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과 백남준의 붓다

장욱진_백남준 2인展   2018_0914 ▶︎ 2018_1202 / 월요일 휴관

장욱진_진진묘, (眞眞妙, Zinzinmyo,My Wife's Buddhist Name)_ 캔버스에 유채_22.8×16.2cm_1973_개인소장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료 / 성인 5,000원 / 청소년,군인,어린이 1,000원 7세 이하 영유아 및 65세 이상 노인 무료관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YANGJU CITY CHANGUCCHIN MUSEUM OF ART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율로 193 1층 Tel. +82.(0)31.8082.4245 changucchin.yangju.go.kr blog.naver.com/yuma2014

장욱진과 백남준의 '붓다buddha'많이 알고 깨달아(inspiration) 행(作業)하는 게 우리의 생활과정일진대, 안다는 경지가 밑바닥부터 알고 촉감부터 알아야 할 것이며, 모든 것을 알기 위해서는 모든 사물을 철저히 보아 주어야 할 것이다. -장욱진1)"그래, 대오각성이다. '이제 모든 것을 야구경기 보듯이 하자. 심각하게 생각할 건 아무 것도 없지', 난 꽤 냉소적이었다." -백남준2) ● 불교의 석가모니, 즉, '붓다buddha'는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우주의 본성이나 참 모습을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을 뜻한다. 사물의 순수한 본질만을 남겨 간결하고 압축된 조형성으로 표출되는 장욱진의 작품세계와 구도자(求道者) 같은 삶의 태도는 내적성찰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붓다buddha'를 떠오르게 한다. ●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은 종교적 성자인 '부처'를 현대문명의 과학기술과 접목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관객의 참여와 소통을 이끌어 내고 새로운 철학적 사유의 전환을 유도하는 그의 작품세계는 자아성찰을 위해 끊임없이 화두를 던지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문답의 '선(禪)'사상과도 닮아 있다.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기획전 『장욱진과 백남준의 붓다』는 불교적 세계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장욱진과 백남준의 작품을 함께 선보인다.

장욱진_팔상도_개인소장

장욱진은 불교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특히 17세에 성홍열과 신장염을 앓게 되면서 만공선사(1871~1946)가 있는 수덕사 견성암에서 6개월간 정양생활을 하며 본격적인 불교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장욱진이 "수덕사 견성암의 만공 대선사 선실에 기거했어요. 독경을 한 건 아니고 온종일 선실에 앉아 있었어요. 밥도 문틈으로 밀어주면 먹고 반년이지만 그 때 몸과 마음이 완쾌된 것 같아요"3)라고 회고한 바 있듯이, 이후 이러한 불교와의 인연은 그의 전반적인 삶의 태도와 예술세계에 영향을 주게 된다. 장욱진이 그려낸 세계는 단순하지만 함축적이다. 작은 화면 속에 최대로 압축하고 생략하여 대상의 본질만을 남긴 그의 세계는 우주의 질서와 자연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 예술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고, 나아가 자기 스스로의 본질을 찾고자 했던 장욱진의 예술철학과 삶의 자세는 내적성찰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한 구도자와도 같다. 이는 "마치 승려가 속세를 버렸다고 해서 생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처님과 함께 하여 그 뜻을 펴고자 하려는 또 하나의 생활이 책임지워진 것과 같이 예술도 결국 그렇듯 사는 방식임에 지나지 않음이라."며 스스로를 승려에 비유한 그의 언급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 장욱진의 전반적인 작품세계는 불교적 세계관이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으나, 직접적으로 불교적 주제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로 파악된다. 유화작품으로는 독실한 불자였던 자신의 부인이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을 간략한 선으로 압축해 표현한 「진진묘」(1973)와, 부처의 탄생에서부터 열반까지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1976)가 대표적이다. 특히 「팔상도」(1976)는 불자였던 백성욱 박사(1897~1981)의 권고로 제작된 것으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탄생불을 간략한 선으로만 표현한 모습과 함께, 깨달음을 얻고 설법하는 부처의 머리에 까치를 그려 넣어 화가특유의 조형성과 상징성을 보여준다.  ● 아기부처, 미륵존여래불, 달마, 심우도,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도상 등 직접적인 불교적 소재는 유화보다는 먹그림에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장욱진이 그의 아내에게 추천했던 사경(寫經)을 그녀가 선뜻 시작하지 못하자 화가가 직접 시범을 보인 것이 계기가 되어 시작한 먹그림은 충북 수안보 시절(1980~1985)에 본격적인 작업으로 제작되었다. 하얀 여백의 공간에 모든 것을 압축하여 일필(一筆)의 선으로만 응집시켜 완성한 장욱진의 먹그림은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운 진정한 공(空)의 자리는 무엇이든지 있을 수 있는 상태로서의 유(有)의 자리'임을 의미하는 선종의 진공묘유(眞空妙有)와도 같다. ● 이는 1977년 양산 통도사에서 만난 경봉스님에게 장욱진 자신을 "까치 그리는 사람"이라 소개 하자, 스님이 그에게 '비공(非空)'이라는 법명을 지어주며 "장비공거사, 까악까악 나도 없고 남도 없으면 모든 진리를 자유롭게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이며,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닌데서 부처의 참모습을 본다'(長非空居士 鵲鵲라 無我無人觀自在 非空非色 見如來)라는 선시(禪詩)를 적어 준 것과도 상통할 것이다. 장욱진에게 예술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의 과정이다. 그가 작품으로 나타낸 내면세계는 끊임없는 자아성찰과 저항을 통한 깨달음의 표현이었다. ● "나의 경우도 어김없이 저항의 연속이다 행위(제작과정)에 있어서 유쾌할 수만도 없고, 소재를 다룰 때 기교에 있어 재미있게 나왔다 해도 결과가 비참할 때가 많다. 이렇다 보니 나의 일에 있어서는 저항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바꾸어 말해서 자기만족이 있을 수 없으며, 자기만족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자신의 종식이라 생각하고 달게 감내하고 있다. 일상 나는 내 자신의 저항 속에서 살며, 이 저항이야말로 자기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4)

