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시白視

권희수展 / KWONHEESUE / 權熙絒 / video.installation   2018_0915 ▶︎ 2018_1110 / 일,월요일 휴관

권희수_증발한 기억, 녹아내린 눈_단채널 영상_00:05:33_201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71108l | 권희수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_제주특별자치도_제주문화예술재단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일,월요일 휴관

문화공간 양 CULTURE SPACE YANG 제주 제주시 거로남6길 13 Tel. +82.(0)64.755.2018 culturespaceyang.com

작가는 자신이 머물던 장소들과 만나고, 관객은 전시공간에 개입하면서 콘텍스트를 만든다. 이러한 만남과 개입에는 시간성이 더해져 그곳에서는 어김없이 '중첩'과 '교차'의 사건이 일어난다. 텍스트 작업을 구심점으로 작품을 만들어온 작가, 말솜씨와 작문실력이 출중한 시각예술작가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 간 고민을 하며 겨우 그리고 다시 포착한 키워드는 '중첩'과 '교차'였다. 권희수의 작품에 대해 생각하면서, 미열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감기와도 같은 증상을 겪고야 말았다. 오래 전, 어느 소설가가 쓴 글을 읽으며, 모종의 육체적 고통은 나의 신체가 세계와 만나는 방식에 대해 더욱 반성적으로 고찰하도록 한다는 내용이 머리에 각인된 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권희수라는 젊은 작가가 세계와 만나고, 세계가 그의 신체와 가슴을 투과하면서 다시금 생성된 결과물들이 세계로 배출되는 방식이 더욱 더 궁금해졌다. 그러한 궁금증을 확장시키며, 나는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타이틀로 내세운 '백시(白視)'라는 단어에 주목하였고, 그 말이 풍경, 시간, 빛, 소리 등이 중첩되고 교차됨을 의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가의 신체가 직접 개입되어 있는 장소의 풍경, 시간, 빛, 소리라는 점이다.

권희수_접목된 기억_단채널 영상_00:17:47_2018

문화공간 양이라는 매력적인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작업은 17분 47초짜리 영상 '접목된 기억'이었다. 이 작업은 풍경사진에 관심을 지니던 작가가 어느 엽서수집가에 대한 기사를 접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제주 출신 재일교포 고성일이라는 이였는데, 피혁공장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가 분재를 업으로 삼으면서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었고, 그때부터 제주의 풍경을 담은 엽서에 관심을 지녀 여러 루트를 통하여 그것들을 수집하게 되었다고 한다. 권희수는 그를 직접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갔고, 거기서 엽서의 이미지들을 재수집해 제주도로 돌아온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게 제주를 관광지로 홍보하기 위해 촬영하였던 엽서 속 근대 제주 풍경 사진들을 동시대의 제주 풍경들에 접목시키는 작업을 시작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 작가가 인터뷰에서 언급하였듯 관광지의 장소가 되었던 그 풍경들은 바뀌지 않았는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나 인공적인 장치들이 바뀌어있다는 점이다. 또한 나에게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은 관광지라 명명된 여러 장소였다.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제주를 처음 방문한 이들이 가장 먼저 찾아가게 되는 곳. 여러 생명체의 삶과 죽음이 교차하지만, 언제나 그대로인 듯 변화되지 않을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받는 곳. 그 장소들이 지닌 모종의 숙명이 어딘지 모르게 처연하게 느껴졌다. 권희수 역시 이 작업을 통해 그 장소들을 카메라에 담는 프레임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자본주의 안에서 모든 장소는 용도에 따라 변화하지만, 또한 용도에 의해 변화될 수 없는 장소도 존재한다는 점은 여러 생각을 하도록 했다. 또한 이 작업이 담고 있는 시간성 역시 흥미롭다 일제강점기에 촬영하여 만든 엽서를 박정희 정권 때 누군가 수집하였고, 그것을 권희수라는 작가가 다시 독립된 조각으로 파편화시켜 직조를 하듯 저 영상작품으로 제작하였다는 것. 그리고 그 작품을 제주의 전시장에서 2018년도에 스크리닝하고 있다는 것. 이것 역시 그 장소들이 지닌 또 다른 운명이라 말할 수 있을까.

