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한 대화

고승욱_박정근 2인展   2018_0817 ▶ 2018_0905 / 공휴일 휴관

초대일시 / 2018_0817_금요일_06:00pm

작가와의 만남 / 2018_0828_화요일_04:00pm

기획 / 최연하

후원 / 미진프라자

관람시간 / 11:00am~07:00pm / 공휴일 휴관

사진·미술 대안공간 스페이스22 SPACE22 서울 강남구 강남대로 390 미진프라자 22층 Tel. +82.2.3469.0822 www.space22.co.kr

모뉴먼트(Monument) & 도큐먼트(Document) ● 『△, □,○... 무한한 대화』 전시는 그동안 말 할 수 없었고, 언어가 되지 못한 것, 그래서 이해의 바깥에, 텅 빈 중심에, 공백으로 남아있는 것에 말 걸기를 시도한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1907-2003)의 책, 『무한한 대화』에서 전시의 타이틀을 가져왔다. 침묵에 천착한 블랑쇼의 저서들은 대개 '말할 수 없음'에서 시작한다. 그는 "말은 재현만이 아니라 파괴하는 역할도 한다. 말은 사라지게 만들고, 대상을 부재하게 하며 소멸시킨다."(Blanchot, Maurice, trans, Mandell, Charlotte, 『The Work of Fire』,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5, p.30.) 라고 언급하며 언어의 불가능성과 언어의 의미 작용을 벗어난 곳, 침묵의 장소를 찾았다. 말 할 수 없음을 통해 타자와 (불)가능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블랑쇼의 대화방식이었고, 이를 통해 바깥의 목소리, 들리지 않았던 또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래서 결코 끝낼 수 없는 대화인지도 모른다. 블랑쇼를 경유하며 이 전시를 준비하는 동안 말할 수 없었던, 오직 침묵의 '공백'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형태를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사진의 존재론에 대한 궁극의 모색이다. 사진은 말이 없는 이미지(image, 이-미지(未知))이고, 사진이 발화한다면 그것은 관객의 말 걸기에 대한 응답으로서 가능할 것이다. 말이 숨기 쉬운 장소, 사진은 애초부터 침묵의 이미지이다. 그래서 사진의 환원될 수 없는 무성한 가치들을 실현시키려면 사진이 응답할 때까지 사진 안에서 발생하는 근원적인 힘을 성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진의 의미론적 프레임을 벗어나 사진의 고유한 힘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아무런 말이 없는 사진과 어떻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 전시에 참여한 두 작가, 고승욱, 박정근의 작업의 터는 제주도이다. 나고 자란 곳이 제주인 고승욱과 어쩌다 제주에 발을 디딘 후 10년 째 머물고 있는 박정근은 작업의 동지이자 선후배다. 제주의 선주민인 고승욱과 이주민인 박정근, 그리고 제주에 단 4박 5일을 머문 적 있는 기획자인 나. 제주의 선주민과 이주민, 구경꾼인 나는 꼭 일 년 전에 이 전시를 도모하며 제주의 텍스춰(Text-ure)를 떠올렸다. 제주의 결코 읽을 수 없는 질감들, 숨결들, 들릴락 말락 하는 음성들에 대해 생각했다. 구경꾼인 내게 제주는 다만 웅성거리는 이미지로 가득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올 초에 제주 4.3을 기념하는 수많은 행사들이 있었고 기억투쟁이 벌어졌고 여기저기 동백꽃잎이 떨어지며 제주를 바라보는 여러 방식들이 제기되었는데도 내겐 아직도 잡히지 않는 이미지가 제주이다. 그래서 '무한한 대화'에의 예감이 들었다. 고승욱과 박정근, 두 작가의 대화, 고승욱과 제주, 박정근과 또 다른 제주의 대화들은 각각 결이 다르고 주고받는 시선도 다르다. 선주민 고승욱은 제주의 모뉴먼트(Monument)를 만들었고, 이주민 박정근은 제주의 도큐먼트(Document)를 수집했다. 고승욱은 제주의 원풍경에 촛불을 밝히고, 박정근은 4.3유가족들의 초상과 음성을 기록하고 수집하고, 수면 위로 떠오르는 해녀의 초상을 찍었다. 그리고 구경꾼인 나는 이해 불가한 두 작가의 작업을 직조(texture)한다.

