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10기 입주작가 릴레이전 & 오픈스튜디오

The 10th Artists-in-Residence of Yeongcheon Art Studio Relay Exhibition & Open Studio   2018_0918 ▶︎ 2018_1209

금영숙_묵.상. 1

오픈스튜디오 / 2018_1026 ▶︎ 2018_1030

금영숙展 / 2018_0918 ▶︎ 2018_0922 손영화_홍준호展 / 2018_1026 ▶︎ 2018_1101 문혜령_장연서展 / 2018_1105 ▶︎ 2018_1111 마크손_장세록展 / 2018_1116 ▶︎ 2018_1122 김지섭_서인혜展 / 2018_1203 ▶︎ 2018_1209

주관 / 영천시

관람시간 / 10:00am~06:00pm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YEONGCHEON ART STUDIO 경북 영천시 왕평길 38 (교촌동 298-9번지) 1,2전시실 Tel. +82.(0)54.330.6062 www.yc.go.kr

금영숙展 / 2018_0918 ▶︎ 2018_0922 치유의 적묵(積墨) ●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세계를 시각화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오로지 예술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금영숙 작가는 서양화를 전공하고 파리로 건너가 작품 활동을 하면서 이빛이란 아호를 사용하는 작가이다. 이방인의 빛이란 뜻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스스로 이방인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서예를 하면서 동양 즉 한국의 정서와 동양미학에 심취하였다. 금영숙 작가는 이방인면서 이방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써의 자아를 찾기 위해 늘 고민한다. ● 금영숙 작가는 한국에서 시작한 서구미술과 프랑스에서 시작한 한국의 정신을 서예를 motive로 하여 찾고 있다. 작가는 수분 함량이 거의 적은 짙은 먹의 초묵(焦墨)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먹을 쌓아가고 있다. 적묵(積墨)을 해서 다시 물로 씻어 내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글자 '사랑'을 쓰기도하고 지우기도 한다. 작가 자신의 삶과도 같다. 한국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프랑스로 가서 다양한 종류의 작업들을 쌓은 후 다시 버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드리핑 회화의 추상표현주의 미술행위와도 같은 격렬한 갈등의 시각화는 동양적 감성 즉 서예의 선과 많은 공통점을 갖는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러한 공통점이 서양미술을 전공한 작가에게는 실존의 갈등표현으로 먹과 글의 동적 깊이, 서예가 작품표현의 주요 수단일 것이다. 하지만, 수용과 충돌에 있어서 마치 광가(狂歌)처럼 버림과 치유에 있어서 몸부림치는 것이다. 어쩌면 금영숙 작가의 평온과 묵상의 치유는, 이 시대 우리가 모두 가지고 싶은 간절한 바램의 욕망일 것이다. ● 작가는 동양의 거친 붓과 먹, 두꺼운 한지들을 주로 사용하면서 적극적인 선(線)을 형상화하여 작품에 몰두하고 있다. 의미를 넘어선 무언가 형언 할 수 없는 몸짓으로 굵은 선과 가는 선, 곡선과 직선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시작으로 하늘을 상징하는 현(玄)의 색인 먹과 땅을 상징하는 누런 색의 종이를 사용하여 시각화하고 있다. 마치 봄날의 땅의 기운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신성하고 태초의 기운처럼 따뜻한 기운마저 감돈다.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는 듯, 한 붓의 움직임은 느리고 또한 빠르다. 이러한 여러 겹의 먹과 붓의 흔적들을 작가는 물로 씻어낸다. 반복해서 씻어냄은 성찰이며 또한 치유이다. ● 중국 남제(南齊)의 사혁(謝赫)이 지은 『고화품록』에 회화의 제작 및 비평의 기준이 되는 여섯 가지 항목이 있다. 기운생동(氣韻生動), 골법용필(骨法用筆), 응물상형(應物象形), 수류부채(隨類賦彩), 경영위치(經營位置), 전이모사(轉移模寫)이다. 작가는 최상위개념인 '기운생동'에 심취하고 있으며, 하위개념의 형태나, 색채, 구도 등 즉 형식들은 모두 버리고 있다. 반복적인 씻김과 붓의 운필은 이미 법과 형식들을 잊은 듯하다. 마음에서 이미 흥취가 일어 그 높고 낮음이 구분하기가 힘들다. 심정(心正)-인정(人正)-필정(筆正)-서정(書正)으로 이어지는 금영숙 작가의 바른 마음이 곧 작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쓰고 그리는 이빛, 이방인의 빛이 세상을 비추는 묵상과 평온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 박세호

