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사적인 풍경

김소라_노혜인_박지수展   2018_0601 ▶︎ 2018_0619 / 일요일 휴관

김소라_Loved duck03_캔버스에 유채_22×33.4cm_2018

초대일시 / 2018_0601_금요일_06:00pm

기획 / 윤상훈 큐레이터

관람시간 / 02:00pm~06:00pm / 일요일 휴관

아터테인 스테이지 ARTERTAIN stage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717-14번지 Tel. +82.(0)2.6160.8445 www.artertain.com

한참 동안이나 작품 앞에 서 있던 그 노파는 급기야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보인다. 무엇이 그녀에게 그토록 이나 강렬한 감동을 전해 주었을까. 그저 검붉은 색이 반복적으로 덧칠해진 색면 추상 회화에서 그 노파는 어떤 스토리를 읽어 낸 것일까. ● 몇 해 전 테이트 모던에서 목격했던 이 장면은 로스코(Mark Rothko)의 작품들 보다 오히려 더 생생하게 나의 기억에 남아 있다. 익숙한 대상이나 이미지만이 관객의 공감을 얻을 수 있고, 결국 그것이 작품과 감상자 간의 소통을 이끌어내는 핵심적인 방식이라고 믿어왔던 편견을 깨버린 순간이었다. 물론, 그 노파가 붉은색의 시각적 파괴력에 압도되어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닐 것이다. ● 로스코의 작품이 노파로 하여금 과거의 특정 사건을 떠오르게 했을 테고, 비록 망막은 붉은 캔버스를 응시하고 있을 지라도, 그녀의 뇌 기억은 자신의 삶을 더듬어 어떠한 지점을 회상하게 했을 것이다. 혹은 현재의 삶을 반추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작품이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했다기 보다는 감상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되돌아 보게 하는 중간 역할을 했다는 것으로 이해 하는 것이 옳다.

김소라_Loved duck02_캔버스에 유채_37.9×37.9cm_2018
김소라_용마랜드_72.7×90.9cm_캔버스에 유채_2017
김소라_할머니 방_캔버스에 유채_53×45cm_2017
김소라_할머니 방2_캔버스에 유채_41×45.5cm_2017
김소라_불 꺼진 방_캔버스에 유채_32×41cm 2018

예술은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처럼 우회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접근법으로 보면, 전자의 경우처럼 작가가 보편적이고 익숙한 이미지들을 제시해 감상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해석의 틀을 제공하는 것을 스투디움(stadium) 이라 한다. 반대로 푼크툼(punctum)은 관객의 개인적 경험이나 성향, 취향 등과 연결되어 순간적으로 이미지를 접했을 때 찾아오는 강렬한 자극을 의미한다.

노혜인_manly_종이에 유채_21×29.6cm_2018
노혜인_재즈와산조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18
노혜인_pinkspace_캔버스에 유채_31×30cm_2017
노혜인_ROSE LIPE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17
노혜인_무제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18
노혜인_위험해!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18

물론, 작가는 불특정 다수의 관객 개개인의 경험과 취향을 고려하며 작업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푼크툼은 작가가 중심이 되어 자신의 경험을 작품으로 풀어내고, 공교롭게 비슷한 경험을 한 특정 감상자와 만나는 지점에서 그 자극이 형성된다. 이렇게 접근 했을 때 스투디움이 작품을 감상하고 독해하는 재미를 선사해 줄 순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꼭 감동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는 없다. ● 물론, 다수에게 보편적 해석이 가능한 여지를 전달하는 작품과 특정 관객만이 인지 할 수 있는 처절한 공감을 전달하는 작품을 놓고 무엇이 더 우월한지 옳은지를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이다. 그것은 각자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고 혹은 예술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 일 수도 있다.

박지수_twilight_종이에 유채_21×29cm_2018
박지수_The lost White House_종이에 유채_29×42cm_2016
박지수_봄_종이에 유채_29×21cm_2018
박지수_Gloomy summer_종이에 유채_42×29cm_2018
박지수_Dawn flowers_캔버스에 유채_91×91cm_2018
박지수_Alive_종이에 유채_42×29cm_2017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소개하는 세 명의 작가들은 후자의 경우에 근접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들 작품에 등장하는 상징들은 관람객들이 그간 일반적으로 독해해 왔을 방식과는 다르게 매우 사적인 영역의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매우 사적인 풍경』을 제시하는 이 세 명의 작가들은 어찌 보면 관객의 보편적 해석을 차단하는 불친절한 작가들 일지도 모른다. 도대체가 가늠할 수 없는 상징들의 집합체인 이번 전시는, 그렇기 때문에 작품 자체는 난해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반면에 작가에게 더욱 바짝 다가설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과연 어떤 감상자가 테이트 모던의 노파처럼 강렬한 자극을 받게 될는지 작가와 기획자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을 예정이다. ■ 윤상훈

Vol.20180603c | 매우 사적인 풍경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