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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열展 / KWONOYEOL / 權五烈 / photography   2018_0605 ▶︎ 2018_0629 / 일요일 휴관

권오열_Perch-1708_디지털 C 프린트_115.2×76.8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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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열 블로그_blog.naver.com/photo510

초대일시 / 2018_0605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2:00pm~07:00pm / 일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플라스크 ARTSPACE PLASQUE 서울 성북구 정릉로6길 47 Tel. +82.(0)2.3216.5357 www.plasque.co.kr

무한의 단편 - 1. 단자적 세계, 또는 다중의 사회 ● 권오열의 작품들에는 무엇인가가 많이 모여 있다. 모여 있는 것이거나 모은 것들이다. 사진이라는 매체는 이러한 선택에 매우 적합해 보인다. 그가 처음 자의식을 가지고 사진 작업을 시작했을 때 영감을 받은 작품이 김환기의 「전면 점화」였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많으면서도 혼란스럽지 않은 것에 대한 작가의 선호가 감지된다. 많으면서도 혼란스럽지 않으려면 개별과 전체 간의 예정된 조화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예정조화설의 예로, 단자(monad)론적 세계가 있다. 라이프니츠가 원자론의 물질주의적 사고에 대항하기 위해 고안한 단자적 사고는 많이 조명되고 있지만, 오늘날의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다소간 형이상학적이다. 감시사회에 대한 비판 등, 사회적 의식이 언뜻언뜻 드러나는 권오열의 작품에서 하나와 여럿의 관계는 다중(多衆)에 대한 의식과 좀 더 가깝다. 다중은 대중처럼 전체적 집단이 아니라, 각각의 존재로서 독립적이지만 뿌리줄기와도 같은 네트워크를 통해서 상호작용한다. ● 민족이나 민중 같은 이전 시대의 집단적 주체가 아니라, 분자적 혁명을 촉구하는 사회이론가 안토니오 네그리에 따르면 다중은 지배의 중심이 흩어져 있는 탈근대사회에 걸맞은 주체이다. 특히 이름 모를 식물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인 권오열의 작품에서 현대적 민초(民草)인 다중의 이미지를 보게 된다. 그의 초창기 작품은 식물을 찍은 손톱만 한 이미지 수천 개를 한 화면에 모아 놓은 시리즈 작업이었다. 정사각형 프레임에 들어간 수많은 식물들은 다양한 계조의 녹색을 보여주었다. 자연이 짠 태피스트리 같은 이 시리즈에서, 한 장의 사진은 일종의 모듈이 되어 수없이 붙여지는 확장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답답함을 느껴 지속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한 장면으로도 많은 것을 담아내는 「낯선 숲」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굳이 모으지 않아도 모여 있는 대상들이었다. 거기에는 늘 있었지만 깨달음을 주는 자연적 존재들이 있었다.

권오열_Myth-1802_디지털 C 프린트_51.2×76.8cm_2018

작은 풀잎이나 나뭇잎들이 담긴 작품들은 명암대조가 강하지 않은 조건 속에서 고르게 시야에 드러난다. 태양은 지구에 있는 모든 존재의 조건이기도 하지만, 권오열의 작품에서는 간접적으로만 현시된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작품인 「Estranged Woods-1736」(2017)에서도 광활한 들판을 지배할 태양은 두툼한 구름 뒤로 숨어있다. 하나의 태양을 대신하여 화면을 빛내는 것은 수많은 해바라기들이다. 태양은 모든 중심 지향적 사고의 원천이 되었다. 이 우주에 하나의 태양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 선지자는 불온한 이단자가 되어 화형을 당했다. 그게 불과 몇 백 년 전의 일이다. 권오열의 사진들은 대부분 은은한 계조를 유지한 채 수직으로 내려다본 관점(俯瞰)을 가지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어느 하나도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라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렇게 이름 모를 식물의 잎들은 화면의 주인공이 되어 일으켜 세워진다. ● 주로 자연적 대상이 많지만, 최근에는 인간사회로 대상이 확장되었다. 그의 작품에는 자연에는 사회가, 사회에는 자연이 있다. 인간중심주의가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해온 이래, 소원해진 양자 간의 유비 관계가 복원되는 것이다. 인간사회를 자연에 빗대는 것은 희극도 비극도 아니다. 자연 또한 보이는 것만큼 평화롭지 않으며, 가혹해 보이는 인생에도 자연적 순리가 있기 때문이다. 길게 보면 인간사는 자연사에 속한다. 그러나 자연사에 내재된 시간성은 100년 남짓 사는 인간에겐 멀게만 느껴지며, 단기적인 이익만을 촉구하는 사회 또한 억압적이다. 하나는 막연한 초월을, 다른 하나는 제한된 현실에의 적응을 강요한다. 그러나 역사도 과학도 아닌 예술은 적절한 은유를 통해 너무 길지도 너무 짧지도 않은 시공간에 주목하게 한다. 권오열의 작품에서 인간사회든 자연이든 방식은 유사하다.