손영화_Bear Fruit_수채_30×30cm_2018

손영화_홍준호展 / 2018_1026 ▶︎ 2018_1101 자연의 순리를 통해 배우는 생명력과의 조응(照應) ● 작가 손영화는 2011년부터 일관성을 유지하며 제작되어진 그녀의 작품 속에는 '인고'와 '결실'과 같이 자연에서 얻어지는 생명의 소중함과 삶의 원천으로 귀결되어지는 미의식이 『bear fruit』이라는 주제로 관통되어 진다. "인고의 시간 뒤에 얻어지는 아름다운 결실"을 작품으로 인식하는 미의식 속에는 창작을 위한 예술 활동이 주는 고뇌와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으며, 강인한 생명력을 조형언어로 표출하려는 실험과 노력으로 이어져 가고 있다. 마치 우리의 전통회화에서 느낄 수 있는 간결함과 공간감을 고스란히 품고 있어 서양화가 주는 조형성과 구성미와는 사뭇 다른 점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화조화(花鳥畵)에서 볼 수 있는 간결한 사물의 묘사력과 문인화(文人畵)가 주는 공허한 여백의 깊이감은 그녀 작품이 주는 절대적 가치로 여겨진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생명이 없는 물건 즉 화초, 과일, 죽은 고기와 새, 악기, 책, 식기 등을 그린 회화(그림)"을 일컫는 정물화의 의미에서 벗어나, 생명의 원천과 결실이라는 자연의 순환적 요소가 깊숙이 내재되어 있음을 직관할 수 있다. 열매가 달린 나뭇가지 이면에는 자연을 이어주는 나무의 몸체가 가려져 있고, 나무뿌리를 통해 생명의 근원이라는 자연적 섭리를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간결하고 소박한 구도와 기름기 빠진 담백한 수채화의 표현은 화려한 장식적 요소에서 벗어나 단아한 절제미를 감각적으로 표출해 내는 세련된 조형미로 종결되어진다. ● 작가는 그의 작가노트를 통해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이겨내고 결실을 맺는 강인한 생명력의 자연처럼 나도 아름다운 삶을 꿈꾼다. 저마다의 결실은 다를 것이다. 내 결실의 의미는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 가는데서 오는 행복. 그와 동시에 좌절과 인고의 시간이 있었다. 작품은 인고의 시간 후에 얻는 아름다운 결실을 의미한다." 라는 삶의 경험이 내재된 글에서 인고의 아픔을 무릅쓰고 미래와 희망으로 귀결되어 결실을 얻고자 하는 작가의 투철한 직업의식을 느끼게 해준다. 강인한 생명력의 아름다움은 비로소 '결실의 표상(表象)'으로 작품 속에 투영되어 새로운 예술적 조형성과 의미를 부여받게 되며, 아픔을 경험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자아의 가치를 찾아가는 것이 예술가의 진정한 직업의식일 것이라는 확신으로 자기 스스로를 무장해 가고 있는지 모른다. ● 톨스토이는 그의 저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자신이 경험한 감정을 자기 자신 속에 불러일으키는 것, 그리고 이것을 자기 속에 불러일으키고 난 다음에는 운동, 선, 색, 소리 또는 말에 의한 표현 양식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도 그와 같은 감정을 경험하도록 그 감정을 전달한다. 이것이 예술 활동이다." 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는 예술가의 철학과 사상, 경험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활동을 통해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사고의 틀 속에 갇혀 있던 관념을 새롭게 인식하고 이해하며, 표현하는 행위를 통해 '의식의 확장' 즉 '사고의 다양성'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그녀 역시 인고의 시간을 통해 경험했던 절대적 아픔을 화가이기 이전에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자연의 신비와 생명과의 조응(照應)을 통해 경험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인고의 아픔을 이겨내며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풍요롭게 느껴가는 그녀의 감성이 아름다운 예술로 새롭게 승화시킬 기대해 본다. ■ 김태곤

홍준호_Deconstruction of Idols ; Religion #009_ 구겨진 종이에 빔프로젝트 사진, 피그먼트 프린트_120×93.87cm_2018

'Deconstruction of Idols' : 현상의 지각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 ● 작가 홍준호는 우상, 다시 말해 종교-적 성향의 우상을 다룬다. 아니, 보다 적확히는 종교(-화 된 것들), 그리고 이데올로기, 권력, 신화 등이다. 홍준호가 우상을 주제로 삼게 된 배경엔 2016년 많은 국민들이 삼삼오오 거리로 나와 정상적이지 못한 국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쏟아낸 촛불집회가 놓여 있다. 과거 사진과 회화의 경계 넘기라는 방식을 통해 작가 자신이 경험한 삶과 죽음, 정체성의 문제1)에서 살짝 벗어나 동시대 우상을 다루게 된 계기도 해당 집회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홍준호의 시선은 부정한 정치권력에 관한 국민투쟁에 초점을 맞추기보단 우상화(-에 버금가는) 현상에 관한 지각에 무게를 뒀다. 동시에 해체의 전략을 통한 새로운 대안으로 받아들였다. 작가에게 이는 보다 광활한 대지로 나아가는 인식자유 및 해방과 맞닿는 것이었고, 사상과 이념에 관한 리얼리티가 아니라 어떤 원인과 결과의 동일성을 통한 인과관계 자체2)에 중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 '우상화라 할 수 있는 현상의 지각과 인식자유 및 해방'은 동일성이라는 인과관계를 매개로 표상화 되지만 조형적으론 찰나의 기록과 저장, 영원이나 불멸의 의미적 동일성 등과 같은 사진내외의 특성을 외면하지 않는다.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모더니즘의 형식주의와 개인성을 이탈한 포괄적 관점에서 우상에 관한 자신만의 시각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건 이러한 우상(-화 된 것들)을 조형언어화 하기 위해 작가가 선택한 방법론이 '우연성'이라는 점이다. 그의 옛 작업들이 물질과 물질(종이×잉크)의 만남을 통한 소극적 우연성을 강조했다면 근작은 우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존 형상의 고정적 이미지를 붕괴시키는 방식(해체)을 사용하고 있다.3) ● 그는 이러한 붕괴와 흐트러짐을 자유의 개념으로 전치시킨다. 작가에 따르면 그것은 곧 선택을 넘어 스스로 해방되는 인식-지각(깨달음)의 해체-자유와 갈음된다.4) 심지어 사진매체가 가진 요소와 소재로써 우연성을 활용해 우상을 해체한 자유의 부여가 예술의 '자유의지'에 종속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까지 나아간다. 홍준호의 작업은 시도와 결과가 어느 정도 예상되는 사진매체의 특성에서 이탈한 등사의 방법론을 새롭게 적용해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교적 흥미롭다. 프린트된 이미지를 구겨 잉크와 종이를 분리한다거나, 보다 적극적으로 우연성을 확장하기 위해 작가적 개입/행위의 축소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 또한 눈에 띄는 부분이다. 특히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명사인 '우상'은 다분히 관념적일 수 있는 주제임에도 나름의 방식으로 시각화-조형화하려는 고된 과정은 인상적이다. ■ 홍경한

