해지는 세계와 타인들과 다른 생명체들과 다층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대화적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때 말하는 대화는 바흐찐이 말하듯, 문자나 숫자만이 아니라, 눈으로, 손으로, 입술로, 영혼으로, 정신으로, 온 몸으로,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대화다. ● "인간의 진정한 삶에 유일하게 적절한 언어적 표현 형식은 완결되지 않는 대화이다. 삶은 본성상 대화적이다. 산다는 것은 대화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묻고 귀를 기울이고 대답하고 동의하고 하는 등등이 그것이다. 이 대화에 인간은 삶 전부를 가지고 참여한다. 눈으로, 입술로, 손으로, 영혼으로, 정신으로, 온몸으로, 행동으로, 그는 이 대화에 참여한다. 그는 자신의 전체를 말 속에 집어넣으며 이 말은 인간 삶의 대화적인 직조물 속으로, 세계적인 심포지엄 속으로 들어간다."4

최진욱_남쪽으로부터 B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7.3×168.5m_2018

최진욱이 최근 뭔가 「포괄적인 단계에 도달했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대화적 직조물 속으로, 세계적인 심포지움 속으로 들어간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대화적인 세계적 심포지움은 단일한 의미로 확정될 수 없고, 다성음악의 복잡한 화음처럼 중층적인 콘트라스트들로 가득 찬 크고 작은 파도들이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인지생태기호학적 리듬을 펼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현상학적-개념적 회화가 기호학적-생태학적 네트워크들이 펼치는 이 역동적인 드라마 속에서 다시 한번 새로운 그림의 시작을 보다 드라마틱하게 전개하기를 기대해 본다. ■ 심광현

Vol.20180602d | 최진욱展 / CHOIGENEUK / 崔震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