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ght Within

윤경미展 / YOONKYUNGMEE / 尹卿美 / painting   2018_0725 ▶ 2018_0731

윤경미_Light Within 2017009_캔버스에 유채_112×112cm_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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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0725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인사동 10길 22(경운동 64-17번지) Tel. +82.(0)2.733.1045 www.grimson.co.kr

소실점의 이편과 저편 ● 윤경미의 작업은 두 개의 레이어로 이루어져 있다. 종횡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치된 수많은 점들의 확고부동한 행렬이 하나의 레이어를 이룬다. 그리고 다소 느슨한 통일감을 가진 형상들의 집합과 그들의 미미한 움직임이 또 다른 하나의 레이어를 형성하고 있다. 윤경미의 작업의 진면목으로 돌진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개의 레이어의 정체는 무엇이며 이들이 왜 하나의 캔버스에 공존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유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편의상 이 둘을 점의 레이어, 형상의 레이어라고 하자. 이 두 개의 레이어를 가르는 기준은 소실점이다. ● 상(象)의 세계가 있다. 이 세계는 촉각, 미각, 후각, 청각 등 내부감각, 근거리 감각의 감응이 일어나는 몸의 내부와 몸의 주변부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가장 원거리 감각인 시각의 극단인 소실점까지 상(象)의 세계는 펼쳐진다. 이를 현상계(現象界)라 한다. 지각의 세계라고도 한다. 시간의 흐름이 존재하고 온갖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의 세계다. 대개의 미술은 이 영역을 다룬다. 윤경미의 형상의 레이어도 이 영역에 놓여있다. ● 한편 상(象)이 사라졌거나 처음부터 아예 없는 세계도 있다. 소실점 너머의 세계가 그렇다. 그곳은 유동적이고 변덕스런 몸의 일인칭은 물론이고 모든 인칭이 사라진 비인칭의 세계다. 그 곳에선 지각은 요령부득이다. 그 곳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인식이다. ● 사진가 스기모토 히로시(杉本博司)는 초점거리 무한대 이상으로 렌즈를 당겼다. 초점이 흐려지고 카메라 렌즈 앞의 상(象)과 카메라 속의 상(像)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가 도달하고자 했던 곳은 초점거리 무한대(∞) 너머의 궁극적인 세계, 카메라가 포착할 수 없는 소실점 너머의 세계, 시각이라는 지각을 뛰어넘은 인식의 세계였던 것. 여기서는 일체가 여여하고 상주불변한다. 이를 공간의 세계라고도 한다. 인식과 공간의 세계에서 윤경미의 또 다른 레이어, 점의 레이어가 펼쳐진다.

윤경미_Light Within 2017013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17

점의 레이어에는 눈에는 포착되지 않지만 종횡으로 무수한 직선이 지나가고 있다. 캔버스의 숱한 점들은 종선과 횡선이 만나는 지점이다. 데카르트가 창안한 X Y 좌표가 윤경미의 캔버스에 숨어 있다고 해도 좋다. 데카르트는 좌표계를 통하여 균질공간을 주창했다. 좌표상의 점이 어느 지점에 있더라도 그 밀도는 똑 같다. 그리고 X축과 Y축은 무한대로 뻗어있다. 시작이 곧 무한대의 끝과 동시성(synchronic)으로 연결된다. 윤경미의 점의 레이어는 캔버스의 유한한 사이즈를 넘어 무한대로 뻗은 광대무변의 균질공간을 대변한다. ● 무한대 너머의 세계, 공간의 세계는 눈을 감아야, 지각을 버려야 비로소 열린다. 이른바 내관(內觀)의 세계다. 의식을 내부로 향함으로써 소실점 너머 무한대의 외부공간이 열리게 되는 인식의 세계다. 내부와 외부, 안팎이 하나로 열렸기에(uni-verse) 주체와 객체가 사라진 세계, 이 편과 저 편의 경계가 사라진 세계, 통으로 열린 세계 즉, 균질공간(universal space)이라 한다. 여기서는 시작이 무한대의 끝으로 동시적으로 연결되기에 시간이 있을 수 없다. 시작과 끝 사이에 시간의 틈이 없기에 사건이 있을 수 없다. 변수적 성격을 지닌 시간과 사건은 상수로 환원되어 존재한다. 이게 데카르트가 언급한 균질공간의 본령이다. ● 윤경미는 오랫동안 점의 작업에 천착해왔다. 규칙적인 배열의 점적(点滴)이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는 가장 큰 특징이다. 점은 기하학, 조형, 존재함의 최소단위이다. 점은 시작이 곧 끝이다. 현상을 최소한으로 환원하여 더 이상의 사건성을 불허한다. 이런 점에서 윤경미는 환원주의자다. 환원주의는 개념주의에 이어지기 쉽다. 개념은 솔리드하다. ● 윤경미는 개념주의 미술에까지는 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솔리드한 상주불변의 세계를 나타내고 싶은 의지를 점의 레이어에서 읽을 수가 있다. 수많은 개개의 점들은 극단적인 환원작업을 통해서 확고부동한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 점들은 무한한 공간 속에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더 이상의 동세나 변용을 거부하고 있다. 점의 레이어는 소실점 저편의 세계, 공간의 레이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윤경미_Light Within 2017017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17

