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바깥, 바다 너머

이강욱展 / LEEKANGWOOK / 李康旭 / painting   2018_0605 ▶︎ 2018_0617

이강욱_일곱개의 씨앗_종이에 콩테, 파스텔, 과슈_107×78cm_201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70921c | 이강욱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8_0605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윤보선길 72(안국동 7-1번지) Tel. +82.(0)2.738.2745 www.gallerydam.com

6월을 맞이하여 이강욱 작가의 전시를 선보입니다. 이강욱 작가는 산해경이라는 고대 지리서의 텍스트와 칼바노의 소설 그리고 오래된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자연과 동물들이 현재에도 유효하며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에 제주도 서귀포에서 1년 반을 지내면서 육지와는 다른 섬 생활에 매료되어 작가의 그림에는 아직도 불을 안고 있는 화산이 등장하고 있다. 꼬리가 셋 달린 호랑이가 달밤에 산을 바라다 보는 「달밤」에서는 오래 전 여름철 납량특집드라마 「전설의 고향」과도 같은 호러스런 분위기도 풍긴다. 「큰 산을 넘어가는 새」라는 작품에서는 첩첩산중의 험한 산을 학처럼 보이는 새 한 마리가 시원한 날개짓을 하면 날아가고 있다. 이강욱 작가는 충남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으며 이번 전시는 열 세번째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에는 「어디 빛나는」, 「새」, 「산을 넘는 호랑이」,「붉은 나무새」 등 20여점의 작품이 선보일 예정이다. ■ 갤러리 담

