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60820f | 이다은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8_0626_화요일_06:00pm
2018 소네마리 신진작가 릴레이 개인展
아티스트 토크 / 2018_0731_화요일_07:00pm 안소현(아트 스페이스 풀 디렉터) X 자청(노뉴워크) X 고산(소네마리)
후원 / 네오룩_수유너머104 기획 / 박수진_홍이현숙 코디네이터 / 고산_김도희_김효영 디자인 / 김도영
관람시간 / 11:00am~07:00pm
복합공간 소네마리 서울 서대문구 성산로 315 1층 수유너머104 Tel. 070.8270.0910 www.nomadist.org/s104
소네마리 신진작가 릴레이 개인전 ● 2018년 문화복합공간 소네마리의 첫 전시로 '여성'의 언어를 담은 전시가 선정되었다는 점은 매우 인상 깊은 시작이다. '미투' 선언 이후, 가려졌던 목소리들이 세계의 벽들과 부딪혀가며 울리고 퍼지기 시작했다. 울림은 '일회성'도 '지나가는 흐름'도 아니다. 모든 옛 것이 흔들려 무너지지 않는 이상에야 그것은 멈추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담론의 장에서 소외되고 사소한 것들로 치부되어왔던 여성의 목소리가 '공론의 장'에 올라서기 시작했다. 울림은 성을 불문하고 온 세상의 무디고 견고한 구조에 균열을 낼 것이다. 그리고 균열 난 세계에서 소외된 목소리를 찾아낼 것이며, 미시적인 감정과 감각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할 것이다. ● 세 명의 신인 작가들은 각기 다른 매체를 이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윤 결 작가는 제3 세계의 억압 속 여성들의 욕망을 전시장 공간에 덮어 자연스럽게 한국 모습과 비교하게 하고, 이 다은 작가는 디지털 매체에서 여성의 이미지가 어떻게 소비되는가를 추적하며 이미지 담론을 선점하고 지배하는 '주체'를 겨냥해 카메라의 프레임에 날카롭게 담아낸다. 그리고 홍양무현 작가는 배제되었던 여성들의 감정과 촉각의 결들을 종이 위에 섬세하게 스미게 한다. 사실 이 이야기들은 이미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일상이며, 언제나 사소하기에 언급될 수 없던 또 하나의 '삶'이다. 하지만 이 일상에서 더는 오늘과 과거의 시간이 같은 감각을 공유할 수 없게 되고, 삶이 머무는 공간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되었으며, '누군가'의 호소가 더 이상 '사소함'에 머물 수 없는 상황에 진입했다. 기존의 평화로운 듯 보였던 삶은 작가들의 이야기를 통과하고 난 후,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image hunting ● 이다은 작가는 지하철에서 '몰카'를 당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사실과 픽션이 혼재된 영상작업을 선보인다. 웹상에는 수많은 여성의 이미지들이 부유하고 있다. 그런 이미지들 안에는 주체의 동의와 서사가 없다. 대신 그 자리에는 행위자의 성적 욕망만이 가득하다. 작가는 빼앗긴 이미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피해를 증명해야 하는 벽에 부딪힌다. 그리고 이 기준을 정하는 사람들의 자의적 해석과 그에 담긴 보편성, 합리성에 대한 확신은 사건을 더욱 우스꽝스럽고 이해 불가능하게 만든다. ● 한편 '몰카'범이 여성이미지를 획득하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카메라 촬영의 메커니즘 떠올리게 하며 이를 둘러싼 폭력성과 이미지 생산의 윤리성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작가는 이러한 매체적 특성을 작업의 방법론으로 차용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데, 이렇게 획득된 이미지들이 디지털화되어 임의 편집되고 유포된 뒤 다시 물질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작업의 함의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행위자의 흔적은 욕망들이 복잡하게 얽혀질수록 희미해져 가고, 이미지를 둘러싼 폭력의 궤적만이 두드러진다. 작가는 과연 자신의 빼앗긴 이미지를 되찾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 고산
