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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경展 / YOUHYEONKYEONG / 劉賢經 / painting   2018_0615 ▶︎ 2018_0705 / 월요일 휴관

유현경_엄마 친구들 #2_캔버스에 유채_259×194.5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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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0615_금요일_06: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몸미술관 SPACEMOM MUSEUM OF ART 충북 청주시 흥덕구 풍년로 162 제1전시장 충북 청주시 흥덕구 서부로1205번길 183 제2,3전시장 Tel. +82.(0)43.236.6622 www.spacemom.org

그림은 이제 내가 아닌 너를 향해 있고 나는 너의 일을 걱정하고 논의해 본다. ■ 유현경

유현경_어서 와_캔버스에 유채_259×194.5cm_2018

너는 무섭고 싫고 위험하고 나는 약하다, 나는 너를 건너야 한다 ●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유아론이나 이기심, 고립/고독―분리와 단절을 상정한―이나 자기애로서의 나르시시즘 같은 것은 결국 이미 항상 작동 중인 사회적 삶을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하거나 거부하려는 심적 회로를 방증한다. 관계는 나의 삶과 생존의 전제조건이고, 그것의 무자비한 힘/권력에 대한 공포는 계속 살아(내)야 하는 약하고 예민한 사람의 고통의 일부분이다. 사회적 관계를 잘 유지하는(것으로 가정된) 사람은 물론 이미 항상 자신의 욕망과 그들의 의미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 사회적 관계에 공포심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생존이나 물리적 현존을 위기상태로, 비상사태로 감각한다. 타인은 나를 죽일 듯 밀려드는 파도이고, 타자의 선하고/악한 개입이나 침입은 심지어 나를 내 안에서도 구석으로 몰아댄다. 나는 너와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나 진배없고, 나는 너를 혐오하고 두려워하면서도 너를 사랑하는/미운 사람으로 규정함으로써 나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네가 없다면 나일 수 없기에, 너는 곧 나이기에, 내가 너를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결국 내가 나를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타자는 지옥"이고 이는 타자를 지배하는 것도 타자에게 복종하는 것도, 즉 나의 주체화나 나의 대상화가 모두 타자를 필요로 하는 나의 필사적인 생존의 양태라는 점에서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임을 함축한다. 자기애는 자기혐오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고 나의 생존의 어려움은 사회적 삶에의 공포와 연동한다. 이런 사실을 의식하면서 계속 관계를 이어가고 이해받으며 사는 것과 자신의 공포에 '미적' 형식을 수여함으로써 공포를 둔화시키고 달래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억압하고 외면하는 것이고 후자는 관계가 아니라 관계의 '구조'를 살아내는 것이기에, 즉 자신의 생존, 실존을 하나의 가설로 전치시키는 것이기에 그렇다. 전자는 공모이고 후자는 대결이다. 전자는 현실을 반복하는 것이고 후자는 현실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자신의 두려움과 공포를 자기 연민의 알리바이로 동원하는 대신에 이 세계의 구조와의 싸움에 필요한 에너지로 (재)활용하는 것이다. 관계에 진정으로 소속되는 대신에 허구적으로 관계를 갖고 노는 것이고, 관계를 무대에 올림으로써 일시적으로 연출가의 '주권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허구적 주권성은 권력을 획득함으로써 관계를 장악하는 세속의 방식과는 무관하며, 그러나 당연히 주권성이기에 예민하고 허약한 자아의 일시적 승리라고 불러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유현경_어느 푸른 날_캔버스에 유채_194×130cm_2018

인물화는 고용된 화가와 자신의 정체성―인성(personality)이나 고결함(integrity) 혹은 신분(status)으로서의―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고픈 욕망하는 주체의 관습으로서, 혹은 남성 화가와 여성 모델 사이에서 화가가 자신의 성적 욕망을 '베일'을 씌운 채 투사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해왔다. 결국 종속된 화가와 '주체'로서의 모델이건, 주체로서의 화가와 대상으로서의 모델이건, 기성의 인물화 관습에서는 한 장면에 동석한 둘, 두 입장의 '관계'가 서열화되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보다 민주주의적인 화가들, 자신의 대상들(과/에)의 '감정'을 배려하면서 인물을 단지 수동적이거나 능동적인 '개념'에 부착하지 않으려는 동시대의 화가들도 존재한다. 인물화가 모델의 내면으로의 침잠이건 화폭의 정동(affect)으로의 확산이건, 주체와 모델의 관계는 일방향적이거나 관계론적이었다. 일방향적이라는 점에서 화가는 위계서열의 위나 아래에, 관계론적이라는 점에서 화가는 따듯하고 예민한 사람에 위치했다. 인물화는 모델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화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통해 규범적으로, 관습적으로 의미화 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물화가 유현경이 자신의 모델과 '관계'를 맺는 새로운 방식이 첨가된다. 유현경은 자신의 모델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약하고 예민한 여성 청년 화가였기 때문이다. 유현경은 오랫동안 자신의 모델을 앞에 두고 자기 자신과 결투를 해왔다.