이강욱_붉은 나무새_종이에 콩테, 파스텔, 먹_64×103cm_2018

씨앗으로부터 우주까지 변신하는 자아 ● 이강욱의 작품에는 식물, 동물, 광물, 하늘과 바다까지 다양한 계가 등장한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삶의 패턴에 유추하자면, 그것들은 일단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어눌한 표현방식 때문에 아이의 순진한 그림이 생각나는 그의 작품은 대상에 대한 정확한 재현에 충실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전달하는 데는 이상이 없다. 그의 작품을 보면 왜 그림을 배워야 하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그도 미술대학을 다녔지만(그리고 미술대학에 가기 위해 미술학원도 다녔겠지만), 그는 그것을 습득하고 나서 버렸다. 물론 그것은 처음부터 모르는 경우와는 다를 것이다. 또한 그는 박사/작가 못지않은 독서량을 가지고 있지만, 읽고 나서 잊어버린다. 작가에게 작품 이외의 것까지도 많이 기대하곤 하는 미술계에서 우리는 늘 어떤 쓰임새를 생각하지만, 최소한 작업의 경우 그것들이 어떤데 쓰일지 알 수 없는 것들이야 말로 진짜 활용되는 것 아닐까. ● 지식이든 경험이든 무의식에 쟁여져 있다가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인 작업을 통해 나온다. 작업, 특히 전시회를 위한 작업에 전적인 무의식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작업에 무의식이 최대한 발휘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이강욱의 경우, 그림이 너무 잘 되도 끊어내는 시공간을 가지려고 할 정도이다. 자신을 초기 상태로 만듦(reset)으로서 일종의 관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잘되는 것만 하려 하면 작가의 입지는 좁아진다. 장인(생산자)은 하나만 잘 해도 되지만, 예술가는 전 방위적이다. 계속 이동 중인 예술가는 무엇인가 익숙해질 틈이 없다. 이강욱은 'refresh'를 말하지만, 기계적 일상에서 그렇게 신선한 전환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가 직면했던 세계는 영감의 근원이 된다. 그의 말대로 '바람 한 점, 풀 한 포기'에서 얻는 영감은 매우 크고, 그것은 작품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전 전시에서 '풀 한 포기' 얽힌 상상력이 피어났다면, '바람 한 점'은 이동하는 동물들이 등장하는 이번 전시에서 발견된다. ● 『산의 바깥, 바다 너머』라는 부제로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질 법한 이상한 동물들이 등장한다. 작가의 삶에서 작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지만, 그의 작품은 세상과 절연하고 작업실에 푹 처박혀 만들어졌을 법한 통풍이 안 되는 스타일의 작품과는 거리가 있다. 대개 평평하게 채워진 바탕에는 대상을 감쌌던 공기, 즉 분위기가 전달된다. 그 분위기 속에서 그 안의 것들도 같이 숨 쉰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지속되는 맥락이지, 어떤 특별한 국면의 단편은 아니다. 움직이지 않는 그림은 단편이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굳어진 파편이 아니라, 생략된 앞뒤의 함축을 통한 일련의 서사를 가진다. 밤을 표현하기 위해 켜켜이 칠해진 화면의 층이 밤의 깊이를 전달하며, 바다를 표현하기 위해 쓱쓱 그은 선들은 바다 한가운데 자리한 산(또는 섬)이 바다와 함께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 해왔는지 알려준다. 간략한 선과 형태가 특징인 작품에는 점, 선, 면의 변주인 조형 언어가 적재적소에 구사되고 있다. ● 간략한 표현방식이 특징인 그의 작품에서 형식은 큰 위상을 차지하지만, 그것은 예술 언어의 자족성을 위해 세계를 괄호 치는 형식주의와는 구별된다. 작품은 작가가 본 것을 보여주지만, 그는 세계의 별천지를 돌아다니는 탐험가 스타일은 아니다. SNS를 통한 소통방식처럼 자기만 해봤던 것을 같이 보자고 소개하지 않는다. 그러한 소재주의는 다른 상품들의 목록처럼 그냥 우리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작가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그런 별천지들을 향유하고 싶겠지만, 작업은 또 다른 차원이다. 작업의 지속을 위해서는 스스로 설정한 엄격한 규칙이 필수적이다. 삶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와 물질을 온전히 작업으로 전용하는 이에게 자유로움은 규칙 실행에 있어서 창의적인 수의 적용에 집중된다. 작업에 묶여 있는 작가는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새로움, 또는 특별한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작가는 예술에 대해 '그 시간을 온전히 내 시간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 작가는 작업을 통해 작품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그림 안의 공기와 색감에 빠진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지는 체험을 한 적이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림 안에서 바라보는 것을 그 안에서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김홍도의 작품 속 서슬 퍼런 호랑이에서 그러한 경지를 본다. '그림 속으로 사라진 작가'라는 멋진 문구가 붙은 반 고흐에 대한 책 소개도 떠오른다. 작가가 그림 속에 들어 갈 수 있어야 다른 사람들(관객)도 그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것 아닌가. 온갖 화려한 스펙터클이 대중의 눈을 현혹하는 가운데, 예술은 이러한 내재적 차원을 통해 자신의 차별성을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날이 발전하는 가상현실을 비롯한 대중문화 또한 몰입을 겨냥하지만, 대량 소비에 맞춰진 생산과정에서 몰입은 없다. 거기에는 최대한의 이익을 위한 철저한 계산에 의거한 합리적 과정이 있을 따름이다.