권오열_Membrane-1727_디지털 C 프린트_76.8×120cm_2017

어느 하나에 방점이 찍히지 않은 여럿은 그 아래에 뿌리줄기와도 같은 조직이 잠재해 있다. 여럿을 가득 담은 정사각형 프레임의 작품들은 전체의 임의적 일부를 뚝 떼어다 놓은 것 같다. 그것은 무한의 단편이다. 엽맥이 드러나는 작품이나 갈라지는 대지의 균열을 포착한 작품들은 질서 안에 또 다른 질서가 발견된다. 프랙털 기하학이 보여주는 것처럼, 단편에 이미 전체가 있다. 개별에 없는 것은 전체에도 없다. 그것은 내가 곧 세계라는 유아론에 매몰되기보다는 소우주와 대우주간의 새로운 연결망을 구축하게 한다. 20년 가까이 다뤄서 거의 손의 일부가 된 카메라는 여러 겹의 층이 살아있는 자연을 포착한다. 거기에는 자연 고유의 두툼한 실재감이 있다. 그의 작품은 표면에 주목하면서도 실재감 또한 간과하지 않는다. 오늘날 회화는 단순히 자연의 거울을 넘어서 이러한 실재감을 화면에서 구현하려 한다. 회화처럼 겹쳐 바를 수 없는 사진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누적된 시공간의 단편을 찾아내 정밀하게 재현해야 한다. ● 권오열의 작품이 추상회화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그만의 선택에 따른 결과이다. 소재의 많음이 압박감을 주지 않는 이유는 그것들이 자연적 대상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빽빽하고 촘촘하고 풍성하다. 그는 자연이 아닌 인간사회 풍경에서도 작은 것들을 많이 담는다. 언뜻 군중이나 빽빽한 빌딩 숲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는 의외의 선택을 했다. 문패들이다. 작가는 문패라는 상징적 기호를 선택해서 촘촘히 배열한다. 그의 작품에서 문패들은 각각의 사람들을 대신하여 거기에 서 있다. 부재 하는 대상을 대변하는 기호는 명명법의 자의적 속성을 드러낸다. 그는 문패를 소재로 시리즈 작업을 시작하면서, 사전조사를 했는데, 백여 년 전 집집마다 문패를 달도록 하였을 때 전 국민 중에서 성이 없는 사람들이 56%가 넘었다는 통계이다. 10% 남짓한 양반을 제외하곤 무명씨나 다름없는 존재들이었고, 성이 부과되는 방식 또한 우연적인 요소가 많았다.