고승욱_세모의 풍경-하도리_70×120cm_2017

고승욱은 (제주에) 살았다. 제주 4.3평화공원 전시실 초입에 있는 '비명을 새기지 않은 백비'에 응답한 고승욱의 「△의 풍경」은 기억투쟁의 심란한 상황을 이미지의 '헐벗음'으로 표상한다. 구멍이 숭숭 뚫린 고승욱의 「△의 풍경 - 하도리」는 역기념비(counter monument)이다. 비명을 새기지 않은, 언어가 되지 못한, 텅 비어 있는 비석을 탁본하고(실제 탁본하지는 않았지만), 탁본한 천에 이름 없는 자들의 그림자를 띄워 익명의 사람들을 호출하는, 즉 기념할 수 없는 것들의 기념이 바로 「△의 풍경 - 하도리」이다. 이름이 없기에 누구누구야~~라고 호명할 수 없는, 하지만 웅성거리며 떠도는 이들을 위한 다만 지극한 애도의 몸짓이다. 구멍으로 존재하는 역사와 구멍으로 살아온 사람들을 위해 고승욱은 제주의 바다에, 원시의 풍경에 촛불을 켠다. 사진 속에는 검은 산과 검고 푸른 하늘, 벌거벗은 사람의 몸통과 그림자, 그리고 타오르는 촛불이 있다. 사람의 얼굴은 촛불 뒤로 도망치며 그림자로 증명되고, 그림자 초상은 스크린위로 또렷하게 떠오른다. 이 사진 속의 주체는 누구인가? 그림자인가, 몸통인가, 촛불인가, 검은 산인가. 아니면 제주도의 보이지 않는 손인가? 사진 속에 편입되지 않았지만, 사진의 밖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인가. 온통 다 주체이다. 개별주체들이 모여 만들어낸 집단, 제주라는 섬에 이 말더듬이 주체들은 검은 산, 망각의 저편에서 잠자고 있었던 기억들을 호출해내 겹겹의 레이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로 생생하게 되돌아오는/타오르는 역사를 보여줌과 동시에 과거로 자신의 그림자를 투사하는 말더듬이, 촛불, 그림자, 검은 산 주체들의 말에 귀 기울여 보자.

박정근_물숨의결_물숨#01_150×110cm_2014

박정근은 (제주를) 찍었다. 해녀를 찍고 4.3유가족을 찍었다. 그런데 거개의 해녀를 촬영한 사진과 박정근의 해녀사진은 다르다. 나는 '떠오르는 해녀'를 본다. 사진 속에서 꽉 낀 수경을 쓰고 알 수 없는 표정의 얼굴이 떠오른다. 찬란한 아침 햇살이 닿은 얼굴이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흔한 피사체, 해녀가 다가온다. 사진의 폭력성('피사체'라는 말부터)을 와해시키고 프레임의 바깥으로 빠져나가게 하는 박정근의 해녀사진은 찍는 자와 찍히는 자의 관계를 무화시키고 오직 떠오르는 얼굴만 보여준다. 사라질 위기에 처한 해녀는, 그래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명명된 해녀가, 다만 그의 사진 속에 충만하게 있었다. 고승욱의 구멍 난 사진처럼, 해녀는 박정근의 사진 속에서 구멍을 만든다. 반대로 4.3 유가족들의 초상은 분명하다. 목소리도 또렷하고 그 소리를 받아 적은 글들도 잘 읽힌다. 박정근이 잘 받아썼고 탁본하듯이 얼굴을 찍어내서 모든 게 선명하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론적인 위치는 역시 구멍이다. 전체로 포섭될 수 없었던 제주의 빈 중심이었다. 전달이 불가한 또렷한 목소리. 해녀의 얼굴은 떠오르고, 목소리는 허공에서 해체되는, 박정근의 초상사진은 그들을 재현하려는 것이 아닌 대상에 순수하게 도달하려는, 그들의 움직임이 만들어낸 '결'을 찍고자 한 것이 아닐까. 박정근은 무엇으로도 환원이 불가능한 해녀와 4.3유가족의 현존에 응답하고 있었다. ● 구경꾼인 나는 제주를 보듯이 고승욱과 박정근의 사진을 오직 바라볼 뿐이다. 닿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이미지들은 △, □,○...으로, 말이 아닌 말로 계속 미끄러진다. 규정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었던 제주에 대한 두 작가의 '무한한 대화'와 제주라는 '타자'와 관계를 맺는 그 둘의 새로운 방식이 귀한 이유이다. 이미 기념비적인 기념물들의 의미작용에 저항하면서 그것으로 결코 설명될 수 없는 사진의 존재론적인 사건에 주목하는 것. 사진찍기 자체의 경험을 중요시 여기며 사진의 한계를 실험하는 두 실천가는 사진을 찍는 것과 말하는 것, 사진에 담기는 것과 본다는 것, 사진이든 말이든 그 어떤 담론보다 앞서 존재한 제주와 제주사람들과의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게 한다. ■ 최연하

