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TE-웅크린 사람들

황학삼展 / HWANGHAKSAM / 黄矐三 / sculpture   2018_0905 ▶ 2018_0915

황학삼_Mute-웅크린사람_FRP_90×120×60cm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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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8_0905_수요일_05:00pm

후원 / 충청북도_충북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_10:00am~06:00pm

청주시립미술관 오창전시관 CHEONGJU MUSEUM OF ART Ochang Gallery 충북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오창공원로 102 오창호수도관 2층 Tel. +82.(0)43.201.2651 cmoa.cheongju.go.kr

황학삼의 감각의 몸 조각, 몸 철학Hwang Haksam's Sensual Body Sculpture and Its Corporeal Ontology ● 소멸할 수밖에 없는 육체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은 늘 불안함을 느낀다. 불완전한 인간은 가족, 사랑, 우정, 사회적 성취 등 관계적 가치를 앞세워 고독과 불안으로부터 도피하려 한다. 옆으로 누워 머리를 파묻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 인간, 고독한 등줄기만을 드러내며 맥없이 고개를 숙이고 앉은 인간, 바닥에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으로 이미 잔뜩 웅크린 몸인데도 더 숨기려 하는 인간의 형상이 황학삼의 작업실에 즐비하다. 「Mute」 연작 (2017~)은 고요 속에 침묵하는 웅크린 인간 형상이 주를 이룬다. 인간 내면의 감정과 의지는 자세에 나타난다. 인간은 자신이 힘 있고 강하다고 느낄 때 몸을 열지만, 스스로 나약하다고 느낄 때, 마음이 아플때는 몸을 닫는다. 상처입고 두려움에 쌓인 채 마지막 남은 자존감마저 잃고 몸을 잔뜩 웅크리고 머리를 감싼다. 황학삼의 작업에서 몸을 꽁꽁 닫고 간절히 세상의 어딘가로 숨고 싶은 인간의 몸뚱이는 고통으로 타 들어간 듯 시커멓다. ● 황학삼은 한동안 건물을 지을 때 일시적으로 쓰는 기둥을 지탱하고 안간힘을 다해 매달려 있는 인간 군상인 「불완전한 기둥」 (2016) 연작을 제작했다. 그는 타고난 자연적 상태로 꿋꿋이 설 수 없다면 사회를 통해 학습한 불완전한 가치관과 생각들에 의지해서라도 삶을 지탱하려는 인간의 불안정한 모습과 불안한 감정들을 형상화했다. 이전에 그가 만들어낸 인간은 갈대와 같은 모습이었다. 「바람 부는 날」 (2011~2013) 연작에서 매끈하게 표면을 다듬어 만든 비쩍 마른 인간 형상들은 갈대처럼 바람에 휘청이고 있다. 그 마르고 유약한 인간 형상은 「불완전한 기둥」에서 살덩이가 붙는다. 휘청이는 인간들을 기둥에 붙여 세우고 감정을 담은 점토를 한 점 한 점 얹어 붙여 인간 내면의 깊이를 표현한다. 내면 표현에 불필요한 신체부위는 생략되었다. 사지가 절단되고 머리의 형체마저도 생략된 인간 군상들은 쇠기둥에 꽂아놓은 고깃덩어리처럼 섬뜩하다. 처절하리만큼 절박하게 기둥을 의지하여 버티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절망의 늪에 빠진 듯 암울하다. 인간으로서 그 검고 거친 육체의 그로테스크함은 마주대하기 힘들다. 그러나 외면하고 싶은 그들의 몸 덩어리가 한결같이 웅크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들은 고요 속에 침묵하며 안간 힘을 다해 지루한 시간을 이겨내는 결연하고도 강인한 모습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화려한 나비로 환골탈태를 꿈꾸며 험난한 시간을 이겨내는 번데기의 인내의 시간 속에 있는 듯하다. 그의 말처럼 말없이 웅크리며 기다리는 것이다. 웅크린 것들은 절망 속에 있는 듯 보이나, 언젠가는 다시 일어선다. 침묵하고 웅크리며 기다린다는 것은 희망을 위한 더 큰 울림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작가의 믿음의 표현이다. 그 희망이 그의 어두운 조각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이유이다.