문혜령_female-Utopia

문혜령_장연서展 / 2018_1105 ▶︎ 2018_1111 그녀가 돌아왔다 ● 그녀가 돌아왔다. 아이를 안고. 오랜만에 만난 그녀의 얼굴에서 원래 그녀가 가지고 있던 여장부의 이미지가 언뜻 사라진 것만 같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얼굴 위에는 그러나 무언가 더욱 진지하고 보다 거친,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결연한 의지, 무서울 정도의 격한 열정 등이 한데 섞인 복합적인 표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다 그 아이 때문이었다. 긴 팔에 안긴 검은 머리, 붉은 얼굴을 한 꼬물꼬물 거리는 그 보드라운 생명에 대한 그녀의 강한 집중력이 무척이나 동물적이고도 숭고해 보이는 것까지 말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맘 좋은 년 속곳 마를 날 없다(Performance, 2008)'를 비롯한 전위적인 페미니즘 계열의 퍼포먼스나 다소 과격하고 급진적이었던 다른 어떤 작품과도 비견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새 작품을 들고 나타났다. ● 영남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문혜령 작가는 자신의 작품과 생활 전반에 있어 '여성 예술가', '예술가인 여성' 등의 수식어를 완벽하게 드러내보이는 작가이다. 그녀에 관한 이 두 수식어를 이해하는 일은 한 개인, 한 예술가로서의 그녀에 대해 이해하는 것과 같다. 이는 아마도 그녀가 표현하고자 하는 여성주의의 지향점이 바로 그러한 '자연스러움'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의 예술가,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를 비롯한 많은 여성 작가들이 위계질서를 명분 뿐인 차별이라 꼬집으면서도 페미니스트라 불리기를 거부했던 이유는 이렇듯 온 몸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생물학적 여성으로서의 본질에 있었을 것이다. ● 그녀의 작품은 'Female - Utopia'라는 제목처럼 여성의 성(性)에 관한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화면 중앙에 파란색과 노란색 등의 강한 원색으로 묘사된 비밀스러운 문, 여성의 내부로 향하는 통로가 묘사되어 있고, 이를 통해 어딘가 존재하는 이상세계로 달려가는 듯한 반인반수(半人半獸), 즉 사슴의 하반신을 가진 긴 머리의 여성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강한 대조를 이루는 검은 배경을 뒤로한 채 전면에 위치한 한 여성의 실루엣도 보인다. 그 외곽선 안은 구름 문양, 물결 문양, 고운 빛깔의 복숭아 꽃, 한가로이 뛰어노는 사슴 등 우리나라 전통의 십장생도에 등장하는 여러가지 요소들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상서로운 이미지들과 함께 그녀가 표현하고자 하는 여성은 그 특유의 아름다움이 강조되어 자연의 일부로서 묘사되어 있다. 즉, 남성과의 생물학적 차이점이 본질 혹은 미덕으로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반은 사슴인 여성의 머리카락이 초록 풀들과 그대로 연결되거나 여성의 눈물이 파란 물결 문양으로 흘러 들어가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은 이러한 내러티브를 통해 생명의 근원, 자연의 일원으로서의 여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보다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그녀의 철학을 보여준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의 편가르기가 아니다. 금기시되어 온 여성의 성기를 오히려 강조하여 인류가 유지되어 온 방식,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에 대해 보다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의 그것과 반대로 '감추어지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등으로 치부되어 온 여성성과 그 오랜 오해의 역사 속에 길들여진 여성의 삶에 대한 수동적인 태도에 대해 그녀는 자신만의 색채로 그것이 실은 생명과 인류의 근원이며 이제는 새로운 역사를 적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 이렇듯 자연주의적인 페미니즘은 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녀의 작품에 두드러진 경향으로 나타났다. 언뜻 과격해보이는 그녀의 퍼포먼스, '공감(1999)'은 자신의 신체를 매개체로 여성을 나타내는 x 염색체의 'x'를 형상화하는 듯한 포즈를 극적으로 연출함으로써 여성의 성과 사랑을 호소한 작품이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스팽글이나 비즈 등의 장식적 요소들을 화면에 적극 차용한 작품들에도 나타나는데, 2008년 작 '심상으로의 여행'에서와 같이 봉긋한 여성의 가슴의 유려한 곡선이나 따뜻한 색감 등은 이후의 민화 이미지를 차용한 작품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선인장과도 같은 형상으로 화면에 부유하는 듯 표현된 가슴은 여성의 생명력, 에너지 등을 어필하고자 하는 의도로 비쳐진다. 즉 그녀가 표현하는 것이 여성의 젖가슴이나 성기면서도 그 결과로서의 작품은 선과 색채 등의 시각적 요소로서 먼저 인식되는 것이다. 대상이 갖는 속성, 그것에 대한 우리의 오해와 선입견이 화려한 오브제, 아름다운 선과 색의 유기적 움직임, 온화한 민화적 요소들 속에서 타협을 이루며 그녀는 그렇게 금기시되는 것들과 상서롭다고 간주되는 것들 간의 인식 전환에 대해 은근한 암시를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소설가, 닉 혼비(Nick Hornby)는 그의 소설, 'Nipple Jesus'에서 여성의 젖가슴의 사진이 하나의 망점으로서 이용되어 만들어지는 예수의 얼굴 그림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소설은 그 작품을 둘러싼 논란과 헤프닝으로 전개되는데 실제로 미국의 사진작가, 안드레 세라노(Andres Serrano)가 자신의 오줌이 담긴 작은 유리 용기 속에 십자가를 담아 연출한 작품, 'Piss Christ'를 떠올리게 한다. 이 두 예술가가 작품을 통해 던지는 이슈는 '성스러운 것과 불온한 것의 경계'인 것이다. 붉은 오줌 속에서 광배의 반짝임과도 같이 노랗게 빛을 방사하고 있는 그의 작품은 그 재료가 무엇이든간에 시각적으로 너무도 성스럽다. 문혜령 작가는 여성의 유려한 곡선과 강한 원색의 민화적 요소들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훔쳐 보는 야한 동영상, 싸구려 모텔에서 감정 없이 이루어지는 성행위 등 부정적으로 연계되는 우리의 여성성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강한 논란을 일으킨 안드레 세라노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고매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말이다. ● 한때 여성은 세상의 중심이었다. 고려시대 때도 그랬고, 영국의 창녀들이 자신들의 사업을 통해 과부와 고아를 후원하는 등 사회 복지에 앞장서는 주요 세력이었던 적도 있었다. 변질되고 사그라드는 미투 운동, 혼인과 출산에 대한 기피 현상, 어느 편에 서기도 혼란스러운 성매매, 간통, 낙태, 미혼모, 영아 유기 등의 갖가지 문제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 전반에 자리한 여성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실감한다. 어릴 때부터 노란 저고리, 다홍 치마 등 한복의 고운 색깔이 좋았다는, 장수와 길흉화복을 상징하는 십장생도와 우리 전통 사상들에 여성으로서의 자신과 아이의 모습을 겹쳐 놓는 문혜령 작가를 보면서 건강한 여성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 전환이 이처럼 자연스러워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색깔과 이미지, 철학 등에 대한 그녀의 애착은 여성성, 한국인으로서의 미의식 등이 본능적으로 작품에 반영된 것임을 보여준다. '생명의 정원(2009)', '여자의 몸은 궁전과도 같다(2009)' 등 다수의 작품들을 통해 그녀는 물론 여성이 받는 억압과 차별을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약한 발로 악의 세력의 상징인 뱀의 머리를 바수고 있는 성모 마리아처럼 그녀는 여성이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생명력과 인류애, 주체로서의 당당함 등을 보다 호소력 있게 드러내며 진정한 여성성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 타마라 젠킨스(Tamara Jenkins) 감독의 신작 영화, 'Private life'(2018)는 유괴를 제외하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아이를 갖고자 했던 난임 부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인공 수정, 체외 수정 등 그들의 험난한 계획 임신의 과정과 번번이 이어지는 실패를 보면서 너무도 자연스러워야 할 인류의 지속 방식이 왜 이렇게까지 어려워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는 없고 아이를 낳기 위한 도구로서의 인간으로 전락해버린 주인공들은 하루가 다르게 발달해가는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현대인이 되려 애쓰다 고령 출산, 환경 호르몬으로 인한 난임 문제까지 떠안게 되며 결국 화해와 이해의 과정을 통해 그것이 비단 여성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의 분신인 듯 화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문혜령 작가의 귀여운 딸은 이렇듯 우리가 개선해야 할, 새로이 물려줘야 할 여성성에 대한 인식, 그 시작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그 어떤 인위적인 방법도 이보다 완벽할 수 없다고, 결국 우리에게 창조의 고통을 감내하게 하는 인류애가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본능이라고 말이다. 문혜령 작가는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처럼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그림을 통해 극복하며 한 여성으로서, 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용기 있게 영위해 가고 있다. 그녀의 작품은 비뚤어진 미투 운동, 서로 편을 가르고 등을 돌리게 만드는 페미니즘에 지쳐가는 우리를 위로하며 진정한 여성주의란 서로를 보듬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 김윤경