Image의 Voyage ● 이다은 작가는 동시대에서 자신이 행하는 역할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실천적 행위를 통해 영상, 사진 등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전시 『Image Hunting』에서 선보이는 작업들은 '여성'이라는 주제의식을 관통하면서, 작가가 작품으로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 수행의 주체가 되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방식을 탐구한다는 데에 일맥상통하다. 작가가 선택한 예술이라는 틀 안에서의 방법론은 영상과 사진을 비롯한 다양한 미술적 언어로 발현된다. 포착, 획득, 가공, 내보내기 ● 이미지를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이미지는 그것을 보는 객체에게 절대적이며, 객체가 받아들이는 개인적 감상이나 의미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이미지는 대상을 심상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지는 포착되는 과정에서 이미 주관성을 획득한다. 예를 들어 사진을 찍을 때 사진을 찍는 사람이 프레임을 선택하여 촬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이미지가 물리적으로 가공되든 보는 사람에 의한 감상으로 가공되든 이미지 자체로 남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다은 작가는 몰래 포착된 -작가는 이를 '나는 이미지를 빼앗겼다'고 표현한다- 자신의 이미지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현실과 환상을 교차하며 이미지를 대상화한다. ● 『Image Hunting』은 작가가 경험한 몰카사건을 신고하고, 방송출연을 하면서 마주하는 불편한 인식과 묘한 강요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표현하다가, 작가가 사냥꾼이 되어 이미지를 재편집 하기도 하고, 중국 공안성의 몰카 예방 캠페인을 조롱하듯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에 덧대어 팟캐스트 영상을 차용하고, 컴퓨터툴을 사용해 직접 이미지를 가공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미지가 가공되는 과정을 희화화하며, 제도 안에서 너무 쉽게 배제되어 버리는 피해자의 권리를 녹취와 몰카의 형식으로 표현한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작가는 포획 당한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쫓는 과정에서 채집한 이미지들을 재구성 하는 데에 미디어에 경계를 두지 않고, 다층적 레이어를 늘어놓음으로써 작가의 개인적 서사가 담긴 영상과 텍스트로 감정의 전복을 유도한다. 이다은 작가는 형식적 변이와 다양한 매체 활용을 통해 자신이 적극적으로 사건 속으로 들어가 사건을 재현하고 왜곡하여 역설적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 작품 후반부에는 최근 대학로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 집회 장면이 등장한다. 이 집회는 인터넷 채널로의 '내보내기'로 해외 SNS와 동영상 채널에서도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흥미로운 점은 당시 몰래카메라가 'molka'로 표기된 바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의 불법 촬영 문제가 단순히 몰래 찍은/찍힌 영상 정도로만 설명되기엔 어려워서 일 것이다. '몰카'가 도처에 도사리는 일상적 위험이 되어버린 지금, 이 뒤틀리고 구질구질한 욕망이 어떻게 팽배해버렸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발트라우트 포슈는 『몸 숭배와 광기』에서 인간이 자신의 몸을 객관화, 수량화, 수치화하려는 시도에서 거울, 체중계 등이 등장했고 이를 통해 몸의 성 상품화가 가능했다고 말한다. 여기에 자본주의와 미디어의 발달이 맞물려 정형화된 미적 기준이 형성되고 여성의 몸은 상업적 대상이 되었으며, 미디어의 다각화로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상품화 되었다. 미디어에도 구조적 위계질서가 반영되어 남성은 권력과 소비의 주체가 되고, 여성의 몸은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미디어는 이 관념들을 재생하기를 거듭하였다. ● 『Image Hunting』속에서 작가가 포획 당한 이미지와 작가가 포획한 이미지들은 이미지 포착, 획득, 가공, 내보내기(유포, 혹은 유포실패를 희망한다.)의 동일한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작가에게 이미지는 현실이고, 욕망의 주체에게는 환상이다. 몰카범이 개인적으로 소유하든 그것이 매체를 통해 유포되든 기어코 그것은 소비되고 만다. 작품의 마지막 즈음에서 세상으로 나간 이미지를 보고 있자니 '내보내기'의 과정도, 사라진 이미지를 쫓는 것도 아닌 그저 부유하는 이미지만 있을 뿐이라 허무함 마저 들었다. 애초에 작가는 이미지를 소유하려는 욕망도, 가공할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작가는 그저 사건의 피해자로 머물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포획자, 가공자가 되기를 시도함으로써 시선을 전복시키고 욕망을 비틀어버린다.
