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Dialogue, 對話)

오수환展 / OHSUFAN / 吳受桓 / painting   2018_0620 ▶︎ 2018_0715

오수환_Dialogue_캔버스에 유채_193.7×130.2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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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0620_수요일_05:00pm

입장료 / 성인 3,000원 / 소인 2,000원 단체 20명 이상 20% 할인 7세 이하, 64세 이상, 장애 3급이상 무료입장 두레유 식사시 무료입장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센터 Gan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평창30길 28 (평창동 97번지) Tel. +82.(0)2.720.1020 www.ganaart.com

오수환, 그는 추상화가다. ● 잠실역에서 멀지않은 타워730 빌딩의 로비에 가면 오수환의 멋진 추상회화 두 점을 볼 수 있다. 흰 바탕에 3-4회씩 단선적으로 내리그은 청색의 붓터치가 삼삼오오 비상하는 새처럼 리듬감을 이루는 화폭과 선명한 노란색 바탕에 검은 필선이 초서(草書)처럼 역동적으로 펼쳐진 대형 캔버스 두 점이 로비의 시원스런 양 벽을 압도하고 있다. 최근에 신축한 초현대식 건물에 필획(筆劃)의 추상회화가 이처럼 잘 어울릴 수 있다니, 건물을 드나드는 누구나 그리 어렵지 않게 화가가 선사하는 역동적인 기운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니, 추상은 역시 보편적인 언어임을 되새기게 된다.

오수환_Dialogue_캔버스에 유채_145.7×112cm_2018

1980년대 이후 '곡신(谷神 God of Valley)', '변화(變化, Variation)', '대화(對話, Dialogue)', '적막(寂寞, Tranquility)' 등의 제목으로 선보이는 40여년 오수환의 화업은 지속적인 추상에의 탐색이라 할 수 있다. 1946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1969년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오수환은 실존철학과 현상학, 구조주의, 기호학 등 20세기 후반의 철학적 사유를 섭렵했을 뿐만 아니라 노자, 장자 등의 동양 사상, 한학에 두루 밝아 전후(戰後) 동서양의 양대 지성이 교차하는 접점에 그의 좌표를 두고 있다고 할 것이다. 어려서 부친에게 배운 서예와 대학 입학 이후 전공으로 탐색한 서구 모더니즘의 미학이 혼융되는 지점에서 그의 추상 회화가 발아하여 번성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흔히들 '동서양의 결합'이라 정의하는 일반적인 수사로는 그의 화업을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다. 오랜 세월 무수한 회화적 실천으로 그것을 실행에 옮긴 그의 작품이 말없이 그 자체로 작가의 자기 발견과 자기 확신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주고 있기에, 관객 역시 말없이 그의 작품을 눈으로 보고 즐기는 것이 그의 화업에 대한 적절한 화답이 될 것이다. ● 오수환은 "예술은 화합의 도구이자 공감의 도구"라고 정의한다. 딱히 사회적 참여를 말하지 않더라도 예술은 "공감으로 인하여 사회적이며, 예술은 자신의 자립적 발산으로 현실적 사회의 변형에 힘을 기울인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창조력을 키워주는 것은 예술가의 개인적인 경험이며, 그렇게 예술의 미적 완성은 도덕적 완성과 뒤섞인다"고 밝힌다. (인용구는 오수환의 작가노트에서 발췌했다.) ● 대형 화면에 힘차고 대담한 붓질로 상징적 기호들을 남기는 그의 추상회화는 대략 1980년대 중반부터 구체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40여년 꾸준히 이어지는 그의 추상회화는 성마르게 사회적 변혁을 좇기보다 성실한 예술적 실천으로 확고한 자기 완성을 추구하며 그것으로 사회와 세계에의 기여를 구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철저한 예술적 실천으로 자기의 발견과 자아의 완성을 구현하며 그것으로 궁극의 사회 변형에 닿기 위해서, 그는 동서양의 여러 지성에서 자양분을 흡수하고 오래도록 변함없는 추진력을 공급받은 것으로 보인다.