장연서_빛의 조각(겉면 첫장) light-sculpture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8

빛의 은유적 표현 ● 빛은 오래전 부터 모든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이며 생명의 원천으로 생각해 왔다. 빛은 인간이 생활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며, 사물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빛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형태를 파악하게 하며 입체적으로 지각하게 하고, 색채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빛은 형태 윤곽과 색의 변화를 만들어 준다. 서양의 고대에서는 빛에 대하여 지금과 같이 과학이 발달하지 않아 과학적인 접근보다는 철학적인 접근을 하였는데 빛을 신과 같은 절대자라고 생각하였으며 생명의 원천을 빛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빛은 주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지녔으며 상징적인 요소도 지니고 있다. ● 빛이 없으면 빨간색, 노란색, ... 등의 색상이 없으며 세상 사물들의 색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빛이 비추어질 때 비로소 색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빛은 문화, 종교, 신화, 경험, 기억, 학습 등에 따라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다르게 표현 된다. 빛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신의 정신과 힘, 생명, 신성함, 영성, 기쁨을 상징하였으며 성경에서는 선함과 신을 상징하였다. ● 인간은 빛을 물리적으로 지각하기도 하며, 정서적인 감정에 따라 심리적으로 지각하기도 한다. 물리적으로 지각하는 경우는 고대부터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과학적 실험에 의한 이론적 정의를 말한다. 심리적으로 지각하는 경우는 빛에 정신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빛의 물리적 속성과 심리적 속성의 요소가 모두 결합되어 있을 때 빛을 시각화하고 형상화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작품을 제작한다. ● 장연서는 빛을 작품에 표현하고 있는 작가이다. 빛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냄새도 없고, 형체도 없다. 그러나 빛은 존재하고 있으며 살아가는데 있어 항상 느끼고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와 같은 빛을 장연서는 시각화 하였다. 시각화된 빛은 그림 속에서 붓의 터치를 통해 작은 조각으로 변화를 일으키며 나타나고 있다. ● 장연서의 최근 작품들에서는 물위에 반사되는 빛, 땅위에 반사되는 빛, 들판 위에 반사되는 빛, 꽃밭 위에 반사되는 빛, 다양한 빛의 표현들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하나의 색은 하나의 빛에 의해 나타나지 않고 여러 가지 색과 방향의 빛에 의해 형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직접적으로 바로 나타나 있는 빛의 색채, 반사되어 나타나는 빛의 색채, 옆으로 부딪쳐서 나타나는 빛의 색채, 다른 물체에 의해 반사되어 나타나는 빛의 색채 등 다양하게 빛의 색채가 표현되고 있다. ● 그리고 장연서의 빛을 표현한 몇 개의 작품들은 인상주의 작품을 연상하게 한다. 인상주의는 색채표현의 혁신과 발전을 가져왔으며 회화표현에 있어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태양광선의 변화에 의해 생기는 물체의 색상변화에 대해 연구하였는데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였다. 그리고 색채나 색조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표현하려 하였다. 장연서도 인상주의자들이관심을 가졌던 빛에 의해 변화하는 색채를 작품에 나타내었다. ● 이와 같은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하여 장연서는 " 나의 작품들은 빛의 조각들을 화면에 채우는 것입니다. 빛은 모였을 때 나타나는 형상은 제각각 다르고 그 모습을 각자의 경험으로 상상할 수 있는 작업들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빛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시대를 공존하고 있으며 서로 다른 빛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 그 빛들은 모여서 세상을 아름답게도 만듭니다. ...빛의 조각들은 모여서 하나의 색이 되기도 합니다. 빛이 가진 아름다움을 화판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장연서는 빛을 나타내는 색채와 형상들을 작품 속에 표현하여 사람들과 소통하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장연서는 인상주의자들과 같이 빛에 의한 순간적 인상을 표현하고 있다. 일렁이는 물결을 표현하였고, 무성한 숲과 나뭇잎, 풀잎, 꽃나무 등을 붓 터치로 묘사하였다. 그렇게 표현한 작품에서는 자연의 생기가 넘치고 있다. ■ 오세권

