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학정 조사형展 / ??? / 鶴丁 趙思衡 / calligraphy   2018_0905 ▶︎ 2018_0911

학정 조사형_언필유중 言必有中 말씀은 반드시 핵심을 찌른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디아트플랜트 요 갤러리 THE ART PLANT Jo Gallery 서울 중구 명동길 74 (명동2가 1-1번지 명동성당) 명동 1898광장 B117호 Tel. +82.(0)2.318.0131

날마다 흰 종이 위에 말씀을 붓글씨로 새김은 바쁜 일상 가운데 마음에 담긴 말씀을 간직하고 필선과 묵향으로 몸과 마음을 온전히 내어놓는 일입니다. 좋은 말씀이 언제나 입에 달고 부드럽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쓰고, 아프기도 하지만 믿음으로 말씀을 간직하고 온몸으로 새기며 살아내려는 이에게 희망이고 위로고 기쁨입니다. ● 디아트플랜트 요 갤러리 초대전으로 마련한 학정(鶴丁) 조사형(趙思衡) 서예 개인전 『말씀』이 많은 이들에게 작지만 알찬 삶의 밑거름이자 알곡 열매와 양식이 되고, 약이 되고, 내일을 준비하는 말씀의 씨앗을 나누는 기쁜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 디아트플랜트 요 갤러리

학정 조사형_聽斯行之_들음은 곧 행함이라.

簡單明瞭한 선비精神의 形象(鶴丁 趙思衡 先生의 書寫精神을 보고) - 1. 서언에 ● 서예의 본질은 文 · 史 · 哲에서 찾아야한다. 이는 선비의 정신세계를 말함이며, 문자를 통하여 나타나는 근본적인 선비의 연원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것이 선비인가에 대해서는 본고의 요점이 아니므로 생략하지만, 서예의 본질에 대한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조형화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은 외면할 수가 없다. 필자의 한결같은 화두, '글씨를 잘 쓰고 못쓰는 것은 팔자소관, 그러나 무엇을 쓰는 것인가는 철학의 문제'가 이에 해당하는 것인데, 대개의 경우 그저 글씨를 잘 쓰기만 하면 그것으로 서예가 완성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음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서예는 당연히 글씨를 잘 써야 한다. 그것이 가장 우선하여 요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인가 무엇을 쓰는 것인가에 대한 요구는 대체적으로 소홀히 하고 있는 실정이다.

학정 조사형_富貴在天 부하고 귀한 것은 모두 하늘에 있다.

서예는 글씨를 잘 쓰되 무엇을 써야하는 것인가가 분명해야 한다. 이는 선비정신의 형상제시라는 것만 떠올리면 다른 설명이 필요없다. 그러니 우리는 그러한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鶴丁 趙思衡선생이 작품을 펼치는 글씨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는 이를 통해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鶴丁선생은 그의 이력에서 읽을 수 있듯이 이미 경향간에 널리 회자된 명사이므로 행적에 대한 별도의 설명을 나열한다는 것은 오히려 누를 끼칠 정도의 인격이 멋진 서예가이다. 그러한 그의 서예는 어떠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인가를 살펴보면 확실한 그의 인간적 분위기를 더욱 쉽게 읽을 수가 있다. 그는 訥言敏行의 실체라 할 수 있을 만큼 분명한 인격자이다. 스스로의 생각을 남의 눈치 보지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정의로운 작가이다. 대개의 서예가들은 적당히 알고 있는 것을 거의 전부를 아는 척하고 있지만, 鶴丁선생의 경우는 그러한 문제에 관하는 한 분명하다. 그는 공자의 말씀대로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인물이다.

학정 조사형_무신불립 無信不立_믿음이 없으면 일어설 수 없다.

지금시대에 이와 같은 맑은 정신자세를 확보하고 있는 서예가가 흔하지 않다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개는 그를 유덕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다. 그 덕이란 내 것 챙기기에 서두르지 않고 오히려 남의 형편을 살피기에 부지런하다는 말로 설명이 될 것이다. 이는 서예의 위상정립을 위해 같은 활동을 하면서, 지난 20년간 부단히 살펴서 내린 필자의 결론이다. 이러한 그가 서예전을 펼치면서 단견을 요구한다. 실로 간단한 작품구성에 대하여 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앞에 적은 대로 말은 어눌하게 하면서 실천은 민첩하게 한다는 그의 서예는 일반의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서예가라 하여 서사만으로 행세하는 허접한 껍데기를 벗고, 인간적으로 보일 수 있는 행실의 문자적인 전거를 적치로 내세운 그의 서예는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이제 그러한 그의 서예에서 어떤 것이 멋진 것인가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학정 조사형_淨 神_정신을 맑게 한다.