이강욱_산을 넘는 호랑이_종이에 오일파스텔, 과슈_52×37cm_2018

내가 만든 세계지만 거기에서 또 다른 나, 즉 다양한 타자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작품에 들락날락 할 수 있는 사람, 즉 예술가의 특권일 것이다. 작가는 그림을 통해 뻔한 일상을 탈출한다. 예술이라는 또 다른 차원을 통해 일상의 다른 결을 발견한다. 이강욱의 경우 우리도 같이 볼 수 있는 어떤 대상의 표면이 아니라, 그 대상이 되는 것에 있다. 카프카적인 변신은 오늘날 겉보기의 자유로움 뒤에 더욱 결정론적 작용하는 시스템화 된 현대사회를 탈주하는 작가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소수가 다수가 되어 집단적(정치적)인 해결책을 추구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탈주는 산 넘고 바다 건너, 그리고 창공을 통과해 우주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대개 제자리에서 하는 탈주이다. 변신은 굳이 탈주라는 것을 멀리까지 가야 하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변신을 통해 현실 속 작은 틈도 빠져나갈 수 있는 문턱이 될 수 있다. ● 질 들뢰즈로 대표되는 현대적 사고가 총체적 질서를 전제하는 유기체보다는 단편을 지지하는 것은 탈주를 염두에 둔 것이다. 단편들의 조합은 거대 시스템의 틈을 빠져나가는 유력한 방식 중의 하나이다. 그때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접합하기 위한 단면을 가지는 단편이 아니라 파편 그 자체가 되는 것, 또는 전체의 일부로 톱니바퀴같이 작용하는 부품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단편과 단편이 난데없이 이어지곤 하는 이강욱의 작품은 탈주를 위한 변신의 한 방식이다. 변신하는 존재는 대지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나무같이 체계적이지 않다. 그것은 풀과 더 가깝다. 풀의 뿌리는 지층 바로 아래에서 서로 얽혀있다. 식물과 식물이 자라는 축소화된 대지라 할 수 있는 화분이 있는 풍경은 제자리에서 변신한다. 작품 『7개의 씨앗』에서 화분에서 나오는 줄기와 그 위에 걸쳐있는 '가지들'은 말 그대로 난데없는 관계로 이어진다. ● 가지 끝에는 꽃, 하얀 점, 뭉게구름 같은 것들이 '7개의 씨앗'에서 발생한 것일 터이다. 노란 점박이 배경은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변신에 경쾌함을 더한다. 작품 『파초』에서 하얀 작은 원, 그 위에 다이아몬드 형태, 그 위에 식물 같은 형태들이 아슬아슬하게 연결된다. 이어진 것들이 서커스처럼 균형 잡는 가운데 노란 꽃은 마치 얼굴처럼 보인다. 아니 얼굴 자리에 위치한다. 봉오리는 표면 아래에 무엇인가를 숨긴다. 작은 하얀 동그라미 위에 쌓인 것들은 근거 없는 연결망들의 뿌리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자라나는 생명체의 기적 같은 존재 방식을 알려준다. 작품 『어디 빛나는』은 '마치 형광 식물같이 깊은 밤 스스로 빛나는 식물'이다. 이 스스로 빛나는 존재는 지하의 뿌리 얼개까지 다 보여준다. 작품 『붉은 나무 새』는 새가 나무가 되고. 그 나무 위에 새가 있고, 가지 끝의 검은 원들에서 또 무언가가 자라난다. 검은 원은 점을 닮았지만, 그의 작업은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는 좌표적 사고가 아니라, 비스듬한 선으로 종횡무진 움직인다. ● 광합성을 위해 하늘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뻗은 가지가 아니라 제멋대로의 가지, 한 종류의 열매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나오는 씨앗, 뿌리의 취약함—그것들은 대개 약간의 표시로만 존재한다—은 이강욱의 작품 속 식물적 존재 양태의 특징이다. 그것은 씨앗에서 또 다른 씨앗을 낳는 과정에 존재하는 식물적 변신의 여러 단계들과 유사하다. 식물의 이동은 제한적이어서 주로 변신을 통해 '이동'하지만, 동물은 실제로 이동할 수 있다. 