마크손_분리되고 조작된 신체 02_혼합재료_160×55cm_2018

마크손_장세록展 / 2018_1116 ▶︎ 2018_1122 기억에 도사린 욕망 ● 작가는 언제나 계기를 마련하려는 자다. 미적성과를 쟁취하기 위한 작가의 노력은 자신의 작업이 구현하려는 내용에 대한 당위성을 쌓아가는 것이며 그것은 치열한 고민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광스런 성공이냐, 처절한 실패냐로 분명히 나눌 수 없는 바, 그 시도로서 의미를 가진다. 손광목(이하 '마크손')은 현재 그 시도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 마크손의 포트폴리오를 받고 들었던 의문이 있다. '이 포트폴리오가 과연 한 작가의 것인가?' 그만큼 그의 작업은 일단 '다양함'이라는 단어로 축약되었다. 그리고 이는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아무 정보 없이 전시장을 들어섰다면 각각의 작가가 참여한 기획전과도 같이 보일 것이다. 그만큼 마크손의 작업은 사진부터 설치 그리고 컴바인 페인팅(combine painting) 작업까지 다채로움을 과시하고 있었다. 사실 '다양함의 추구'라는 말은 작가에게 양날의 검과 같이 작용하기도 한다. 작가가 특정 시점(時點)까지 이룩한 결과물의 집합인 맥락은 항상 작품으로 증명되기에 이는 작가의 '성취'이자 동시에 '지향성'을 제시한다. 그 두 요소 사이의 연결고리가 발견되지 않으면 자칫 중구난방(衆口難防)이라는 오명을 쓰기 마련이다. ● 지금까지 마크손 작업의 대부분은 '기억'과 '욕망'에 근거하고 있다. 살아오면서 그의 손을 거쳤던 대상이나 그가 방문했던 곳에서 느낀 감정, 그가 도달하려는 지점에 있는 작가의 작업들에 대한 나름의 오마주(homage)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 「Light and Spectrum」(2017) 연작은 극명한 기억의 흔적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자신이 어렸을 때 갖고 놀던 장난감, 입었던 옷이나 신발, 썼던 원고, 일상에서 발견했거나 사용했던 대상 등이 컵의 형태의 얼음에 뭍혀 있고 이를 촬영한 것이 작업의 내용이다. 작가는 '냉각'의 과정을 거쳐 그 기억을 박제화하려 했는지, 추억하려 했는지, 원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낯선 감흥을 이끌어 내려 했는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연작은 작가의 개인사에 집중한 바를 극명하게 보여주고자 한 의도로 읽힌다. 특히 대상이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라는 점이 그렇다. ● 「바이마르」(2018) 연작 또한 「Light and Spectrum」 연작과 마찬가지로 기억의 흔적이다. 이 연작의 차이는 개인사에 천착한 이전 작업에서 개인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모래와 나뭇가지를 캔버스에 붙인 이 컴바인 페인팅 작업은 작가의 말에 의하면 아우슈비츠를 방문하고 느낀 바를 담아낸 것이라고 한다. 일견 그곳의 참혹함에 대한 비통함과 학살로 스러진 이들에 대한 연민도 느껴지지만 달리 보면 과거 끔찍한 현장이 전 인류의 관광지가 되어버린 아이러니에 대한 작가적 고통도 엿보인다. 그것은 메마른 모래의 거친 표면으로, 나뭇가지로 드러난다. ● 이와 같은 흐름을 견지한 작가가 최근에 내놓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2018)는 작가 개인의 감정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흥미롭게도 시간과 공간의 복합적 층위를 가진다. 먼저 캔버스로 짜여진 박스를 들여다보면 이른바 동시대 미술사의 단면을 보여준다. ● 흡사 데미안 허스트나 루치오 폰타나, 솔 르윗, 잭슨 폴락 등 현대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작가들을 연상시키는 작업이 층을 이루며 탑처럼 쌓아올려져 있기 때문이다. 욕망의 분출은 수직의 외연으로 드러나는 바, 이는 그들에 대한 헌정과 동시에 작가가 쟁취하고자 하는 바를 상징하는 것과 같다. ● 따라서 캔버스로 만들어진 박스형태는 그야말로 욕망의 옵스큐라라 칭할만 하다. ● 다만 작가는 현재 결여 혹은 목표에 다다르기에 불편한 상황을 겪고 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의 작업에서 보듯, 그가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또 다른 증거물을 제시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래서 그를 좀 더 지켜볼 요량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말이다. ■ 황석권