형상의 레이어를 보자. 여기서는 시작이 바로 끝과 연결되지 않는다. 시작은 울퉁불퉁한 시간을 통과하며(diachronic) 사건성이 더해지면서 끝을 향하려 한다. 형상들이 미미하나 유동적(liquid)이다. 상주불변의 형태가 아니고 변용을 꾀하려는 모습이다. 영기문(靈氣紋)에서 느껴지는 자유분방한 기운과 동세까지는 아니나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진행을 감지케 한다. 형상들은 자신의 권역에서 다른 권역으로 이동하거나 다른 상태로 변용하려는 기세를 취하고 있다. 가벼운 구름은 바람에 실려 장소를 옮기고 있다. 무겁고 축축한 구름들은 금방 비가 되어 뚝뚝 떨어질 것 같다. 기체가 액체로 상태의 변용을 꾀하고 있다. 사건성을 드러내는 레이어다. ● 이들 형상은 점의 레이어처럼 엄격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전혀 무질서한 움직임은 아니다. 나름대로의 통제를 받고 있는 듯이 보인다. 점의 레이어를 통제하는 X Y 축이 여기서는 수평과 수직으로 대체되어 자리잡고 있다. 장소에서만 성립하는 수직과 수평은 중력의 지배력에 따라 흔들리는 변수적 실재성을 갖고 있다. ● 그 흔들림과 떨림에서 상주불변성의 엄격함(solid)에 틈이 벌어지며 실재라는 사건의 유동성(liquid)이 움틈을 본다. 하늘을 나는 수백 대의 드론이나 수만 마리의 새 떼처럼 집단적으로 움직이나 어느 정도 질서를 유지하며 동선과 형태를 바꾸어 나가듯, 형상의 레이어에서는 수직, 수평, 중력의 관대한 질서 속에서 허용되는 형태의 발생과 물성의 유동적인 움직임이 감지된다. 새 떼처럼 이 편에서 저 편으로 움직이거나 구름처럼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변화하려는 형태형성장(形態形成場 Morphogenetic Field)이 윤경미의 형상의 레이어다. ● 형상의 레이어는 소실점 이 편의 세계, 장소의 레이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윤경미_Light Within 2018022_캔버스에 유채_72.7×72.7cm_2018

통념적으로 장소와 공간, 지각과 인식, 개념과 실재는 섞일 수가 없다. 그런데 윤경미의 작업에서는 이들이 따로 있거나 공존하거나 하나로 관통되거나 한다. 자세히 보면 점의 레이어에서 균질해야 할 점들의 일부에서 밀도의 차이가 보인다. 균질공간의 엄격함이 깨진 것이다. 느슨해진 그 틈 사이로 형상의 레이어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성이 스며든다. 장소가 공간을 감싸는 형국이다. ● 무한하고 상주불변한 공간의 성립은 유한한 장소의 변수성, 사건성을 배제함으로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상식이다. 이렇게 하여 획득한 엄격한 질서를 통해 공간은 장소를 지배하고 통제하며 감싼다. 그런데 윤경미의 작업에서는 부분적이긴 하나 유한한 장소가 무한한 공간을 감싸는 형국을 보일 때가 있다. ● 공간과 장소의 레이어는 서로 결코 섞일 수 없는 별개의 층위이다. 윤경미의 경우 이들 별개의 레이어들을 관통하는 모종의 사태가 발생했다. 섞일 수없는 것을 섞고 안과 바깥을 통합하거나 내부가 외부를, 유한이 무한을 감싸는 것은 종교적 수련을 방불케 한다.

윤경미_Light Within 2018026_캔버스에 유채_72.7×72.7cm_2018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요한복음 제 17장 21절) 유한한 일인칭의 내가 비인칭 진리의 광대무변한 아버지를 품 듯, 유한한 장소가 무한한 공간을 품는 형국이다. 이런 경지는 종교적 각성과 예술적 영감에서만 가능하다. ● 데카르트가 말하는 균질공간(universal space)은 철저하게 장소를 버리는 데서 성립한다. 그러나 소실점의 이쪽과 저쪽, 인칭과 비인칭, 실재와 개념, 지각과 인식이 하나의 통으로(uni-verse) 안팎이 트이는 경지에 이를 수만 있다면 공간이 굳이 장소를 버려야 할 이유가 없다. 공간이 장소를 품을 수도, 장소가 공간을 품을 수도 있다. 그 경지에 이르는 도정은 매우 어렵고 고단하지만 윤경미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기쁘게 그 길을 택했다. ■ 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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