권오열_Estranged Woods-1736_디지털 C 프린트_92.8×177.6cm_2017

2. 부분 속에 있는 전체 ● 질서의 바탕에는 무질서가 있다. 무질서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다. 우정국 같은 제도를 통해 본 성씨의 역사는 근대적 지배를 위한 국가적 기획과 관련된다. 미셸 푸코는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근대적 신화를 벗겨내고, 개별화 자체를 근대적 지배의 기획이었음을 밝혀낸 바 있다. 근대적 지배가 시작되기에 앞서, 봉건적 지배로부터의 한시적인 개인의 '해방'이 필요 했던 것이다. 권오열의 작품은 이제 양반이었든 상놈이었든 표시가 나지 않는 사회를 보여준다. 물론 그것은 겉으로 만의 평등이었지만 말이다. 자연과학도 마찬가지다. 이름 없는 생명에 긴 학명이 만들어져 붙여지는 이유는 생산에 편입시키기 위한 사전 코드화 작업이다. 오늘날 촘촘한 소비 망을 위해 활용되는 빅데이터들은 어떠한가. 명명의 기획은 명명의 대상이 사라질 때까지, 형식화되곤 한다. 최종적으로 이름만 남는 것이 모든 코드화의 기획일 것이다. ● 예술은 이러한 코드화에 대항하여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에 주목한다. '실재계는 명명할 수 없는 것'(자크 라캉)이다. 가령 권오열의 「Estranged Woods」 시리즈에서 작가는 무엇을 찍든 거기에서 잎만을 보려 한다. 「In the Name of」 시리즈는 바늘 하나 꼽을 수 없을 만큼 밀도가 강하다. 정주보다는 유목이 대세가 된 시대에 문패는 이제 희귀한 대상이 되었다. 문패라는 것이 점차 사라지는 대상이긴 해도 현대의 인구밀도를 생각한다면 많음의 표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문패들은 군중이나 고층 빌딩들이 가득한 풍경과는 다른 느낌이다. 전체 화면의 틀이 문패의 비율이며 그 안에 문패들이 가득 들어있는 그의 작품에서 하나하나는 전체 못지않은 존재감을 가진다. 잎 하나하나에 균등하게 맞춰진 관심이 문패 하나하나에도 이어진다. 도드라지는 것도 없고 가려진 것도 없다. 어느 하나도 전체를 위해 희생되지 않는다.

권오열_Suspicious tongue-1605_디지털 C 프린트_76.8×51.2cm_2016

마치 렘브란트가 당대의 상승하는 부르주아지의 집단 초상화를 그렸을 때 누구 하나도 명암법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배려한 것과 유사하다. 눈 밝은 관객이라면 나무, 돌, 옥, 브론즈 등으로 만들어진 문패에 새겨진 이름 하나하나를 읽을 수도 있다. 호주제 폐지나 개인정보를 보호해야 한다는 또 다른 시대의 흐름에 의해 이제는 고풍스러워 보이는 문패들을 사진으로 수집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사진기를 장난감처럼 다루는 시대에, 단순히 보이는 것보다 보이게 해야 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이다. 그래도 그가 작업 초창기에 잎을 선택했듯이, 피사체의 선택에 큰 부담이 없는 것을 선호하는 것은 여전하다. 작품 하나당 800여 개의 문패들이 있다. 모두 한 번씩만 찍은 것이다. 문패에 새겨진 이름들은 이름 모를 잎들처럼 그렇게 빼곡히 서 있다. 더 많이 찾아 모아서 12폭 병풍처럼 만들어 보는 것이 1차 목표라 한다. ● 스쿠터를 타고 다니며 이 동네 저 동네에서 찍어 모은 문패들은 큰집, 작은 집 할 것 없이 저마다의 존재 이유를 가진 채 하나의 동등한 기호로 배치된다. 배치라는 인위적 선택에는 평등이 도래해야 할 이상이지 지금의 현실은 아님을 알려준다. 자연이든 인간사회의 사물이든 균등하게 관심을 주려는 그의 작품에서 치우침이 있다면 곧장 우울한 느낌이 든다. 물론 풍자적인 경쾌함도 있다. 가령 도심의 시멘트 틈을 뚫고서 간신히 꽃피운 식물, 그루터기에 떨어진 낙엽 하나, 벌레 먹은 나뭇잎, 엽록소가 다 소실된 나뭇잎, 가지치기 된 가로수 등이 그렇다. 수평 구도가 아니라 수직 구도일 때 압박감을 준다. 가령 쓰러질 듯 위태롭게 한 줄로 올린 의자 등이 그렇다. 그의 작품에서 외따로 떨어진 것들은 충만한 세계로부터의 이탈처럼 보인다.