고승욱_돌초15

△의 풍경백비 제주 4.3평화공원 전시실 초입에는 비명을 새기지 않은 백비가 누워있다. 그 앞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적혀있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 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고승욱_말과 돌-수월봉년_70×130cm_2015

탁영 ● 나는 4.3 백비를 보면서 탁본을 상상해 본다. 이름을 얻지 못한 비석의 탁본은 어떤 모습일까? 본이 없으니 글이 없고, 그래서 배경도 없이, 다만 이름이 오기를 기다리는 침묵의 장인가? 아니면, 그러하기에 본이고자 하는, 글이고자 하는, 따라서 무언가는 배경으로 밀려나야 하는, 이름을 둘러싼 각축장인가? 탁본 위로 스치는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의 주인은 누구인가? 가해자? 피해자? 행여 가해자와 피해자, 두 형제를 둔 어미일까? 오래도록 이름을 얻지 못해 무뎌진 원망들. 언젠가 이름을 얻은 뒤 작별해야 할 연민들. 검은 탁본에 맴도는 검은 그림자를 붙잡을 수 있을까?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이 시도를 나는 '탁영'이라 부른다.

고승욱_말과 돌-황고지_70×110cm_2015

노근리 ●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전후, 남한에서는 수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희생자의 수는 대략 100만 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해 7월에 발생한 노근리 사건은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기까지 희생자 유족들의 오랜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유족들이 제시한 증거를 외면하였고, 노근리에 대해 침묵하였다. 한국에서 잊혀진 노근리를 주목한 나라는 오히려 미국이었다. 미국의 주요언론들이 자국의 만행을 보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한국사회는 노근리를 비극으로 인정하였지만, 그것은 2001년 미국정부의 유감표명 이후의 일이었다. 유족들은 사건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총알의 흔적을 ○로 표시를 해 두었고, 현재까지 총알이 박혀 있는 흔적에는 △표시를 하고 있다. △의 풍경 ● 내 앞에 풍경이 있다. 풍경을 담기 위해 나는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하지만 초점은 사진을 비켜 간다. 내가 흔들린 탓일까? 풍경이 흔들린 탓일까? 흔들림이 서로 어긋난 탓일까? 나는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바람은 드세고 파도는 거칠다. 바람에 바람이 부딪쳐 파도에 파도가 부딪쳐 흔들림에 금이 가는 순간이 올까? 부표에 기댄 채 기다려야 하는 그 자리와 그 시간. 나는 노근리 △를 빌어 '△의 풍경'이라 부른다. ■ 고승욱