2. 선문의 범주 ● 선문. 글을 가려서 작품으로 만드는 것을 말함이다. 글을 가린다는 것은 작가의 정신세계를 바로 읽을 수 있는 척도가 된다. 따라서 이 문제를 심도있게 살펴보면 작가의 심성을 바로 읽을 수가 있다. 그의 선문은 성인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같은 말을 가려내도 작가의 표현능력에 따라서 그 말씀의 의미가 흐려지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아왔다. 그것은 언어와 조형의 조화를 놓치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鶴丁선생의 경우는 문제의 복잡성을 피하기 위하여 너절하지 않는 기치로 접근한다. 첫 번째의 특징으로 선택한 어휘들이 분명하게 와 닿는다. 거의가 간단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정신력은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다. 필자의 경험인데, 어떤 이가 李白이 쓴 草書歌行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는 그 내용이 어떤 형식으로 펼쳐진 것인지는 고사하고 오자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막연하게 베껴 쓰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작품성 운운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는 그러한 것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다. 이 말은 자신이 써놓고도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작가가 있다는 것의 다른 설명이다. 더욱이 본문의 해석은 고사하고 그러한 글을 무슨 이유로 썼다는 설명은 꿈도 꾸지 않고 있는 것을 전시현장에서 경험했기에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鶴丁선생의 경우는 오해의 시발점을 원천봉쇄하면서 자신의 서예관을 읽게 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가 바로 선비가 취해야 할 근본적인 서사자세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변함없는 화두는 바로 그러한 것을 쉽게 설명하여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펼치는 민족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실은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보다 남의 험담을 우선하기 좋아하는 민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鶴丁선생의 일상은 그렇지가 않다. 그것이 바로 작품으로 나타나고 있다.

학정 조사형_山不在高有僊名_산이란 높다고 명산이 아니다. 물이 깊다고 영한 것이 아니다. 그곳에 깃들고 품은 것에 있다.

그것은 누구든 읽어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마음이 없으면 꿈에도 없다'라는 속담을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작품을 통하여 그의 평상심을 읽을 수가 있다는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둘째로, 현대적인 서체의 조화를 포함하여 전통의 오체를 고르게 망라하고 있다. 그의 이력에서 읽을 수 있듯이 다양한 경험을 한 작가로서의 서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는 어떤 서체가 되었건 간에 망설임이 없으니, 실로 대단한 호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는 글씨를 그림을 그리듯이 즐기고 있다. 그것이 현대서예라는 테두리를 정해서 수용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鶴丁선생의 경우는 대전의 서체를 흩트리지 않고 도상화하는 방법을 서사력에 의지하여 펼쳐내고 있다. 이것이 孔子의 말씀인 遊於藝에다 비유가 될 것인가. 마지막으로 어렵지 않게 작품을 구사하고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내용이 짧아서 이해를 쉽게 하게하고 있으며, 그 깊이를 생각하게 하는 형상을 보여줌으로써 문자의 향기와 서사의 기운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것을 표현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일관할 수 있다는 것은 고문에 의지한 자신의 평상심 대비에서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낸 것이라 생각된다. 서예란 본디 이런 것이다. 작품에서 나타난 내용을 읽고, 그에 대한 상호처지를 생각하게 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지금의 경우 일단은 작품으로서 성공한 것으로 풀이를 한다. 그 부분을 鶴丁선생은 적절하게 그리고 유용하게 운용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학정 조사형_尊客之前不叱拘_귀한 손님 앞에서는 개도 꾸짖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3. 서상의 재미 ● 본디 鶴丁선생이 즐겨 서사하는 서체는 전서가 주무기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전서, 그 가운데 대전으로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번에 펼친 다양한 서체의 퍼레이드는 자금까지의 관념을 그대로 뒤엎었다. 한자서예에 있어서 정의된 오체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평상심을 성인의 글을 통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기억할만한 것이다. 많은 작품 가운데 몇 가지만 서체별로 추려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전서의 경우 대전과 소전의 절절한 어울림으로 작품구사를 하고 있는데, 먼저 觀過를 위시하여, 君子不器, 無信不立, 過猶不及, 敏則有功, 不忍大亂, 등이 있다. 그 중에 敏則有功과 不忍大亂은 내용의 중요성 때문인가 두 점을 서사하였는데, 초서로 표현된 것과 함께 조화미의 멋을 알 수 있도록 서사했다. 예서의 경우는 切問近思와 死生有命의 당당함, 여기서도 溫故而知新은 초서와 함께 두 점이 등장했다. 그와는 무관하게 서체의 조화로움은 더 이상의 요구가 불가하다. 같은 작품의 등장은 용어의 중요성으로 인함인가 威而不猛이 또 있다. 이는 작가의 평상심을 글씨를 통해서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더욱 눈에 드는 것은 오늘 날의 정치인들이 누구든 가슴에 새겨두고 신조로 삼아야 할 民無信不立이 있다. 선비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궁극적으로 이래야 한다.