권희수_오선지 그리기_단채널 영상_00:06:23_2018
권희수_오선지 그리기_드로잉, 단채널 영상_가변크기, 00:05:23_2018

두 번째로 말하게 될 작업은 여러 개의 선 드로잉 흔적과 함께 두 개의 영상으로 스크리닝되고 있는 '오선지 그리기'이다. 이 작품에서 하나의 영상은 작가가 제주의 각기 다른 장소에서 촬영한 바다의 장면들을 이어붙인 것이고, 또 다른 영상은 제각기 다른 바다의 수평선들을 문화공간 양의 작은 방에서 작가가 직접 연필로 그려 이어가는 퍼포먼스 장면을 담은 것이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중첩과 교차의 사건은 벌어진다. 일차원적으로는 각기 다른 바다의 풍경들이 교차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는 그 바다에 머물던 작가의 시간과 기억이 중첩된다. 그리고 문화공간 양이라는 전시장소는 다시 바다의 이미지와 중첩, 교차되면서, 어느덧 바다와 연결되어 바다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또한 이 작품 속 장소들은 앞서 언급하였던 작품 '접목된 기억'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월정리 해안가는 '접목된 기억'에서 "오래 전 고래를 잡던 바다였으나 지금은 '고래'라는 단어가 붙은 카페가 많아진 장소"로 언급되면서 장소의 특정성이 부각되지만, '오선지 그리기'에서는 여느 바다와 다름없이 고요한 수평선을 지닌 보통의 바다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렇게 탄생한 오선지가 텅 비어있다는 점이다. 무엇을 담을 수도 있으나 또한 담지 않아도 되는 잠재성을 지닌 빈 공간(오선지). 그것이야 말로 '백시(白視)의 공간'이며, 관객들이 새로운 콘텍스트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의 공간'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작업의 사운드를 통해 일정한 규칙성에 대응되는 헤르츠를 시각적으로 치환하면 바다의 물결무늬와 매우 유사하며, 일정한 규칙이 있으면서도 무질서한 형태로 나타나는 그것은 매우 '유동적'이기도 하다. 또 이는 잔잔한 듯 보이지만 그 안에 엄청난 움직임의 에너지를 품고 끊임없이 발산하고 있는 바다의 그것과도 닮아있다.

권희수_찰칵, 깜빡_단채널 영상_00:16:30_2018
권희수_찰칵, 깜빡_의자, 사진_가변설치_2018

다음 작품은 오브제와 퍼포먼스 영상으로 이뤄진 '찰칵, 깜빡'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이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만든 엽서를 하나씩 보여주며 버리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아마도 그 엽서는 한 엽서수집가의 노고('접목된 기억')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전달되는 숙명을 지닌 엽서에 대한 고찰이기도 한 것 같다. 또 작가가 제주에 체류하는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아주 오랫동안 바라본 제주의 풍경을 그저 겸허하게 제시한 것일 수도 있다. 영상은 문화공간 양의 두 장소(밖거리 전시장과 안거리 전시장)를 다룬다. 하나는 밝은 방(camera lucida)이고, 하나는 어둠의 방(camera obscura)이다. 즉 나는 이를 카메라가 렌즈로 피사체를 담아 필름 위에 얹히고 그것이 여러 화학적 작용을 통해 실사 이미지로 재현되는 메커니즘이 작품 전체에서 펼쳐지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육안과 카메라의 렌즈를 하나로 본다고 말한 것과도 연결된다. 퍼포먼스가 끝나고 전시장에 남은 것은 다소 허무해 보이는 낡은 나무 의자와 흩뿌려진 엽서들 그리고 이를 기록한 영상밖에 없는 듯 하지만, 그 영상을 바라보고 있자면 거기에는 작가가 제주에 머물던 시간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서서히 노출을 더하여 결국 백지 상태가 되는 엽서를 통해 작가가 시간과 빛을 중첩시키며 백(白)이 되어가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도달하게 된다. 이 작품을 보면서, 나는 스기모토 히로시의 '극장' 연작을 떠올리게 되었다. 거대한 서사를 담은 영화라 할지라도 한편을 모두 한 장의 사진으로 압축하면 결국 남는 것은 빈 공간(白)일 뿐이다. 중첩과 교차가 더해질수록 남는 것은 어둠(黑)일 것 같지만, 그것이 시간이라면, 그리고 빛처럼 영롱하게 맺힌 기억이라면 결국 그 결과물은 아무 것도 없는 백(白)의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빛이 어두운 공간(camera obscura)을 통과하면서 다시 빛이 되는 아이러니. 이것은 마치 한 인간이 이 세계에 태어나 거친 삶(黑)을 중첩시키며 살아가다 주검으로 돌아갈 때 결국 남기게 되는 무(無/白)와도 다름없다.