황학삼_Mute-기다리는사람_FRP_100×90×95cm_2018

황학삼은 조각의 표면을 통해 인간 내면의 깊이를 탐구하는 길을 걸어왔다. 가늠할 수 없다는 인간의 내면을 조각으로 얼마나 깊이 표현할 수 있을까. 소조의 방법을 쓰는 황학삼의 작품에는 손으로 일일이 살점을 눌러 붙인 자국이 시커먼 표면위에 거칠게 남아있다. 로댕(Auguste Rodin)이 인체 조각에 감정 표현과 내면의 깊이를 불어넣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가 인간 실존의 조건과 철학적 논의의 장을 마련했다면, 황학삼은 그 양자를 추구하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로댕은 인체 조각이 언어를 초월한 미지의 심연과 삶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는 황학삼의 「Mute-고요」는 우연찮게도 로댕이 지옥의 문을 위해 제작한 「다나이드 (Danaid)」(circa.1889)의 자세와 닮아있다. 살인을 하고 영겁의 형벌을 받는 여인의 절망과 슬픔은 로댕의 조각에서 아름다운 인체미가 두드러져 비애의 미로 승화한다. 반면 황학삼은 「불완전한 기둥」에서 인체의 미를 포기했다. 그의 조각에서 인간 내면의 심연의 깊이는 물성을 흠씬 풍기는 거친 표면과 절단하거나 왜곡된 형태를 통해 드러난다. 감정과 체온이 묻어난 물성 진득한 표면은 오히려 뭉크(Edvard Munch)의 「절규」에 나타난 날 것의 공포, 에곤 쉴레(Egon Schiele)의 드로잉에서 나타나는 표면을 후벼 파는 거친 필치에서 느낄 수 있는 강한 실존의 표현을 추구하는 듯하다. 그들의 그림에서 감정적 표면과 내면적 깊이는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있다. 황학삼의 조각에서 표면은 갈수록 거칠어져 왔다. 비록 FRP를 쓰고 있지만, 그는 최근에 그 위에 청동의 파티나(patina) 효과도 표현해보고자 한다. 그 거칠고 방치된 표면의 효과가 실존의 깊이 어디까지 침투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

황학삼_Mute-기다리는사람_FRP_100×90×95cm_2018

황학삼은 과학의 미끈함이 주는 시대의 미학을 거스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본격적인 디지털 미디어의 시대인 21세기에 몸과 손으로 실존의 고통을 표현하는 표현주의 조각이자, 리얼리즘을 선택했다. 구본주의 조각이 전하는 생생한 삶의 리얼리티에 매료되었던 그 이다. 그는 자신만의 리얼리즘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보는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몸과 살 철학을 통해 구현하고 있다. 황학삼의 조각은 몸이 중심이 되는 조각이다. 그의 몸 조각은 표면을 보고 만지고 싶은 '지각의 장'과 '현상의 장'을 제공한다. 그는 몸이 정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장애물이라는 관념론을 거부하고, 인간은 몸을 통해 존재함을 생생하게 일깨운다. 황학삼의 웅크린 몸은 '세계에의 존재'로서의 인간이 세계를 향해 나아가려는 과정에서의 정신에 앞선 행동인지도 모른다. 그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 자세는 그가 세계와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버티고 살아남기 위해 체득한 '몸 틀(le schema corporel)'의 형태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의 웅크린 몸은 절망보다는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고 세계와 하나가 되기 위한 보호기제일 수 있다. 메를로-퐁티에 의하면 세계는 인간의 몸을 구조화하고 그 구조화된 몸이 세계를 재구성한다. 이처럼 몸이 바탕이 되어 사유에 도달하는 철학은 중심, 고정, 규정을 거부한다. 세상이 달라지고 상황이 달라지면 '몸 틀'은 변화한다.

황학삼_Mute-calmness_FRP_32×36×18cm_2017

근작 「Mute-하늘을 바라보다, 땅을 바라보다」 (2017~8)에서 황학삼은 웅크린 인간을 일으켜 세우고 스케일에 변화를 주었다. 거대한 크기의 인간상은 「불완전한 기둥」과는 달리 몸의 그 어느 부위도 생략하지 않은 온전한 모습이다. 황학삼의 새로운 '몸 틀'은 갈대처럼 바람에 흔들리지도 사족을 절단하고서라도 기둥에 매달려 지탱하고 있지도 않다. 뒷짐을 지고 굳건하게 스스로 땅을 딛고 서있는 거대한 인간 형상의 무표정의 침묵이 큰 울림으로 다가 온다. '몸 틀'이 달라졌다는 것은 세계와 몸의 관계가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황학삼이 웅크린 몸 틀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새로운 상황 속에 존재하는 변화된 새로운 '몸 틀'을 만듦으로써 메를로-퐁티의 몸이 바탕이 된 감각적 존재론을 침묵 속에 공명한다. 황학삼은 질기고 강인한 인간존재의 생명력을 인간 실존에 뿌리깊이 박혀있는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대함으로써 구현하고 있다. 그것은 또 다른 새로운 '몸 틀'을 향해 가는 과정이다. ■ 이필

Vol.20180905j | 황학삼展 / HWANGHAKSAM / 黄矐三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