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통화 Phantom painting

정해민展 / JEONGHAEMIN / 鄭海民 / painting   2018_0630 ▶ 2018_0713 / 월요일 휴관

정해민_Roundabout_캔버스에 디지털 페인팅_267×330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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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0703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175 Gallery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 Tel. +82.(0)2.720.9282 blog.naver.com/175gallery

문화적 기술로서의 그리기와 디지털의 물질성"제국의 지도학은 너무 완벽해 한 지역의 지방이 도시 하나의 크기였고, 제국의 지도는 한 지방의 크기에 달했다. 하지만 이 터무니없는 지도에도 만족 못한 지도제작 길드는 정확히 제국의 크기만 한 제국전도를 만들었는데, 그 안의 모든 세부는 현실의 지점에 대응했다..." (보르헤스, 「과학적 정확성에 관하여」) ● 작품의 최종형태가 무엇이든, 일반적으로 컴퓨터를 기반으로 제작된 작업은 이미지의 디지털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특정 효과들, 이를테면 간편한 제작공정, 자유로운 저장과 배포, 유연한 전시형태 등 비물질적 양상에 따라 논의되곤 한다. 유사한 맥락에서 정해민의 작업 또한 새로운 이미지 생산수단이나 디지털 문화와의 관련성에 따라 읽히기 쉬운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작가가 수년간 발전시켜온 일련의 디지털 이미지 작업은 때때로 그런 기대를 충족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상충되는 지점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흥미로운 질문을 이끌어낸다. 이 글은 바로 그 지점에 대한 관심을 이끌기 위한 시도로서, 정해민의 기술적 그리기에 대한 몇 가지 잠재적 해석을 비판적으로 재고하고 나아가 그의 작업을 물질성과의 관계 속에서 논의할 것이다.

정해민_Water gun fight_캔버스에 디지털 페인팅_200×633cm_2018

작가는 오랜 기간 디지털 페인팅 소프트웨어(포토샵), 그리고 태블릿과 스타일러스 조합의 인터페이스를 이용하여 다양한 회화 형식이 절충된 이미지를 제작해왔다. 이러한 기술적 측면으로 인해, 작업에 대한 해석은 일차적으로 기존 회화의 매체-특정성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생산수단의 효과에 집중되기 쉽다. 예를 들어, 가상공간에서의 그리기를 위해 디자인된 디지털 인터페이스는 일반적인 회화 실천에서 요구되는 전문적 숙련도와 물리적 제약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상대적으로 누구나 쉽게 사실적이거나 표현적인 회화 양식을 소프트웨어적으로 모방할 수 있고, 편집과 수정, 여타 다른 디지털 개체와의 합성 또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또한 이미지의 소유와 전시, 운반에 있어서도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미지 제작과 배포의 민주화(democratization)라는 결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디지털미디어를 미학적 해방으로 간주하는 접근방식은 정해민의 작업을 디지털 회화의 맥락에서 읽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중요 내러티브중 하나이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흔히 디지털 이미지와 전통적인 회화실천 사이의 차이를 바탕으로 전통적인 회화의 위기를 점치곤 하는데, 실제로 디지털 인터페이스와 소프트웨어가 발달하여 그리기의 물리적 속성을 보다 정확하게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함에 따라 기존 회화 관행을 고수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논의는 전통적으로 이미지를 읽는 관습을 유지하는데 일정 부분 기여한다. 급진적인 생산수단의 영향을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저자가 구상하고 관람자가 해독하는 해석학적(hermeneutic) 매개방식 자체가 지닌 문제적 측면을 다루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정해민_Self-portrait_캔버스에 디지털 페인팅_85×60cm_2018