장세록_행복을 찾아서_복주머니 외 혼합재료_460×910cm_2018

장세록의 복주머니: 복을 나누어 드립니다. ●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삶의 주요한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방대한 철학사상에서 행복은 주요 논제이면서 궁극의 목표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외에 다수의 철학자,사회사상가, 성직자에게도 행복은 주요 논제이다. 철학적 논의에서 그리고 일반적인 통념에서 행복은 개인의 노력으로 가능하지만 복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전통 풍습에서도 행복보다 복을 기원한다. 우리의 풍습 중에는 새해가 되면 복주머니를 만들어서 친척이나 자손들에게 나누어주는 풍습이 있다. 일년 내내 좋은 일만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복주머니는 새해의 좋은 선물이었다. 한국민족백과사전에 의하면, 이러한 민간 풍습은 조선시대 가례(嘉禮 :궁중의 경사스러운 예식)가 있을 때나 음력 정월 첫번째 돼지날(亥日)이나 첫번째 쥐의날(子日)에 종친(宗親)과 신하들에게 복주머니를 나누어 준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복주머니를 나누어주면서 서로의 복을 기원했던 그 유래가 어쨌든 지금까지 이러한 풍습은 이어지고 있다. ● 이와 같은 풍습을 주제와 작품으로 삼는 작가가 있다. 그 작가는 바로 장세록이다. 작가는 전통적인 의미를 가진 복주머니로 우리에게 복을 선사한다. 작가는 직접 천을 재단하고 바느질하여 복주머니를 만들고 다양한 형태의 설치를 통해서 전시장을 밝고 경쾌하게 구성한다. 이러한 시각적 효과로 작가의 전시는 생기가 가득하다. 작품과 전시에서 느낄 수 있는 이미지와 달리 작가의 작품 세계는 여인으로서의 삶이 그 바탕을 이룬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삶과 작품이 얽혀 존재한다. ● 장세록의 복주머니는 복을 나누는 풍습만큼이나 규방문화(閨房文化)와 관련을 가진다. 바느질은 우리의 규방문화로서 유교적 세계관의 산물이다. '규방(閨房)'은 부녀자가 거처하는 방을 말하며 규방문화는 유교의 영향으로 여성들의 바깥출입이 제한되면서 집안에서 행해지는 여성들의 문화를 통칭한다.규방문화에서 규중칠우(閨中七友)는 바느질에 필요한 일곱 가지 도구를 이르는 말로 인두, 골무, 바늘, 자, 실, 가위, 다리미를 가리킨다. 따라서 자수, 의복이나 장신구 등의 제작이 규방문화의 중심이었고 바느질은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여인들은 통제된 생활에서 자신의 소망을 바느질 한 땀 한 땀에 담았던 것이다. ● 장세록에게 바느질은 유교적 관습의 틀 속에서 살아온 여인의 삶을 상징하고 있다. 유교의 영향은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다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는 완전히 유교적 관습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작가의 세대들은 지금의 우리와 또 다른 시대를 살아왔다. 작가는 아내, 어머니, 며느리로 살아가면서 인내, 사랑, 희생에 대한 고민 없이 우리 시대의 어머니들이 그렇듯 모든 것이 당연했다.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면서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 아쉬움, 후회 그리고 우리 시대,우리 사회에서 여성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생각을 작품에 담기 시작했다. 작가는 삶에 대한 생각과 복에 대한 염원을 한 땀 한 땀 바느질하여 복주머니를 만들었다. ● 어머니로서 자식에 대한 염원을 담아 복주머니로 복을 나누고 삶을 헤아리게 하는 그녀의 작품에는 자식들의 복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도 깊게 자리잡고 있다. 자신이 나눈 복주머니 만큼 자식들과 그 자식들의 자식들이 복된 삶을 살게 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작가는 예술가이자 어머니로서 작품을 제작하고 그 복을 나눈다. 우리는 작가의 작품 앞에서 무한한 사랑과 정성을 마음에 담고 두 손에 복을 담아간다. 작가의 작품은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 서희주

김지섭_이상한 풍경5 Dreamins landscape5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18