여성주의의 지리학 ● 「Deserted House」는 장소와 젠더규범의 관계성을 함의하는 작업이다. 린다 맥도웰은 목소리를 내는 방식에는 어디에서 말하는가가 중요하며, 자리가 정해진 사람들은 자리의 이동이 그 자체로 사회의 규범에 저항하는 방식이 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부장제의 권력은 장소와 밀접하다. 특정장소, 사회, 그리고 거대서사 안에서 권력과 타자가 결정되고 나름의 젠더규범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평생 경주 이씨 가문 종가라는 공간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할아버지 없이, 종가의 며느리로써 제사를 지내고, 자식을 키운다. 그 집은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이에 대한 균열이 시작된 최초의 곳이기도 하다. 경주 이씨 가문의 타자이자 이방인인 할머니는 며느리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그 역할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의 배우자에게, 배우자의 딸에게로 전이된다. 작가는 마치 복원하듯 집안 곳곳을 청소하고, 제사음식을 하는 과정을 재현하고, 재현의 결과물을 먹은 뒤 토해낸다. 구토하는 행위의 메타포는 매우 직설적으로 다가온다. 토하는 행위 자체는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사유하는 태도 같기도 하고, 토사물을 가부장제 안에서 억눌려버린 여성의 울분 같기도 하다. 어쩌면 행위 자체가 '저항'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 현대 여성주의 이론에서 만들어낸 개념 가운데 가부장제야말로 가장 남용되고 어떤 면에서는 가장 이론화되지 않은 개념이라는 낸시 홈스트롬의 말처럼, 「Deserted House」에 다가갈 때에도 가부장제를 결부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때 자꾸 시선의 균열이 생겨난다. 가부장제를 남성지배의 형식이나 사례에 사용하느냐 혹은 사회주의적 측면에서 자본주의 내 계급과의 관계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접근 방식은 상이해지며, 이때 시각의 균열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가부장제는 세분화된 젠더 이슈를 설명하기에는 너무 포괄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Deserted House」를 통해서 우리는 가정, 집이라는 장소가 갖는 억압성, 통제성, 그 속에 모성화 된 여성의 전형에 대해 좀 더 세분화된 시각으로 가부장제도 속 여성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 몇 년 전, 명절 스트레스에 관한 설문 조사한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세대별, 연령별, 성별마다 이유는 다양했다. 기혼여성들의 경우 제사음식을 차려야 하는 노동에 대한 스트레스가 물론 1위를 차지했다. 기혼 남성들의 경우 할 일이 없어서, 그 때문에 장인어른과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해서, 본가이든 처가이든 명절 후 부부싸움을 해서 등이 이유였다. 요즘이야 많이 달라졌다고들 하지만, 직장과 일, 관습 속 젠더 역할 분리가 여전히 선명한 것은 사실이다. 현상학적 측면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된 생활의 내외면적 현상들을 통해 작가의 작업을 바라본다면, 작가가 젠더 의식을 작업으로 불러들이는 방식은 가변적이고 수행적이다. 다층적 매체를 활용하여 변이하는 이미지들은 가변적이며, 자신이 작품의 한 가운데로 적극 개입하는 면에서 수행적이다. 또한 현상학에서 다수가 모인 시공간은 객관적 세계로 받아들여 진다. 다수가 모인 곳은 공간성을 띠고, 공동체가 되고, 공동체에는 관념, 규범, 규칙들과 같은 레짐(regime)이 생겨나므로 이 지점에서 지리학적으로 여성주의에 접근하는 앞선 이론과 상응하는 부분이 있다.