식물은 동물의 이동성을 이용하면서 진화해왔다. 지구상의 최초의 생명체였던 식물은 자족 기능을 갖추고 이후의 생명체들을 가능하게 한 원초적인 존재이기에 배경이 따로 필요 없지만, 동물은 그렇지 않다. 동물은 종속 생물체인 것이다. 작품 속 동물은 식물과 달리 배경을 가진다. 산은 호랑이에 딸려온 세트처럼 보인다. 작품 『산을 넘는 호랑이』에서 붉은 바탕에 시늉으로만 그려 넣은 듯한 작은 산은 호랑이를 매우 거대한, 그래서 신화적 존재처럼 보이게 한다. ● 실제 호랑이가 살 수 있으려면 산은 얼마나 거대하고 깊어야 하겠는가. 바짝 세운 꼬랑지가 마치 붓처럼 보이는 것으로 보아 호랑이에는 작가가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작품 『눈 오는 밤』에도 호랑이는 어디론가 이동한다. 굵은 눈방울처럼 밤 또한 굵은 검은 점으로 내려앉는다. 이 호랑이는 마치 고양이처럼도 보인다. 도시를 정처 없이 어슬렁거리는 '낭만고양이'--록밴드 체리필터의 노래제목이기도 함—는 어느 겨울 소나무를 그리려 했는데, 소나무를 그리고 나니 따라온 것이라고 한다. 고양이에게 도시는 호랑이에게 정글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에서 유일한 밑천은 자신이다. 그것은 꿈과 무의식까지도 모두 동원해야 하는 작업이다. 배경은 산산이 흩어지는 듯이 보이는데, 비록 고양이처럼 보이는 호랑이지만 그것의 포효는 주변의 것들을 들썩이게 만들 것이다. 작품 『눈표범』은 높고 깊은 산에 사는 설표를 그린 것으로, 가보지 않은 산 너머를 상상하다가 딸려온 동물이라고 한다. ● 정작 산은 매우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고, 설표는 무늬까지 자세하게 그리려다가 웃긴 표정의 동물이 되고 말았다. 설표는 실재하는 동물이지만, 호랑이처럼 잘 알려져 있지 않아 마치 상상 속의 동물 같은 모습니다. 자연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을 보여준다는 점은 거의 1%도 발견되지 않았을 심해어들의 생김새를 보면 알게 된다. 자연은 예술처럼 '창조'가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지만, 어떤 예술가적인 철학자의 말대로 '창조 또한 발견되는 것'(니이체)이다. 자연이 이미 실행하고 있는 것을 인간은 단지 발견할 뿐이며, 발견 또한 일부일 뿐이다. 이강욱은 자신이 식물을 그릴 때 어떤 상상을 하든 이미 그런 식물은 지구상 어딘가에 있음을 말한다. 동물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인간의 신화적 상상력부터 동양 고전 『산해경』까지, 그리고 현대의 작가 보르헤스의 『상상 동물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기괴한 상상력은 자연의 파편을 재구성한 것에서 나왔다. ● 종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 존재들은 흔히 괴물(키메라)이라고 칭해진다. 보르헤스는 『상상 동물 이야기』에서 키메라에 대한 최초의 언급을 『일리아스』에서 찾아낸다. '이것은 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앞부분을 사자를 닮았고, 중간 부분은 암산양을 닮았으며, 마지막 부분은 뱀을 닮았다' 한마디로 괴물은 지나치게 이질적인 것이다. 이처럼 괴물의 가장 큰 특징은 차이들의 뒤섞임이다. 그것은 인간, 동물, 물질, 우주의 다양한 범주에서 빌려온 단편들과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구별되는 차이들에는 잠재적 움직임이 내재한다. 신화학자 진 쿠퍼는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 상징 사전』에서 상상적 동물, 즉 괴물이 상징하는 것은 변화시키는 힘이라고 말한다. 변화하는 존재, 바로 그것이 괴물이다. 진 쿠퍼에 의하면 상상의 동물들은 서로 다른 동물들의 특징이 결합 되어, 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피조물이 다른 모양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나, 다른 존재 형태의 잠재성, 원초의 혼돈이나 무시무시한 자연의 힘을 상징한다.