김지섭_서인혜展 / 2018_1203 ▶︎ 2018_1209 어두운 농담 ● 김지섭의 이번 신작은 그 어떤 정보 없이 보더라도 전시 공간을 빠져나올 때쯤이면 내용이 이해될 것이다. 두 가지 단서는 달자. 하나는 이 그림들이 관객에 따라서 호불호를 탈 게 분명하다. 또 하나는 동시대 혹은 우리가 막 지나온 과거에 걸친 미술 경향과 서브컬처에 박식할수록 더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현장에서 혹은 지면으로 이 작품들을 확인했다면, 그 누구도 그림이 전달하는 분위기가 나긋나긋하다고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김지섭의 회화가 가진 매력 가운데 상당 부분은 악취미(bad taste)와 연관되어 있다. 그림에는 섬뜩하고 음산한 공기가 흐른다. 작가 스스로도 밝힌 바가 있는데, 관객인 우리가 그림 속 인물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작가의 자화상으로 짐작되는 캐릭터들(그 또한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복제된 클론)이 우리를 보는 것 같다. 사실 이것은 많은 대중문화 집적물에서 곧잘 다루어져 왔던 호러물의 클리셰이기도 하다. 음산한 저택에 걸린 초상화나 사진이 눈동자를 굴려가며 가엾은 방문자들을 주시하는 상황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캐릭터가 머무는 아니, 툭 내동댕이쳐진 공간은 현실로부터 더욱 거리가 먼 가상의 장소다. 그것은 1966년 영화 『마이크로 결사대』(원제:Fantastic Voyage)에서 축소된 잠수정을 타고 들어가 본 인체 내부의 모습처럼 낯설고 환상적이지만 동시에 엉성한 연출 장면이다. 그것은 기술이나 자연과학의 힘을 빌려 재현한 장면이 아니라 현실성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가다가 빚어진 경관이다. ● 이번 전시의 계획 단계에서부터 나 혼자 가지고 있던 생각이긴 한데, 지금 그의 작업은 화이트 큐브 식의 표준 공간에서 매력이 줄어드는 면이 있다. 예컨대 차라리 들어가고 나오는 곳이 따로 있는 긴 터널 구조의 전시를 상상해보자. 그림 속에 레퍼런스로 암시되거나 표현된 특성을 이래저래 따진다면, 결국 김지섭의 회화는 미술시장에서 환영받기보다 실험적인 측면을 더 부각시키는 미술로 분류될 것이다. 일단 그의 회화에는 한 캔버스 사각 틀 안에서 구현되는 모든 상황이나 사건 전개, 혹은 시점의 통일성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 빠져있다. 그림의 어떤 부분은 굉장히 세밀한 묘사가 이루어지고, 또 다른 부분에는 조악한 재현이 제시된다. 그게 스타일이 될 수는 있다. 그림 속 등장인물 자체가 관객이 받아들이는 것 이상으로 아이덴티티의 혼란을 겪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다. 이런 내적 분열은 작가와 관객이 함께 가지는 불안을 더 깊이 끌고 간다. 당연히 그의 미술을 접하는 일은 불편한 감상이 되는데, 그게 나쁜 건 아니다. 동시대 미술은 이보다 훨씬 잔혹하거나 어이없거나 괴기스러운 주제로 말미암아 전통적인 미 개념으로부터 한참을 떨어져 있지 않나. 여기에 관객들은 이미 잘 훈련되어 있다. 그들에게 김지섭의 작업은 오히려 하나의 서브 장르로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는 점이 내 걱정이다. ● 막스 베버(Max Weber)가 제시한 디스토피아적 전망은 내가 그의 작품을 보면서 떠올렸던 이론이다. 획일화된 구조 속에 무력하게 정렬된 인간상은 합리적인 관료제가 현대 사회를 이끌었지만 사람들을 철장(iron cage) 속에서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모습에 다름 아니다. 변형된 관료제는 미술평단으로, 미술교육으로, 미술시장으로, 미술행정으로 그를 틀 속에 집어넣었다. 이게 싫으면 예술을 포기하면 된다. 이처럼 너무나 선명한 거대 모순 앞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던 프란츠 카프카는 문학으로 부조리한 세계를 베버와 공유했다. 카프카가 저지른 농담을 김지섭은 미술로 풀어내고 있다. 그가 속한 이 미술계를 어두운 농담으로 풀어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과업을 지금 여기서 치러내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현실과 예술은 그렇게 닿아있다. ■ 윤규홍