유현경_제가 안고 갈게요_캔버스에 유채_259×181.5cm_2018

캔버스를 사이에 두고 화가가 자신이 인간에 대해 갖고 있는 두려움이나 공포 심지어 혐오를 정당화하고자, 그럼으로써 그로부터 나올 수 있는 '출구'를 찾으려는 필사적인 결투가 시작된다. 여기서 출구는 계속 살기 위해 상상해 내야하는 도피나 해방이나 화해의 은유이다. 더 이상 인간에 대한 희망이나 사랑을 가질 수 없다고 고백하는 문장을 쓰고 죽는 예술가들도 그 출구를 찾으려는 데 전 생애를 걸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인간에 대한 공포심이나 두려움, 따라서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를 견딜 수 없어하면서 계속 사는 사람들은 여기서 제외하자. 아이러니는 인간의 비극의 무의미함을 받아들인 뒤 그 비극에 희극성을 덧칠하는 자의식적 예술가들의 생존'법'이라는 것도.)

유현경_곁에 있는 것 같아요 #2_캔버스에 유채_100×77cm_2018

대학 졸업반이었던 2008년 유현경이 무모한 프로젝트인바 <일반인 남성 모델> 연작을 감행한 것은 그녀의 말대로라면 "(남성)화가와 (여성) 모델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때문이었다. 인물화 전공의 여성 화가라는 '정체성'은 이미 그 안에 역설, 모순을 내포한다. 젠더 표식이 없는 화가와 언제나 여성의 이미지로 채워진 모델 사이에 전제된 서열을 의식하는 예민한 여성 화가가 기성의 인물화 관습을 거부하지도 혐오하지도 않은 상태로, 즉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문제삼는 방식은 지금껏 여성-모델-대상의 자리에 놓였던 사회·문화적 관습의 비가시적 전제를 '인물화' 안에서 가시화하는 것이었다. 대상화된 여성 모델의 자리를 외면하는 대신에 유현경은 그 자리를 자신의 '주체'의 자리와 뒤섞는 상당히 지적인 전략을 선택한다. 경제력이 있는 중년의 남성들이 돈이 필요한 젊은 여성의 몸을 착취할 때 그렇듯이 유현경은 "여행 경비 일체"를 자신이 감당하면서 중년 남성 모델과 여행을 떠났고 비좁은 여관방에서 그들의 몸을 대상으로 그렸다. 이렇듯 자신을 추문과 호기심과 위험에 노출하는 시도는 미술사적 전통을 사회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일환으로 재고하는 것이지만 유현경의 전복은 자신의 '정치적' 의제를 회화적 구조 안에서 가시화했다는 점에서 급진적이고 특이하다. 어린 여성 화가가 중년의 남성 모델을 '데리고' 여행을 떠나고 그들의 호기심을 거스르며 재현적 위계질서의 권력을 휘두르는 장면은 그러나 그녀가 자신을 일종의 사회적 구조의 '폭력' 안으로 밀어 넣은 채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놀랍고 아프고 윤리적이었다.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데 자신의 몸을 볼모로 활용하는 이 작고 가녀린 여성의 '용기'는 혐오스러운 구조의 반복을 지지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생존의 시도로 해석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유현경은 대상의 자리와 주체의 자리가 겹치는 지점에서 인물화 전통에 개입한다. 여성-청년-아이-화가의 방식이다. 무모하고 유약하고 담대하고 그러면서 그리길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같은 해 여름 한 달 간 100명의 모델을 하루에 5~6명씩 상대하면서 기계처럼, 자멸의 태세로 인물화를 그렸을 때, 물리적으로건 심리적으로건 고갈의 상태로 자신을 내몰기 위해 낯선 사람들 앞에 자신을 노출했을 때, 그런 무모한 고행을 거치며 유현경이 '얻은' 것은 그녀의 말대로라면 "자신감"이었다. 자신이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안 하는 쪽으로 자기­유지에 골몰하는 현실원칙(reality principle)에의 충실한 신민이 되길 거부한 유현경은 자신을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쪽으로 밀어붙이며 자기죽음을 실연하면서(enact) 결국 죽음충동(thanatos)에 자신을 내맡기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두려운 상황을 더 적극적으로 위험하게 밀어붙이는 수동적 능동성은 자아의 죽음을 감수하는 욕망의 주체의 상태를 말한다. 자신감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할 때 타인이 수여하는 사회적 이미지이지만, 유현경은 자신이 잘 해낼 수 없는 것을 마침내 해냄으로써 아무도 모르게 자신감을 쟁취했다.