이강욱_눈오는 밤_종이에 콩테, 파스텔, 아크릴채색, 먹_76×56.5cm_2017

인간의 상상계에 서식하는 괴물은 양면적이다. 그것은 인간의 상징적 우주의 분류 원리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신과 악마는 동일한 기원을 가진다. 보르헤스에 의하면 그리핀이 보통 악마를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리핀은 예수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서양의 신화에서 괴물을 이기는 것은 영웅이다. 그러나 괴물을 이기기 위해서는 영웅 또한 괴물이 되어야 한다.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에서 어떤 계율을 계속 위반하던 주인공이 무엇보다도 괴물 파괴자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상상 속의 괴물은 무의식처럼 의식에 의해 제압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그것이 용으로 대변되는 불길한 괴물의 목을 치는 기사의 신화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은 신화를 활용하는 현대의 대중문화에 빈번히 나타난다. 괴물은 처치되어야 한다는 목적성을 가지는 서사에서 그로테스크하고 기괴한 상상은 고무된다. ● 그러나 이강욱의 저 너머 바깥에 서식하고 있다고 상상되는 동물들에서 괴기스러운 면은 별로 없다. 그의 작품에서 상상 동물은 제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것, 자기 내부의 타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작품 속 동물들은 작가가 했을 법한 행동을 한다. 가령 빛이 번쩍번쩍 나는 듯한 작품 『달밤』에서 설표는 붉은 산자락 아래 쉬고 있다. 산꼭대기에 걸쳐진 달의 색이 아래로 쑥 빠져 내린 듯한 노란 선은 고양이과 동물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 쭉 뻗은 다리가 꼬리처럼 보여 신화 속 동물 같은 모습이다. 작품 『초록 물고기』에서 앞으로 헤엄쳐 오는 듯한 물고기의 머리는 꽃처럼 보이고, 그림자 또는 지나온 궤적처럼 보이는 뒤편의 하얀 선은 비행기 같은 모습이다. 자연을 대표하는 초록 바탕은 그 어떤 변신도 허용해줄 듯 넉넉하다.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주사위 놀이는 예술에서도 실행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실행에 돌연변이, 실험 등의 명칭을 부여한다. ● 이강욱의 작품에서 동식물의 거처인 산은 돌산, 즉 본질로만 나타난다. 금방이라도 용암을 뿜어 올릴 듯한 분화구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관객과 마주한 형상에 내재한 것이 초상이라면 꼭대기에 분화구가 있는 산은 얼굴 없는 초상으로, 자신의 상태를 표현한다. 가령 몸이 펄펄 끓는 상태, 폭발하기 직전 또는 직후의 모습 등으로. 작품 『북쪽 큰 산』은 분화구가 있는 산의 붉은 배경이 그 뜨거움을 전달해준다. 사방위가 표시되는 제목은 그곳이 매우 멀리 있는, 상상 속에 있는 지형일 수 있음을 알려준다. 별이나 산 등 자연적 지표가 아니라 GPS에 의존하는 현대의 관습은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하여, 북쪽, 동쪽...하는 표현조차도 이국적으로 다가온다. 서양인들의 동쪽 나라에 대한 상상은 오리엔탈리즘을 낳았다. 해질녘의 석양이 너무 아름다워서 천국은 서쪽에 있다고 상상했던 옛사람들이 있었다. 가까이는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 얼어붙은 땅을 탈주한 일가도 있었다. ● 작품 『세 개의 산을 넘어』는 근경/중경/원경의 자리에 있는 산이 그 위치 관계에 상관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 속담에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있는데, 다양한 파고를 넘어 도달할 수 있는 맨 마지막의 산의 배경은 휘황찬란하다. 작품 『푸른 밤』에서 푸른 달빛 아래의 푸른 산은 파도처럼도 보인다. 분화구가 보이는 다른 산들이 액체(용암)의 다음 단계라면, 고체는 다시 액체로 변할 수도 있으리라. 전시 작품 여기저기에서 발견되는 다이아몬드 형태는 광물계에서 가장 귀한 존재일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이 귀한 존재는 산 뿐 아니라 동물과 식물에게도 있다. 물론 광물에도 동물적인 면과 식물적인 면이 있다. 식물, 동물, 광물계가 복합적으로 등장하는 작품들은 마치 화분처럼 대우주를 반영하는 소우주처럼 관계적 사고를 보여준다. 작품 『큰 산을 넘어가는 새』에서 층층이 검은 선을 쌓아 만든 큰 산을 넘기 위해서는 날개 두 개만으로 부족하다는 듯 여러 개의 날개를 가진 새가 아슬아슬하게 떠있다.