서인혜_버무려진_광목천에 채색, 대나무 봉에 설치_가변크기_2018

죽음과 결합된 아름다움 ● 서인혜의 작품에서는 화면 하나하나가 마치 투명한 그릇이라도 되는 양, 혈액이 연상되는 밀도 높은 액체가 투명한 매질 속에서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더 시간이 지나면 균질 화 되겠지만, 작가는 과정중의 형상을 여기저기 풀어놓는다. 균질화란 해결, 또는 죽음이다. 유기체적인 비유에서 균질화란 해결보다는 죽음을 떠오르게 한다. 주변과 구별될 수 있는 경계가 없는 것에서 우리는 무생물과 같은 죽음을 본다. 경계가 해체되는 과정은 죽음의 시작이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언제든 자리를 바꿀 수 있는 삶의 짝패이다. 서인혜의 작품에서 붉은색으로 나타나는 혈액은 죽음 보다는 생명, 정지보다는 과정에 더 가깝다. 순간에 고착된 이미지를 완화시키기 위해서 작가는 비슷한 스타일의 시리즈 작품을 함께 배열한다. 작품마다 붉은 물감이 퍼져나가는 형태가 달라서 여러 개를 같이 놓고 보면 어떤 시간적 흐름이 느껴지는 것이다. ● 그 밀도 높은 액체는 혈액, 특히 생리 혈을 떠오르게 하는데, 그것들은 종이 보다는 천위에 있을 때 보다 직접적이다. 최근 한 기획전에서 선보인 작품에서는 낡은 재봉틀과 붉게 칠한 천, 그리고 평면 작품들을 함께 걸어놓아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낡은 재봉틀은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작가보다 더 오래된 세대를 가리킨다. 그러나 작가는 재봉틀을 붉은 실과 연결시켜 과거의 질곡과 모순이 현재에도 지속됨을 강조한다. 재봉틀 옆에 비치된 책제목 『여자의 일생』--할머니의 유품이다—처럼, '여자의 일생'은 한 여성이 태어날 때마다 되풀이 된다. 물론 사회가 진보하고 있으니 만큼 똑같은 반복이 아니라 차이가 있는 반복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서인혜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피의 이미지는 보다 근본적인 것을 가리킨다. 혈연은 종족번식의 본능이라는 자연의 법칙 외에 사유재산을 계승하는 적자(嫡子)의 확보 문제와 깊이 얽혀 있다. ● 진보 또는 발전이란 생산양식이나 생산력의 발전을 말하는데, 그에 걸 맞는 신체적 운명의 변화가 일어났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여성은 생명을 잉태하고 낳고 돌보는 역할에 상당부분 투자해야 하는 '자연적' 운명을 가지고 있다. 서인혜의 요즘 작품들은 오래되었으면서도 새삼스러울 수밖에 없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그림이나 사물을 통해, 그리고 텍스트의 제시를 통해 총체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녀가 다루는 사물은 대체로 낡았다. 지금은 구하기도 힘들 세로줄 인쇄본 소설책이나 재봉틀이 대표적이다. 한 페이지씩 떼어 네 가필을 해 벽에 걸어 놓은 『여자의 일생』은 가독성은 떨어지지만, 어김없이 '여자'라고 집단적으로 호명된 성이 있다. '영원한 여성' 즉 문명과 비교되는 여성에는 자연과의 끈이 선명하다. 이 자연은 착취와 소유를 포함한 대상화를 넘어서 다시 맥락화 되어야 할 것이기도 하다. 거기에다 한국화 재료 자체가 가지는 고풍스러움이 가세한다. ● 여성이야기가 오래되었다 함은, 인류 최초의 불평등을 계급보다 성에서 먼저 일어났다는 유물론자들의 신빙성 있는 가설 때문이고, 새삼스럽다는 것은 그 많은 선구자들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은 여전하다는데 있다. 평등은 자유의 문제와 더불어 거듭된 도전이 아니고서는 결코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을 난제로 남아있다. 페미니즘 예술 또한 이러한 도전에 가담해 오고 있다. 서인혜가 이러한 주제를 풀어나가는데 영감을 얻은 계기는 김치를 만들면서였다. 반으로 자른 배추의 형태나 그 위에 붉은 양념이 버무려지는 모습, 이후에 김치가 숙성되는 과정 등에서 여성성을 본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형태적 유사성 외에, 김치 담그기를 포함한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한 평가절하에 대한 사회적 관심사가 보태졌다. 가사노동은 작가가 어릴 때부터 해왔던 예술 활동과 더불어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하는 행위, 즉 경제학자들에 의해 '그림자 노동'으로 정의된 부분이다. ● 인류와 노동의 재생산을 위해 사회적으로 꼭 필요하지만, 사적 영역에 감춰져 있던 것들이 하나둘 발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히 출산파업이라고 해야 할 출생률의 저하에 대해 사회적 차원의 고민과 해법이 시도되기 시작했다. 한국사회에서 가사노동의 가치가 한 달에 170만원 정도로 계산되었다는 기사를 얼마 전에 보았다. 그렇게 계산되었다고 해서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자영업자의 평균 소득이 170만원 정도 된다니까 꽤 높은 평가를 받은 셈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여자가 남자의 3배 더 많이 가사노동을 한다는 내용이다, 그림자 노동으로서의 예술 문제는 어떠한가. 물론 예술 관련 직업이 있지만, 그것은 작업과도 별도인 사회적 노동에 속한다. 예술적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서 '젊은 여자'가 할 만 한 아르바이트—여성의 그림자 노동은 사적 영역이 아닌 공적 영역에서도 평가 절하되기 마련이다--들을 전전하면서 작가의 문제의식은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 몇 년 전의 작품은 여성의 성기가 암시되는 등 보다 직접적인 발언이 앞서기도 했지만, 요즘 작업은 성의 문제를 보다 포괄적인 맥락에 놓고자 한다. 흐르고 번지고 얼룩지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체액은 종이나 천에 표현한다. 아교 대신에 안료의 고착제로 사용되는 콩즙은 색을 좀 더 부드럽게 만들기 때문에 붉은 물감의 흐름은 피를 넘어서 몸의 느낌으로 확장된다. 광목천에 채색하여 설치의 형식으로 제시되는 붉은 평면들은 '뫼비우스 띠로서의 육체'(엘리자베스 그로츠)의 여러 양상을 보여준다. 벽에 공중에, 또는 다른 사물들과 연관되어 펼쳐지는 다양한 표면들은 (여성을 억압하는)유기적 질서가 해체된 상태를 말한다. 표면들에 얼룩진 액체의 이미지에서 여성의 몸은 또한 유체로도 비유된다. 이 체액은 경계를 넘나든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가 『순수와 위험: 오염과 터부 개념 분석』에서 개진한 바처럼, 경계를 위반하는 것은 불순하다. ● 순수와 불순은 절대적 구분이 아니라 상대적 구분이다. 즉 경계가 구분은 만든다. 인류사회는 오염을 야기하는 위반을 금기시해왔다. 현대미술은 이러한 금기를 활용하여 선정적인 방식으로 수면 아래의 종교적 힘을 부활시키곤 한다. 메리 더글러스의 논의를 더욱 확장시킨 철학자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이다.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뫼비우스 띠로서의 육체』에서 메리 더글라스와 크리스테바가 유사하게 사물, 실체, 객체의 견고성을 와해시키는 체액의 역할을 인식한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피, 토사물, 타액, 담즙, 고름, 땀, 눈물, 월경, 정액 등은 제각기 통제의 정도를 달리하면서 스며들고 흐르고 통과하며 입구와 출구를 찾아가고 상호교환의 통로나 세계와 교통하는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크리스테바는 『공포의 권력』에서 여전히 주변적인 액체지만 오염시키지 않는 두 체액으로 눈물과 정액을 지적한다. 반면 월경의 피와 배설물은 불결한 체액이다. 경계를 위반하는 '아브젝트' 또한 성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 크리스테바는 사회 속에서 오염의 의식화 과정은 성별의 엄격한 구별에 대한 강박 관념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남성을 여성보다 우위에 두는 것에 대한 강한 관심이다. 누군가 한계에서 아브젝트를 인격화하면서 정화작용을 약속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해체되어 가는 현대에서 승화의 모델은 점차 사라진다. 동일시할 전체나 완전성, 정상성이 사라진 사회에서 승화는 윤리적 당위에 머문다. 감춰져야 할 것이 편재하는 서인혜의 작품은 승화와는 거리가 있다. 삶의 귀감이 될 만 한 형이상학적 관념이 승화의 몫이라면, 그 반대로 아래로의 흐름에는 퇴행이나 도착이 자리한다. 이 흐름은 단지 삶의 반대 항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까지 포함하는 삶을 말한다. 크리스테바는 『공포의 권력』에서 아름다움과 죽음의 결합이야말로 글쓰기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서인혜의 작품은 크리스테바가 내건 조건이 특히 여성적 글쓰기(작품)에 해당됨을 알려준다. ■ 이선영

Vol.20180918a |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10기 입주작가 릴레이展 & 오픈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