개인의 서사는 결코 사회와 무관할 수 없다. 예술 행위 또한 사회구조적 서사와 개인의 서사, 이 양가가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는 이다은 작가가 자신의 고민을 풀어내는 방식으로 예술을 택했다는 데서 맥락을 함께 한다. 또한 단순히 성, Sex로 설명되지 않는 구조적 성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젠더라는 용어가 생겨났고, 개인은 일정한 장소 마다 역할을 획득하며/당하며, 개인의 생애에서 발생하는 서사는 관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실하게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멀리보기를 실행해야 하며, 이때 발생하는 시선들이 예술을 통해 작업으로 실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가족이 중심 단위인 사회에 살고 있고, 호주제는 폐지되었지만 뿌리깊은 家의식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가정은 개인과 제도 사이의 교집합이다. 중첩된 이 사회적 단위 안에서 파생되는 계급, 권력, 성별 역할 고착화 등의 문제들을 우리는 여전히, 그리고 이제서야 고분(孤憤)한다. 젠더, 가정, 국가, 사회, 직장, 혈연 등 객체로써 개인을 정체화할 수 있는 여러 요소에 대해 작가는 부정하거나 결론 짓거나 선포하지 않는다. 그저 적극적 수행자가 되어 고민을 계속한다. 포스트 모더니즘 이전의 예술이 사회문제를 표상하는 방식에 가까웠다면, 동시대의 예술은 사회문제를 실천적 기재로 변환하는 행동주의적 특질을 띤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다은 작가의 작업 또한 이 흐름을 같이 한다. '매체는 예술가 개인의 기억을 복구하여 드러내는 일종의 역사성을 지닌다'는 로잘린드 크라우드의 말처럼, 작가의 사적 경험에서 출발한 세 작품은 작가의 기억과 당시 체득한 감정을 복구하고, 작품은 작가 개인의 역사를 상징하는 매개체가 된다. 며칠 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들의 운전이 합법화되었다. 사우디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운전'이 금지되었던 나라이다. 며칠 새 관련 기사에 등장하는 '여성운전'이라는 단어에서 스며 나오는 이 묘한 불편함을 어찌해야 할까. 그 와중에 거대 자동차 회사들은 앞다투어 여성을 타깃으로 한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그렇기에 이다은 작가의 작업을 보며 필자는 필연적인 연대의식을 느꼈다. 여성, 아버지의 가부장적 의식, 제사, 제사음식을 할 때 눈치를 보며 아버지와 방에서 쉬던 남동생, 결코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필자의 개인적 서사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의 작업들이 거듭하는 수행과 전복의 변증법을 통해 결국 도달하는 지점은 깊이 들여다보기, 함께 들여다보기이다. 작가는 외부와 제도로부터 자신이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 하에 끊임없이 미술 장치의 활용, 형식적 전회를 통해 자신의 사적 영역에서의 작가로의 정체성에 대한 담론, 그리고 여성주의 담론을 정립하고 다져가는 중인 듯하다. 자기세계 안에서 '자신의 말들의 말을 포괄하는 담론'을 확고히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 인가. 더군다나 요즘처럼 젠더 갈등이 심화되고 페미니즘 이론 서브컬쳐의 영역까지 고르게 진입한 한국 사회의 지금에서 말이다. ■ 김가영
어느 날, 나는 그만 이미지를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그리고 내가 인지하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나는 이 곳이 사냥터라는 사실도 모른 채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땐 상황이 종료된 후였다. 승객 중 몇 명이 사냥꾼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나의 이미지는 이미 포획되어 그의 핸드폰 속에서 디지털화 되었다. 총구를 겨눠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이다. 되돌려 받고 싶었지만 이미지는 이미 내 손에서 벗어나 여기저기 옮겨다니기 시작했다. 빼앗긴, 도둑맞은 이미지들은 어디로 가게 될까? 종착지는 어디일까? 분명히 나는 '여기' 있었는데. 불쾌하고 낯선 당혹감 속에서도 나는 다시 저것들을 되찾아야겠다는 다짐만 할 뿐이었다. 수사기관에 넘기기 전 마지막으로 언뜻 본 그의 핸드폰 속 사진첩에는 수백 개의 얼굴들이 넘실대고 있었다. 몇일 뒤 조서를 쓰기 위해 '여성청소년과'라는 곳을 방문하였다. 사냥꾼을 잡기 위해서는 나의 이미지들이 얼마나 선정적인지, 얼마나 노출 부위가 넓은 지, 프레임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몇 퍼센트인지 등을 입증하고 기준을 충족시켜 줘야했다. 이것은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서론에 지나지 않는다. 빼앗긴 이미지들을 추적하며 나는 많은 경로를 거치게 되었다. 사람들을 모아 영화를 찍고 공중파의 아침 프로그램에 나가 인터뷰를 하고 팟캐스트를 시작하였다. 나는 이미지들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이미 경로를 추적할 수 없을 만큼 퍼져버리고 변태하기 시작한 여인들의 이미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스스로도 낯선 자신의 이미지를 다시 한 번 조우하게 될까? ■ 이다은
Vol.20180626d | 이다은展 / LEEDAEUN / 李多恩 / video.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