그리기 방식에 이어 그의 작업과 얽혀 있는 또 다른 맥락은 그릴 대상의 선택, 가공, 적용 등의 모든 과정에 내포된 인터넷 문화의 논리이다. 이 작업들이 제시하는 거대한 스펙터클의 세부를 들여다보면, 최근의 사회적 쟁점과 관련된 이미지들이 다양한 형태로 변형된 채 파편적으로 산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동시대 이슈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작업에 사용할 이미지를 구상하고, 구글링을 통해 구체적인 이미지를 확보한 후 그것을 특유의 방식으로 모사하거나 직접 차용한다. 이미지의 선택에 있어서, 그 과정은 미디어를 통해 쏟아지는 사회적 이슈가 인터넷커뮤니티에서 수용되고 재생산되는 패턴을 닮았으며, 작가가 그 이미지를 가공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활용하는 테크닉 또한 우리가 일상적으로 웹에서 이미지를 다운받고 목적에 맞게 변형하여 재유포 하는 행위와 궤를 같이한다. 이는 전체적인 화면 구성과 화면 속 이미지들 간의 관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작가가 배포하는 다양한 시각정보들은 어떤 명료하고 계획된 메시지로 전달되기보다는, 마치 인터넷 밈(meme)이나 소위 짤방이 만들어지고 재구성되는 것처럼, 관람자에 의해 무작위적으로 선택되어 자의적인 의미작용으로 이어지기는 듯하다. 이처럼 작업이 인터넷 공간의 이미지 생태를 체화하는 동시에 그것이 결국 익숙한 형태의 (퇴행적) 전시관행으로 나타나는 모순은 이른바 포스트 인터넷 예술이 공유하는 속성인데, 누군가는 정해민의 작업을 그런 맥락과 연결시켜볼지도 모르겠다.

정해민_오늘도 무사히_캔버스에 디지털 페인팅_136×300cm_2018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맥락, 즉 이미지 생산의 디지털화와 디지털 문화의 체화는 이러한 유형의 기술적 그리기가 미술제도 속으로 편입되는 일반적인 양상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개인적으로 정해민의 작업은 그런 기대를 충족시키기보다는 배신하기 때문에 주목을 끈다. 물론 작가의 작업은 디지털 매체의 활용에서 얻어질 수 있는 비물질적 가능성에서 출발하지만, 그 전개 과정에서 의외의 결과, 말하자면 흔히 디지털 기술의 유토피아적 가능성에 가려져 있던 기술적 제약이나 물질적 조건을 어렴풋이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작가의 작업과정을 다시 살펴보면, 그는 포토샵과 태블릿 등 가장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인터페이스를 활용하는 한편 그러한 장치가 무색할 정도로 수공예적인 그리기를 수행한다. 다시 말해 그의 작업은 극도로 높은 해상도의 이미지들을 일일이 구상해내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벽화 크기의 세밀화를 그리는 것과 같은 강도의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그는 실제로 현실 공간 기준 30미터 길이의 이미지를 제작하는데, 이는 저장과 배포에 있어서 오늘날의 평균적인 컴퓨터 환경과 상충한다. 예컨대 컴퓨터 모니터 수십 대를 이어 붙여야만 그의 작업 과정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으며, 어지간히 고사양의 컴퓨터가 아니고서는 30기가바이트가 넘는 원본 사이즈를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정해민_회화싸움_캔버스에 디지털 페인팅_170×360cm_2018

이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오히려 기술의 물질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모든 디지털미디어의 기저에는 데이터를 처리하고 전송하는 물리적 채널이 존재하고 또 제한된 매체 환경에서 가장 사실적인 감각의 매개를 위한 표준화된 포맷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물리적 현전은 디지털 이미지 체험에서 그동안 간과되어온 부분이다. 모르긴 해도 작가는 원시적 그리기를 기술적 그리기로 직역한 나머지 보는 이로 하여금 초고해상도의 디지털 이미지 공간과 아날로그 이미지 공간 간의 직접적인 대응을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이미지의 시각적 효과나 해석의 층위와는 별도로 기술적 이미지 체험과 물질적 조건의 관계를 재고할 수 있도록 이끈다. 요컨대 그가 제시하는 일종의 디지털 '그리기'는 고해상도 디지털 이미지와 기술적 환경 사이에서 발생하는 노이즈와 물질성을 드러내는 미디어이자 기술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그의 작업에서 강조되고 있는 압축 가공물(compression artifact)의 흔적, 그래픽의 늘어짐(stuttering)은 데이터의 층위를 조건 짓는 물질적 층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앞으로의 작업에서 그리기 자체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의미작용의 중요한 축을 구성할 것으로 보인다. ■ 손부경

Vol.20180630g | 정해민展 / JEONGHAEMIN / 鄭海民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