권오열_Nevertheless-1633_디지털 C 프린트_115.2×76.8cm_2016

그러한 소재들에 붙인 제목 「Nevertheless_일련번호」(2016-17)들은 그 와중에도 긍정적인 부분을 주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은 계속될 것이니까. 사진은 세계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종합하는 데 큰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사진이 발명된 근대 이전 시대, 가령 신학 같은 기존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세계를 날 것 그대로 보고자 하는 욕망이 눈앞에 보이는 것에 충실한 사실주의를 낳았다면, 사진은 그러한 재현주의 회화의 자동화인 셈이었다. 그리고 이미지의 역사로 본다면, 얼마 전에야 보편화된 디지털 언어는 이미지의 수집과 복제에 가속도를 붙였다. 이러한 미디어 환경은 다시 인간의 시각에 피드백된다. 몸에 미디어를 직접 접속하는 기술도 시간의 문제일 따름이다. 미디어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다. 대상과 눈 사이에 막이 있음을 의식하는 「Membrane」 시리즈가 암시하듯, 순결한 눈은 없다. ● 인간은 선재하는 질서인 상징적 우주에서 태어날 뿐, 그 우주를 선택할 수는 없다. 실존주의자들은 선택하지 않은 세계에 던져진 존재의 운명적 우울에 대해 수없이 말했다. 물론 이 상징적 우주는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차이와 반복의 과정에 의해 미세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예술가들의 파격적인 어법 또한 이러한 변화에 일조한다. 예술가의 이러한 역할을 너무 강조하여, '언어를 변화시킴으로써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이상주의가 번성하기도 했다. 현실정치에 좌절하곤 하는 예술가들은 이러한 생각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작품 「Membrane-1727」(2017)은 창밖의 숲이 고르지 않은 유리창 때문에 어느 부분은 로딩되다만 이미지처럼 길게 왜곡된 모습이다. 그것은 작가가 말하듯이, 주체와 대상 사이에 있는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의 속성이다. 매체는 투명한 도구를 자처하지만 그 자체도 불투명한 면이 있다. 다른 시각 예술에 비해 사진의 투명성에 대한 대중의 신뢰도는 아직 높다.

권오열_Enforcement-1726_디지털 C 프린트_120×76.8cm_2017

3. 상징적 우주에서의 길항작용 ● 그러나 현대예술은 매체의 불투명성을 더욱 의식한다. 그래서 대중으로부터는 좀 더 멀어진다. 끝없는 욕망에 휩싸여 있는 인간의 눈은 더욱 불투명하다. 자크 라캉에 의해 유명해진 욕망이라는 키워드는 무엇보다도 내가 보는 나와 타자가 보는 나와의 차이를 강조한다. 고층 빌딩의 유리창에 비친 또 다른 고층 아파트를 찍은 작품 「Myth_1802」(2018)는 대상 자체에 내재한 일렁이는 신기루 같은 모습이다. 그것은 물신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허망한 욕망에 대해 말한다. 신화는 인간의 욕망과 무의식을 반영한다. 사실은 이성도 마찬가지이다. 타자에 대해 깊이 사유했던 철학자 레비나스는 '유아론은 착란도 궤변도 아니다. 그것이 바로 이성의 구조이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인간은 계몽을 통해 신화를 극복한 듯했지만, 신화는 계몽의 역설에 의해 되돌아온다. 탈(post) 근대의 철학자들은 계몽 자체가 신화라고 비판한다. ● 근대시대에 계몽은 주로 문자를 통해 살포되었지만, 이제는 스펙터클의 시대이다. 과거에 사람이 자연에 둘러싸여 살았듯이, 총체화된 미디어 환경이 주체에 선행한다. 사진은 아마도 세계를 총체화 하려는 기획에 가장 어울리는 매체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러한 기획이 사진을 발명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진에 내재했던 영상'(발터 벤야민)이 그 뒤를 이었다. 오늘날 구글을 비롯한 정보 관련 기업들은 이전에는 무명이었던 세계의 면면을 샅샅이 기록하고 그 기록에 누군가의 소유권을 새겨 넣을 것이다. 총체적 세계관에 대한 이미지는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예를 든 파놉티콘이 대표적일 것이다. 단속 중 카메라의 낡은 이미지를 포착한 작품 「Enforcement-1726」(2017)은 보고 보이는 관계를 통해 권력이 자동적으로 실행하게끔 된 감시/권력 편재의 사회를 말한다. 그가 포착한 감시망(의 기표)은 들판의 허수아비처럼 어수룩하다. ● 아마도 그 정도로 표지판이 허술하다면 실제로 카메라는 작동되고 있지 않을 것이다, 파놉티콘처럼 권력자가 안 보면서도 보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 동시에 그의 사진에 포착된 색 바랜 표지판이나 덧붙여진 시트지는 감시사회가 펼쳐진 것이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암시한다. 이제는 감시를 넘어서 조절사회가 왔다고 말해진다. 즉 감시는 내면화되어 감시받는 자 스스로 조절한다는 것이다. 권오열의 작품 속 낡은 경고표지는 실제로 감시가 작동하는가에 대한 의혹이 담겨있다. 그의 작품에 의하면 감시란 몰래 이루어져야 하는데 드러내놓고 한다. 그것은 감시하는데 드는 노력과 비용을 절감해야 한다는 권력의 요청을 반영한다. 조절사회는 감시가 편재하다 못해 내재화된 상태를 말한다. 감시사회가 아닌 조절사회에서는 카메라가 없어도 카메라가 있는 듯이 행동하게 한다. 위로부터의 권력이 총체성을 원한다면 아래로부터의 권력은 전체를 원한다.