오수환_Dialogue_캔버스에 유채_101×100cm_2018

"토끼가 뛰는 순간 솔개가 순식간에 덮치듯" 즉흥적으로 그려낸 그의 화폭은 응축된 에너지를 발산하지만, 그러한 순간적 발산은 오랜 숙고와 내적 성찰 끝에 나오는 것이기에 그의 화폭은 누구도 쉽게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완숙한 화면으로 귀결된다. 작가의 주변에는 시적 감흥과 철학적 논평으로 그의 화업에 대한 상찬을 헌정하는 문인들이 줄을 잇는데, 딱히 20세기 모더니즘 형식주의의 현학적인 미술 비평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의 추상회화가 정선된 예술적 성취로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 오수환이 미술대학에 입학하고 예술가의 길을 모색하던 1960년대는 전후(戰後) 추상의 미학이 한국 미술계에도 당위로 부과된 시대였다. 전전(戰前)의 기하추상과 전후의 앵포르멜 미학이 혼재하는 가운데 '전위'와 '현대성'의 담론이 '추상'을 시대의 과제로 견인했고, 한국의 청년 미술가들은 그러한 추상의 미학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서구의 추상은 오랜 재현 회화의 역사에 대한 도전이자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는 전위의 정신으로 추동된 반면, 견고한 재현 회화의 역사를 갖지 못한 전후 한국미술에서 추상은 길항작용을 이룰만한 탄탄한 재현 화풍이 자리 잡지도 못했기에 그에 대한 반작용 또한 뚜렷하지 못했거니와 18세기 이래 최고조로 승격된 순수예술의 미학적 담론도 어느 정도 낯선 개념이었다. 그러나 철저한 개인적 성찰로 예술적 성취를 이룩하며 그것으로 보편적 미학을 이룩한다는 서구의 근대식 '순수예술'의 개념은 한국 미술가들이 공감하기에도 충분한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수환_Dialogue_캔버스에 유채_145.3×112cm_2018

근대적 사회의 건설과 그 안에서 개인적 성찰로 고유한 미학적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순수예술'의 개념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서화와는 다른 '미술'의 경로를 설정하지만, 유교적 문인 예술가의 개념과도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어 후발 산업국가 한국의 청년 예술가들에게 어렵지 않게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전후 '추상'을 근대화된 예술의 과업으로 설정한 청년 미술가들에게 모더니스트 미술의 엄격하고 절제된 미학은 당대 세계 예술계의 흐름에 동참하면서 새로운 근대적 미술을 수립할 수 있는 합당한 과제로 수용되었다. ● 전후 세계 미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미국의 형식주의 모더니즘 미술은 정교하고 치밀한 미학적 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 1994)와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 1939- ) 등에서 정점을 이룬 형식주의 모더니즘 비평은 대형 캔버스에 영웅적인 붓질로 순수예술의 자율성과 자유로운 창조자, 미의 보편적 법칙을 시연하는 당대 회화 작품들을 미학적으로 지탱했다. 세상의 다른 무엇도 참조하지 않고 회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자율적인 예술, 자유롭게 내면을 성찰하며 자아를 펼쳐 보이는 예술가라는 개념은 비서구권 미술가들을 매료시키기에도 충분했다. ● 그러나 보편적 미학을 내세운 서구의 추상이 일정한 문화적 산물이며, 서구 중심주의의 편견을 내재하고 있다는 문화 정치적 비판이 뒤따르면서 20세기 말 들어 그린버그식 형식주의는 재고의 대상이 되었다. 교조적 단계에 이른 그린버그의 형식주의 비평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과 함께 수명을 다하여 해체된 것으로 보지만, 순수한 형식에 집중한 모더니스트 미술 비평은 2000년대 이후 미술 혹은 확장된 시각문화의 포스트-매체 분석을 위한 출발점으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어찌 보면 20세 후반의 형식주의 비평의 부상과 뒤이은 몰락은 동일한 문화 정치적 구도에서 전개되었지만, 미술이 일정한 제도적 산물로 작동되는 한 미술의 '매체'에 대한 탐구와 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오수환_Dialogue_캔버스에 유채_193.7×130.2cm_2018