백남준_TV Buddha_백남준아트센터 소장
백남준_Born Again_혼합재료_48.3×58.4×15.3cm_1991_대구미술관 소장

백남준의 작품세계에도 '진리의 깨달음은 문자를 떠나 곧바로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서 본성을 보아야 한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로 대변되는 불교의 선(禪)사상이 전반적으로 깃들어 있다. 백남준은 18세까지 한국에서 유·소년기를 보냈으며, 그의 어머니는 불교신자이기도 했다. 이후 동경대학 유학시절(19~19)에는 일본 선불교의 본산인 가마쿠라에서 생활하였다. 실제로 백남준이 자신의 사상과 예술에서 중요한 것들을 이미 한국과 일본에서 다 형성했다5)고 말한바 있듯이, 이 시기 동양의 전통사상과 선불교의 영향은 이후에도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독일 유학 시절에는 마이바우어마이스터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벽암록碧巖錄」의 선문답에 대해 가르쳐 줄만큼 해박했고, 비디오 아티스트인 야마모토 게이고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백남준은 가마쿠라 시절에 선(禪)수행을 했다고 한다.6) 이러한 경험으로 백남준은 독일에서 만난 존 케이지(1912~1992)와 그에게 영향을 준 스즈키 다이세츠, 그리고 선불교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수용했다. 이는 "스즈키 다이세쓰와 같이 자문화를 파는 세일즈맨이 되지 않기 위해 통상 회피해 온 선(禪)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문화적 애국심은 정치적 애국심보다 더욱 해로우며 전자는 일종의 위장을 취한다. 특히 선(禪)의 자기선전(자기포기의 교리)은 선(禪)을 스스로 죽이는 행위이다."라는 백남준의 언급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 백남준의 초기작품에는 불교사상과 동양 전통문화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의 대표작품으로 꼽히는 1974년 뉴욕 보니노 갤러리에 출품한 「TV부처」는 동양의 선불교와 서양의 과학기술을 새롭게 접목하여 관객의 소통과 참여를 유도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선정인(禪定印)의 자세로 명상에 잠겨있는 고대 부처상의 모습은 실시간 카메라 회로를 통해 TV모니터로 다시 마주하게 된다.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체를 불교의 끊임없이 돌고 도는 윤회사상으로 해석해 새로운 미학적 담론을 생성하는 것이다. 이는 백남준의 언급 "불교에서는 또한 카르마와 윤회는 하나며, 인연과 전생은 하나라고 말한다. 우리는 열린 회로 안에 있다."과 상통한다. 백남준의 「TV부처」는 이후 「TV 부처 No.X」(1982), 「돌-부처」(1983) 등 다양한 형태와 새로운 방식으로 변형되어 지속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 백남준이 "「tv부처」를 파리에, 그리고 최근에는 제5회 크노크 실험영화 페스티벌에 소개했는데 관객을 명상으로 이끌려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답하며, "나는 그저 하나의 길을 열었을 뿐이에요. 만일 관객들이 명상체험을 하고 싶다면 잘된 일이죠. 나는 단지 하나의 문을 열고 싶었을 뿐입니다. 사실, 비디오는 1960년대를 지나오며 가능성을 모두 소진해버린 환경예술, 해프닝예술 행위예술에 신선한 혈액을 공급한 셈입니다." 7) 라는 대답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백남준은 작가 특유의 재치있는 어법으로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하고 예술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질문한다. 이러한 과정은 수행승에게 진리의 깨달음으로 도달할 수 있도록 화두를 던지는 선사의 모습과도 같다. ● 예술창작을 통해 진리를 얻고자 끊임없이 수행승과 같은 자세를 견지한 장욱진, 그리고 새로운 방식과 매체로 탄생한 백남준의 '붓다buddha'가 던지는 화두를 통해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예술의 본질과 근본적 차원의 진리의 깨달음으로 한걸음 다가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 윤여진

* 각주 1) 장욱진, 표현, 『동아일보』, 1969.4.10. 2) 백남준, [Calvin Tomkins, "Profiles : Video Visionary", The New Yoker, 5. May 1975, p.46]을 강태희, 「전위의 첨단 백남준 예술 : 초기 작품에서 비디오까지」, 『미술세계』, 1988년 11월, vol.49, p.42에서 재인용 3) 「작가의 인간탐구 장욱진 편- "예술은 모른다, 쟁이가 좋지"」, 『문학사상』, 1982.1월호 4) 장욱진, 저항 『동아일보』, 1969.6.7. 5) 백남준아트센터 총체 미디어 연구소 편저, 『백남준의 귀환』, 백남준아트센터, 2009, p.141. 6) 앞의 책, p.224. 7) 마르셀 뒤샹은 비디오를 생각하지 많았다-아르멜린 리비어와의 인터뷰(1974년 12월 16일, 보훔)-Marcel Duchamp n;a pas pense a la video:《살아있는 아트 연대기》제 55호 축약판에 수록. 파리, 1975년 2월, pp.30~33.

Vol.20180918j | 장욱진과 백남준의 붓다-장욱진_백남준 2인展