권오열_In the Name of-1624_디지털 C 프린트_177.6×86.4cm_2016

안토니오 네그리는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쓴 책 「자유의 새로운 공간」에서 사회전체를 뒤덮는 권력에 대해 숙고한다. 그러면서 '타자를 지배하는 사회적 힘(potestas)'과'potentia', 즉 'potestas의 타자로서 그와 적대 관계에 놓이는 힘'을 구별한다. 「자유의 새로운 공간」에 의하면 전자는 중앙집권화하고 매개하고 초월적인 명령의 힘임에 비해, 후자는 지역적이고 직접적이며 활동적인 구성적 힘이다. 권오열은 총체가 아니라, 전체를 원한다. 전체는 단지 집합되어 있는 것이지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질서에 근간하는 상징적 위계가 없다. 총체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인간의 형상이 있다. 이러한 비유에 의하면 왕은 머리이고 손발은 국민이다. 그것은 계층적 사고의 기반이 된다. 상호 간에 연결은 되어 있지만, 수직적이지 않고 수평적인 연대가 필요하다. 권오열의 작품에 분명한 것은 수평적 존재 방식이다. ● 들뢰즈의 구별법에 의하면, '수목의 체계가 아니라 근경의 체계'이다. 고만고만한 것들이 옹기종기 모인 존재의 합창 같은 그의 작품은 사진의 메커니즘에 따라 잘 찍혀있고 질서 있게 배열되곤 하지만, 단지 덧붙여질 뿐이지 선재하는 관념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구성하려 한다면 그것은 해체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해체는 부서진다는 부정적 어감 대신에 열려 있다는 긍정적 의미로 전화된다. 해체는 억압적 권력을 되돌아오게 할 혼돈상태인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민주적 사고를 말한다. 지평선이 보이는 너른 평야에 여물용 건초더미들을 미니멀 아트처럼 규칙적인 간격으로 놓고 찍은 작품 「Estranged Woods-1731」(2017)은 각을 이룬 풀조차도 최초의 풀처럼 방점 없이 나열되어 있다. 그마저도 영원히 고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이다. 시공의 절편을 포획하는 사진은 일시적인 것에 어울리는 매체이다. ● 현대예술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과정적인 것을 중시했을 때, 작가가 체험했을 순간의 경험을 공유하는데 사진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작품 「Estranged Woods-1736」(2017)은 지금 여기보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듯한 이국적인 장소로, 전경의 해바라기 밭이 중경의 숲 및 후경의 하늘과 조화를 이룬다. 거기에는 뚜렷이 구별되는 세 개의 층이 있지만, 각각은 평행하게 존재한다. 작가는 '오후 4-5시의 다크 블루의 하늘은 먹구름이 물을 많이 머금은 상태'라고 상황을 전한다. 짙푸른 하늘은 마치 바다처럼도 보인다. 그 아래의 수많은 점 하나하나가 다 한 송이 꽃이다. 또 그 꽃 안에는 여물고 있었을 수많은 씨앗들이 있을 터이다. 이 전시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이 작품은 밤과 낮이 공존하는 듯한 초현실적 풍경을 보여주며, 하늘 아래의 모든 것들이 가지는 균등한 권리에 대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 이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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