유현경_소라_캔버스에 유채_227×181.5cm_2018

유현경의 언어문법은 "편한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고 "좋아하는" 사람은 "어려워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특이체질idiosyncratic에 가깝다. 그녀의 자신감의 내포도 그렇다. 사회성이 결여된 예술가들은 사회의 어휘, 문법, 이해방식을 거스르는 자신의 개인 방언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2012년 개인전 제목이었던 "거짓말을 하고 있어"는 진실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의심을 통해서만 겨우 나타난다는 오래된 잠언을 표식했다. 유현경은 진실에 도착하려는, 초자아의 인정을 받으려는, 그러나 무의식의 리비도를 경유해서 그곳에 도착해야하는 화가이다.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헤매이는 사람이 가장 윤리적인 존재라고 말해도 된다면, 약하고 여린 사람 유현경이 자기 몸과 바깥의 타자의 대결/대치를 통해 불러일으키는 장면은 그녀가 스스로 구성한 진실에의 여정의 일환일 것이다. 유현경은 <작가의 노트>를 빌려 이번 전시를 기존 전시와는 전혀 다른 전시, 인물화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뀐 전시로 설명해낸다. 관념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움직이는 유현경이 그렇게 말한다면, 이것은 몸으로 만들어낸 변화라는 점에서, 결국 유현경이 앞으로도 계속 일으킬 변화의 일부분으로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계속 생성(becoming) 중이다.

유현경_윤지_캔버스에 유채_227×181.5cm_2018

이번 전시는 유현경의 말대로 "일회성, 혹은 단기간의 모델 작업이 아닌 최근 1년간 모델과의 장기적 만남"을 기록한 작품들이다. 유현경은 자신의 변화와 연관해서 기존의 자신이 그려온 인물화를 "추상" 혹은 "표현"이었다고, 그들이 "누구"인지보다는 자신이 그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특정한 태도를 각기 다른 모델에 일관되게 투영하는" 것이 관건이었다고 설명한다. 유현경이 자신의 전작(前作)을 자신의 나르시시즘의 일환으로 설명하는 것은 사후적이기에 왜곡이나 오인을 포함한다. 자신을 위험/바깥에 노출시키고 타자의 물리적 현존을 타자의 재현성의 최소화를 위한 막, 심지어 자신의 회화의 보호막으로 활용하는 괴이함은 여전히 분석을 필요로 하는 수수께끼적 정동이다. 어쨌든 유현경은 이제 자신의 모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그녀들이 누구인지에 관심을 갖고 그래서 그녀의 인물화는 좀 더 사실적이고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재현'에 걸쳐있다. 그녀가 이제 30대라는 것, 더 이상 20대 청년이 아니라는 것, 사회-제도를 무시하거나 도피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는 것도 이런 변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유현경_적막_캔버스에 유채_190×300cm_2018

