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를 찾아서

윤수아展 / YOONSUA / 尹粹娥 / painting   2018_0615 ▶︎ 2018_0720 / 일요일 휴관

윤수아_너의 머리카락도 아름답다#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8cm_22017

초대일시 / 2018_0615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대안공간 아트포럼리 ALTERNATIVE SPACE ARTFORUM RHEE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조마루로105번길 8-73(상동 567-9번지) Tel. +82.(0)32.666.5858 artforum.co.kr

여기에 있다, 아름답게 - 들어가며 ●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형태를 지닌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쉽사리 눈길이 오래 머무르지 않는 수풀 같은 것들이 그렇다. 자라온 이력을 살필 수 없이 구불구불하고, 종류를 알 수 없는 다른 유약한 것들과 함께 뒤엉켜 있다. 어떤 변모를 앞둔 채 시들어 있는 것 같다가도, 영원히 메마른 모습으로 있다가 바스락 부서져버릴 것 같다. 이 출처 없는 수풀은 어느 길가 언덕에 있는 것이든, 누군가의 화단이든, 도심의 숲 길이든 모두 어느 크기 이상의 굵기를 가지지 못한다. 모든 잎과 줄기가 각각 다르게 생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노릇도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불명확한 장면이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윤수아_너의 머리카락도 아름답다#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17

보라와 연두: 내재된 은유 ● 작가는 어느 겨울 파주에 갔다가 버려진 배추밭을 보았다고 했다. 그 해의 배춧값은 수확하느니 내버려 두는게 나을 정도였다. 애물단지가 된 배추 위에 눈이 드문드문 쌓여 있었다. 그 장면이 불현듯 아름다웠다.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산책길에 마주쳤던 뿌리가 뽑혀 기울어진 나무와 그 나무를 감싼 덤불도 '아름답다'고 일컬으며 그려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누운 풀들, 갈색 낯빛으로 고개를 숙인 수련도 아름다워서 그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윤수아가 그동안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들은 적지 않았다. 처음에는 스스로에 대해 천착하는 것들을 그렸다. 그러다 자꾸만 과거의 시간으로 수렴되는 자신에게 거리를 두고 싶어, 일면식도 없지만 같은 해를 공유했던 익명의 사람들이나 그해의 사회적 사건들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아름다워서 그렸던 것은 아니었다. 아름다움이란 전형적인 긍정과 통용되는 밝음의 형태를 띠는 무언가가 아니다. 아름다움의 감각은 때때로 유한하고 유약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윤수아_너의 머리카락도 아름답다#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72.7cm_2017

작가는 오래전부터 아름다움에 꽤나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한국화를 전공했지만 사용하지 않는다. 발색 때문이다. 한국화 재료로 원하는 정도의 발색을 내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주 5일 상근하는 일과 병행해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아크릴도 성에 차지 않았다. 유화라도 열댓 번은 넘게 칠해야 원하는 색이 나왔다. 어떤 것들은 보라색으로 죽어가고, 그 사이에서도 연두색으로 생을 지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이 색을 그려내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따르면, "은유란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윤수아의 은유는 죽은 풍경을 전용해 모종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삶의 진실 같은 것에 근접해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발색에 가깝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보라색 현실에서 존재라는 미약한 색을 찾아내는 과정 그 자체가 윤수아의 은유다. 그러니까 윤수아에게 있어 은유는 표현된 것이 아니라 내재된 것이다. 그의 눈에 비친 광경의 파편과, 그가 천착하는 발색력을 가진 색을 보는 것 그 자체로 삶을 인식하는 새로운 화각이 된다.

윤수아_시간에 기대어 #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30.3×160.2cm_2017

시간에 기대어: 잦은 죽음 ● 한편 윤수아에게 있어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우리는 쉽게 모두가 죽음이라는 일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작가의 현재에는 그런 식의 선형성이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현재는 이따금 일시정지를 일삼는다. 정지된 시간은 방향의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자꾸만 '그때'로 기운다. 그래서 윤수아의 지금은 때때로 '그때'이곤 한다. '그때'는 앞서 언급한 내재된 은유의 과정에 따라 작가의 프레임 속에 기거한다. 윤수아의 작품 속 얇은 고목과, 그 고목을 가로지르는 쓰러진 나무, 덩굴이 감겨도 나뭇가지가 되지는 못하는 쇠창살, 형태는 그대로인 듯 보이지만 탄성 하나 없이 바람이 빠져버렸을 것 같은 버려진 노란 공은 모두 잦은 죽음들의 파편이었다. 누운 풀에서, 버려진 배추에서, 그물에 뒤엉킨 덤불에서 '그때'의 장면과 직접적으로 닮은 것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때가 맞는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포착되어 캔버스에 갇힌 순간일수록 오히려 그 시간성이 누락된다. 때문에 종종 공간마저 잃는다. 내가 있는 이 장소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심지어는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있는 것인지 조차 의심스럽다. 생각을 멈춰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해진다.

윤수아_꽃보다 배추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91cm_2017

윤수아의 작품 속에서 정물이 된 마른 수풀과 뿌리 뽑힌 나무, 서리 맞은 채 내버려진 배추는 일종의 '메멘토 모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16-17세기의 '바니타스'와 같은 계몽적이거나 인문적 성찰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의 덧없음을 이야기하는 감상적인 죽음의 겉모습도 아니다. 윤수아는 그림 속 정물이 '죽어 있었지만'이라며 부러 과거형으로 말한 적이 있다. 과거에 작가가 발견했을 때와 달리 캔버스 위에서 그 죽음을 유예시켰다는 것이다. 죽음의 유예라고 해서 그것이 '살아있음'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잦은 죽음으로 가득한 것이 바로 삶이 아닌가. 다시 말해 잦은 죽음을 인지하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대면하는 일이다.

윤수아_보라와 연두_캔버스에 유채_가변크기_2017
윤수아_untitled_종이에 유채_116×91cm_2018

나가며 ● 이번 그의 첫 개인전에서 볼 수 있는 그림 속 장소는 작가가 산책길에 마주한 그의 넓지 않은 생활 반경 안에서 포착된 장면들을 콜라주 한 것이다. 모두 다 있는 장소들이지만 작가의 프레임 속에 재배치되면서 없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오직 그림 안에만 있는 공간과 시간, 윤수아가 스스로의 존재를 그림 안에서 찾듯이 말이다. ■ 박수지

Vol.20180615h | 윤수아展 / YOONSUA / 尹粹娥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