'우리는 결코 모던한 적이 없었다'는 반성적 회고 속에, '미술'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은 그것이 일정한 매체를 매개로 한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킨다. 즉, 회화 평면 너머로 그 무엇을 찾는 노력, 이를테면 선험적 진리나 보편을 가장한 일정한 의미 체계를 지시하는 것은 당연시 할 수 없지만, 미술을 포함한 예술이 인류 문화가 만들어낸 제도적 장치로 번성하는 동안 그 전후의 문맥을 연계하여 발전하는 매체의 계보는 유효하다는 것이다. 교조적 형식주의의 편견은 탈각시키되, 모더니즘 비평의 중요한 토대였던 매체에 대한 주목은 회화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사진, 영상, 디지털 이미지 등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데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형식과 매체에 대한 주목은 미술 밖 사회적 참여로 내달은 정치적 비판 미술과 다시 내용을 담기 시작한 동시대 미술에서 여전히 점검하고 검토해야 할 미술의 최저점이 된다. ● 1970년대를 풍미한 단색조 회화와 여기에 대항하여 예술의 사회적 기여를 강조한 1980년대의 민중미술, 그리고 전자 매체의 등장으로 뉴미디어 아트의 도래를 알린 1990년대를 지나 다시 매체 본연의 속성을 되새기는 2000년대 포스트-매체론의 시대에 40여년 충직한 오수환의 추상회화를 다시 보는 것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디지털 기술은 창작과 복제의 구분을 무효화하는 포스트-프로덕션의 시대를 열었지만, 사진과 영상, 디지털 그래픽 등 새로운 미디어도 매체 자체에 대한 숙고가 없다면 예술로서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디지털 기술과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도입으로 회화는 일견 위기에 처했지만 뉴미디어 역시 매체 본연의 의미를 점검할 필요가 있고 그 과정에 회화 매체의 순수성을 탐색한 모더니스트 미술 비평은 피해갈 수 없는 구조적 틀을 제시한다. 기술 혁신은 전적으로 새로운 이미지의 제작과 소통을 기약하기보다, 과거 시각 매체에 대한 참조와 전통적인 매체에 대한 연계로 미술의 역사적 계보를 잇는다. '매체는 기억'이며, 과거 매체에 대한 '재매개'로 작동된다는 논평은 포스트-매체론이 도달한 복고적 결론이다. ● 최근 단색화를 비롯한 추상 미술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부상하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단색화가 한국적 전통을 강조하며 집단적 양상을 띤 반면, 40여 년간 조용히 그러나 치열하게 전개된 오수환의 화업은 작가의 사적 완성에 온전히 집중한다는 점에서 추상 본연의 의미에 밀착해 있다. 그가 회화의 평면 매체를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방법은 무엇보다 화면 위에 작가의 행위의 흔적을 남기는 필획에 방점을 두고 있다. 그의 '선(線)'은 전통적 의미의 서예에서 기원을 찾거나 한국미의 특성을 발현한 것으로 보기보다 회화 평면의 실재를 확인하는 행위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오수환_Dialogue_캔버스에 유채_227×182cm_2018

서구의 오랜 회화의 전통에서 회화는 세상을 향한 창이었으며, 화면 위에 재현된 이미지가 대상의 실재를 표상하는 가운데 회화 매체는 투명하게 사라졌다는 지적은 모더니스트 미술이 화면 위 대상보다 회화 매체 그 자체를 뚜렷하게 드러내면서 처음 각인되었다. 투명한 창인 회화 평면을 사이에 두고 재현된 대상과 그것을 시각적으로 인지하는 주체의 관계를 기본으로 삼는 것이 오랜 서양 회화의 전통이었다면, 모더니스트 회화는 그것을 회화 평면과 주체의 관계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대를 의미했다. ● 한편으로 디지털 미디어가 급속히 발전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미디어건 새로운 미디어건 일정한 매체를 매개로 하여 세상을 접하고 경험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구조를 따르고 있다. 서구의 전통 회화에서, 선형 원근법과 붓자국을 남기지 않는 매끈한 유화 기법의 도움을 받은 회화는 세상을 향한 투명한 창이 되고 관람자는 그 창 너머의 공간을 시각적으로 통제하는 데카르트적 주체가 된다. 원근법으로 묘사된 공간은 화면 속 공간과 관람자의 실제공간을 연속체로 가정하며 정밀한 묘사로 화면에 표상된 사물을 현전 속에 놓으려 했다. 이때 화면에 붓자국을 남기지 않는 정교한 유화 기법은 회화의 실체를 지우는 기능을 했다. 그리고 화가의 실존 역시 시각적 대상의 현전을 위해 거부된다. 그러나 모더니스트 회화는 그러한 시각적 투사를 거부하고 회화의 매체적 실재성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회화 매체를 마주하고 있는 주체를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 회화의 매체적 실재성을 드러내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는데, 전전의 추상이 명징한 지적 사유를 기하학적 형상으로 정의하며 그것으로 일체의 재현적 묘사를 대체했다면, 전후의 표현적 추상은 회화 표면의 마티에르를 부각시키는 방법으로 대상의 재현을 차단했다. 오수환의 방법은 이 두 가지 모두에서 벗어난다. 회화 표면의 실체를 분명하게 드러내지만, 수학적 사유를 가시화하지도 않고, 표면의 마티에르가 두드러지지도 않는다. 그 대신 역동적인 필획으로 화면 위에 행위의 흔적을 선명하게 남긴다. 행위의 흔적으로 회화의 평면적 실체는 뚜렷하게 인지되고,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 주체와 매체의 관계로 전환된 모더니스트 회화의 요건은 분명하게 발현된다. 서구의 재현 회화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대한 시각적 인식론을 '나는 본다. 고로 존재한다'로 주장한다면, 모더니스트 회화는 '나는 그린다. 고로 존재한다'의 실존적 자각으로 전환시킨다. 오수환은 40여 년간 행위를 반복했지만, 화폭 위에 의미 없는 행위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회화 매체의 실체를 반복적으로 확인한다. 냉정한 이성적 사유로 정신의 우위를 주장하지도 않고, 작가의 몸과 신체의 기운을 강조하되 어둡고 저항적인 물성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과 폭발하는 역동성으로 뚜렷한 행위의 흔적을 남기고 그것으로 작가의 존재를 확인한다.