이강욱_세개의 산을 넘어_종이에 과슈, 파스텔_103×64cm

작품 『흰 새』에서 중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아래로의 흐름에 역행하여 날아오르는 새 또한 많은 날개를 가진다. 반면 비행기를 닮은 『밤을 지나는 새』는 보다 안정적으로 수평선 위 별빛 아래에서 비행한다. 검은 바다, 검은 하늘로 가정된 바탕은 손으로 콘테를 문질러 만든 두툼한 질감의 장막이다. 이전에 주로 그려온 화분 식물 이외에 이번 전시에 새로이 등장하는 호랑이, 새, 물고기 등의 동물은 식물의 잠재적 움직임을 동물의 실제적 움직임으로 확장 시킨 것이다. 이번 전시의 부제 『산의 바깥, 바다 너머』는 식물보다 더 넓은 행동반경을 가진 존재를 등장시켜 '바깥'과 '너머'를 상상한다. 작년 전시 이후 몸도 아프고 이사도 하는 등의 신변 변화가 화분이라는 자족적 우주로부터 벗어나게 한 원인 중의 하나일 것이라 짐작해 본다. 형식상의 변화는 '바깥', '너머'라는 공간적 상상과 관련된 배경이 들어온 점, 그리고 그 배경을 채우는 붓질이 보인다는 점이다. 그것은 공간적 이동이라는 상상에 내재된 시간성을 조형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화면에 남아있는 붓의 궤적은 바로 시간성을 말하기 때문이다. ● 이전의 평면적 배경이 응축적이라면, 이번 전시의 작품에서 회화적 배경은 풀어져 있다. 이러한 풀어헤침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는 예측 불허이다. 작가가 진도 나가듯이 자신의 작품을 진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산의 바깥, 바다 너머』라는 주제어 또한 소극적인 표현이다. 다양한 색채 또한 다양한 시/공간을 암시한다. 단색조의 배경이 시간의 단면이라면, 붓질이 남아있는 복합적인 배경은 시간의 지속을 보여준다. 또한 색은 그에 걸맞은 대상들을 화면에 불러들인다. 작품은 자신 속의 타자적 존재가 변모하는 장이며 선택지는 무한하다. 특히 그가 현대미술의 전범들이 아니라, 주로 자연을 참조한다는 것, 또는 자연에 가까운 역사인 고고학, 또는 자연과 잘 어우러졌던 시대의 상상력이 결집 된 『산해경』같은 고전을 참조하는 대목이 그렇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적 원천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는다. 관객이 알아볼 수 있는 동식물, 광물의 형태 또한 최소한의 방향타만 설정된 것이라서, 작가만큼이나 관객도 그것들로 유희할 수 있다. ● 현대의 사상이 구축해 놓은 구조들을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는 철학자 질 들뢰즈는 재현이 아니라 생성을 강조한다.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에서 한때 현대 인류학, 언어학, 철학, 심리학 등을 두루 평정했던 구조주의에 와서 모든 세계가 훨씬 더 합리적인 것이 되었다고 보면서, 구조주의는 생성을 부정하거나 적어도 생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평가절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비판한다. 구조주의는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이기보다는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 사유를 고무한다. 지금 여기의 것들이 어떤 역사를 통해 이것이 되었는가 보다는 이것과 저것의 관계만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어떤 것으로 변모할 것인지에 대한 것도 생략한다. 그것은 지금 여기의 사실을 명석하게 분석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단편적인 사실을, 또는 그 사실만을 인정하기 보수적일 수 있다. 합리주의에는 자기 만족적인 보수주의의 색채가 없지 않다. 특히 기성의 지배 질서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사람일수록 현실은 합리적으로 간주된다.