권희수_바다×바람×바탕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8
권희수_바다×바람×바탕_단채널 영상_00:05:22_2018

다음 작품은 '바다×바람×바탕'이다. 오브제 설치와 두 개의 영상작품으로 이뤄진 이 작업에서 관객들은 다소 당황할 수도 있다. 전시장에서 보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오브제(종이와 빛) 설치작업이 보다 개념적이고 압축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을 두고 작품에 개입하다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 많은 사각의 프레임은 엽서의 프레임이기도 하고, 카메라의 프레임이기도 하며, 문화공간 양에서 공존하는 수많은 프레임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그 프레임에 담긴 수많은 시간, 빛, 소리를 중첩시키고 교차시킨 결과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외부의 빛과 내부의 빛이 만나 고요하게 맺히는 또 다른 빛들은 풍경을 압축시켜 놓은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도록 한다. 영상 속에는 제주의 풍경에 존재하던 많은 이들과 많은 사건들이 중첩, 교차되고 있어 공간을 메우고 있는 갖가지 빛들은 그들 하나하나의 존재성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계 내에 던져진 수많은 이들의 존재는 결국 그들의 흔적(시간, 빛, 소리 등)을 통해 증명되는 것은 아닐까?

권희수_부식된 방_스피커, 사운드 설치_00:05:27_2018 (음악제작_박동근)

권희수의 이번 전시에는 일곱 개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작업들은 모두 독립적으로 놓여있는 것 같지만 결국 어떤 흐름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작업은 문화공간 양의 안거리 전시장에 설치되어 있는 '부식된 방'이다. 화이트큐브로 단장되어 있는 밖거리 전시장과 달리 이 공간은 시간이 중첩, 교차되며 남긴 거친 환경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 장소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시각적 이미지 못지않게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 소리는 제주에서 채집한 소리와 다른 소리들을 배경음(중첩, 교차)으로 엮은 것으로 정확한 소리를 분간할 수 없는 일종의 소리 풍경이다. 또한 그 장소에는 한 편의 시처럼 은유적으로 쓰인 텍스트가 낡은 의자 위에 덩그러이 놓여있는데, 그 글을 보면 결국 그 내용이 작가가 머물던 문화공간 양의 여러 공간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탐라순력도 28도중 제1도인 한라장촉에 거로(居老)라고 표기 되었고, 1700년대 말에 그려졌다는 고지도에는 거로촌(巨老忖)으로 표기되어있으며, ...제주성이나 화북포로 가는 도로에 산다는 뜻에서 거로(居路)라 하기 시작하여 오늘이 마을명이 유래되었다고 추정되는(제주시 포털사이트 참고)" 오래된 동네 거로마을. 그곳의 어느 구릉지에 고즈넉이 들어선 전통가옥을 개조한 전시공간 문화공간 양. '부식된 방'은 이처럼 시간의 흔적들을 곳곳에 남겨놓은 낡은 공간에 외지에서 온 젊은 작가의 새로운 시간이 결합하면서 탄생한 작품이다. 그 두 시간이 만나 어김없이 생성되는 간극과 틈 그리고 이질성. 이 또한 빈 공간(白)이 된다. 아마도 관객들은 그 빈틈에서 새로운 사건들(events)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장치는 작가의 자발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전 작업들에서도 권희수는 '경계'와 '사이'에 깊은 관심을 두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주목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이전 작업들과도 그 궤를 같이 한다.

권희수_동시에 바라보기_투명시트지에 실사출력_120×153cm, 120×164cm_2018

권희수 작업에서 끊임없이 흥미를 유발하는 지점은 처음에는 외부인으로 제주의 풍경을 만났으나,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들을 내재화하면서 시각화, 청각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신체의 개입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고, 듣고, 연구한 것들은 어김없이 '타자성'을 지니게 되며, 객체를 바라보는 주체의 부조리한 관점을 만들곤 한다. 고로 진정성을 지니기에 가장 단순하며 확실한 방법은 신체를 직접 개입시키며, 미시적으로 상황들에 접근하고, 고민과 반성을 동반하면서 바라보고, 듣고, 연구하는 것이다. 또한 연구와 글쓰기를 동반하면서 시청각 작업을 해왔기에 그 바탕은 더욱 탄탄할 수밖에 없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람과 풍경이 만나 이뤄지는 예측 불가능한 수많은 사건들. 권희수 작업은 이렇듯 바라보는 이마다 제각기 다른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예측불가능성을 담고 있다. 작가와 제주의 여러 장소들 사이에서, 작품과 작품 사이에서,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작업과 관객 사이에서 중첩되고 교차되면서 지속적으로 생겨나게 될 사건들이야 말로 권희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될 것이다. ■ 김지혜

Vol.20180916j | 권희수展 / KWONHEESUE / 權熙絒 / video.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