오수환_Dialogue_캔버스에 유채_193.7×130.2cm_2018

그는 회화 표면을 마주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본다. 원근법 회화가 대상에 대한 지배와 통제를 위해 그림 그리는 주체를 지운다면, 오수환의 추상회화는 그러한 시각적 지배를 자신을 향해 돌림으로써 그리는 주체를 강하게 드러낸다. 전통적인 재현회화가 붓질의 흔적을 지워 화면 너머의 그 무엇을 보게 한다면, 추상회화는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화폭의 직접적인 경험, 그것의 진정성으로 화가의 존재를 선명하게 각인시킨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관객 또한 화면에 남은 흔적을 통해 작가가 느낀 생의 약동을 함께 느낀다. ● 이러한 추상의 매커니즘은 그린버그식 형식주의 비평이 아니더라도 자주 추상의 동양기원론의 형태로 여러 작가들에게 나타났지만, 오수환의 추상 화업 40년을 '한국적 추상'이나 '동양적 추상'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모더니스트 회화로의 전환과 동양 사상을 관통하는 접점을 지속적인 회화적 실행으로 옮기는 오수환의 화업은 회화 매체의 발견과 그를 통한 자아의 실현이라는 점을 일관되게 구현하고 있기에 그냥 '추상'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집단과 그룹의 생리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개인적 수행으로 추상을 실현했으며, 사회적 발언에서 벗어나 자아에 집중함으로써 추상에 매진했다. 섣불리 한국적인 것, 동양적인 것을 역설하지도 않는다. 일체의 정치적 의도에서 분리된 그의 40년 화업은 오롯이 개인과 자아의 구현에 집중된 것이었으며, 회화 평면과 마주한 예술적 실천으로 일관하고 있다. 회화가 다른 어떤 것을 지칭하거나 표상하지 않고, 그 자체의 존재 요건을 드러내며, 그러한 요건에 직면한 화가를 온전히 보여주는 것, 그것이 오수환의 작업이다. 그가 이처럼 철저한 추상의 길로 일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가나아트와의 오랜 인연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그의 추상은 '이것이 회화다'의 선언이며, '나는 그린다'의 실행이다. 그 외 다른 어떤 수식어도 필요치 않는 그의 그림은 매우 추상적이다.

오수환_Dialogue_캔버스에 유채_227×182cm_2018

그의 회화는 최고조의 모던 예술이며, 개인의 치열한 자아실현이자 온전한 자기 집중으로 예술의 과제를 실행에 옮기며, 그것으로 관객과의 직접적인 소통과 공감을 이루며 나아가 사회적 변혁을 이끌고자 한다. 모던 예술에서 경험의 진정성은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과정으로 드러난다. 회화 매체 최저점에 대한 확인 그것의 반복적 검증, 40여년의 치열한 싸움, 오수환의 회화는 그것의 실행이고, 그 과정에 화가의 존재를 선연하게 확인한다. 그것이 몹시 외롭고 고단하지만 그만큼 깊은 기쁨이기에 그의 화폭 앞에 선 관객들은 작가의 예술적 행위를 추체험하며 사회적 공감을 이룬다. 회화가 세계에 대한 선험적 진리나 대상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표상하고, 그러한 회화 매체와의 만남으로 우리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의 추상회화는 다른 어떤 것도 표상하지 않고 회화 매체의 실재성에 주목하여 실재 그 자체로 존재하는 회화다. 그의 회화가 세상이며, 그것을 마주한 화가의 존재 확인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보는 관객 또한 기쁘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이러한 회화를 선사하는 오수환, 그는 추상화가다. ■ 권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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