박정근_물숨의결_물옷#06_150×110cm_2014
박정근_물숨의결_물옷#0302_150×110cm_2014

[물숨의 결] – 화석이 되어버린 해녀 불러내기 ● 본 작업은 자본주의의 욕망의 universality와, 욕망의 다양한 사회적 발현을 제주 해녀의 물숨을 통해 제주의 자연 위에 풀어낸다. '물숨'이란 해녀들이 입수 전 들이마시는 깊은 숨을 이르며, 물숨 한 번을 머금은 해녀는 약 2분가량 잠수하여 해산물을 잡아 올린다. 물숨을 머금은 해녀의 얼굴을 수면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여 그 '결'들을 기록함으로써 본 작업은 해녀를 역동적이고 현대적인 맥락으로 재해석한다. ● 지금껏 해녀는 이미지로 가공될라치면 흑백의 대비로 그려져 향수로 점철된 어머니상에서 탈피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숨 가쁘게 변해가는 제주에서 내가 만난 해녀는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는 다양한 역할을 살아내며, 자본주의 사회의 종종 이기적인 욕망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추구하고 실현하고 있었다. 다만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이 사회의 대다수보다 자연의 제약을 더 받으며, 그들의 사회는 공동체 의식이 이익추구라는 가치와 꽤나 안정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이러한 욕망과 자연, 그리고 전통적 가치의 충돌을 나는 제주 해녀의 물숨이 빚어내는 결을 통해 읽었다.

박정근_물숨의결-물숨#02_150×110cm_2014
박정근_물숨의결-물숨#04_150×110cm_2014

개인의 이익을 실현하려는 욕망은 제주 해녀들이 매번 물숨을 머금을 적마다 제정신이 아닐 만큼의 힘든 노동을 견뎌내는 근원적 동기이다. 그러나 욕망과 다른 곳에서 기원한 해녀의 몸은 물숨의 길이만큼의 욕망만 채우기를 그들에게 허락한다. 채워지는 욕망의 길이를 조금 더 연장하려는 해녀의 안간힘과 신이 인간의 육체에 지워놓은 한계가 충돌하는 접점에서 해녀의 얼굴에는 결이 하나, 둘 빚어진다. ● 이러한 해녀의 주름결 위로 또 다른 결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그 곳,바다에서 만들어지는 무수한 형상과 깊이의 물결이 때로는 굵은 선으로, 때로는 세밀한 터치로, 해녀의 얼굴에 결이 되어 척척 드리워진다. 내게 이 물결은 인간의 육체라는 자연 너머 다른 범주의 자연에서 물숨을 머금은 인간의 욕망에 선을 긋는 또 다른 한 겹의 한계이다. 두려울 법도 하건만 그들은 저 배경으로 보이는 청빛 암흑의 바다 심연으로 물 속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거침없이 자맥질한다. 해를 거듭하는 욕망을 향한 해녀의 자맥질을 받아내는 바닷물과 바다 속 밭 등의 자연은 고무재질로 된 해녀의 잠수복 (물옷)에 끊임없이 생채기를 낸다. 물옷은 또 다른 결로 인간의 욕망과 자연의 충돌을 기록한다. ● 인간의 의지를 겹겹이 한계 짓는 자연에 도전, 순응, 타협하는 데는 개인의 욕망 일부를 희생하여 공동체 내 약자들의 필요를 채워주도록 진화한 그들의 제도로 인함이 아닐까. 제주 해녀들이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욕망은 범사회적, 범문화적이다. 해녀가 물숨을 머금는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얼굴의 주름결과 물옷에 조금씩 하지만 쉴 새 없이 음영이 깊어지며, '얼굴결'에 드리워진 물결이 한 순간도 고정되지 않는 것과 같이. 그러나 제주 해녀가 욕망을 추구하는 방식에는 욕망과 배치됨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지탱하는 또 다른 가치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으며, 이것이 제주 해녀들의 자본주의를 다른 사회의 그것과 차별 짓는다. ■ 박정근

Vol.20180818c | △,□,○...무한한 대화-고승욱_박정근 2인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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