이번 전시의 모델들은 욕망하는 이들인데 특히 유현경'을 욕망하는' 이들이라는 게 특이점이다. 그/그녀들은 화가 유현경을 선망하거나 닮거나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이다. 필자가 유현경의 작업실에서 특히 관심을 갖고 주목한 것은 모델 연수, 혹은 20대 여성 연수와 유현경의 관계였다. 유현경은 그녀를 1년간 만나 총 6점의 그림을 그렸다. 5점은 회화이고 한 점은 드로잉이다. 그리고 유현경은 대중에게 노출할 것인가를 놓고 가장 고민한 드로잉을 이번 전시에 내놓았다. 연수는 도발적이고 식별불가능하고 불안정하고 정동에 자신을 내맡긴 그런 20대 여성이었다고, 나는 작가의 말과 작품을 근거로 이해했다. 연수는 자신을 대상화된 누드의 관습 안에 밀어 넣었고, 성적 대상화를 연기하면서 즐기는 이중의 스탠스를 유지했다. 욕망하는, 과 욕망된, 은 사실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유현경은 연수의 욕망의 기시감과 생경함에 불편해했던 것 같고, 까다로운 대상인 연수와 화가 사이에는 늘 주종 관계의 역전과 재배치가 일어났다. 유현경은 "저는 그녀가 보여주는 메시지를 그리고 싶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데, 연수는 자신이 취한 별반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포즈를 다른 역할, 의도, 이미지로 설명할 수 있는 여성이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대치했던 둘 사이에 타협이나 화해는 없었던 것 같은데, 이것은 유현경이 그만큼 약했다거나 그만큼 윤리적이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생각한다. 유현경은 화가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이렇게 영향받으면서도 영향받지 않으려는, 침해하면서도 침해하지 않으려는 자기의심과 상황에 단단히 부착시켰다. 연수가 스스로 선택한 포즈와 그 포즈를 있는 그대로 재현한 유현경과 "표현"의 궤도에서 한참이나 밀려난 이 사실적인 드로잉이 맞물리면서, 그리고 이 이미지가 지금 현재 한국에서 상기시킬 수밖에 없는 상당히 '정치적인' 쟁점 때문에 우리를 곤혹스럽게 한다. 연수는 저 포즈를 즐기고 있고 유현경은 그것에 속수무책으로 포획되었고, 우리는 이 이미지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유현경은 자신의 드로잉에 들어있는 이 모든 딜레마를 과감히 이번 전시의 '타자'로서 노출하길 선택했다.

유현경_연수 #5_종이에 연필_117×80.5cm_2017

작품의 제목이자 재현된 인물의 이름들인 은주, 민소라, 윤지, 은주, 김동화 선생님은 오히려 기존의 유현경이 자신의 익명의 모델들에게 붙였던 "차분한", "착한" "어린"처럼 모델에게 그녀가 투영한 감정들―유현경은 내게 착하고 차분하고 어린 사람이다―보다 관객인 우리를 더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유현경이 붙인 제목-이름-명사는 당사자 모델을 제외한다면 정작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추상명사이기 때문이다. 그/그녀들은 관습적인 화가 앞에 앉아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기로 가정된 예의 모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현경을 향해 있고 유현경을 욕망하는 '주체'들, 유현경에게 사랑받으려는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저 이름들은 어떤 고정성, 정체성, 자기동일성을 내포하지 못한 채로, 그러나 회화적 이미지의 '주인'을 사회적 이름으로 표시하면서도 유현경과 같은 곳에 있으면서 뭔가를 공유하거나 공유하지 않는 이들의 불안한 상태를 고정시키지 못한 채 떠돌게 된다. 이것은 전형적인 인물화가 아닌 것이다.

유현경_민소라_캔버스에 유채_162×130.5cm_2018

그래서 필자는 유현경이 자신의 어머니를 대상으로 그린 "엄마 친구들"이나 "어서와", 그리고 인형을 안고 있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그린 듯한 "제가 안고 갈게요"와 같은 제목-문장에서 배어 나오는 따듯함이나 책임감이 보는 관객의 정동을 안정화한다고 생각한다. 지옥으로서의 타자와의 관계에 붙들린 유현경이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런 관계 이전의 이자적(二者的/dyad) 관계를 함축한 제목-문장들, 어머니와 어린 아이인 유현경이 우리를 쉬게 해준다. 유현경이 자주 읽고 읊는다는 금강경을 서투르게 붓으로 필사한 무대에 등장하는 여신-도사와 그녀의 아래에 발기된 성기를 드러낸 채 누워있는 남성으로 구성된 <도와주세요 그래그래>는 화가의 남성성을 결국 자신의 화가로서의 정체성 안에 수용하고 있는, 온전히 여성성으로 잠입해 들어가지 않은 채 어정쩡하게 자신의 '거짓말'과 자신의 무력감과 자신의 정동을 '갖고' 움직이는 유현경의 고단한 현실과 휴식과 화해에의 환상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유현경의 인물화에서는 자신을 위험하게 만들어야 인물화를 그릴 수 있는 화가로서의 고독/고통과 돌아가고 싶은 따듯한 곳에의 그리움과 죄의식으로 고통받는 자신의 자아를 달래줄 실재-어머니에의 환상이 공존한다. ■ 양효실

Vol.20180616d | 유현경展 / YOUHYEONKYEONG / 劉賢經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