학정 조사형_天道無親 常與善人_하늘의 도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사람을 골라서 친하지 않다. 누구이건 선한 자에게 베푼다.

해서의 경우, 누가 보든지 간에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서사의 깔끔함, 서흔에 군더더기가 없다. 최근 글씨에 이상한 화장을 하여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는 방법동원은 서예의 본질에서 비껴난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해서를 구사함에 있어서는 깔끔한 호흔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것을 鶴丁선생은 유감없이 표현해 냈다. 작품 가운데에는 中庸之爲德이라든가, 見得思義에서 작가의 평정심을 확실하게 읽을 수 있다. 작품의 감성은 이처럼 향수자의 마음에 드는 글과 글씨를 통해서라도 작가를 읽어내야 한다. 행초서의 경우, 그야말로 붓의 휘두름에 망설임이 없다. 호기로 무장한 붓놀림의 호방함은 필세로 나타난다. 君子思不出基位 라든가 不遷怒, 敬而無失, 寬則得衆, 行篤敬, 聞斯行之, 不忍大亂의 조화로운 표현은 행 · 초서를 서사한다고 하여 누구든 쉽게 서사할 수 있는 서태가 아니다. 모양을 따라가며 그리는 서가들이 즐비한데, 鶴丁선생의 경우는 시종의 정황을 하나로 꿰고 있다. 이러한 작품을 두고 멋진 서사의 정통구가라고 하는 것이다. 특히 和而不同에서는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개성에 관한 소견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고전의 진미와 서사의 조화가 이처럼 멋지게 서사된, 이러한 분위기의 연출력을 우리는 배워야한다. 마지막으로 이른 바 현대서이다. 遊戲를 우선하여 壽福, 克己復禮, 祈禱, 好德, 過猶不及 등의 서사기운에서 자형의 해체와 집합이 함께 어우러진 종합표현을 살필 수가 있다. 특히 過猶不及에서는 농담으로 표현된 먹의 맛이 멋지다. 이러한 서사의 제시는 더러 경험하고 있겠지만, 鶴丁선생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일반의 경우와 또 다른 맛이 있다. 그것은 그의 인간적인 관념에 의하여 생기는 표현성이라 생각한다.

학정 조사형_盖上帝愛世至以獨生子賜之 使凡信之者免沈淪而得永生_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드님을 내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장 16절)

4. 마치며 ● 한 작가의 예술인생을 원고지 몇 장에서 밝히기란 쉽지 않다. 그야 '잘 썼군'이라든가 아니면 연구가 좀 더 있었으면 등의 소견은 누구든 하기 쉽겠지만, 막상 발표된 다음을 생각하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작가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 한 것이고, 평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입 다물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짐작할 수가 있을까마는 서예는 그러한 어려움을 한꺼번에 풀어주는 열쇠역할을 한다. 글씨형태에 글씨를 쓰는 사람의 모든 것이 그대로 담겨있다는 것을 안다면 이 말의 본의를 쉽게 이해할 수 가 있을 것이다. 이번에 전시된 鶴丁선생의 작품을 통해서 글씨를 쓰는 작가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는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그 첫째가 단연코 정신집중이다. 무릇 모든 작품에 정성이 결여되면 작품의 신채가 흐려진다는 것은 상식이다. 둘째, 실천가능한 어휘의 선택이다. 서예란 내용을 통해서 노력하면 안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셋째, 글씨는 그리는 것이 아니고, 정신을 쓰는 것이라는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스스로는 이해의 접근이 쉽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글씨에서 글씨를 쓴 사람의 인품이 보인다. 그래서 고래로부터 書如其人이라고 했던 것이다. 간단히 적어본 필자의 견해를 한마디로 줄이면 간단명료한 선비정신의 형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필자의 견해가 작가는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 鶴丁선생! 이러한 필자의 생각에 그대도 동의하시는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 "儒人戱字象形謀, 五體寫書範本優. (선비 글자놀이 모양으로 꾀하자, 오체의 서사가 범본으로 우아해.) / 古籒調和行草味, 鶴丁筆跡正通遊. (옛글자 조화는 행초서 맛이라니, 학정의 필적은 정통으로 노니네.)"故鄭充洛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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