이강욱_푸른밤_종이에 콩테, 파스텔, 먹, 과슈_112×76cm_2018

진정한 합리주의는 변화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방향을 설정해 놓은 변화는 진정한 변화가 아니다. 가령 역사의 목적을 설정하는 역사주의나 변증법적 사고를 도식화해서 이해하는 경향이 그렇다. '희생양'같은 인류의 원초적 신화를 연구했던 저자 르네 지라르도 같은 맥락에서 구조주의를 비판하는데, 그는 금기와 위반에 관련된 저서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구조주의 같은 현대의 도식적 사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예컨대 '쌍둥이, 질병, 온갖 형태의 전염이나 오염, 설명할 수 없는 의미 전도, 모든 형태의 증가와 감소, 이상 생성물과 변형체, 무시무시한 것, 환상적인 것과 같이, 많은 것을 의미하지만 충분한 뜻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의심스러운 의미들을 신중히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 나오는 어떤 항목으로도 분류되지 않는 애매한 존재들은 구조적 합리성을 반하는 예외들이다. 물론 '합리주의'는 그 또한 재 코드화시키려 하지만 말이다. ● 들뢰즈는 그러한 경향을 탈주의 재영토화라고 표현했다. 대중문화나 현대의 예술 또한 체계가 구획해 놓은 해방구에서만 자유롭다. 그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들은 그들의 주장만큼 파격적이지 않다. 단지 강도를 더한 자극만이 요구될 것이며, 그 모든 것은 소비의 항목이 된다. 모두들 경계를 넘고자 하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다. 재현이 온갖 종류의 생산과 관련된다면 진정한 예술을 생성이다. '너머'와 '바깥'을 지향하는 이강욱의 전시에서 생성은 미지의 것, 즉 '되기'를 말한다. 이때 자연은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 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작품에 대입하자면 식물 되기, 동물 되기 등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변치 않아 보이는 광물조차도 광물이 되어야 한다. 질 들뢰즈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억압받는)여성도 여성이 되어야 하며,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억압받는)흑인도 흑인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듯이 말이다. 자명한 출발점은 없다. 욕망을 따라 이동하는 과정에서 되기가 실행된다. 소유와 소유의 또 다른 형태인 소비가 직업이라는 기계적 반복을 요구할 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러한 시스템에서 벗어나 있는 작가는 오직 자신만을 대상으로 되기의 실험을 감행한다. ■ 이선영

이강욱_큰산을 넘어가는 새_종이에 콩테, 파스텔, 과슈, 먹_103×64.5cm_2018

산의 바깥, 바다 너머 ● 어떤 곳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한 두 개의 산과 몇 개의 물을 건너는 수고보다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믿음이 더 필요합니다. 평범한 것들이 기이해지고 온갖 것들을 마주하며 여기 이 자리에서 다른 세상을 보게 되지요. 산해경과 칼비노의 소설, 오래된 우화나 전설들의 이야기가 당신이 아닌 누군가의 구체적인 경험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나는 산책을 하며 많은 생각을 합니다. 제각기 다르게 피어나는 풀잎을 보거나 작은 돌멩이 사이 사금파리 같은 것들을 봅니다. 나무 끝에 매달린, 계절의 마지막 꽃잎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멀리 여러 개의 산을 넘어 두 줄기로 흐르는 강물과 연기를 뿜는 큰 산도 생각해 봅니다. 어떤 새들은 아주 멀리서 오고 어떤 바람은 아주 멀리까지 갑니다. 그러나 빛이 어디서 오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것들이 실제 하는지 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단지 보이는 것들을 그릴 뿐입니다. 복잡한 이야기지만 지나가는 바람이 어느 날 마침내 푸른 바다에 다다랐다는 것을 그림으로서 증명하고 싶어집니다. ■ 이강욱

Vol.20180605b | 이강욱展 / LEEKANGWOOK / 李康旭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